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망명자의 편지 ① | 한 여성 활동가가 당국에 체포되었던 기록을 남기다

중국인 망명자의 편지 ① | 한 여성 활동가가 당국에 체포되었던 기록을 남기다

"일상을 잃어버렸다는 게 고통스러워요."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어느 중국 활동가의 편지 ①

2023년 7월 27일

[동아시아]중국대륙중국, 백지시위, 사회운동, 페미니즘, 광저우

편집자의 말

저자와 번역자의 기고로 게시하는 이 글은 한국 사회에 일반화된 중국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한국어의 한자어 표기대로 번역되었다. 1986년 한국 문교부의 외래어표기법 고시(제85-11호)는 외래어 인명·지명 한국어 번역의 발음 기준을 설정하였는데, 이는 기존 한자문화권 통번역의 기준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언론은 모두 이 기준을 따르지만, 학계에서는 연구자 개인의 선택에 따라 한자음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국립국어원 역시 역사적 지명과 인명은 한자음 표기, 신해 혁명 이후에 대해선 원지음 표기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으나, 병기를 관행적으로 용인하고 있다. 이 글의 번역자는 한자음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존중하여 이 글에서는 한자음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한자음 표기는 중국어 인·지명이 갖는 한자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상호이해의 리터러시가 될 수 있다.

역주(译注)

이 글은 글쓴이인 오근(伍勤우친, 본문에서는 ‘마헤사’라는 필명을 사용)이 중국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란의 상황에 빗대어 서술됐다. 이름과 지명에 모두 이란식 이름을 차용했지만, 서술되어 있는 상황은 모두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오근의 북경 집에서 그녀를 만난 적 있다. 오근은 나와 몇몇 친구들을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환대로 맞아주었다. 처음으로 먹어 본 ‘귀주(貴州)식 훠궈’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오근은 북경에서 어렵지만 끈질기게 사회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창한 조직을 만들고 떠들썩한 활동을 공개적으로 벌일 수는 없었지만 현명하게 당국의 탄압을 피했고, 때론 당국이 허용하는 범위를 시험하면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오근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노동운동 상황을 다른 중국 친구들과 공부하고 싶다고 나를 몇 번 초대한 적 있다. 나는 이런저런 상황으로 초대에 응하지 못했다. 부채감을 가진 상황에서 한국에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오근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우친의 집은 북경의 오래된 아파트였다. 집에 들어갔을 때 딱 봐도 일반 가정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안 곳곳에는 각종 정치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정치 팜플렛들을 모아 둔 책꽂이도 있었다. 정치와 사회, 역사를 넘나드는 책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집안의 모든 공간이 커뮤니티 공간처럼 꾸며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침실로 보이는 방은 없었다. 커뮤니티 공간에 침대 한두 개가 어색하게 놓여 있는 느낌이었다. 다른 곳에서도 이런 형태의 활동 공간을 본 적이 있다. 체제 외부에서 사회운동을 하면서 활동 자금을 모금할 수도 없고 공개적인 사무실을 갖기도 힘든 중국 상황에서 가정집을 커뮤니티 공간처럼 활용하는 것이 중국에서는 활동의 방식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집까지 사회운동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헌신성을 보면서 우친이 얼마나 활동에 진심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오근은 지금 중국에 없다. 여러 사회참여 활동들을 이유로 2022년 10월 경찰에 체포되었고, 조사를 받고 풀려난 후에도 또다시 체포될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지내다가 지금은 다른 나라로 피한 상태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중국을 떠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땅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로서는 그 땅을 떠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오근의 상황이 무척 안타깝지만, 그 결정 또한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글을 번역해 오근이 알리고 싶었던 것을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또 어디에서든 그녀가 잘 지내기를 기원하는 것뿐이다.

이 글은 중국 사회운동가에 의해 직접 쓰였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의 상황상 국내 활동가의 비판적 목소리가 직접 전달되기는 쉽지 않다. 발표되는 순간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도 어렵고, 또 외부로 전해지면 더 큰 화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근은 지금 중국에 있지 않고 또 앞으로도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이런 글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로 인해 오근은 앞으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어 발표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박수를 보낸다.

