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저자와 번역자의 기고로 게시하는 이 글은 한국 사회에 일반화된 중국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한국어의 한자어 표기대로 번역되었다. 이 글은 글쓴이인 오근(伍勤, 우친)이 중국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란의 상황에 빗대어 서술됐다. 이름과 지명에 모두 이란 식 이름을 차용했지만, 서술되어 있는 상황은 모두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이 글에 대한 역자의 서문은 앞선 ①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중국인 망명자의 편지 ① | 한 여성 활동가가 당국에 체포되었던 기록을 남기다
- 중국인 망명자의 편지 ② | “우리는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어머니, 지난 2년 동안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이 나라를 떠나야 할지에 대해 토론했어요. 1년 전 저는 레자와 함께 그가 2009년 녹색혁명(역주: 이란에서 2009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해 진행된 대중운동)에서 체포된 후의 경험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는 상황에서 그는 당시 남아 있기로 결심했죠.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속에 살고 있잖아.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어!” 그는 우리가 남아서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떠난 사람들의 실어증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발언권을 박탈당한 대신 나라 밖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외부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 목소리들은 결국 이 땅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들의 투쟁도 결국 이곳의 역사와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1979년 이후 서방으로 망명한 좌파 이슬람조직 무자헤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들이 국왕을 쫓아낸 후 또 다시 신정 정부와 맞서 싸워야 했던 역사를 기억하실 거에요. 이 기억은 오늘날 거의 사이비종교의 음모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죠. 젊은 활동가들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부 음란사이트 광고에서만 그들의 영향력을 일부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너무 슬프지 않나요?
경찰서에서 나온 날 밤 아델은 집에 돌아갔고, 저는 누르와 사난다즈에 있는 헤디의 집에 가서 각자 심문실에서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웃으며 공권력의 무지함을 조롱하기도 했고, 심문 중 무용담을 자랑하기도 했으며, 친구가 심문실에서 받은 굴욕감에 함께 울기도 했죠.
경찰들은 증거불충분으로 우리를 공식적으로 체포하지 못해 무척이나 화를 냈습니다. 헤디를 심문하던 테헤란 출신의 중년 경찰은 우리가 떠나기 전 욕을 쏟아냈습니다. “씨발 이해가 안 되네. 니들은 돈도 명예도 바라지 않고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니들 쳐돌았지? 씨발!” 그들의 상상력으로는 우리가 바라는 다른 세계가 어떤 것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에요. 사람이 존엄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도, 자신의 이익을 벗어나 이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죠.
우리는 항쟁 선언문에 불을 질렀고, 선언문은 묘지의 비문처럼 재가 됐습니다. 그날 밤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며 보낸 시간은 너무나 소중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헤디의 집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 더욱 심하게 감시에 노출되어 있었고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이 곤란해 질 수 있었어요. 저와 누르는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어요. 다음 날 저녁, 마침내 우리는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기로 결심했죠. 탈출하는 길에 이라크 쿠르디스탄 쪽에서 들려오는 포격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10]
- [10] 2022년 11월 11일 새벽 중국 광주 해주구(海珠區)는 봉쇄됐다. 필자는 마지막 순간에 해주대교(海珠大橋)를 건너 급히 공항으로 달려갔다. 광주의 건강코드가 다시 빨간색으로 바뀔까 봐(역주: 건강코드가 빨간색으로 바뀌면 즉각 봉쇄되어 그 지역을 떠날 수 없다.) 호텔에 머물지 못하고 공항에서 10시간 이상을 기다린 후에 비행기를 타고 광주를 떠났다.
공항에서 한참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 저는 캐나다에 있는 마지드(Majid)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마지드는 이미 친구들로부터 내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너 지금 바로 떠나야 돼! 절대 테헤란으로 돌아가지마!”
“하지만 난 불법으로 출국할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어. 언젠간 돌아오고 싶단 말이야.”
“니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건 알지만 이건 망명이라고! 망명은 절대 너에게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을 거야.”
