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임신중지정책의 역사

일본 임신중지정책의 역사

2023년 7월 17일

[동아시아]일본임신중지권, 일본, 페미니즘

지난 6월 28일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일본 활동가들이 <유산 유도제, 재생산 건강과 권리 이슈들> 웨비나를 열었다. 한국의 모임넷(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와 일본의 ASAJ(Action for Safe Abortion Japan) 이 공동 주관한 이 행사에는 양국 활동가들 80여명의 참여해 서로의 역사와 현재를 공유하고, 전망을 위한 심도싶은 토론을 나누었다. 발제 중 일본 미에대학(三重大学) 의 이와모토 마사코 명예교수의 발표 <일본 임신 중절 정책의 역사> 를 정리했다.

저는 일본의 낙태 정책 역사에 중점을 두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일본의 낙태죄 도입 역사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서양식 형법을 도입했습니다. 현행 형법은 1907년에 도입되었는데, 이 형법에 낙태죄가 포함되어 있으며. 지금도 유효합니다. 낙태를 한 여성은 징역 1년 이하의 형에 처해지고(自己堕胎罪), 낙태수술을 한 의사나 조산사는 업무상 낙태죄가 적용되어 징역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형을 받습니다(業務上堕胎罪).

전시 우생 정책과 임신 중절 규제 강화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단종법인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을 제정해 정신장애인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시행했습니다. 일본에서도 1940년에 “국민우생법”이 만들어져 유전성이 있는 정신장애인에게 불임수술을 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조상 숭배 사상이 있었고,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자손을 남기지 못하는 강제 불임수술은 반대했기 때문에 전쟁 전에는 강제 불임수술이 없었습니다. 반면 "국민우생법"으로 인해 오히려 임신중지에 대한 국가의 단속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전후에는 강제 불임수술이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국민우생법이 생기면서 임신중단을 더욱 엄격하게 단속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941년 인구정책확립요강이 제정되어 젊은 나이에 결혼해 각 가정에 5명의 자녀를 낳으라고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우생보호법 제정

1945년 8월 패전 후 식민지와 전쟁터에서 군인과 이민자들이 귀국했습니다. 식민지에서 돌아온 사람들로 일본 국내 인구가 늘어나면서 베이비 붐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인구 수는 줄이고 인구의 질을 향상시키지 않으면 국가 부흥이 불가능하다’는 우생학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전쟁 전부터 산아제한을 주장하던 여성들이 1947년 우생보호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 당시 일본의 일부 여성운동가들과 혁신계 여성의원들에게는 우생보호법안이 강간에 의한 원하지 않는 임신의 문제를 배경으로 임신중절의 완전한 합법화를 시키기 위한 수단인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1946년 4월 10일 열린 전후 최초의 선거인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된 혁신계 여성의원들은 전후의 제1회 국회에서 국민우생법안을 제출했다. 일본 사회당의 후쿠다 마사코, 카토오 시즈에라는 혁신계의 정치가는 모태보호의 관점에서 다산에 의한 여성에게의 부담이나 모태의 죽음위험도 있는 유산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된 시점에서 낙태 선택지의 합법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죽을 위험이 있는 출산은 여성의 부담이라며 인공중절의 필요성과 합법화를 주장했다. (永畑道子, 《花を投げた女たち : その五人の愛と生涯》, 文藝春秋, 124쪽)

이듬해 1948년 다니구치 야사브로 의원이 법안에서 ‘산아제한’을 삭제하고 합법적 낙태와 우생수술을 규정하는 우생보호법안을 제안하여 내각의 참의원,중의원에서 전원일치로 가결하였습니다. 정신장애, 지적장애, 한센병, 시각장애, 청각장애 등을 지닌 사람들을 강제로 불임수술이나 낙태를 시키는 법률입니다. 또 빈번한 출산으로 힘들어하는 여성의 동의를 전제로 한 불임수술이나 낙태를 허용했습니다. 외국에 비해 매우 빠른 시기인 1948년에 낙태를 합법화했기에 배우자 동의조항이 있었고, 이 조항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다른 많은 국가들이 낙태를 합법화하기 시작했지만 낙태 시 배우자 동의가 필요한 국가는 거의 없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다니구치 야사브로는 우생보호법 지정의사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시,군,도의 의사협회에서 지정한 의사만이 합법적으로 낙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독점으로 임신중절의 방법과 가격을 결정합니다. 낙태에서 사용되는 소파수술은 건강보험의 적용이 되지 않아 현재 최저 가격이 10만엔(약91만원) 이 넘습니다.

우생보호법 개정

1949년과 1952년에 우생보호법이 대폭 개정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임신중절 사유로 경제적 이유가 도입되었습니다. 1952년에는 당시까지 필수였던 지방 우생보호법 심사회의 심사가 폐지되었습니다. 합법적 낙태 건수는 1955년 117만건까지 늘어났다가 그 후로 줄어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연간 12만건 정도입니다.

