현대중국 인물열전 | 리리싼, 무모한 모험주의자인가 탁월한 투쟁가인가

현대중국 인물열전 | 리리싼, 무모한 모험주의자인가 탁월한 투쟁가인가

신중국 성립 후 노동조합과 노동자계급은 자발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다. 노동조합 본연의 임무인 노동자 권리를 위한 투쟁, 그중에서도 파업권을 실질적으로 박탈당했다.

2023년 11월 4일

[큐레이션]현대중국 인물열전중국, 중국공산당, 중국 역사

이철의의 ‘현대중국 인물열전’ 연재는 20세기 중국 혁명사에서 주목할만한 인물들을 소개한다. 공과 과를 있는 그대로 기재하고,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게 맡기는 것을 지향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오늘날 중국 사회를 평가할 순 없지만, 한 단면을 살펴볼 순 있을 것이다.

이 연재의 필자 이철의는 철도노동자로 일하며 40여 년간 기차와 전철을 운행했다. 1988년부터 철도노조 민주화에 참여하고 노조 주요 간부로 활동했으며 공공부문 노동운동에 복무했다. 20여 차례 배낭을 메고 중국 곳곳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중국어를 익혀 《나, 펑더화이에 대하여 쓰다》와 《모택동과 한국전쟁》을 번역했고, 《국공내전: 신중국과 대만의 탄생》을 썼다. 철도에서 정년퇴직한 뒤 전라남도 해남에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쓴다.

리리싼(李立三, 이입삼)의 본명은 리룽즈(李隆郅)이고, 리싼은 그의 별명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리리싼으로 통칭하고 있으며 외국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리리싼은 1899년 후난성 리링(醴陵)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훈장이었는데 리리싼의 이름을 펑셩(鳳生)으로 지었다. 리리싼이 태어날 무렵 그의 집에 “봉의 꼬리”라는 화초에 커다란 꽃이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봉이 태어났다는 이름을 얻었는데 그에 대한 집안의 기대를 엿볼 수 있다. 혁명운동에 투신한 뒤 그는 리리싼으로 이름을 바꿨다. 자신의 이름이 중국 혁명사에서 좌경 모험주의 혹은 맹동주의의 상징처럼 될 것을 누가 알았으랴.

리리싼은 창사 사범학교 출신이다. 마오쩌둥, 차이허썬(蔡和森)과 동창인데 모두 공산당의 거물로 성장했다. 리리싼은 중국의 대표적 노동운동가로 손꼽힌다. 근공검학을 다녀온데다 수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지만 대중을 조직하고 투쟁을 지도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판단력과 결단력, 그리고 즉각적인 행동이 그의 장점이었다. 리리싼은 비밀활동을 하던 혁명가답게 여러 개의 가명을 썼다. 넝즈(能至), 룽즈(隆郅) 등 서른 개가 넘는다.

젊은 시절의 리리싼
젊은 시절의 리리싼

1924년에 리리싼은 상하이의 노동운동을 이끌던 덩중샤(鄧中夏)와 함께 기차에 앉아 있었다. 그때 세명의 승객이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덩중샤가 무심코 “싼리(三立), 싼리…”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리리싼에게 '싼리'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이를 들은 리리싼이 “어감이 안좋으니 리싼이 낫겠다”고 답해 이립삼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후 ‘리싼주의(立三主義)’는 좌경 모험주의 혹은 좌경 맹동주의를 상징하는 어휘가 됐다.

그가 중국공산당에서 실세로 활동한 경력은 아주 짧다. 난창폭동과 추수폭동 등 잇따른 폭동전술 실패에 책임을 치고 취추바이(瞿秋白)가 낙마하자 화려한 투쟁 경력을 자랑하던 리리싼이 뒤를 이었다. 샹중파(向忠發)가 공산당 서기였지만 상임위원이자 선전부장이던 리리싼이 실세가 됐다. 리리싼도 처음에는 무장투쟁에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코민테른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중국공산당의 실력행사를 유도했다. 천두슈의 기회주의, 취추바이의 모험주의와 리리싼의 좌경 맹동주의는 사실상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른 것으로 그만큼 공산당 초기에 영향력이 막강했다.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영향력에서 사실상 벗어난 것은 마오쩌둥이 옌안에서 지도력을 확보한 1937년부터일 것이다.

