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사건 이후 76년, 대권주자로 등극한 학살자의 증손자

2.28 사건 이후 76년, 대권주자로 등극한 학살자의 증손자

지난 2월 28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2.28사건 기념식에서 기습시위가 일어났다. 청년들이 장제스의 증손자인 현 시장에게 항의의 목소리를 낸 이유는 일까?

2023년 4월 5일

[동아시아]대만대만, 노동운동, 장제스, 차이잉원, 국가폭력, 노동시간

이 글은 지난 4월 1일자 한겨레 토요판 칼럼을 기초로, 보다 자세하고 풍부하게 서술한 것이다.

지난 2월 28일, 타이베이시 한복판에서 거행된 2.28기념식에서 기습시위가 있었다. 2.28기념식은 1947년 2월 28일 일어난 민중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민당 정부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고 희생된 피해자들을 추도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매년 진행되는 추도 행사다.

2.28 항쟁과 국가폭력에 대해 오늘날의 대만 사회는 어떤 분열을 겪고 있을까? 이번 기습시위가 갖는 역사성을 이해하려면 종전 직후로까지 78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7년 2월 28일 민중봉기와 학살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대만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선언 이후 대만은 국민당이 통치하는 중화민국의 영토로 귀속된다. 그러나 대만의 복귀 즈음 난징(南京)에 수도를 두었던 국민당 정부의 대만 통치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흡사 식민주의적 통치에 가까울 정도였다. 마치 홍콩 반환 이후 중국 중앙정부가 그러했듯, 본토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 민중의 다양한 견해와 요구를 강압적으로 억누를 뿐이었다.

천이(陳儀) 행정장관 휘하의 국민당원 통치엘리트들과 외성인(1945년부터 중국대륙 등지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한족 인구. 최근 조사에 따라 10~12%로 추정), 관료들의 부정부패, 본성인(주로 청나라 시기에 대만으로 이주하였으며 대만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 인구)에 대한 차별 등이 극심했다. 이는 오랫동안 대만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배제와 소외를 낳았다.

경제적으로도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실업률 확대라는 삼중고로 민생은 점차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전후 대만 한족 시민 사이에서 본성인과 외성인 간 뚜렷한 분열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중화민국 행정원의 『’2.28사건’ 연구보고』(二二八事件研究報告)에 따르면, “처음에 대만인들은 조국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곧 실망에서 경멸로 바뀌었다.”

1947년 2월 28일 학살 직후 티엔마찻집 앞에 모인 시민들
1947년 2월 28일 학살 직후 티엔마찻집 앞에 모인 시민들

1947년 2월 27일, 국민당 정부의 단속반은 타이베이 시내 톈마(天馬) 찻집 근처에서 40세 가량의 여성이 불법 사제담배를 팔고 있는 것을 단속하였고 이 여성을 체포했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는데, 전매국(專賣局) 소속 조사관들의 폭력에 이 여성이 다쳤고, 항의하던 한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튿날인 28일 시민들은 철시·파업·동맹휴업을 통해 이른바 삼파(‘三罷’)투쟁에 돌입한 후 대만 총통부까지 행진해 청원서를 제출하려 하였다. 한데 이에 경찰들이 행진 대오에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날부터 5월 16일까지 대만 각지에서는 저항하는 민중과 진압하는 경찰 간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주요 도시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시민들은 무력항쟁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들은 여러 지역에서 총기를 탈취하고, 정부기관을 통제하기 위해 민병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항쟁을 통해 본성인의 권익이 보장되는 정치개혁을 요구했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군대 동원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3월 8일, 국민당 정부는 항쟁을 무력 진압하기 위해 대륙에서 2개 사단을 보내기에 이른다.

1992년 민주화 과정에서 대만 행정원이 발표한 『’2.28사건’ 연구보고』에 따르면 78일 간의 항쟁 과정에서 약 1만8천 명에서 2만8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당 수치가 과소 추계되었을 가능성도 학계에서 제시된다.