글을 번역해 한국에서 발표하는 걸 결심하기까지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중국은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도 부정적인 면만 갖고 있는 사회가 아니고 긍정적인 면도 많이 갖고 있는 사회인데, 한국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면만 소개되고 또 그런 소식이 환영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시 중국에 비판적 소식을 전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 친중과 반중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반중 감정을 더 자극해 부정적인 편향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친구가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면서 이런 상황을 이유로 침묵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국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 사회이고, 또 그런 장점으로 인해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고, 인민들로부터 지지받을 수도 있었지만, 단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른 모든 사회들처럼 말이다. 중국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향적 시선을 이유로 중국의 단점에 침묵하는 것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가 중국에 대해 어떻게 좀 더 균형적인 시선을 갖고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과제로 남길 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 ‘중국 문제’로 지적되는 많은 문제들은 오히려 한국 사회의 인식론 문제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흔히 회자되는 ‘중국=권위주의 체제’라는 인식은 △권위주의 체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권위주의는 체제에 대한 판단인지 아니면 정권에 대한 판단인지, △세계에는 다양한 국가 시스템이 존재하는데 자유민주주의가 곧 ‘선’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권위주의=악’으로 묶어버린다. 이렇게 탈역사적이고 이분법적으로 정의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인지도 모호해진다. 따라서 상기한 문제들에 있어 한국 사회가 왜 이렇게 ‘자유민주주의-권위주의’의 대립 구도에 집착하고, 그에 대한 내용을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못하는지도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이는 소위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에 다양한 사상과 가치가 넓게 뿌리 내리지 못하고, 오로지 실내용이 부족한 ‘민주주의’라는 기표만이 점령하고 있는 모습을 반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때문에 나는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에서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를 돌아봐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생각한다.

중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비판하는 목소리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되물어야 한다. 모든 발언은 개입의 효과가 발생하고 그러한 효과는 책임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중국을 권위주의 체제라고 비판하는 것은 중국을 바꾸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한국 사회 내부의 담론 지형에 개입하기 위해서일까? 중국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한국에서의 그러한 발언이 어떠한 전략적 의미를 가지며, 얼마나 효과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중국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판의 목적과 전략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의미다. 중국에서 자신들의 정치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우울증과 실어증에 빠진 중국인 친구들(은유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현실에 대해 책임감과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청년들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을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나와 그들의 위치와 거리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중국의 내부자인가 외부자인가? 외부자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을까?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한 사회를 바꾸는 주체는 일차적으로는 그 사회의 구성원일 수밖에 없다.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일차적으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돌아간다. 외부자는 외부자로서의 위치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이 위치 또한 고정되어 있지만은 않으므로) 외부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할 뿐이다. 누구도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해방시켜줄 수는 없다. 그런 외부자의 윤리를 어기면 ‘외부자의 오만’으로 쉽게 인식될 것이다. ‘외부자의 오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거나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에선 중국 현실에 비판적인 내부의 목소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서운함’을 토로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이 서운함의 이면에는 중국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에 대한 모종의 비난이 숨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나 또한 ‘서운함’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정작 중국 내부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들이 항상 있었다. 공론화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다.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식으로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연대는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다. 그들의 주장에 온전히 동의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외부자로서 연대한다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고,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을 잃어버렸다는 게 고통스러워요"

어머니, 콰르작(Qarchak) 구치소에서의 둘째 날이에요. 이번 겨울 테헤란(역주: 북경)은 정말 춥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북부의 에빈(Evin) 감옥은 이미 과밀 상태입니다. 저는 남부로 끌려왔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더 난처해졌을 거에요. 지금 전 9월 초에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요. 초가을 옷 두 벌만을 갖고 나왔었죠.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어머니, 혹시 제가 키우던 식물에게 물을 주셨나요? 양치식물은 겨울에도 습도를 유지해 줘야 하고, 알로카시아는 햇빛이 필요해요. 레몬나무에는 레몬이 열렸나요?