리리싼이 실권을 잡은 4개월동안 홍군은 “가능한 지역이나 몇 개 도시를 점거하라”는 지침에 따라 움직였다. 우한과 창사 등 도시공격 전술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비판을 받고 실각했으며, 모험주의의 상징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지금부터 리리싼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대중집회에서 연설 중인 리리싼
대중집회에서 연설 중인 리리싼

대중조직과 투쟁에서 이름을 알리다

리리싼은 근검공학(신해혁명 이후 중국 지식청년들의 해외 유학 운동)을 다녀온 지식인 출신이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주더, 천이 등 중국공산당 초기의 지도자 상당수가 이렇게 프랑스나 독일에 다녀왔다. 1919년 리리싼은 프랑스에서 강철 제조 노동자로 일하며 혁명 활동에 분주했다. 야학운동, 노동학회 설립, 파업 등 분주하게 조직과 투쟁에 앞장섰는데, 동료들은 그에게 ‘탱크’라는 별명을 달아줬다. 그 덕분에 리리싼은 금방 프랑스 당국의 주목을 받고 강제추방을 당했다. 귀국할 때 그는 이미 견결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1921년 리리싼은 창립한지 4개월 밖에 되지 않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때 초대 당수 천두슈(陳獨秀)를 만났는데, 천두슈는 그를 후난성으로 가게 했다. 프랑스에서 짐이 도착하기도 전에 길을 떠난 리리싼은 중국공산당 후난성지부 서기 마오쩌둥을 찾아갔다. 마오쩌둥은 그를 장시성과 후난성의 경계에 있던 탄광도시 안위안(安源)으로 데려가 노동운동에 배치했다. 이때부터 리리싼은 노동운동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러시아처럼 중국 혁명도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은 그는 농촌을 근거지로 한 마오쩌둥과 노선을 달리했다. 리리싼이 대도시 공격 등 모험주의적 전술을 지시했을 때 마오쩌둥과 주더, 펑더화이는 의구심을 품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펑더화이 자서전에도 리리싼의 전술에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왜 비판받고 실각한 리리싼을 다시 중용하고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노동부장(노동부 장관)을 맡겼을까? 필자는 리리싼의 태도와 능력,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견결한 의지 때문이라 판단한다.

안위안 탄광에서 리리싼은 소비조합을 설립해 대표를 맡으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가 설립한 노동자 당지부와 소비조합은 중국공산당에서 첫 시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리싼과 류샤오치(劉少奇)는 안위안 탄광의 대파업 투쟁을 조직하여 전면적 승리를 쟁취했다. 노동자들은 그에게 넝즈(能至)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능력자가 온다”는 뜻이니 대중들에게 제대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안위안 탄광 파업
안위안 탄광 파업

안위안 탄광 자본은 그의 목에 600대양(大洋: 중화민국 시기 화폐단위)의 현상금을 걸었는데 리리싼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이 나를 보호한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또 마오쩌둥과 함께 후난성 성도 창사의 토건 노동자 파업을 지도했고, 후난성 공회(노동조합) 주석에 취임했다.

1924년 국공합작이 성사되어 공산당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여했다. 공산당은 처음에 합작에 소극적이었지만 코민테른이 강권하여 마지못해 참여하는 형국이었다. 광저우에서 열린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리리싼과 마오쩌둥은 두각을 나타냈다. 젊고 패기에 찬 두 사람의 활동은 국민당 원로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후 리리싼은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로 가서 노동운동에 종사했다. 1925년 그는 상하이에서 중화전국총공회(中华全国总工会; 노총) 위원장이 되어 5.4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5.4 운동은 원세개(위안스카이) 군벌 정부가 일본과 산둥성의 독일 조차지 일본 할양등 제국주의에 굴복한데 항의해 일어난 반제 반외세 투쟁이었다. 리리싼은 노동자 파업, 동맹휴학, 상인들의 철시를 이끌며 상하이의 제국주의 질서를 완전히 흔들었다. 상하이의 외국세력과 군벌은 상하이총공회를 봉쇄하고 리리싼를 찾았다. 리리싼은 노동자들의 보호 속에 상하이를 탈출하여 소련으로 갔다.