대만 시민사회는 이 학살의 책임자가 장중석(蔣中正; 한국에서는 자를 쓴 장제스라는 호칭이 훨씬 많이 알려져 있다) 전 총통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1948년 5월 국민당 정부는 “폭동기간 임시조례”를 제정해 총통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했고,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사회단체 결성을 금지했으며, 선거 역시 무기한 연기됐다. 그 결과 선출직의 국민당 의원들은 종신 임기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국가기구는 시민사회에 대한 사찰과 통제를 강화했다.

1949년 5월 20일 당시 중화민국 대만성 경비총사령부는 본격적인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대만 전역의 계엄령은 1987년 7월까지 4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수십년 동안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고 출판과 여행은 심하게 규제되었으며 정치범과 사상범에 대한 강도 높은 처벌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만의 “국부”라는 별명으로 종종 지칭되는 통치자의 진면목은 이러했다. 정부수립 이후 반세기 가까이 독재와 학살로 점철된 한국과 대만의 역사가 ‘민주주의’의 역사로 불리는 게 어불성설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테러 검열(恐怖的檢查)」, ��목판화, 황롱짠(黃榮燦), 1947년
「테러 검열(恐怖的檢查)」, 목판화, 황롱짠(黃榮燦), 1947년

미완의 ‘민주화’와 ‘전형정의’

오랜 세월 대만에서 ‘2.28사건’은 망각을 강요받는 역사였다. 장기독재가 이뤄진 1960~70년대에 이따금 저항들이 분출했지만, 폭발적 대중운동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그러나 일련의 저항이 누적되고, 대외적으로도 대만이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밀려 축출당하면서, 국민당 일당독재에 대한 정당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국내적인 저항의 흐름이 점차 강화되자 국민당 지배엘리트로서도 더 이상 강압적인 독재만으로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정부는 1971년 11월 지방선거를 실시했고, 이 선거과정에서 국민당의 선거부정이 드러나며 항쟁은 더 대중적으로 점화됐다.

1975년 철권통치의 상징 장제스 총통이 사망하자 계엄령 해제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중의 요구는 더 커졌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체제에서 점차 재야 정치세력들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1970년대 후반 민주화로 이행하는 주요한 계기들을 만들어냈다. 우선 민주파 정치인들이 전도연합(全島聯合)이라는 정치세력을 구성해 사회적 세력을 결집해나갔고, 1979년에는 『미려도(메이리다오)』(美麗島; 아름다운섬)라는 시사잡지를 중심으로 권위주의 반대 민주항쟁이 촉발됐다. 1979년 12월 10일 당국의 집회 금지 통보에도 불구하고 가오슝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미려도』 관계자들은 대거 체포되어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됐지만, 이러한 탄압은 결과적으로 이후 더 큰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메이리다오 사건’의 참가자들은 오늘날 대만 집권당인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1986년 창당)의 주축이 됐으며, 대만의 시민사회는 1992년 개헌을 거쳐 2000년 3월 마침내 정권 교체를 이뤄 55년에 걸친 국민당 독재를 끝내게 된다.