마지드와 두 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전 너무 지쳤고, 거의 말다툼까지 할 뻔 했어요. 마지드는 제가 아직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든 것을 직면하도록 밀어 붙였어요. 파르와(Parva)에게 다시 저와 통화하도록 했죠. 파르와는 1년 동안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고, 재판 후 집행유예 상태로 2년 동안 전자수갑을 차야 했습니다. 그동안 모든 사람들과 연락이 끊어졌죠. 파르와가 대중과 경찰로부터 거의 잊혀졌을 때 그녀는 조용히 프랑스로 떠났고 지금은 프랑스에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 중입니다. “내가 이슬람공화국 여권을 갖고 있는 동안은 어디에 가든 조국이 내 뒤에 있기 때문에 나는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어. 나는 그곳과 관계를 확실히 끊어야만 해.” 파르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11]
- [11] 이정옥(李婷玉)은 2016년 <비신문(非新聞)> 창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노욱우(盧昱宇)와 함께 체포됐다. 구금된 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그 후 2년 동안 형집행을 연기했다. 그녀는 결국 2021년 중국을 떠나 독일로 가서 정치적 보호를 받고 있다.
파르와는 투쟁을 위해 학업과 안락한 삶 등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서구의 속물적 시스템 속에서 저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피해자로서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저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면 더욱 가고 싶지 않았죠. 이런 상황보다는 한동안 감옥에 있는 것도 그렇게 견디기 힘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한동안’이라는 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망명
저는 결국 역사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페르시아만의 섬 키쉬(Kish)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화창하고 따뜻하며, 대중의 분노나 경찰의 폭력도 없었습니다. 역사 속에 있는 그 지역들은 점점 추워져 거리의 여인들은 추위 때문에 다시 히잡을 썼습니다.
테헤란의 친구들은 하나씩 끌려갔고 아무 이유 없이 고발 당했습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빠져 있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 사이에 커지고 있던 불신과 거리감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메시지 프로그램 단체방에서 누가 비밀경찰 끄나풀일지 서로를 의심했습니다. 잡혀 갔다가 나온 사람들은 때로 친구들의 위로가 아니라 연루될 것을 걱정하는 친구들의 두려움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위챗과 같은 메시지 프로그램에서 언팔을 하는 이유는 항상 대동소이했습니다. “나는 너희들과 달라. 나는 혁명가가 될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어. 나는 ‘희생’당하고 싶지 않아!”
용감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널리 알려지고 칭송됩니다. 하지만 공포와 연약함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도 많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혁명의 그늘에 숨어 쉴 곳도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새해 전날 미나(Mina)가 테헤란에서 저를 찾아 이 섬까지 왔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잤죠. 미나는 처벌의 위협 앞에서 친구들이 이번 혁명에 대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공포정치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고통스럽게 말했습니다. 미나는 단호하고 정직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전 ‘사라진’ 친구들을 돕기 위해 더 이상 자신의 법적 지식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그 대화를 서둘러 끝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저는 그녀에게 제 약점을 들킬까봐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심문 과 정에서 가장 큰 고통은 배신의 순간이었거든요. 저는 경찰의 압박에 못 이겨 일부 친구들의 별명을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실명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진짜로 넘긴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삼았지만, 그게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배신이 그 순간 저 자신을 삼켜버렸고, 제 영혼과 신념의 일부가 무너져내려 영원히 자책의 고통 속에서 살게 만들었습니다. 미나는 과거 조사를 받았을 때 휴대전화와 컴퓨터 비밀번호를 절대로 넘기지 않았고, 경찰의 모든 질문에 불굴의 눈빛과 침묵으로 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를 따라 배우기를 원하지만, 저는 그녀가 좀 더 관대하게 우리 세대가 공포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시간을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미나는 저와 작별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다시 체포됐습니다.[12] 지난 6개월 동안 친구들과 이별할 때마다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그녀의 이야기를 중단시킨 것이 얼마나 후회되는지 모릅니다.
- [12] 진재혁(秦梓奕)은 12월 초 북경의 양마교(亮馬橋, 량마치아오)에서 진행된 백지시위에 참여한 후 심문을 받았고 석방된 후 휴가차 온 해남(海南, 하이난) 삼아(三亞, 싼야)에서 필자를 만났다. 삼아를 떠난 지 일주일만에 그녀는 다시 체포됐다. 이 글을 발표한 후 진재혁은 형사 구금 한 달 만에 풀려나 현재 보석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카타윤(Katayoon)이 체포되기 전의 고통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수감된 저명한 반체제 인사의 아내로서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라는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자신의 모든 활동을 포기한 채 정치적 탄압을 버티며 남편을 지지해야 하고, 또 남편이 이루지 못한 일을 완성해야 했습니다.[13]
- [13] 이교초(李翹楚)는 노동운동가이자 인권변호사 허지용(許志永)의 부인이다. 허지용이 ‘정권전복선동죄’로 판결이 난 후 이교초는 허지용 변호의 중임을 맡았다가 결국 체포됐다. 그 후 똑같이 ‘정권전복선동죄’로 기소됐다. 그녀는 지금까지 감옥에 있다.