저는 이 편지를 어머니께 쓰고 있지만, 편지가 어머니께 전달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들이 직접 처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겠죠. 그건 이 편지가 그들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습관적인 잔인함과 무관심 때문입니다. 어머니, 파라(Farah)를 기억하세요? 제가 말씀드린 적 있는 그 소녀는 발루치스탄(Balochistan)에서 연구를 하다가 체포됐어요. 당국은 그녀를 국가보안 범죄 혐의로 15년형을 선고했습니다.[1] 그녀는 이미 4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고 있죠. 우리가 파라에게 보낸 책들을 그녀는 한 번도 받지 못했대요. 파라가 감옥에서 써서 알리(Ali)에게 보낸 소설은 감옥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검열에 걸려 결국 목록만이 전달됐어요. 지난달 저는 첫 심문에서 풀려난 후 알리를 만났습니다. 알리는 최근 파라가 감옥에서 건 전화를 받았는데, 이는 지난 1년 중 유일하게 파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파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있고 단단했다고 합니다. 작별 인사를 할 때 알리는 머뭇거리며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도 너와 똑같이 단단하게 견딜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어요.

  • [1] 풍사유(馮斯瑜펑스위)는 2018년 신강(新疆, 신장)대학에서 연구조교로 재직하던 당시 그녀와 함께 일하던 인류학자 Rahile Dawut 교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녀는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Rahile Dawut 교수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저는 모두를 실망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결국 전 한 명의 나약한 쁘띠부르주아 지식인일지도 모르죠. 최근 1년 동안 좋아하는 일을 줄곧 잃어버리는 연습을 했어요. 밤마다 고양이 두 마리를 안고 말없이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지만, 결국 제가 얼마나 무언가 잃어 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어요. 집에 있는 책들조차 잃기엔 아쉬워요. 참 나약하죠. 제가 체포되던 날 아침 중고 레코드판을 샀는데, 이미 집에 도착했겠죠? 언제 그것들을 들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석류즙을 짜서 아침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날 아침에 착즙기를 장바구니에 추가했는데 너무 비싸서 망설이다가 결국 결제하지 않았어요. 어머니, 믿겨지세요? 그 하루반 동안 저를 가장 괴롭힌 순간은 이렇게 쁘띠부르주아 생활에 대한 수치스러운 향수였어요. 내가 성취한 것보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서 찾은 의미보다 일상을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실직 소식도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지난 초여름 전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어요. 단지 친구들과 함께 거리에서 춤을 췄다는 이유만으로요. 이 정권은 자유의 영혼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2] 그 후 비밀경찰은 제가 일했던 신문사에 연락했고(최근 몇 년 동안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편집장과 경영진은 더 이상 저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제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비겁함과 나약함을 언제나 기꺼이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하지만 신문사는 이 ‘방 안의 코끼리'를 이용해 노동법에 따른 전액 배상을 거부했습니다.

  • [2] 그 금요일 밤은 마침 ‘6.4’(역주: 1989년 6월 4일 진행된 ‘천안문 사건’을 의미) 전날인 6월 3일이었다. 필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봉쇄가 해제된 직후 필자와 친구들은 실외에서 만나 춤을 추기로 했는데 비밀경찰은 민감한 날에 모임을 조직한 것으로 의심했다.

2022년 10월 1차 조사가 끝난 후 제 삶의 모든 순간은 정지됐어요. 저는 다시 자유를 빼앗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최근 수년 동안 체포된 친구들의 수감 기록을 읽으며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아민은 감옥에서 자신의 유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며 최고법원 법정에서 “나는 기꺼이 나의 자유를 희생해 내가 한 일을 옹호하겠다”는 최후 진술을 했대요.[3]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곤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제가 정말로 그런 일을 겪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졌습니다.

  • [3] 노욱우(盧昱宇루위위)는 이정옥(李婷玉리팅위)와 함께 『비신문(非新聞)』을 창간해 전국 각지의 집단 시위를 기록했다는 혐의로 2016년 체포됐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여전히 주도면밀하게 감시를 당했고 여권은 무효화됐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옥중 기록을 쓰기 시작했고, 「부정확한 기억(不正確的記憶)」이라는 제목으로 『중국디지털타임즈(中國數字時代)』에 연재했다.