1979년 메이리다오가 주최한 가두 행진
1979년 메이리다오가 주최한 가두 행진

‘2.28사건’이 다시 주류 정치와 언론 영역에서 회자된 것은 이 즈음부터다. 항쟁과 학살 50년 후인 1997년 타이베이2.28기념관(臺北二二八紀念館)을 세워졌고, 풍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이 공간은 오늘날 대만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2.28’을 기억하기 위해 전반적인 사업을 관장하는 2.28사건기념기금회(二二八事件紀念基金會)는 제주 4.3 항쟁이나 광주 5.18 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과정을 경험한 한국 민주화운동을 중요한 참조점으로 보았다. 기금회는 빈번하게 광주나 서울, 제주 등을 방문하고 교류사업을 이어오기도 했다. 가령 2019년 6월에는 제주4.3유족회 서귀포시지부를 초대해 2.28국가기념관을 안내하고 교류 행사를 치렀으며, 2018년에도 한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사들을 초대해 교류하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민주화 이행의 내러티브는 여기에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주류 사회에서 통용되는 ‘민주화’라는 비전은 과연 역사의 종착지일까? 우선 그 과정이 과연 모두를 위한 ‘민주화’였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한국 사회 역시 공식적 역사 서술에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물결 속에서 양극화는 권위주의 시기보다 더 심해졌지 않은가. 6월 민주항쟁에 뒤이은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과 중공업 사업장 노동자들의 대중적 투쟁을 기점으로 강화된 노동권은 97년 IMF 외환위기 이래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다. 오늘날 원하지 않음에도 야근과 특근을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들, 반실업과 불안정 고용을 전전해야 하는 시민들, 주거빈곤에 시달리는 도시민들에게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아가 과연 정부수립 이후로 지속된 국가폭력에 책임을 져야 할 학살자와 가해자들은 마땅히 평가받고 처벌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흔쾌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만 역시 마찬가지다. 대만에서 ‘전형정의(轉型正義)’라는 개념이 대두된 것도 이 때문이다. 대만 시민단체 ‘대만민간진상화해및촉진회(臺灣民間真相和解與促進會)’에 따르면 ‘전형정의’는 대만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이로 인한 사회분열에 대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후속 사업이다. 즉 피해자에 대한 보상, 가해자에 대한 법적·윤리적 처벌과 평가, 정치적 박해의 진실을 규명하고 은폐된 정보를 드러내는 과정 전반을 가리킨다.

일련의 ‘전형정의’ 과정에서 대만 사회는 2017년 ‘2.28사건’ 관련 4617건(137만 페이지)의 기밀문건을 조사하고 이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장제스가 묻힌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내의 '중정홀'과 '제스홀' 이름을 변경하고, 장제스 관련 기념품과 피규어의 판매 및 ‘장제스기념가’ 제창을 중단하기 위해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친장제스 입장의 시민들(좌)과 국민당의 학살 책임을 묻는 시민들(우)
친장제스 입장의 시민들(좌)과 국민당의 학살 책임을 묻는 시민들(우)

민주진보당의 '노동개악'에 맞선 독재자의 증손자?

그러나 우리는 독재 청산과 ‘더 많은 민주주의’의 길이 단순한 정책이나 조치들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 또한 알고 있다. 사회운동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한 방향성을 상실하는 그 순간, 현실 정치에서의 왜곡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발생한다. 장완안(蔣萬安)은 대만 정치의 이러한 모순을 드러내는 상징적 인물이다. 1978년생으로 국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오늘날 대만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미국 유학 후 변호사가 된 그는 2014년 귀국 후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인 2015년 입법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빠르게 등장했다. 애초부터 ‘장개석의 증손자’라는 타이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쾌속 데뷔였다. 선거운동 당시 뇌물수수 혐의 등이 제기됐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당시(2016년경)에는 마침 민진당 소속 차이잉원이 대만의 첫 여성 총통이 되어 시민사회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실제로 차이잉원 정부는 성소수자 동성결혼을 법제화하고, 탈원전 정책을 펴는 등 진보적인 행보를 보였다. 한데 차이잉원 정부는 임기 초반부터 노동 정책에 관련해서는 오락가락하는 모습만을 보였다. 2016년 12월 개정한 노동기준법(’일례일휴 정책’으로 불린다)은 주5일 근무 확립, 휴일근무에 대한 수당 인상, 교대제 노동자의 11시간 휴식 보장 등을 명문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7일마다 하루의 의무휴일을 주고 2주 동안 84시간 근무하는 대신, 의무휴일과 ‘휴식일’을 하루씩 부여하여 휴식일에는 고용주와 노동자가 협의해 연장근무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개정안이 논란이 된 이유는 애초에 수정안이 의무휴일(例假)을 ‘7일 중 하루’로 설정했다는 점 때문이다. 노동계는 일주일에 의무휴일이 하루만 보장된 점에 크게 반발했고, 자본가들 역시 ‘특별휴가’ 관련 개정 내용에 반발했다. 여기서 특별휴가란, 한국의 ‘연차’ 개념과 유사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주어진 휴가를 사용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많은 불만이 야기되었다. 휴가를 제대로 쓰기 어려운 일터의 권력관계 속에서 대만 또한 한국처럼 지옥같은 장시간 노동을 자랑하는 국가가 되어온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8년 통계에 따르면 대만 노동자들은 연 2,033시간 일하는데, 이는 OECD에서 네 번째로 긴 노동시간이다.

