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백년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지난 백년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지난 100여 년 철도노동자들이 보여온 행동의 역사는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단결하고 자신의 힘을 확인해나갈 때, 나아가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증명한다.

2023년 9월 6일

[읽을거리]노동철도, 공공성, 역사, 노동운동, 민주노총, 박근혜, 식민지

일제 식민지 시기 철도 노동자 투쟁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철도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계기로 조선에 쉽사리 진출한 일본은 고종으로부터 철도부설권과 50년 이상의 영업권, 철도용지 무상제공 등을 약속받고 곧바로 철도 부설에 돌입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건설하느냐였는데, 철도부설에 동원된 강제 징발과 비용 전가는 민중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가령 평양에서는 5천여 명의 민중이 모여 평안남도 관찰사에게 철도 부설로 인해 빼앗긴 농지의 반환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시흥과 곡산에서도 수천여 명의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일본인과 조선인 관료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처럼 철도부설에 불복종하는 민중들의 자생적인 봉기는 이후 의병 운동과도 연결되기도 했다.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된 1910년 이후 의주까지의 철로 건설이 본격화됐다. 1920년 일본은 건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사설철도령’을 제정하고, 1차 세계대전의 군수산업 발전을 통해 형성된 잉여자본을 동원해 철도를 건설한다. 14개 민간기업에 2,947킬로미터의 철도부설권이 허가됐고, 5개 기업에게는 궤도전차 사업을 할당한다. 또, 한반도와 만주의 철도를 통합적으로 관리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조선반도의 철도 운영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에 위탁했다. 그 즈음 철도에서 일하는 노동자수는 10만 명에 달했는데, 그와 함께 노동자들의 단결도 조직되고 있었다.

1919년 3월 3.1만세운동의 열기가 계속되던 3월 22일 철도노동자와 그밖의 다른 노동자 700여 명은 경성역에서부터 독립문까지 만세 시위를 벌이며 행진했다. 불과 며칠 후인 27일, 만철 경성관리국 소속 노동자 800여 명은 다시 5일간 파업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투쟁들은 이듬해 조선노동공제회 결성의 밑거름이 됐고, 1924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 건설로 이어졌다. 일제에 맞선 철도노동자들이 정치 파업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출발을 여는 데 함께 한 셈이다.

1924년 4월 15일 조선노동총동맹 창립대회
1924년 4월 15일 조선노동총동맹 창립대회

1925년 12월 25일에는 군산의 철도 노동자들이 일본인 운송업자들에 맞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요구안 수용이 있을 때까지 수송물 하차를 하지 않겠다며 싸웠지만, 이에 운송업자조합은 일본인 노동자들을 대체인력으로 투입했다. 그러자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들 간 물리적 충돌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운송업자 측은 수송물 한 가마니당 1전의 임금을 주는데 합의함으로써 이 투쟁은 군산 철도노동회의 승리로 끝났다.

1929년 1월 원산에서 2,200여 명이 참여해 일어난 총파업 역시 철도 노동자들이 함께 한 거국적인 투쟁이었다. 이보다 앞선 1928년 9월, 영국인 자본가가 운영하던 문평제유공장(Rising Sun)에서 일본인 관리자들의 차별과 구타에 항의하며 파업이 발생하자, 사측은 20여 일만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구타한 일본인 관리자 해고, 파업 참가자에 대한 해고 금지, 파업 기간 임금의 40%를 보전한다는 등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로서 파업은 종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해를 넘겼음에도 사측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원산노동연합회가 나서 도시 차원의 파업으로 번졌다. 파업이 80일 넘게 이어지면서 도시와 물류 자체가 마비되어버리자 일제는 경찰과 군대, 깡패, 재향군인까지 동원해 파업 진압을 시도했고, 부두와 철도도 모두 마비되는데 이르렀다. 파업의 당초 목적은 실패했지만, 노동운동 전체의 역사에서 이 투쟁은 매우 깊게 새겨졌다. 1930년대 노동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노조 조직화가 일개 산업과 도시를 넘어 전국적이고 전 산업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각인시켜줬다.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아시아 역시 피해가지 않았다. 서구에 비해선 정도가 덜했지만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경제 역시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안한 은행 경영으로 금융 공황을 겪은 일본은 강력한 디플레이션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대공황은 금의 대량 유출을 낳고, 주가 및 물가의 폭락과 기업의 도미노 도산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1931년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전 직종에 걸친 임금 삭감을 시도했다. 대공황의 피해를 어떻게든 하위 공무원들에게 전가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시도는 철도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김동철을 비롯한 철도노동자들은 ‘오월회’를 조직해 ‘감봉반대 시국대회’를 개최하고, 자신들이 작성한 결의문을 전국 각지의 철도노동자들에게 발송했다. 그러자 그 영향이 비단 철도노동자만이 아니라, 다른 체신 노동자 등 다른 여러 노동자들에게 확대됐고, 결국 조선총독부는 감봉율과 조건을 현저히 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승리로부터 우리는 공황 시기 노동자들이 견고하게 싸운다면, 엄청나게 막강해보이는 제국주의 권력에 대항해서도 충분히 저항하며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9년 1~4월 원산 총파업
1919년 1~4월 원산 총파업