소련에서 그는 코민테른 확대회의에 참가했다. 리리싼은 중국 인민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상황을 보고하고 세계 무산계급과 혁명 인민들이 중국 혁명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리리싼은 프로핀테른(국제적색노련) 회의에도 참가했다. 회의에서 발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태도와 능력이 드러나게 된다. 그후 코민테른은 리리싼을 제3국에 파견하여 노동운동을 지도하라고 권했다. 리리싼이면 어디서든 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할 수 있을 것으로 인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리싼은 귀국해 중국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합류하길 원했다. 1926년 광저우로 돌아온 리리싼은 5월 1일 전국 노동대회에 참가하여 적색노련 회의 경과를 보고했고, 전화총공회의 주요 지도자중 한사람이 되었다.

1926년 9월 리리싼은 당중앙의 명에 따라 상하이를 떠나 우한으로 갔다. 그해 12월 우한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전체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당서기 천두슈는 상하이로 돌아가 중앙의 업무에 복귀하고, 리리싼은 샹잉(项英), 장궈타오(張國燾)와 함께 한커우에서 당사업에 복무했다. 그후 샹잉은 환남사변(新四軍事件)으로 전사하고 장궈타오는 마오쩌둥과 지도력을 다투다 국민당에 투항했다.

1927년 리리싼은 수십만 명의 군중과 함께 한커우의 영국 조계지로 밀고 들어갔다. 그들은 영국의 조계경찰서를 포위 점령하고 경찰들을 몰아냈다. 대중투쟁에 놀란 영국은 한커우와 주장(九江)의 영국 조계를 중국에 반환했는데, 중국은 이 투쟁을 “공산당의 지도아래 중국 인민이 외국 조계를 회수한 투쟁”이며, “백년 이래의 반제 외교투쟁에서 처음으로 쟁취한 중대한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리리싼은 대중들의 역동성을 믿고 투쟁을 확산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한커우의 영국 조계지
한커우의 영국 조계지

‘모험주의’의 상징이 되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반혁명사건을 일으켜 수만 명의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리리싼은 국민당 반동파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덩중샤와 함께 공산당 중앙에 군사 행동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었다. 7월 27일, 저우언라이를 서기로 하는 난창폭동 지도기구는 리리싼에게 치안 보호와 노동자및 군중공작 임무를 맡았다. 난창 폭동은 초기에 도시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국민당군이 증원되자 세에서 밀리게 되었다. 폭동은 실패하고 그는 부대를 따라 광둥성으로 남하하며 군중공작을 벌였다. 광저우 공격과 해륙풍 소비에트 등 광둥에서의 군사행동도 비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리리싼은 그해 10월 당 중앙에 보고서 ‘8·1혁명(난창폭동을 가리킨다.)의 경과와 교훈’을 제출하였다. 난창폭동은 국민당 반동파에 대한 첫 번째 무장투쟁이었으며 무력에 의한 정권탈취 투쟁의 기점이었다.

1928년 6월에서 7월까지 리리싼은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6차 전국대표대회 중앙위원에 당선됐고,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후보 상임위원이 됐다. 11월에는 중앙정치국 위원, 상임위원, 중앙선전부장에 선임되어 당의 주요 지도부에 참여했다. 1928년 귀국한 리리싼은 상하이에서 중공중앙 상임위원, 선전부장겸 비서장을 겸임했다. 노동자 출신을 당수로 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총서기는 샹중파가 맡았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리리싼이었다.

그 무렵 그는 혁명의 퇴조기에 나타난 당내 비관주의와 소극성을 강력히 비판하며 군중노선 관철을 주장했다.

“군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군중조직을 확대하자. 군중의 전투적인 정신을 회복하자. 그래야 혁명의 고조를 촉진시킬 수 있다.”