차이잉원 정부의 개정안은 연말이나 고용계약 종료 시점에 미처 사용하지 못한 특별휴가가 남아있을 경우 고용주가 수당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한데 이 결과 2017년 내내 교통, 소매업, 의료업 영역에서 물가 인상이 초래됐고, 병원에서 토요일 외래환자 진료가 사라지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자본가 단체들은 이런 일시적인 현상을 활용해 개정 노동법이 “원가 상승과 교대근무의 어려움”을 초래한다고 비판하며 끊임없이 재개정을 요구했다. 반면 노동조합과 사회운동 진영은 이 법이 현실에서 시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2017년 여름 대학노조 청년행동위원회(高教工會青年行動委員會) 등 청년단체들이 실시한 ‘일례일휴 청년노동조사(一例一休青年勞動調查)’에 따르면, 청년 노동자의 33%가 평일 초과근무수당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7%만이 주휴수당 규정에 따라 수당을 받는다고 답했다. 특별휴가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노동자는 3분의1도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개악 반대 집회 중인 청년들
노동개악 반대 집회 중인 청년들

결국 차이잉원 정부는 자본 측의 압력에 밀려 다시 노동법 개정을 시도한다. 2017년 10월 30일, 차이잉원 정부의 행정원장 라이칭더(賴清德)는 정기 공휴일에도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시행하는 개악안을 제안했다. 특별휴가의 유연성을 높이고(7일마다 하루의 특별휴가를 주어야 한다는 항목을 완화) 노동시간 상한선을 연장하며 교대근무 간격을 조정(8~11시간)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 개정안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분명했다. 실제 노동-자본 관계의 권력 역학에서 노동자들은 관리자나 사장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12일 내내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됐다. 개정안은 대신 특별휴가를 몰아서 쓸 수 있도록 했지만, 일련의 조치들은 사용자가 연장 근로시간을 매우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걸 가능케 했다.

노동조합들은 이것이 보다 극심한 과로사의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시간 유연화’를 대만 민주파인 차이잉원 정부가 앞장서서 집행한 셈이다. 대만대학의 탁수계사(濁水溪社)를 비롯한 여러 청년단체들도 총통부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여는 등 크게 반발했다.

이에 대해 민진당 소속 9선 의원인 커젠밍(柯建銘)은 “대만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발전 모델이 아니”라며 반박했다. “대만의 경제시스템은 국민당에 의해 당-국가 자본주의로 발전했으며, 당-국가 주도하에 가부장제적 성격의 발전을 이뤄왔고, 1986년 노동기준법 제정 후 대만 화폐가 절상되면서 기업들이 대거 (대륙으로) 빠져나갔고, 이 시기에 중소기업들은 서서히 사라졌어야 했지만 대만은 그렇지 않았으며, 중소기업들이 여전히 산업의 주축이자 대만경제 경쟁력의 기초”라는 셈이다. 즉 중소기업들이 여전히 대만경제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만큼, 이런 기업들의 이윤 추구에 제동을 걸 노동권 강화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핑계는 “우리 회사는 직원이나 사장이나 다 가족 아니냐”라는 식의 노무관리법과 조응한다.

실제 기업수만으로 볼 때 중소기업은 대만 전체 기업의 약 98%를 차지한다. 중소기업 고용은 전체 고용의 78% 정도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는 대만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 대부분에서 중소기업이 자치하는 비중은 전체 기업의 95% 이상이며, 많은 국가들에서 99% 이상을 차지하기도 하기에, 대만 모델만의 특수성이라 말하기 어렵다. 대만에서 상위 100대 대기업의 연간 영업이익이 전체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10년간 23%에서 27%로 증가했는데, 이런 추세는 점차 강화되고 있다. 이제는 대만식의 중소기업 신화가 현재 경제를 설명해주지 못하는 셈이다. 결국 대만 경제체제의 문제는 노동권이 신장되어 중소기업의 원가 부담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대만 자본주의의 독과점 강화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2017년 11월, 민진당 정부의 노동개악 시도에 대해 반대 토론 중인 장완안
2017년 11월, 민진당 정부의 노동개악 시도에 대해 반대 토론 중인 장완안