밤이 되면 전 늘 도주·체포·감금 같은 악몽을 꿨는데, 가끔 이런 악몽을 꾸다가 창밖의 천둥번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곤 했어요.

어머니, 저는 다시 체포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요. 머나먼 곳에 가서 숨어 지내고, SNS 계정을 삭제하고, 내 컴퓨터와 휴대전화에 있는 모든 파일을 삭제했어요. 그리고 모든 불의에 침묵하고, 사회 활동에서 물러났으며, 거대한 실어증 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매일 생각했어요. 만약 그때 바로 투옥되었더라면 적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잊혀지진 않고, 연대의 물결을 일으켜 저항의 열기를 다시 불러 일으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요.

기억은 단절됩니다. 404(역주: 중국 정부에 의해 검열되어 삭제된 글을 클릭하면 ‘404’라는 숫자와 함께 간단한 삭제 공지가 뜬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에서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는 전날과 그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대화는 모두 일관성이 없어지죠. 일부 스마트폰 메시지 프로그램 중 메시지를 읽은 후 삭제할 수 있는 기능이 개발된 후에야 정보기관의 감청에 대해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게 됐는데, 다른 한 편으로는 이 기능 때문에 종종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기억해낼 수 없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어요. 친구들의 메시지가 10초 후, 30초 후 혹은 1시간 후 사라진다는 것이 항상 아쉬웠지만 더 오래 지속되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스크린샷을 찍어 두지도 못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요.

망각은 폭력이고, 폭정의 공범자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 살면서 더욱 피하기 어려운 현실은 기억이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억은 당신의 삶을 무겁고 고통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비밀경찰의 증거물이 되어 당신을 상상 이상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입니다.

체포

첫 번째 체포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때 석방되고 난 후 바로 체포에 대해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이야기하지 않아서 정말 아쉬워요. 저는 심문 내용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했어요. 그래도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과 감정을 기록해 두고 싶었지만, 어디에 기록하든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습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는 더 이상 나에게 사생활을 제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정권의 감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내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비밀경찰에게 압수된 지 30시간이 지나자 그것들은 바이러스처럼 공포의 대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바이러스는 이미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10월의 어느 평범한 날, 그들은 중대범죄수사팀의 범죄수사기법으로 저를 체포하기 위해 유인했습니다. 그들은 멀리 테헤란에서 사난다즈(역주: 중국 광동성 광주廣州)까지 불원천리 달려왔고, 많은 경찰들이 동원되어 매복과 위장 전술을 실시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내 앞에서 우쭐거리며 당시를 이야기했어요. 내 머리로는 그들의 물 샐 틈 없는 포위망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우스운 점은, 저는 한 번도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한 평범한 날이었고, 저는 부엌에서 토마토와 병아리콩을 곁들인 양고기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동료로 위장해 식사에 함께 하기로 한 사난다즈 현지 정보원과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경계를 푼 순간 그들은 헤디(Hedieh)의 집에 쳐들어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두 무릎 꿇어!”[4]

  • [4] 2022년 11월 8일 필자는 광주에 있는 한 친구 집에서 북경시 국가보안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일 함께 있던 4명 모두 건강코드가 동시에 ‘노란색’으로 바뀌었다.(역주: 건강코드가 노란색이 되면 출입에 제한이 생기고 반드시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자 방역 요원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며 봉쇄된 지역에서 온 사람이 있으니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방역 요원이 집에 들어와서 우리의 신분증을 등록하고 우리 휴대전화를 스캔하자 북경에서 온 사복경찰 몇 명이 곧바로 달려들어와 우리를 체포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휴대전화를 압수당했다.