리리싼은 마오쩌둥과 주더의 공농(노동자·농민) 무장투쟁과 소비에트 할거(곳곳에 소비에트를 건설하는 사업)를 지지했는데, 당시 마오쩌둥과 주더는 징강산에 자그마한 해방구를 건설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리리싼은 주마오(朱毛:주더와 마오쩌둥) 홍군의 전술원칙과 경험을 소개하며, 둘을 “혁명적 농민무장의 선봉대이며 무산계급 정당의 리더”라며 격찬했다. 리리싼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마오쩌둥을 지지하며 홍군 내의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앞장섰다. 다른 한편 문예와 문화공작을 중시해 당에 문화공작위원회를 설립하고 좌익작가연맹, 중국사회과학계, 희극계, 미술계, 교육계 연맹을 설립하는 등 좌익문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30년 3월 리리싼은 루쉰을 중심으로 한 ‘좌익작가연맹’을 조직하고, 상하이에서 따퉁(大同)유치원을 열어 마오쩌둥의 세 아들과 차이허썬, 윈다이잉, 펑바이, 리치우스(李求實) 등 중앙지도부를 맡다 희생된 이들의 자녀들을 돌보게 했다. 물론 이는 그의 모험주의 노선에 비하면 영향이 작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 공산당은 폭동 뒤의 가장 곤란한 시기를 벗어났지만, 절대약세인 국면은 여전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좌경 모험적인 지도노선을 견지했다. 이에 영향을 입은 리리싼은 모험주의에 입각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0년 6월 중앙정치국은 리리싼이 기초한 “새로운 혁명고조와 1개 성 혹은 몇 개성에서 우선 승리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좌경 모험주의의 상징이 된 리싼노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결의에 따라 우한 등 주요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등 홍군 부대들이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무모한 실력행사는 모두 실패했고, 국면은 한층 더 엄중해졌다.

다퉁 유치원
다퉁 유치원

소련에서의 험난한 여정

리리싼은 비교적 빠르게 자신의 노선이 잘못됐음을 시인했다. 1930년 9월 공산당 6차 3중전회에서 취추바이(瞿秋白), 저우언라이 등이 뒷받침하는 가운데 그는 자아비판을 하며 잘못을 시인했다. 그의 모험주의 노선은 불과 몇 개월에 걸친 것이었고 취추바이 시절의 노선을 계승한 것이었다. 기실 코민테른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다. 코민테른은 공산당이 원하지 않는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장제스가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는 우한의 국민당 좌파와 합작관계를 계속 유지하라는 지침을 주었다. 우한의 왕징웨이 등 국민당 좌파 정권마저 등을 돌리자 비로소 무장폭동 노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은 모두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권력투쟁과 세계혁명에 대한 전략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리리싼이 혼자 좌경 모험주의 노선이라는 모자를 써야 했으니 억울할 만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리리싼이 원치않는 노선을 강제로 걸어간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판단하였으며 강한 결단력과 행동력이 그의 전술을 뒷받침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1930년 10월, 리리싼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 내려와 모스크바로 갔다. 그의 소련행은 코민테른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코민테른이 소집한 극동국 및 주석단 회의에서 리리싼은 거듭 자신의 잘못을 비판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 당국은 리리싼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의심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15년간 소련에 머물며 실질적인 국내 투쟁에서 벗어나 있었다. 소련 당국은 그를 시베리아의 벌목 노동자로 보내 죄수들과 함께 일하게 했다. 그후 남부 러시아의 기계공장에 견습공으로 보냈다가 다시 모스크바 조선소의 조선공으로 보냈다. 리리싼이 무산계급 노동자가 됐다고 판단한 뒤에야 현장 노동자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소련에서 리리싼은 코민테른의 ‘노동자출판사’ 중국부문 주임, ‘구국시보’주필 등을 역임했다. 또한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 간 비밀전신 암호를 제작하고 해독하는 임무를 맡아 성실하게 수행했다. 소련에 있었지만 그의 온 신경은 국내의 혁명투쟁에 있었다. 중·일 전쟁이 폭발하자 리리싼은 “항일투쟁 일선에 서고 싶다”며 여러 차례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여전히 리리싼을 믿었던 모양이다.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의심했다면 중용했을리 없다. 리리싼은 1945년 중국공산당 7차 대회에서 다시 중앙위원으로 피선됐다. 1946년 1월 리리싼은 마침내 소련에서 옌안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마오쩌둥이 주선한 것이었다. 공산당 중앙은 그를 미군·국민당·공산당으로 구성된 군사조정 집행처 동북소조 요원으로 발탁해 정전에 따른 업무를 보게 했다. 당시 동북지방(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지린성 등 한반도 북부와 접한 지역)은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가 대규모로 충돌하던 가장 중요한 전장이었다. 동북에서 그는 리민란(李敏然)이라는 가명을 썼으나, 국민당은 그가 리리싼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렸다. 국민당은 특무요원을 파견하여 리리싼을 계속 감시하였다.