일련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차이잉원 정부는 노동기준법 개악을 밀어붙였다. 해당 개정안은 “노동개악”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노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운동 진영은 이날 입법회의가 열리지 못하도록 입법회장 진입 시도를 하는 와중에 경찰과 크게 충돌했다. 한데 당일 저녁 장제스의 증손자 장완안 의원이 입법회장에서 노동기준법 개정 반대 입장의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전반적인 사회정책에 대한 입장에서 민진당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보여온 국민당 소속 의원이 노동기준법상 노동권을 후퇴시키는 개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강력하게 개진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 당시 민진당 측은 장완안의 필리버스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표결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의 시위를 하러 온 노동운동가들은 장완안에게 “힘내라!”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만의 민주·진보 진영에서 일대 논란이 일었다.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 대변인 먀오보야(苗博雅) 등의 인사들은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개방된 입법회에서 학살자의 후손이 ‘춤을 추는’ 모습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노동기준법 개악 반대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장완안에게 ‘응원’의 구호까지 외친 사회운동가들을 비난했다.

물론 당시 노동운동가들의 울부짖음은 장완안에 대한 응원이 아니다. 그것은 민진당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에 대한 분노이자, 노동개악을 막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대만국제노동자협회(台灣國際勞工協會)의 천수이롄(陳秀蓮) 활동가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반박했다. “장완안이 노동기준법 악법 개정을 막는 목소리를 외치는 무대를 마련한 것은 정확히 누구입니까? 운동조직들이 아닙니다. 민진당이었습니다.”

대만국제노동자협회의 천수이롄 활동가
대만국제노동자협회의 천수이롄 활동가

2023년 2월 28일의 절규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장완안은 점차 시민들의 인기를 획득해 나갔다. 민진당의 참패로 귀결된 지난해 11월 지방선거에서 장완안은 민진당의 천스중과 무소속 황산산을 물리치고 42.29%를 득표해 대만 수도 타이베이시의 시장으로 당선됐고, 이를 통해 국민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등극했다. 얼마 전까지 대만에서 반중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고 보도하던 외신들은 국민당 후보가 타이베이시장에 당선됐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이는 민진당의 참패일 수는 있지만 국민당의 대승이라고 평가하긴 어렵다. 전체 유권자 대비 2020년 총통선거와 이번 지방선거를 비교했을 때, 민진당의 타이베이시 득표율은 현저하게 감소(42%→25%)했지만, 국민당의 득표는 미미하게 증가(27%→30%)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주요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2020년 총통선거에서 국민당 후보 한궈위가 득표한 수치와 비교했을 때에도 장완안 시장은 눈에 띄는 선전을 하지 못했다.

다시 2023년 2월 28일로 돌아오자. 자신들을 “무력자(无力者)”라고 칭하는 일군의 대학생들은 2021년 5월 사회운동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다양한 행동들을 펼쳐왔다. 중산대학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류핀위(劉品玉)는 장완안 타이베이 시장이 사과와 반성의 책임 대신, “위선적으로 희생자를 위한 추모식을 개최하고 있다”고 보고 동료들과 함께 기습시위를 계획했다.

특히 시위자들 중 몇몇은 ‘2.28사건’ 당시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유족들이었다. 놀랍게도 당일 2.28평화공원 주변은 집회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2.28사건’ 희생자들의 유족이나 시민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밝히거나 구호를 외칠 기회는 애초부터 봉쇄되었던 것이다. 유족들과 시민들로서는 ‘계엄령의 일시적 재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 추념식 당시 행사장 인근에는 사복 경찰들이 포진해 기습시위에 대비하고 있었다.

