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 압승한 태국 총선 - 의미와 과제
2023년 6월 11일
행동전진당의 약진은 지난 수년 간 거리와 작업장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태국 시민들의 반독재 투쟁의 결과이다. 제 1당이지만 과반정당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행동전진당의 공약들은 연합정부 구성을 위해 부득이한 타협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여전히 더욱 중요한 것은 의회 밖 사회운동의 역할이다. 총선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태국의 사회운동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2023년 5월 15일 태국 총선에서 피타 림짜른랏*이 이끄는 행동전진당(까우끌라이당 Move Foward Party)이 제 1당으로 떠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행동전진당(or 전진당)은 2020년 등장한 미래전진당(or신미래당)의 후신으로 사회민주주의, 진보주의, 반군사독재를 표방하는 정당이다.
* 피타 림짜른랏 : 태국 행동전진당 대표. 태국 민주화의 상징인 탐마삿대학 졸업. 하버드와 MIT 등에서 경영학 전공 후 쌀겨유업체 대표로 성공. 2019년 미래전진당의 당대표의 권유로 입당해 의원 당선. 쌀겨기름 회사를 운영하며 농업고문을 지낸 아버지의 영향으로 농업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토지 소유권, 농가 부채, 농업 관광 등에서 정부를 비판하고 농민을 대변하는 정책을 내놓음. 미래전진당 해산 이후 행동전진당 대표가 됨
미래전진당은 지난 2020년 정치탄압으로 군부탄압으로 해산되었는는데, 이후 재건된 행동전진당(이하 전진당)은 더 강경한 반정부 성향을 띠게 되었다. 전진당은 전 총리인 탁신 친나왓* 지지 세력과 군부 지지 세력의 양강 구도에 균열을 내고, 하원 500석 중 151석을 차지했다. 탁신의 막내딸 패통탓 친나왓이 이끄는 프아타이당(태국인당)은 141석을 얻었다. 이로써 반군부진영이 하원 전체 500석 중 과반 이상인 292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
* 탁신 친나왓 : 이동통신 기업가 출신의 정치인으로 2001-2006년 태국 총리를 지내면서 경제발전과 빈곤감소에 기여하고 농민과 빈민 대상의 정책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이슬람계에 대한 탄압 정책 등 우 익 포퓰리즘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이후에 부패와 권력 남용으로 인해 비판받았으며, 군부 쿠데타로 퇴진한 후 해외거주 중
** 나머지 의석은, 탁신계에서 분화하였으며 대기업 총수 출신이자 현 군부 정권의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재직중인 아누틴의 품차이 타이당(태국자랑당)이 70석, 2014년 쿠데타 이후 군부 정권의 지원을 받는 쁘라딧 옹수완의 팔랑쁘라차랏당(인민국가권력당PPRP)과 이 당에서 당권투쟁과 내분으로 탈당한 현 총리 쁘라윳 찬오차 중심의 신생정당 루엄타이쌍찻당(통합태국당RTSC)은 각각 40석과 36석을 얻었다.
전진당은 왕실모독죄 개정와 징병제 폐지, 결혼평등법안*, 낙태죄 개정, 경찰/군대/사법 개혁, 주류산업 독점 해체 등의 개혁적 공약을 내세워 젊은 세대의 지지를 얻었다.
* 결혼평등법안 : 성별에 관계없이 개인이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고 법에 따라 동등한 권리, 의무 및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게 하는 개정안
전진당의 돌풍에는 리더인 피타가 사업가이자 엘리트로써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왕실부패에 대한 지속적인 폭로를 이어가 며 군주제와 군이 지배하는 태국 정치를 바꾸겠다고 약속하고, 군인 제대 후 7년간 정치진출 금지, 쿠데타 군인의 처벌 법안 제출 등 일관된 입장으로 대중의 신뢰를 얻은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탁신의 경제부흥에 대한 향수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해온 탁신가의 프아타이당은 최저임금 대폭 인상, 모든 성인 대상 1만 바트(약 39만 원) 디지털화폐 제공 등의 복지공약을 내놓았으나, 군부도 선거 때마다 복지지출 확대를 약속하기 때문에 군주제 개혁과 군부 제재 공약이 없는 복지정책은 대중의 큰 호응을 받기에 부족했다. 또한 탁신가가 오랫동안 기득권을 가져온 부패한 통신재벌이라는 점 역시 대중과의 유리를 초래했을 것이다.
왕실개혁
반면 전진당은 유일하게 왕실 개혁을 전면에 내세웠으며 군부와 연합하는 정당과는 함께하지 않겠다는 선명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는 이 쟁점에 대해 얼버무린 프아타이당과 대비되었다. 아울러 전진당은 태국은 물론 미얀마 군부의 폭력에 반대하는 외교정책도 내놓았다. 태국과 미얀마는 지리적으로 국경과 메콩강을 공유해, 댐건설 등 수자원 이슈로도 복잡하게 엮여있어 미얀마 군부에 대한 외교정책은 태국에서도 중요하다.
태국은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가 병존하는 국가로, 상하원 양원제 의회가 입법권을 갖고 있지만 군부의 힘이 크고 국왕의 권한 역시 강하다. 전진당 승리의 배경에는 2014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짠오차 총리 이후 군부, 재벌, 왕정이 심한 부패 및 무능에 분노한 반정부 정서 확대가 있다.