그 이미지는 그녀가 약해지거나 위축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수감되기 전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환청에 시달리고 있었고 얼굴도 부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줄곧 집안의 옷장 안에 숨어서 지냈다고 합니다. 오늘이 마침 그녀의 생일인데 감옥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히잡 의무화 법안과 도덕경찰제 폐지 소식이 영어권 국가에 퍼지기 시작했고 외부에서는 이란 여성 혁명의 승리에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란 내부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체포와 투옥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 사이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텔레비전에 나와 이번 시위는 외부세력의 음모이고 정부는 “조직을 색출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14]
- [14] 2022년 12월 28일 공안부는 양력 설과 음력 설 기간 동안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적대세력의 각종 침투, 전복, 교란 및 파괴 활동을 엄격히 단속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백지시위’의 일부 참가자들은 12월 초에 이미 24시간 조사를 받았는데, 정부의 이 발표 후 1월에 다시 한 번 조용히 체포됐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항쟁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 저에게 가한 형벌인 실어증의 상태는 결코 저에게 안전을 가져다 주지 않았고, 단지 저를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경찰은 저에게 혐의를 씌우기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미 수집하고 조작했습니다. ‘외부세력’이라는 상습적이고 허위적인 혐의는 어떠한 가벼운 반박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그들은 반드시 어머니를 찾아 가 제가 직면할 무서운 형벌로 어머니를 위협하며 어머니를 설득하려 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그들을 도와 저를 설득해 저 스스로 죄를 인정하도록 말이죠. 그들은 이전에도 늘 이렇게 해 왔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놀라 저를 걱정하시겠지만, 제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도 믿으시죠? 우리 세대는 이번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고,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고의 약속은 “우리는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은 19세 시위 참가자 얄다(Yalda Aghafazli)가 남긴 말입니다. 얄다는 2022년 11월 체포돼 열흘 동안 콰르작구치소에서 구타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이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진행했습니다. 그녀는 석방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마헤사
2023.1.13
망명자의 후기
2022년에 겪은 나의 경험은 매우 공포스럽게 들리지만, 1년 동안 우리 모두가 함께 경험한, 황당하고도 작은 덧붙임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중국에서 생활하던 지식노동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직업상의 이유, 그리고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경찰과 자주 대면해야 했는데, 2022년 이전에는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글쓰기, 소셜미디어 발언, 팟캐스트 참가, 오프라인 행사 참여, 행사 조직 등의 활동을 할 여지는 남겨 주었다. 하지만 경찰은 가끔 나를 찾아와 면담(約談)을 하고(역주: 중국에서 공안기관이 면담을 한다는 것에는 경고의 의미가 있다) 미행했으며, 회사 상사를 찾아가거나, 사람을 보내 활동과 발언을 감시했다.
2022년 초여름 긴 팬데믹 봉쇄가 끝난 후, 나는 친구들과 공공장소에서 춤을 췄다는 이유로 한 달 3일 동안 집에 감금됐다. (역주: 코로나 봉쇄가 끝난 후 북경에서는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여전히 없어서 이 글을 쓴 오근(伍勤)의 제안으로 청년들이 공공장소에 모여서 같이 춤을 췄다.)