마오쩌둥과 리리싼
마오쩌둥과 리리싼

그후 리리싼은 동북국 도시사업부장, 국민당 윈난군 공작위원회 서기 등을 맡아 활동했고, 국민당 60군 및 93군의 모반공작을 펼쳤다. 국민당 60군은 장제스가 친필로 지시한 펑완(豊满) 수력발전소와 제방의 폭파 지시를 집행하지 않아 하류에 있는 수십만명이 재난을 모면했다. 그 후 60군 군단장 청쩌셩은 귀순했고, 국민당 동북 초비부사령관 정동궈(鄭洞國)도 투항을 택했다. 이로써 동북의 내전 형세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1948년 8월 리리싼은 하얼빈에서 개최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중화전국총공회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노동운동을 관장하게 된 것이다. 내전 시기의 중국 노동운동은 점령지의 생산증대, 노자간 협력, 내전의 동원 등을 주임무로 했다. 1949년 3월 리리싼은 베이징으로 가 신정치협상주비위원회 업무에 착수했다. (그는 20명으로 구성된 공산당측 주비회 5인의 상임위원중 1명이었다.) 신중국은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이론에 입각해 정부 구성에 착수했는데, 군벌과 대자본을 제외한 모든 세력을 망라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그는 저우언라이를 도와 신중국 성립에 심혈을 기울였고, 신중국 성립후 마오쩌둥과 당중앙의 신임을 얻어 중용됐다. 이 시기 그는 생애에서 가장 유쾌한 기분으로 일했다고 한다. 신중국 노동 사업의 개척자로서 탁월한 공적을 공인받았던 것이다.

신중국 성립 후 리리싼은 계속 전국총공회 사업을 주도했으며, 중앙인민정부 위원, 정무위원, 노동부장, 당조(黨組) 서기 등 요직을 겸임했다. 거듭 중앙위원과 전국 정협위원 등에 피선돼 지도부로 활동한 그는 성실하고 사심없이 일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랫동안 국내 투쟁에 참가하지 못한 걸 애석하게 여겨 누구보다 직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아래 인용구는 중국공산당의 공식 기록이다.

1950년 6월, 리리싼은 ‘중화인민공화국 공회법’(노동조합법) 제정을 주관했다. 이 법은 “신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의 지위와 직분을 명확히 규정했으며 노동계급에 조직을 건설하고 신중국 건설의 주인으로 서는 근거를 제공”했다. 리리싼은 중국 정부 초대 노동부장이 되어 실효성 있는 노동자 임금관리제도와 노동보험제를 제정하는 등 많은 사업을 펼쳤다. 실업문제를 중시해 ‘실업노동자 임시 조치법’, ‘실업노동자 처리조치’ 등을 제정했다. 또, 노사관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중요한 법률과 규정을 기초해 각급정부와 공회가 관련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리리싼은 신중국의 첫 번째 임금제도 개혁안를 실시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노동보험 조례’를 제정했다. 또, 산업안전과 노동자 보호를 위해 안전규정 제도를 수립했다. (……)

중국에서는 리리싼이 노동조합 사업과 노동권익 보장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평가에 동의하기 힘들다. 리리싼은 본래 노동운동으로 단련된 혁명가였다. 안위안 탄광의 대파업 투쟁, 상하이 방직공장의 파업 투쟁 등 전설적인 파업 투쟁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5·4운동과 우한의 반제국주의 투쟁들은 그가 대중들을 고무 격려하고 선동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가졌음을 방증한다. 노동자와 대중들의 자발적인 역량을 끌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그가 정작 건국 후에는 노동조합의 자발성과 투쟁성을 거세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그 원인이 뭘까?