1972년 우생보호법의 첫번 째 개악안이 국회에 상정되었습니다. 낙태 사유에서 경제적 이유가 삭제되고 태아의 장애 가능성 조항이 신설되었습니다. 개악안을 추진한 것은 ‘생장의 집’이라는 우익 종교단체인데, 이에 대해 의사회, 여성단체들은 반대했습니다. 낳을지 말지는 여성이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장애인 단체에서 장애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생보호법’자체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법률이므로 이를 바꾸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생사상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여성단체와 장애인 단체는 이러한 의견차를 보이면서도 경제적 사유가 삭제되고 태아의 (장애)사유가 추가되면 우생보호법은 더욱 나빠질 것이기에 개악을 반대했습니다. 1974년 장애인의 반대에 당황한 국회는 이 법안에서 태아의 (장애)사유를 삭제했지만, 그렇다면 이 개정법안은 경제적 사유만 삭제한 셈이 되어 강력한 압력단체였던 의사회가 반대함으로써 법안이 폐기되었습니다.

1982년 두 번째 우생보호법 개악 시도가 있었습니다. 생장의 집이 추천한 무라카미 마사쿠니의원이 모리시타 후생성 장관에게 우생보호법의 낙태사유에서 경제적 이유를 삭제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습니다. 생장의 집은 자민당의 다수파를 움직여 지방의회에서 우생보호법 개정추진 의견서를 제출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의사회, 여성단체, 장애인단체와 자민당의 일부는 반대하는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지방의회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러한 의견서 다툼, 서명, 집회, 가두선전을 하면서 여성들은 후생성과 맞섰습니다.

당시 자민당의 스즈키 총리(70대)였고 모리시타 후생성 장관은 생장의 집의 무라카미와 친했습니다. 그러나 자민당 내부 권력다툼으로 1982년 11월 총리가 군국주의자인 나카소네 야스히로(71~73대)로 바뀌었습니다. 나카소네의 파벌은 세력이 작았고 전 총리인 다나카 가쿠에이(64,65대)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나카소네는 다나카의 측근인 하야시 요시로를 후생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햐야시는 다나카의 뜻대로 우생보호법을 개정하는데 신중했습니다. 당시 자민당은 여성중의원 의원이 없었고 참의원의 모리야마 마유미가 당내 개정반대파를 이끌었습니다.

1983년 5월 자민당은 한달 후의 참의원 선거에서 여성표를 잃지 않으려 우생보호법을 현상유지하도록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낙태 시 경제적 사유를 유지하면서 우생보호법 지정의사의 권력, 소파수술이라는 중절방법, 배우자 동의 조항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생조항 없애기

우생보호법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 특히 여성에게 강제불임수술이나, 우생보호법조차 위반하는 자궁적출 낙태수술이 횡행했습니다. 그리하여 1994년 카이로 인구회의, 1995년 유엔 베이징 세계 여성회의에서 장애인인 아사카 유호씨가 우생보호법의 강제불임수술을 비판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 반대여론이 확산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연립정권은 재생산권리를 고려하는 법률을 만드는 대신 1996년, 우생조항만을 삭제한 ‘모체보호법’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또한 강제우생수술을 받은 피해자를 조사하고 그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는 약 2만5천명으로 추정됩니다.

피임약

일본에서는 피입법 도입이 매우 늦어져 1999년이 되어서야 저용량 피임약이 승인되었습니다. 사후피임약은 2011년에 승인되었습니다. 두 가지 약 모두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건강보험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사후피임약을 의사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전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피임약이 한 달에 2천엔에서 3천엔 (1만8천원~2만7천원), 사후피임약은 1만엔에서 2만엔(9만원~18만원)입니다.

우생보호법 강제 불임 소송

이전 우생보호법에서 강제수술을 받았던 사람들이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2015년, 강제우생수술을 받았던 센다이의 이이즈카 쥰코씨는 변호사모임에 인권구제를 신청했습니다. 2018년에는 사토 유미씨는 강제우생수술을 한 국가에게 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이이즈카씨도 함께 했습니다.

2019년 국회가 피해자에게 일시금 지급법을 만들었습니다. 한명 당 320만엔(3천만원)으로 금액이 너무 적고, 피해자 조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생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밖에 신청할 수 없습니다. 2만5천명의 피해자 중 일시금을 받은 사람은 천명을 약간 넘습니다.

법원의 판결도 엇갈립니다. 일부 지방법원은 우생보호법이 인권침해이며 헌법을 위반했다고 인정했지만, 민법의 제척기간*을 근거로 20년이 경과했기에 국가가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습니다. 1922년에 오사카와 도쿄의 고등법원은 우생보호법은 인권침해로써 헌법위반사항이므로 제척기간을 이유로 배상하지 않는 것은 정의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라며 국가에 배상을 명령했습니다. 국가는 배상하고 싶지 않아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배상과 관련해선 이후에도 지방법원마다 엇갈린 판결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척기간 : 소멸시효는 일정한 기간의 경과와 권리의 불행사라는 점에 기초하여 권리소멸 효과를 발생시키지만 제척기간은 기간의 경과만으로 곧바로 권리소멸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강제불임수술의 피해자인 원고들은 고령이 되어 35명 중 5명이 사망했습니다. 원고들은 한센병, 감염 재판에서 대법원에 가기 전에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한 것처럼 (법리 다툼이 아닌) 빨리 정치적으로 타결하기를 원합니다. 일본의 재생산권리는 이처럼 국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발표 : 이와모토 마사코

정리 : 박근영, 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