한편 1929년 격렬한 총파업이 일어났던 강원도 원산은 20세기 초 개항도시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투쟁이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철도노동자들은 다시 스스로를 조직해나가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원산 철도노동자들은 원산철도부문위원회를 결성해 책읽기모임과 체육회 등을 운영하고, 이를 통해 현장에서의 영향력을 높여나갔다. 특히 철도노동자 대중조직 <철우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신호기>를 발행하며 조직력 제고를 시도했다. 안타깝게도 1938년 철우회를 주도하던 핵심 활동가 방용필과 유우록이 체포되면서 실패했는데, 이들은 “관내 약 3천 명의 노동자들을 조직해 일제에 맞선 봉기를 시도할 수 있었으리라”며 아쉬워했다.

해방 정국의 조선철도노동조합

1940년 전시동원체제가 강화되었을 때에도 철도 노동자들은 태업과 집단적인 현장 이탈, 낙서 쓰기 등 소극적 저항을 통해 싸웠다. 그 중 급진적인 활동가들은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해 투쟁을 이어나갔고, 이처럼 꾸준하게 축적하고 보전해온 역량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빠르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조직할 수 있는 거름이 됐다.

사실 철도노동자들은 전평보다 3일 앞서 조선철도노동조합을 창립했다. 이 노조는 전국 20개 지부에 107개 조합, 6만 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산별노조였다. 전국 광역단위를 지부로 편성하고, 각 지역지부에는 10~20개의 분회를 두어 체계를 갖춰나갔다. 이는 지역운동을 핵심 동력으로 삼은 전평 체계에 맞춰나가기 위한 구성이었다.

전평 건설과 함께 가맹한 전평에 가맹한 조선철도노조는 경성철도 공장에서 쌀 배급과 일급제에 반대하고,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미군정청에 제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전국 곳곳에서 미군정을 비판하는 집회를 개최했고, 미군정이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철도노동자들은 남조선 철도종업원 대우개선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파업을 예비했다. 그 결실이 바로 1946년 9월 23일 개시된 철도 파업이었다. 부산에서 시작된 파업은 전국으로 확대됐고, 파업 집회에는 무려 5만여 명의 철도노동자가 참여해 조직력을 과시했다.

이에 미군정은 9월 30일 일제 시기 순사노릇을 했던 자들을 포함한 경찰을 중무장시키고, 심지어 우익 테러단까지 동원해 노동자들을 습격했다. 당시 용산기관구의 투쟁본부에 모여 있던 노동자 1,800여 명이 일거에 체포됐다. 해방정국 시기에 우익 테러단 괴수로 활동했던 김두한은 자신이 총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어떻게 해서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했는지 회고하기도 했다.

1947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 모습
1947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 모습

이튿날인 10월 1일에는 대구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철도노동자 김용태가 대구경찰서 경찰들이 쏜 실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구역 인근 물류창고에 모여 행진을 시작하던 600명의 파업 대오는 일시에 경찰서로 향했다. 이 사건은 우리가 ‘10월 항쟁’이라고 부르는 사건으로 확대됐다. 이처럼 철도 파업이 경찰 및 용역깡패와의 격렬한 충돌, 미군정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불인정 운동로 번져나가자, 결국 미군정은 노조와 노사협정서를 체결하고 정리해고를 철회했다. 일급제는 월급제로 복원됐고, 쌀배급과 급식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여러 노동자들이 구속되고 목숨을 잃으며 쟁취한 성과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우익들은 노동자들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자기 조직을 통해 단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3년여의 해방정국 당시 조선철도노조는 남한과 북한 전역에 걸쳐 조직률 95퍼센트의 단일한 산별노조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런 역량은 자본가들과 우익들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결국 조선철도노조는 1948년 5월 파업 이후 해체되고 말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조선철도노조를 역사상 가장 투쟁적이고 정치적인(물론 좋은 의미에서) 노동조합으로 평가하고 있다. 해방정국 노동운동의 뜨거운 역사는 흘러간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이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저 패배의 기억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과 삶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다. 조선철도노조의 강제 해산 이후 만들어진 철도노조는 1950년대 내내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기수로 전락했다. 철도노조 규약에는 “반공의 이념을 수호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었고, 50년대 후반엔 여러 차례 친정부 성격의 집회를 개최하거나, 5분 파업을 진행할 정도였다. 심지어 1960년 4월 민중들이 “이승만 하야”를 외칠 때조차 철도노조 지도부는 이승만 정권 사수를 위한 파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층 조합원들의 생각은 이와 달랐던 듯하다. 1960년 4월 혁명의 열기 속에서 기관사들은 한국철도기관사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늘어나는 철도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이 투쟁은 기관사들의 승리로 끝났고, 이듬해 벌어진 임금 인상 투쟁에서도 철도노동자들은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