국공내전 시기 하얼빈 노동대회에서 그는 “해방구의 노동조합들은 생산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번영하게 하며 회사와 서로 도와야 한다. 그것이 노자간에 유리하다”는 노선을 관철시켰다. 신중국 성립 후 리리싼은 전국총공회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공회의 모든 사업에서 생산발전을 관철해야 하며 경제를 번영시켜야 한다. 공기업과 사기업 모두 노자가 함께 유리한 방침으로 가야 하며 강대한 국방역량과 경제역량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이 현 시기 중국 노동자계급과 전국 인민의 최고 임무이고 최대 이익이다.”

그는 또 “공회 사업은 생산을 위해 조직 노동자들을 동원해야 하며 여러 방면에서 행정에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생산임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은 부단히 계급적 각오와 주인의 책임감을 제고하여 전투정신을 발휘, 위대한 조국건설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단초가 있다. 신중국 성립후 노동조합과 노동자계급은 자발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다. 노동조합 본연의 임무인 노동자 권리를 위한 투쟁, 그중에서도 파업권을 실질적으로 박탈당했다.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모든 노조들이 당과 국가의 부속기구로 전락하고 노조 간부들은 당과 국가의 관료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중국 노조들의 퇴화와 국가기구화가 리리싼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어쨌든 중국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조합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다음에 기록한 중국 총공회 주석 웨이지엔싱(尉健行)의 발언은 중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이다.

중화전국총공회 회의에서 발언 중인 웨이지엔싱 전 주석
중화전국총공회 회의에서 발언 중인 웨이지엔싱 전 주석

전국총공회 주석 웨이지엔싱의 발언은 중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1999년 11월 16일 리리싼 탄생 백주년 좌담회에서 웨이지엔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리싼 동지의 일생은 중국 노동운동과 함께 한 것이다. 시종 당과 인민에 충성했다. 그는 장기간 백구와 외국에서 용감하게 사업했으며 진리를 추구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그는 박해 속에서 원칙을 견지하고 당성을 지켰다. 우리는 그의 인민에 대한 충심과 적에 대한 견결한 투쟁, 불굴의 혁명정신을 배워야 한다.”

이제 중국의 노동조합 현실을 보기 위해 그의 경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 웨이지엔싱, 중공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기율위원회 서기, 총공회 집행위 주석
    1931년 저장성 신창(新昌) 출생
    1949년 3월 입당, 다롄 대학 기계과 졸업, 전문 설계사
    1952년 푸순 러시아어 훈련반에서 학습
    1953년부터 2년간 소련에서 기업관리 연수
    1955년-1966 동북 합금가공공장에서 공장장, 당위원회 서기
    1966-70년 문화대혁명으로 하방 공장에서 노동
    1970-1980년 공장장 겸 공장 당위원회 서기
    1981-1983년 헤이룽장성 하얼빈 시장 겸 당위원회 부서기
    1985년-87년 당중앙 조직부부장, 조직부장
    1992년 정치국원
    1993년 중화총공회 집행위 주석
    1995년 중공 북경시위원회 서기1998년 중화총공회 집행위 주석

이 사람(웨이지엔싱)의 경력 어디에 노동자로서 생활한 흔적이 있는가? 노동조합 투쟁 경력도 없지만 엘리트 코스만 걸어온 전문적인 당관료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중국 노동운동의 현실이 숨어있다고 본다. 리리싼도 지식인 출신의 노동운동가였지만, 신중국 성립후에는 노동조합 본연의 임무를 오직 국가 건설에만 뒀다. 노동조합은 당과 국가기구의 부속기구가 됐으며, 노동조합의 생명인 자주성과 민주성, 투쟁성은 모두 잃어버렸다. 존재했거나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가 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리리싼에 대한 평가