한 달 후, 내가 6년 동안 일했던 언론사(펑파이신문)는 정치적 압력 으로 나와의 노동계약을 불법적으로 해지했고, 노동법에 따른 보상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예술전시회 설치 참가를 위해 북경을 떠났다. 이때 열흘치도 안 되는 옷 등 짐을 준비했는데 이후로 다시는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10월 북경에서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기 직전, 북경을 떠났던 시민 수십만 명이 건강코드에 이상이 생겨 북경에 돌아갈 수 없었다. 나 또한 그 중 한 명이었다. 전시회가 시작된 후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전시회를 함께 준비했던 친구들과 같이 광주(廣州, 광저우)로 갔다. 이 시기 제로코로나 정책은 끊임없이 여러 지역에서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켰고, 소셜미디어상에서는 연일 애도가 이어졌다. 습근평(習近平, 시진핑)은 기존의 관례를 깨고 연임을 했으며, 정치국 전체에 자신의 사람을 배치해 많은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다른 한편, 사통교(四通橋, 쓰통차오)(역주: 2022년 10월 북경의 도심에 위치한 고가다리인 사통교에서 제로코로나 봉쇄정책에 항의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기습 시위가 일어났다)에서의 외롭고 용감한 저항은 거센 저항의 흐름을 일으켰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중국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서구 사회 곳곳에서 “倒習“(역주: “습근평 타도”) 포스터를 붙였고, 중국 내의 청년들도 질식할 것 같은 침묵과 공포 속에서도 어렵게 행동에 나섰다. 이때 이란에서 폭발하던 저항은 중국 청년들에게 더욱 큰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광주(광저우)에서 이란의 저항예술을 공유했고, 주변의 친구들도 조용히 행동하고 있었다.
10월 말, 광주의 코로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휴대전화를 보면 친구들의 메시지와 단톡방 대화는 모두 도시 봉쇄에 관한 소문과 그 소문에 대한 비판들로 채워졌다. 나는 몇 번이나 북경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또 다시 도시가 봉쇄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 나는 사통교 시위 이후 일련의 활동에 참여했다는 의심을 받고, 광주에서 북경 국가안전부에 의해 체포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북경 건강코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북경으로 연행해 심문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광주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면 자신들의 건강코드에 이상이 생겨 북경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시급히 심문을 마치고 서둘러 북경으로 돌아갔다.
제로코로나 정책으로 인해 광주구치소에서 나를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소란죄(尋釁滋事)’ 명목으로 내게 내려진 15일의 행정구류 처분은 당장 집행될 수 없었고, 그 덕분에 나는 구치소 수감을 피할 수 있었다. 대신 그들은 북경의 국가안전부에 실시간으로 행적을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그로부터 2주가 되지 않았을 때 봉쇄와 언론 통제에 항의하는 ‘백지운동’이 발생했고 북경에 있는 친구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이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한 해 동안 폭정에 대한 공포는 나의 입을 막았다. 이때 말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다른 모든 억압보다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란의 상황을 빌어 내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는 방법을 찾고 나서 내가 그동안 관심을 갖고 보고 있던 <아트포럼> 중국 홈페이지에 음력 설날 저녁에 이 글을 발표했다. 처음 이 글을 발표했을 때에는 잡지 편집인 및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들, 그리고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 외에는 이것이 우리 자신의 현실인지 알지 못했고 그들은 이란과 중국의 현실이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지 놀랄 뿐이었다. 그 결과 이 글은 처음 한동안은 검열에 걸려 삭제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다 썼을 때, 과연 무사히 그 다음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그 전에 체포될 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 글을 다 쓴 후 나는 행적을 보고하라는 국가안전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운남(雲南)으로 가서 육로로 국경을 넘을 준비를 했다. 국경을 넘기 전에 나는 중국과 라오스 국경에 있는 식당에서 당시 상황을 이 글 각주에 추가하고 후기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국경을 넘다가 체포되면 이 글에 각주와 후기를 추가해서 발표해 달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다행히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이 글을 발표한 후 일주일도 안 되어 나는 중국을 떠날 수 있었다. 이렇게 급하게 떠나느라 집에 가서 짐을 싸지도 못했고,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고양이를 돌봐주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족에게 말하지도 못했다.