불행히도 철도노동자들의 노조 민주화 노력은 박정희의 쿠데타와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군부 정권은 민주노조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노조법을 개악하고, 어용노조를 세워 복수노조를 금지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1962년 12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로 인정된 자를 제외하고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질 수 없다”고 제한했다. 단, “기능직 공무원이나 고용직 공무원 등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의 경우엔 노동기본권이 인정됐는데, 기능직 공무원으로 분류된 철도노동자들은 노동3권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단체행동권은 결코 사용될 수 없었다. 어용적인 노조가 철도청이 맺은 단체협약이 스스로 그것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장악된 어용노조 지도부는 이전보다 더 심한 친정부 행위를 벌였다. 군부 쿠데타와 독재로 점철된 60~70년대 시기에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청 당국이나 관리자들에 맞서 저항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어용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순응과 복종을 강요했고,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준정부기관으로서의 역할까지 자임했다.

1970년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경춘선 열차
1970년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경춘선 열차

하지만 노동자들은 생활임금 확보를 위한 투쟁을 지속하면서 노조의 최소한의 자율성을 잃지 않으려 했다. 노조의 이런 방향성은 현장 정서에도 영향을 미쳐 노동자들 스스로 순응을 공무원의 의무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물론 독재 시기 이러한 노사관계는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인 노동통제 정책과 연관되어 있다.

철도청에 대한 노동자들의 순응은 ‘동의’보다는 ‘두려움’과 ‘방관’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반공주의 집행부는 겉으로는 동의를 획득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론 노동자들의 공포를 악용해 현장에 대한 통제권을 노동억압에 사용했다. 오랜 시기 철도 노동현장은 조회와 점호, 거수 경례 등 군사적이고 수직적인 서열문화로 지배됐는데, 심지어 노동자들의 메모장까지 검열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많은 노동현장에는 용모 검열이나 사상 검증 등 악폐습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노동현장의 이런 문화는 일제 시대와 군부독재 시기에 누적된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은 매우 컸지만, 노조는 이런 불만을 대변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구타와 욕설이 난무했고, 상급자가 하급자의 따귀를 때리는 경우도 빈번했다. 어떤 조직 내에 이런 문화가 팽배할 경우 이는 무엇보다 노동통제에 가장 강하게 악용되기 마련인데, 그 때문에 권력을 쥔 누구도 이런 문화를 개선할 생각이 없었다. 관리자들은 소집교육 자리에서 밥 먹듯이 욕설을 내뱉었고, 이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는 노동자들은 철저하게 직무교육과 승진에서 제외됐다.

철도노조 민주화 투쟁

철도학교에서 만난 일군의 노동자들은 철도민주노조 쟁취투쟁위원회, 횃불 등 조직을 결성하고, 이내 철도사연구회를 만들어 활동을 넓혀나간다. 1987년부터는 낮은 시간외수당과 열악한 노동조건 등의 실태를 폭로하고, 어용적인 노조 지도부를 비판하는 매체 <철길>을 만들어 비밀리에 철도 현장에 배포한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뜻이 맞는 이들을 모아나가는 과정은 미래를 만들기 마련이다. 그해 6월, 기관차분회 임원들과 조합원 200여 명은 ① 각종 수당을 근로기준법대로 지급할 것, ② 등급제도를 조정하고 승진기회를 보장할 것, ③ 전열차 직통운행 반대, ④ 근무시간 단축 등 7개 요구안을 노조 지도부에 제출하고 특별 단체교섭을 요구한다. 7월 15일까지 교섭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실력 행사를 하겠다는 결의도 함께 다진다. 결국 노조는 철도청과 특별단체교섭을 해 통일호 이하 열차 중간 교대, 운전수당 4만원 인상, 2박3일 근무 해소 등에 합의한다.

이 결과에 대한 보고대회가 열려 400여 명의 기관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노조 간부가 한참 나타나지 않다가 마지못해 등장해 거만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자 화가 난 조합원들은 그 자리에서 농성에 돌입하고, 민주노조쟁취위원회(근로조건개선촉구위원회)를 결성해 임원까지 선출한다. 기관사들은 7월 25일까지 요구를 무시할 경우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결의한다.