2012년 재벌인 레드불 창업자 손자 오라윳 유위티아가 뺑소니 사고를 내고도 뇌물로 풀려나 해외에서 향락을 즐기는 모습은 대중의 분노에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2020년 7월경부터 태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다시 확산되었다. 젊은 세대 중심의 시위대는 야당인 미래전진당(행동전진당의 전신)의 강제해산과 반정부 활동가들의 체포, 활동가 완찰레암 삭삿식이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사건 등에 분노해 의회 해산 및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퇴진, 헌법 개정, 반정부 인사 탄압 중단 등 민주화를 위한 요구사항을 내걸고 싸웠다. '세 손가락 시위'*, '밀크티동맹’**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알려진 투쟁이다.
* 세 손가락 시위 : 민주화, 군부통치종료, 개헌 3가지를 내걸어 세 손가락 시위로 불림. 영화 “헝거 게임”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된 제스처에서 파생되어 미얀마와 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됨
** 밀크티동맹 : 홍콩, 대만, 태국의 네티즌에 의해 형성된 온라인 민주주의 연대운동으로 세 나라에서 자주 마시는 밀크티에서 착안
시위대는 시위 초반 군부의 권력독점을 비판했으나, 군주제 폐지를 전면적으로 내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 경제성장률 마이너스 7.8%에 이르는 경기침체로 대중이 고통받는 가운데 태국 왕실예산은 16%나 인상되었고, 시민들은 ‘첩을 거느린’ 국왕이 수백 억의 예산이 드는 전용기로 수시로 해외여행을 다니며 사치를 일삼는 행태에 분노했다. 이에 시위의 구호는 점차 왕실 비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주최측에 따르면 2020년 9월 집회에는 무려 10만 여 명이 모여 왕실의 재산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정부는 이에 대응해 5인 이상 집회금지,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도와 온라인 매체 금지, 왕실모독죄 등으로 태국 시민을 강하게 탄압했으며, 지금까지도 수많은 태국의 시민과 운동가들이 왕실모독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있다.
* 관련기사 읽기 : 왕실모독죄에 서항하는 태국 활동가들의 단식 투쟁
그러나 시민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나갔다. 시위대는 군주제 개혁 슬로건 안에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며 투쟁을 확장시켰다. 세 손가락 경례나 팻말 등으로 왕실에 항의하고, 동시파업을 벌이며, 독재자와 국왕이 소유한 은행 앞에서 시위를 하거나 은행 계좌 파괴 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투쟁 방식을 만들어 냈다.
시위대는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제도 하에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도자를 뽑기를 원하며, 단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외쳤다. 의회와 정부에 기대는 순간 운동의 흐름이 희미해질 것이기에 대중의 공론장, 즉 광장의 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부의 물리적 탄압 이나 정보차단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해 더 많은 이들을 시위에 나오게 할 것이라고도 했다. 전진당의 하원 총선 승리는 이런 반정부 정서와 대중투쟁 속에서 태국 젊은 세대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고조되며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당이 되긴 했지만 피타가 올 7-8월 구성될 정부에서 총리가 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2017년 군부 정당이 민생불안을 핑계로 개정한 헌법 때문에 하원의원 500명과 군부가 임명한 상원의원 250명이 합동으로 총리를 선출하게 되어 있어, 하원 151명의 행동전진당 단독으로는 물론이거니와 탁신 막내딸이 소속된 프아타이당과 연합해도 여전히 과반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 승리 며칠 후인 5월 18일, 피타는 민주화 정부 구성을 목표로 군소정당을 포함한 8개 당이 연합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피타가 이끄는 연정은 연합의회(상원+하원)에서 필요한 과반수 376표 중 313표를 얻었다. 아쉽게도 연정의 공동 성명에는 정당들 중 전진당이 유일하게 내걸었던 태국 형법 112조 ‘왕실모독죄’ 개정은 포함되지 않았다. 왕실모독죄 개정에 부담을 느낀 다른 정당들과 타협하고 집권과 정부구성을 우선 목표로 둔 것이다. 전진당 차원에서 개정 노력을 계속 할 것 임을 밝혔지만, 아쉬운 대목이다. 이후 ‘왕실모독죄’폐지에 앞장 섰던 사회운동이 총선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의회를 압박할 필요가 있다.
전진당은 아직 과반을 달성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군부와 연정을 이뤘던 품차이타이당과는 연합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로써 현재 상원의원 60명 이상의 지지가 추가적으로 필요한데, 피타는 상원의원 상당수가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말하며 여론을 통해 압박했으며, 태국 시민들은 SNS로 ‘우리가 지켜줄테니 옳은 길을 가라’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태국언론 ‘프라차타이’는 5월 25일 기사에서 상원 의원 22명이 피타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런 어려움을 뚫고 피타가 총리가 된다고 해도 쿠데타가 잦은 태국에서 군부가 다시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총선 직전 현 집권당인 군부세력 팔랑쁘라차랏당(PPRP)은 헌법을 개정해 언론사 사주나 주식 보유자의 출마를 금지시켰고, 현재는 운영되지 않는 언론의 주식을 보유했다는 이유로 피타의 총리 자격을 박탈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군주제 개혁과 군부 축소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전면에 드러난 시점에서 거리 시위와 다양한 방식의 투쟁, 그리고 하원 선거에서 태국 시민들이 보여준 자발성과 주체성이 또 어떤 방식으로 분출될지, 거기에 행동전진당이 얼마나 부응할지에 따라 태국의 정치가 훨씬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대중운동이 보여주는 역동성에 주목해야 한다.
글 : 김지혜
교열 : 이재현
참고자료
Thailand protests: Why are people taking to the streets?, Emmy Sasipornkarn Interviews, dw, 2020. 10. 20
Thailand protests: Why are people taking to the streets?, Emmy Sasipornkarn Interviews, dw,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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