아델(Adel)은 조건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고 금새 땅바닥에 진압됐어요. 누르(Noor)와 헤디는 옆에서 얼어붙어 버렸죠. 저는 본능적으로 쿠르드어로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는데 그 순간 칼날과도 같은 테헤란 페르시아어(역주: 북경의 보통화)가 들렸습니다. “마헤사(mahesa), 아직도 내 목소리를 기억 못 하겠어?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기쁘지 않아? 이번엔 진짜 너를 잡아 넣고야 말겠어!”[5] 폭력을 행사할 때 테헤란 말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습니다. 그것은 국가기구의 폭력, 한족(漢族)의 배타적 애국주의와 가부장적 폭력의 종합체입니다. 도발과 억압으로 가득 찬 이 악랄한 오프닝은 오랫동안 제 마음에 남아 저를 괴롭혔습니다. 비록 저는 테헤란 출신이지만, 쿠르드인(역주: 여기에서는 ‘중국 소수민족’의 의미로 쓰임)으로서 영원한 이방인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페르시아어가 테헤란 말로 오염되지 않도록 노력해왔습니다. 체포되던 당시 저는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마음이 차분해졌죠.

  • [5] 테헤란 억양의 페르시아어는 북경 말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떠한 공문서도 제시하지 않고, 소환이나 체포 통지도 없이 억양과 수갑만으로 나와 친구들을 위협하며 체포했습니다. 제 휴대전화와 컴퓨터는 모두 압수됐고, 헤디의 부모님 집은 전부 수색됐어요. 저와 다른 사람들은 각기 다른 차에 태워졌죠. 너무 어두워서 근처 경찰서에 잠시 들린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당시 쿠르드 지역은 시위로 인해 많은 경찰서가 시위대로 채워져 경찰서까지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로코로나 방역정책 하에서 경찰이 우리를 연행해 사난다즈에서 테헤란까지 480km를 이동해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리스크가 너무 컸죠. 그들은 나를 연행하는 중에 끊임없이 나에게 불만을 쏟아 냈어요. 저 때문에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출장을 나왔고, 테헤란으로 과연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6] 그들은 또한 헤디, 누르, 아델 모두 나 때문에 연행되는 것이므로 그들 모두 나를 미워할 것이라고 악의적으로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나는 당연히 그들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6] 필자가 체포되었을 때 북경 건강코드에 문제가 생긴 지 이미 두 달이 넘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으로 와서 체포한 경찰들 역시 기존의 관례에 따라 필자를 북경으로 데려가 심문과 구금을 하지 못했다. 사실 다른 지역에 와서 필자를 체포한 국가보안국 경찰들 역시 건강코드 이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집행하러 온 것이었다. 그래서 심문은 코로나19가 확산하고 있던 광주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밤 늦게야 쿠르드 지역에 있는 한 경찰서에 도착했어요. 그들이 나를 지하실로 데려갔을 때, 신념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고 나의 모든 결기가 사라졌습니다. 제가 처음 본 것은 두 명의 흐트러진 남성이 불타는 백열등 아래에서 품위 없이 잠을 자고 있는 거대한 철창이었어요. 뒤쪽에는 더 외딴 곳에 또 다른 철창이 있었는데, 제가 들어갔을 때 비어 있었고 나중에 화장실에 갔을 때 여성들이 차례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심문실이 있었죠. 저는 그 중 한 곳으로 끌려갔습니다.