1964년 65세가 된 리리싼은 리밍(李明)이라는 가명으로 허베이성 페이현(霸縣)의 농천마을에 가서 ‘사청(四清)운동’(1964년부터 65년까지 중국에서 진행한 사회주의 교육운동으로, 정치·사상·조직·경제를 정화한다는 뜻)에 참가했다. 노동운동에 종사했던 그로서는 처음으로 농민들 속에서 생활한 것이다. 그곳의 농민들과 함께 삼동(三同)운동(함께 먹고, 함께 생활하며, 함께 일한다는 뜻-에 참가한 뒤, 다시 노동자들과 함께 삼동운동에 참여했다. 이런 것을 보면 리리싼의 현장중시와 공평무사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이 폭발하고 리리싼은 모함과 박해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1967년 6월 22일 리리싼은 박해를 견디다 못해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그때 조반파는 리리싼의 시신을 화장할 때 실명을 사용하지 않고 리밍이라는 이름을 썼다. 1980년 공산당은 리리싼의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를 취했다. 다음은 중국 공식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리리싼은 당내 저명한 노동운동의 영수로 직접 참가하고 조직한 영도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와 물질적 이익을 옹호하였다. 그는 지게꾼 노조와 탄광노조의 건의를 지지하였으며 봉건적 십장제도의 타파 등 봉건제도의 족쇄를 푸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기층에 깊이 들어가 안산(鞍山) 강철공장, 안위안 탄광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활동하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신중국 성립 후 노동자계급의 열렬한 생산경쟁을 불러일으켜 항미원조 전쟁(6.25전쟁을 중국에서 일컫는 말)을 지원했고 국민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촉진했다. 리리싼 동지가 관철한 당의 노동운동 방침은 신중국 공회 사업의 발전을 추동했으며 기초를 놓았다.

다음은 시진핑 시대 리리싼에 대한 평가이다. 당사연구원(중국공산당 역사 연구소)에서 발췌했으니, 공산당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11월 18일 ‘충성스러운 무산계급 혁명전사, 리리싼 동지의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며’라는 글은 이렇게 기록했다. “리리싼 동지는 중국 공산당의 우수당원이며 무산계급 혁명가이다. 중국노동운동의 걸출한 영도자이다. 리리싼 동지의 일생은 혁명의 일생이며 투쟁의 일상이었다. 그는 중국 인민해방사업과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자신의 생애와 정력을 바쳤다. (…) 우리는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한 당중앙 주위에 긴밀히 단결해야 한다. 초심을 잊지말고 사명을 명심하여 ‘두개의 백년’(중국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실현하기 위해 세운 이정표상의 시간개념) 실현에 분투해야 한다.
리리싼과 소련 출신 혁명가 엘리자베타 키시키나, 그리고 둘의 딸이 1946년 함께 찍은 가족 사진
리리싼과 소련 출신 혁명가 엘리자베타 키시키나, 그리고 둘의 딸이 1946년 함께 찍은 가족 사진

곡절 많은 생애

리리싼은 중국의 다른 혁명가들보다 우여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세 차례나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추도회를 치렀다고 한다. 1922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그는 당의 지시에 따라 안위안 탄광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탄광 자본과 군벌들의 처단 대상이 되어 신변에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료가 “리리싼은 후난성의 군벌이던 자오헝티에게 피살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추도회가 열리고 추도사가 공산당 잡지에도 실렸으나 결국 오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두 번째, 1927년 난창폭동 뒤 리리싼은 중국공산당 전적위원회 위원 겸 정치보위처장을 맡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1개 중대를 이끌고 출동하다 국민당군을 만나 몇겹으로 포위를 당했다. 급보를 받은 저우언라이가 부대를 끌고 달려가 국민당군을 격퇴했으나 리리싼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이가 리리싼이 전사했다고 말했으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도부는 리리싼의 추도회를 열었는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가 몇몇 동지를 이끌고 나타났다고 한다.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리리싼과 부인은 저우언라이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 저우언라이는 “리리싼 동지는 장수할 것이오. 우리가 이미 추도회를 열어 주지 않았소?”하고 웃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수년이 흐른 1980년 3월, 중국공산당은 진짜 추도회를 열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엘리자베타 키시키나와 리리싼
엘리자베타 키시키나와 리리싼

글 : 이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