2.28기념식 기습시위에 나선 대학생들
2.28기념식 기습시위에 나선 대학생들

장완안 시장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할 때, 일군의 대학생들이 나타나 구호를 외쳤다. 청년들은 “살인자는 무릎 꿇고 사죄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단쪽으로 달려나갔다. 그 즉시 경찰들이 나타나 이들을 진압했고 청년들은 이내 경찰서로 연행됐다.

기습시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족회(二二八關懷總會)는 일찍이 장완안 시장의 취임 전날 성명을 통해 “장완안의 2월 28일 행사 참석을 거부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대만민족주의 단체들의 연대체인 대만국가연맹(臺灣國家聯盟)도 “올해는 타이베이시와 2.28기념활동을 공동 주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또 이날 오전 정난롱기금회(鄭南榕基金會)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228.0 기념행동'을 통해 "2월 28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추념식이 벌어지던 평화공원 안에서도 타이베이의회 소속 의원들이 “독재자 숭배를 중단하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침묵 시위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전형정의’가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민진당 정권이 집권 직후부터 노동시간 유연화를 밀어붙이면서 보인 퇴행적 모습은 노동계와 청년층의 실망을 불러왔고, 궁극적으로 이는 지난해 지방선거의 참패를 야기했다. 2017년에 노동운동가들이 외쳤듯, 장완안을 무대 위로 부른 것은 노동운동진영이 아니라, 민진당 자신이었다.

대만 정치의 아이러니한 상황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노동개악과 외교 참사 등을 자행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을 정치의 무대 위로 불러온 것은 누구였는가? 집권 이후 자신들의 공약을 대부분 파기하고, 오히려 노동운동에게 실정의 책임을 돌리던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아니었던가? 학살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억압을 현실에서 재현하고 있는 정치세력의 재림은, 민주당 정부가 촛불항쟁 시기의 온갖 사탕발린 약속을 기각해버리고 무리한 인사 임명을 밀어붙이며 국민의힘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결과가 아닐까? 과거 민주화운동의 성취를 독점하며 오늘날의 과제를 끊임없이 뒤로 미루는 내로남불 정치세력에게 지금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을까? 대만 민진당과 한국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과 장완안 시장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기시감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박제화된 ‘민주화’의 내러티브를 넘어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하도록 요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2023년 2월 28일에 울려퍼진 대만의 외침은 우리가 올해 제주 4.3, 그리고 광주 5.18을 어떠한 자세로 맞이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촉구하고 있다.

대만 민진당과 한국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과 장완안 시장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기시감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박제화된 ‘민주화’의 내러티브를 넘어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하도록 요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2023년 2월 28일에 울려퍼진 대만의 외침은 우리가 올해 제주 4.3, 그리고 광주 5.18을 어떠한 자세로 맞이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촉구하고 있다.

노동개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
노동개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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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 「勞動基準法」,全國法規資料庫,民國 109年 06月 10日
  • 張智琦, 「三成打工族領不到加班費 青年團體反對一例一休再修惡」, 苦勞網, 2017. 09. 22.
  • 端小二, 「臺灣擬修改“一例一休”,打工仔可以連續工作12天,你撐得住嗎?」, 端傳媒, 2017. 10. 30.
  • 何欣潔, 「從“蔣萬安爭議”迴歸勞基法爭議:行動者還能做什麼?」, 端傳媒, 2017.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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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林柏儀, 「被吹起的臺灣勞工怒火,迎向何方?」, 端傳媒, 2017. 11. 25.
  • 「看不見的移工—訪台灣國際勞工協會研究員陳秀蓮」, 台灣廢除死刑推動聯盟
  • 「韓國民主化運動紀念事業會南奎先常任理事等人到館參訪交流」, 二二八事件紀念基金會, 2018-11-28
  • 黄奕潆, 「蔣萬安的第一個二二八(上):和解、衝場、拒同臺,這天如何被紀念?」, 端传媒, 2023. 3. 9.
  • 黄奕潆, 「蔣萬安的第一個二二八(下):“蔣市長”道歉後,蔣家如何與臺灣和解共生?」, 端传媒, 2023. 3. 14.
  • Keoni Everington, 「Taiwan has 4th longest working hours in world」, Taiwan News, 2019. 9. 27.

글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