심문

불안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방을 드나들었고 돌아올 때에는 제 휴대전화와 컴퓨터로부터 더 많은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참 나약했어요. 심문 시작 후 무자비한 수법은 거의 사용되지도 않았는데 저는 제 휴대전화와 컴퓨터의 비밀번호를 그들에게 고분고분 건네 주었어요. 누르는 6시간 후에야 건네 주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저는 불안감 때문에 계속해서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화장실에 가는 것은 아마도 심문 중 가장 굴욕적인 경험이었을 겁니다. 화장실은 계단 입구 통로에 있었는데, 이 화장실에는 내 키의 3분의1 정도의 상징적인 칸막이만 있었고, 쪼그려 앉았을 때 겨우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화장실에 가서 바지를 올릴 때마다 통로를 지나가는 남성 경찰관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테헤란에서 온 여성 경찰관이 제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저를 감시했지만, 그녀가 없을 땐 남성 경찰관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다른 방을 지나가면서 친구들의 상황을 살펴볼 기회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누르의 방은 흐느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그녀는 너무 어려서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폭력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를 심문한 비밀 경찰관은 그녀와 비슷한 또래였고, 그녀를 대할 때 시시덕거리는 말들로 가득했습니다. 흐느끼며 우는 누르에게 “내 아내에게조차 이렇게 부드럽게 대한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나중에 누르는 테헤란의 다른 중년 경찰관들이 심문실에 들어와 누르를 협박할 때마다 그가 누르를 달래며 안심시켰다고 말했습니다. 누르는 감정적 경험이 적고, 그나마 몇 번의 경험도 남성에게 속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젊은 남성이 밀폐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누르의 말을 듣거나, 우는 걸 지켜보는 상황에서 누르가 어떻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경찰의 이러한 심문 방식은 아마도 피심문자를 심리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고안된 것일 겁니다. 석방되기 전 우리는 로비의 중재실에 함께 앉아 서류에 서명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 경찰과 누르 사이에 성적 긴장감이 충만한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머리 색깔이 원래 이 색이에요? 정말 예쁘네요!”, “언제 밥 사줄 거예요?”, “누르씨의 진술에 허점이 많아서 내가 그걸 고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누르는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런 심문 기술은 인간성에 대한 실험이죠.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이죠. 저는 세피데(Sepideh)가 전해준 투옥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한 여성 경찰이 가끔 세피데를 찾아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 여성 경찰은 자신이 못생겼고 자존감이 낮으며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같은 학교의 남성 혁명 지도자들에게 쉽게 끌려 다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리암(Maryam)은 이 말을 듣고 침을 뱉었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누르를 심문하던 경찰이 늦은 밤 심문을 쉬는 중 내 심문실에 찾아와 저와 대화하는 척을 했습니다. 그가 몇 달 전 나를 미행하던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을 때 밖에서 갑자기 한 강간범이 지하 심문실로 끌려 왔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이 귀에 거슬리는 경박한 말투로 “야, 왜 여기까지 왔냐. 창녀촌에 가서 ‘창녀(雞)’나 찾을 것이지 강간은 무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성에게 가장 모욕적인 ‘창녀’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이것이 이슬람공화국(역주: 중국)의 공권력을 행사하는 자에게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세요?

헤디는 또 다른 유형을 만났는데, 심문들 중 가장 비열한 질문일 거에요. “너희 부모 아직 퇴직 안 했지? 너 9살 난 여동생도 있지 않아?” 가족에 대한 위협으로 헤디는 철저히 무장해제 됐습니다. 심문은 줄곧 그녀의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30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각 질문 사이에 지나치게 긴 침묵이 이어지면서 몸은 더욱 피곤해졌죠. 제가 화장실에 가려고 헤디의 심문실을 지날 때마다 헤디는 조각상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차가운 금속 의자 위에서 다리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그녀는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고 해요. 소변 검사를 하는 동안 처음으로 서로를 볼 수 있었지만 대화는 금지됐습니다. 나와 누르는 몰래 손가락을 걸었는데 즉시 제지됐습니다. 헤디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손에는 핏빛 소변을 한 컵 들고 있었죠. 소변 검사 중이던 남성 경찰이 놀라면서 봤는데, 옆에 있던 여성 경찰은 대수롭지 않은 듯 “생리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날은 헤디의 생리 첫날이었습니다. 헤디가 이 긴 고통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요.

저를 심문한 비밀경찰은 그 중 가장 노련한 사람으로 테헤란 비밀경찰 중의 고위층이었습니다. 그는 내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알아낸 후 휴대전화를 켜 보곤 심문실로 들어와 왜 계속 녹음하고 있었냐고 화를 냈습니다. “너 경찰한테 권리 얘기하는 거 좋아하지? 근데 경찰하고 얘기하면서 그걸 녹음해? 넌 니가 법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 넌 처벌 받아도 싸!” 그는 계속 권위적인 어투로 심문했어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니가 경찰을 바보 취급하는 거야!”