1988년 7월 26일 근무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던 철도 기관사 14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모습
1988년 7월 26일 근무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던 철도 기관사 14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모습

하지만 지도부가 협상을 통해 몇 차례 이룬 잠정합의안들은 조합원들의 아래로부터의 반대로 인해 계속 부결되고, 결국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7월 26일 시작된 기관사 파업은 전국으로 확대됐고, 결국 1,349명 연행 기관사 12명 구속으로 하루만에 진압된다. 하지만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입건된 노동자들은 당시 체신노조와 국립의료원 등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함께 단체행동권과 관련된 헌법소원을 제출해 싸웠고, 결국 1991년 헌재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29년만에 단체행동권을 되찾는다. 이로써 ‘어용노조타도, 민주노조건설’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고, 1955년 이후 36년만에 제대로 된 단체교섭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이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점차 노조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확대한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민주노조 쟁취 운동은 거의 10년에 걸쳐 이어졌다. 이 지난하고도 견고한 투쟁 과정은 당시 철도노동자들이 자신의 청춘을 바쳐 어떻게 싸웠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와 일상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온 철도가 어떻게 지켜질 수 있었는지 그 자체로 말해준다.

2001년 5월 21일, 철도노조는 힘겨운 투쟁 끝에 민주 집행부를 당선시킨다. 철도노조 54년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노조 집행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비단 이 선거의 승리가 아니라, 오랜 시간 철도노동자들이 고심하고 또 싸우면서 얻은 결과였다.

이후로부터 20여 년 간 철도노동자들은 철도 민영화의 신호가 울릴 때마다 전선에 나서서 투쟁했다. 김대중 정권 시기 어처구니 없는 공공부문 민영화 계획에 맞서 온몸을 걸고 싸웠는데, 발전-가스-철도의 공동 파업, 55년만의 철도 총파업 끝에 민영화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만약 철도를 사기업화한다는 이 계획이 이뤄졌다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철도노동자들이 오랜 시간의 노력으로 노조를 민주화하고, 총파업 통해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철도의 공공성도 지켜질 수 있었다. 그것은 철도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진전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온 국민의 이동수단인 철도의 공공성과 한국 사회의 공공성을 지키는 싸움이었다.

이는 김대중 정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등 역대 정권들은 너나 없이 민영화(사영화)에 준하거나 그 수순이라 할 수 있는 계획들을 도모하며 철도의 공공성을 팔아치우려 시도했다. 가까운 예로, 2013년 말에 박근혜 정부는 수서발 KTX 운영 자회사 설립을 발표하고, 민영화를 시도했다. 당시 철도공사 측은 수익 악화와 적자 문제를 들어 수서발 KTX를 철도공사에서 분할 매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계획을 밀어붙였고, 철도노동자들은 결국 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2013년 12월 28일 열린 철도노조 파업 지지 집회
2013년 12월 28일 열린 철도노조 파업 지지 집회

파업이 시작되자 사측은 참가자 5,941명 직위해제와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고, 지도부 체포를 시도하는 등 진압을 시도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이름의 자발적인 대자보 운동이 일었는데, 침체기에 있던 대학가에 모처럼 정치적 활기를 불어넣은 사건이었다. 그밖에도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로부터의 지지를 획득하기도 한 철도 파업은 광범한 시민 지지를 바탕으로 싸워나갔다. 아마도 이런 힘은 박근혜 정권의 강력한 진압 시도에도 불구하고 파업 대오를 22일이나 지속시킬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수서발 KTX 민영화에 맞선 파업은 22일만인 12월 31일 끝났고, 이후로도 긴 현장 투쟁과 법정 다툼을 남겼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은 오히려 이 파업이 매우 정당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지난 100여 년 철도노동자들이 보여온 행동의 역사는 그 자체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단결하고 자신의 힘을 확인해나갈 때, 나아가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것은 식민 통치에 맞선 평범한 노동자들의 싸움이었고, 군부 독재 권력의 고압적인 노동통제에 맞선 싸움이었으며, 동시에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사영화에 맞서 공공성을 지키는 투쟁이었다. 민영화의 망령이 돌아오는 지금, 자본과 정권이 철도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적 총공세에 맞서, 어느 때보다 단단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참고 자료

  • 김경일, 『한국 근대 노동사와 노동운동』, 문학과지성사, 2004년
  • 김병구·지영근, 『만화로 보는 철도 이야기: 철도노동운동사』, 갈무리, 2017년
  • 김영수, 『1960년-70년대 한국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현장과 노동조합』, 역사문화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5년

정리: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