이 이야기는 내가 해남(海南, 하이난)에 숨어 있을 때 썼는데, 바로 그때 제로코로나 정책이 180도 바뀌었다. 감염의 물결은 순식간에 전국을 휩쓸었고 거의 모든 사람이 가족을 잃는 경험을 했다. 사실 제로코로나 정책이 끝나기 전에 이미 정부는 코로나19의 확산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진행된 개방은 마치 봉쇄에 항의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로 보였다. 철저한 제로코로나 정책이든 아니면 하룻밤 사이의 방역정책 중단이든 모두 게으른 정책이고 생명을 통계 수치로만 보는 논리이다. 하지만 기억은 보존하기 어려우므로 인식은 더욱 조작되기 쉽다. 여론은 제로코로나 정책에 대한 반대 시위 때문에 제로코로나 정책은 중단됐고, 결국 그후 부정적 결과가 발생한 것으로 몰아가며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코로나 봉쇄 반대 시위를 자발적으로 잊기 시작했고, 심지어 시위대를 욕하기까지 했다. 10월과 11월에 불타오르던 시민들의 저항은 실어(失語)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코로나19의 높은 사망률에 대한 애도 속에서 봉쇄 정책에 대한 항의 시위에 대한 비난과 망각이 동시에 진행됐고, 봉쇄 반대 시위 참가자에 대한 체포는 비밀스럽게 지속되고 있었다. 공포는 우리가 서로를 찾을 수 없게 했고, 또 누가 잡혀갔는지 알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사라진 친구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출국 후 나는 각주와 후기를 보충해서 <단전매(端傳媒)>와 <Women4China>에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공포에 대한 몸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나는 여전히 실명으로 발표할 수 없었다. 비록 주석을 추가한 버전을 중국 외부에서 발표했지만 이 글은 조용하고 천천히 중국 내부에서도 퍼져나가고 있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나의 글처럼 이란의 상황에 빗대어 발언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테헤란’이나 ‘이스파한(Isfahan)’에서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썼다. 일부 글에서 언급된 친구들의 체포와 석방 관련 상황은 그들의 친구나 그들 자신이 이 글에서 사용된 이란식 이름을 사용해 중국 내에서 자신들의 근황을 밝히기도 했다. 이란은 하나의 은유로서 교차하는 역사 속에서 진실을 획득하게 됐다. 한 사람은 이 글을 읽은 후 다음과 같이 후기를 남겼다. “이란은 용감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이란이 됐다.”
중국을 떠나 먼저 태국에 가서 독일 비자를 신청하고 베를린에 온 후 나는 내 경험을 중국에서 공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중국의 현실에서 단단히 고정시키고 싶었다. 그것은 단지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정치적으로 탄압을 당한 모든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만약 은유의 방식만 고집한다면 나의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공개하고 나서 기대했던 대로 중국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연초에 웨이보(역주: 트위터와 비슷한 중국의 소셜미디어) 상에서 막 공개하기 시작했을 때 전달된 글들이 또 다시 주목 받았다. 이전에 이란의 상황으로 알고 읽었던 독자들은 각주의 설명과 하나씩 대조하면서 이 글 속의 수수께끼를 밝혀내기 시작했다. 겨울을 지나 봄에 다시 읽었을 때 글 속 이름과 지명의 낯설음이 구체적인 상황의 익숙함과 결합하면서 독자들에게 섬뜩할 정도의 실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이나 ‘허구’로 포장되어야만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이 글 배후의 자명한 의미 또한 이 허구의 상황에 더욱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했다. 사람들이 이 글을 몇 달의 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에 걸쳐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읽게 됐을 때 이러한 경험이 결국 이 글의 ‘비-비허구성’을 완성했고 이러한 상황 역시 텍스트의 일부가 됐다. 하지만 예상대로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이 글은 404(역주: 중국 정부 검열로 차단됐음을 뜻함)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중국 내 소셜미디어에서 전달되고 공유된 글도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이 글 중의 몇몇 미묘한 측면은 대략 중국어권 내에서만 의미가 간파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글이 영어로 번역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매우 두려웠다. 나는 이란에 두 번 가본 적이 있고 이란에서 발생한 상황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 글 중 이란 상황의 차용은 충분히 조사되고 고려되지 않았고 일부 구체적인 상황은 이란에서는 거의 설립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글을 쓸 때 일부러 이러한 고증을 하지 않았는데, 이 글 중의 구체적인 상황이 이란의 맥락으로부터 흘러 나와 텍스트의 균열을 만들어 독자들이 어떤 단서를 파악하게 해 우리 자신의 현실로 들 어갈 수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이 글이 영어로 번역되어 더 많은 독자들이 읽게 된다면 이러한 상황은 이란에 대해 부당한 남용이 될 지도 모른다. 특히 이란에서 발생한 이번 운동은 그렇게나 용감하게 진행됐는데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가득한 나의 이야기는 이란 혁명을 왜소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실례를 범하게 된다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 중국인 망명자의 편지 ① | 한 여성 활동가가 당국에 체포되었던 기록을 남기다
- 중국인 망명자의 편지 ② | “우리는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
참고
아래 두 링크를 통해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