제가 한 모든 말은 마치 다 틀린 것 같았고, 그 모든 것들이 저를 더 큰 위험에 처하게 할 것 같았습니다. “너 방금 한 질문에 다시 대답해봐! 너 여기서 몇 년 썩고 싶어?” 결국 저의 거의 모든 진술은 그가 내뱉은 것들로 정리됐습니다. 가끔 그는 태도를 바꿔서 저 같은 활동가를 이해한다고 하기도 하고, 이란 여성이 처한 상황에 대해 동정을 표하기도 하며 저에게 공권력이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사람이 위력으로 조금씩 내 자존감을 무너뜨린 그 24시간은 거의 ‘가스라이팅’의 시간이었습니다. 제 의지가 가장 약해진 순간에는 제가 국가의 용서를 받도록 그가 지금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최종진술서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이 제게 그걸 보여주더라고요. 진술서 가장 앞에 “나는 변호사에게 연락하고 싶습니다”라는 양식화된 질문이 있었는데, 여기에 “아니요”라고 이미 표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심문 규칙 안내를 이미 읽었습니다”라는 항목에도 “네”라고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심문이 시작된 지 20시간이 지나 있었고, 심지어 전 ‘심문 규칙 안내’가 뭔 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이건 수정하면 되지, 뭐!”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심문 규칙에 관한 서류를 줬습니다. 나중에 제가 누르와 헤디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자신의 진술서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서명했다더군요.

그날 가장 우스웠던 일은 경찰들의 오만함과 무지였어요. 경찰들이 발루치어(Balochi)와 쿠르드어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믿어지시나요? 구글 검색만 해도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제 친구가 발루치어로 쓴 저항시가 제 유죄의 증거로 언급되었는데 저는 발루치어를 전혀 모릅니다. 저를 심문하던 테헤란 경찰 옆에서 기록을 하던 쿠르드족 경찰은 이러한 상황에 당황한 듯했고 그 순간 저는 거의 큰 소리로 웃을 뻔했습니다.[7] 한 경찰은 가십이나 이야기하는 말투로 내게 마니(Mani)가 에이즈에 감염됐는지 물어봤습니다. 단지 그가 성소수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의 가장 악랄한 심문기법은 제가 페미니스트인지 캐묻는 데 사용됐고, 다른 비밀경찰들도 누르, 헤디, 아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제가 페미니스트인지 알아내기 위해 유도 질문을 했습니다. 마치 다른 모든 것보다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 가장 큰 죄라도 되는 듯이 말입니다. 만약 그가 평상시에 물었다면 저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당연히 페미니스트라고 대답했을 겁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활동이 ‘최고지도자(역주: 시진핑)’를 향한 것 아니냐며 자백을 강요할 때 그 경찰은 심지어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 [7] 2022년 10월 필자의 한 친구는 이란 시위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지난 세기 고전적인 시위 노래의 광동어(粵語) 버전을 작곡하고 불렀다. 경찰이 필자의 위챗을 샅샅이 감시하던 중 대화 기록 중에 그 친구가 몇몇 친구에게 보낸 노래를 발견했다. 경찰은 필자가 그 노래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필자는 광동어를 전혀 모른다. 필자가 심문 과정에서 이 사실을 지적하자 경찰은 짜증을 내며 "가사가 중국어 간체자로 분명하게 쓰여 있는데 넌 내가 광동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줄 알아? 나는 홍콩에서도 살았다고. 광동어는 번체자를 쓰는 걸 모를 줄 알아!"라고 말했다. 그때 우리는 광주의 한 공안국 심문실에 있었고, 북경 국가보안국 경찰 옆에서 기록을 도와주고 있던 경찰은 광동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광동 사람이었다.

