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사건 이후 76년, 대권주자로 등극한 학살자의 증손자
2023년 4월 5일
이 글은 지난 4월 1일자 한겨레 토요판 칼럼을 기초로, 보다 자세하고 풍부하게 서술한 것이다.
지난 2월 28일, 타이베이시 한복판에서 거행된 2.28기념식에서 기습시위가 있었다. 2.28기념식은 1947년 2월 28일 일어난 민중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민당 정부가 자행한 민간 인 학살을 기억하고 희생된 피해자들을 추도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매년 진행되는 추도 행사다.
2.28 항쟁과 국가폭력에 대해 오늘날의 대만 사회는 어떤 분열을 겪고 있을까? 이번 기습시위가 갖는 역사성을 이해하려면 종전 직후로까지 78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7년 2월 28일 민중봉기와 학살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대만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선언 이후 대만은 국민당이 통치하는 중화민국의 영토로 귀속된다. 그러나 대만의 복귀 즈음 난징(南京)에 수도를 두었던 국민당 정부의 대만 통치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흡사 식민주의적 통치에 가까울 정도였다. 마치 홍콩 반환 이후 중국 중앙정부가 그러했듯, 본토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 민중의 다양한 견해와 요구를 강압적으로 억누를 뿐이었다.
천이(陳儀) 행정장관 휘하의 국민당원 통치엘리트들과 외성인(1945년부터 중국대륙 등지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한족 인구. 최근 조사에 따라 10~12%로 추정), 관료들의 부정부패, 본성인(주로 청나라 시기에 대만으로 이주하였으며 대만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 인구)에 대한 차별 등이 극심했다. 이는 오랫동안 대만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배제와 소외를 낳았다.
경제적으로도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실업률 확대라는 삼중고로 민생은 점차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전후 대만 한족 시민 사이에서 본성인과 외성인 간 뚜렷한 분열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중화민국 행정원의 『’2.28사건’ 연구보고』(二二八事 件研究報告)에 따르면, “처음에 대만인들은 조국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곧 실망에서 경멸로 바뀌었다.”
1947년 2월 27일, 국민당 정부의 단속반은 타이베이 시내 톈마(天馬) 찻집 근처에서 40세 가량의 여성이 불법 사제담배를 팔고 있는 것을 단속하였고 이 여성을 체포했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는데, 전매국(專賣局) 소속 조사관들의 폭력에 이 여성이 다쳤고, 항의하던 한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튿날인 28일 시민들은 철시·파업·동맹휴업을 통해 이른바 삼파(‘三罷’)투쟁에 돌입한 후 대만 총통부까지 행진해 청원서를 제출하려 하였다. 한데 이에 경찰들이 행진 대오에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날부터 5월 16일까지 대만 각지에서는 저항하는 민중과 진압하는 경찰 간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주요 도시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시민들은 무력항쟁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들은 여러 지역에서 총기를 탈취하고, 정부기관을 통제하기 위해 민병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항쟁을 통해 본성인의 권익이 보장되는 정치개혁을 요구했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군대 동원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3월 8일, 국민당 정부는 항쟁을 무력 진압하기 위해 대륙에서 2개 사단을 보내기 에 이른다.
1992년 민주화 과정에서 대만 행정원이 발표한 『’2.28사건’ 연구보고』에 따르면 78일 간의 항쟁 과정에서 약 1만8천 명에서 2만8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당 수치가 과소 추계되었을 가능성도 학계에서 제시된다.
대만 시민사회는 이 학살의 책임자가 장중석(蔣中正; 한국에서는 자를 쓴 장제스라는 호칭이 훨씬 많이 알려져 있다) 전 총통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1948년 5월 국민당 정부는 “폭동기간 임시조례”를 제정해 총통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했고,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사회단체 결성을 금지했으며, 선거 역시 무기한 연기됐다. 그 결과 선출직의 국민당 의원들은 종신 임기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국가기구는 시민사회에 대한 사찰과 통제를 강화했다.
1949년 5월 20일 당시 중화민국 대만성 경비총사령부는 본격적인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대만 전역의 계엄령은 1987년 7월까지 4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수십년 동안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고 출판과 여행은 심하게 규제되었으며 정치범과 사상범에 대한 강도 높은 처벌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만의 “국부”라는 별명으로 종종 지칭되는 통치자의 진면목은 이러했다. 정부수립 이후 반세기 가까이 독재와 학살로 점철된 한국과 대만의 역사가 ‘민주주의’의 역사로 불리는 게 어불성설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