심문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다보니 허리디스크가 심하게 터졌습니다. 대기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었죠. 화장실에 가지 않을 때에는 허리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심문실 안에서 작은 걸음으로 뒤로 걷는 운동을 했기 때문에 종종 테이블과 의자에 부딪혔습니다. 그러자 지하 심문실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중년 남성 경찰이 몇 번이나 큰 소리로 “수갑으로 묶어 두겠다”고 위협했어요. 새벽 4시에 너무 피곤해 걸을 힘조차 없어 심문실 의자 3개를 벽에 붙여 놓고 그 위에 누워서 쉬고 있었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눈을 찌르는 천장의 백열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거대한 공포와 고립감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체포되기 전 저는 헤디의 집에서 꺼낸 스웨터를 들고 있었어요. 그 차가운 공간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위로의 온도였습니다. 마음 속으로 파라(Farah)와 감옥에 있는 동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상상해보려고 했습니다. 비다(Vida)와 세피데,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심문 받고 나온 후 더 큰 감옥으로 들어가 당국에 의해 새로운 이름과 신분으로 바뀌어 철저한 감시와 가짜 삶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세피데가 저항하는 모습은 많은 언론 보도에서 볼 수 있었죠. 세피데는 감옥에서 나온 후 낯선 사람들과의 모임과 공개 행사에 가서 종종 흥분하며 위험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 발언들은 주최자와 진행자를 모두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죠. 저는 그게 세피데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8] 내 미래의 삶에 대한 이러한 가상의 시뮬레이션은 저를 압도했고, 어떤 순간엔 ‘그렇게 살 용기가 없다면 내 인생을 용기있게 끝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세 이러한 생각을 접고 마리암, 레자(Reza), 그리고 밖에 있는 친구들이 우리를 돕기 위한 활동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믿음에 의지해 내 의지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간신히 버텼습니다.

  • [8] 악흔(岳昕위에신)은 ‘자스커지(가사과기) 사건’ 후 구금됐다. 자스커지 사건이란, 2018년 일부 대학생들이 중국 선전에서 용접기 제조기업 자스커지 공장의 노동자 시위에 연대한 사건이다. 이에 참여했던 많은 대학생들이 체포되거나 ‘사라졌다’. 그 후에는 지정된 장소에서 가택연금되었는데, 풀려난 후에는 신분증과 개인정보(档案)가 바뀌었고 새로운 이름과 가짜로 만들어진 개인사로 바뀐 채 사회에 복귀했다. 그런데도 지속적으로 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당하고 있다.

어머니, 동독의 비밀경찰에 관한 영화 『타인의 삶』을 본 적 있으세요? 몇 년 전에 봤을 때에는 그저 좋은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요 몇 년 점점 심해지는 감시 속에 살면서 다시 보니 더 감회가 깊더라고요. 영화 속 비밀경찰은 동독 지식인의 집을 도청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음악과 감정, 사상에 감동을 받아 그들이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몰래 도왔죠. 하지만 오늘날의 감시는 빅데이터 알고리즘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사상·감정·창작물조차 기계적이고 파편적인 ‘키워드’가 되어 경고를 날립니다. 최후에 인간성을 일깨우는 균열의 토양조차 더 이상 존재하지 않죠. 만약 우리도 그렇게 알고리즘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감시를 당한다면, 우리의 창작활동과 감정, 사상에 감동을 받아 우리 편에 서는 체제의 하수인이 한두 명 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합니다.

심문이 끝난 후 우리가 떠나도 된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에야 그들은 체포 당시 제시해야했던 소환장을 가져와 체포된 첫날 날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죄명에 “소란죄(尋釁滋事)"라고 쓰여 있던 구금통지서를 우리에게 한 번 보여줬죠. 그리고는 쿠르드 지역의 불안정한 상황을 고려할 때 구치소에서 당분간 우리를 구금하기 어렵다고 말하고는 소환장과 구금통지서는 가져가지 못하게 했습니다.[9] 경찰서를 나올 때 그 아제르바이잔족처럼 생긴 경찰이 퇴근하면서 다른 간수들과 함께 제 앞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빨리 그를 지나치며 목소리를 낮춰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9] 24시간 심문(연행 후 최후 석방까지는 30여 시간으로 법정 심문 시간을 초과했다)이 끝난 후 ‘소란죄(尋釁滋事)’로 15일 행정구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방역 정책 때문에 광주(廣州)의 구치소는 새로운 사람을 수용할 수 없어서 15일 행정구류 처벌도 제대로 집행될 수 없었다. 경찰이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있던 자료를 모두 복사해 간 후 필자와 다른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2부에서 계속]

글: 오근(伍勤우친, 마헤사)
번역: 유수프(يُوسُ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