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이론 산책하기』 서평 | 우리는 다르지만 같은 존재
2023년 4월 27일
이 글은 지난 3~4월 플랫폼C 페미니즘 공부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한 책 『퀴어이론 산책하기』에 대한 서평이다.
지난 두 달간 <플랫폼C 페미니즘 공부모임>에서 『퀴어이론 산책하기』 책을 함께 읽고 토론했다. 책을 읽기 전에 는 ‘퀴어’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컸다. 나를 ‘퀴어’의 외부에 위치시키고, 제 3자적 시각으로 ‘퀴어’이론을 한번 살펴보자는 ‘객관적’인 태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확인한 것은 나를 타자와 구분하기보다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와 타자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범주로 인간을 함부로 선 긋거나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책의 메시지는 묵직했다. 이분법 구도를 벗어나자는 것은 말은 쉬울 수 있지만, 그것을 삶에서 구현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나와 남을 구분 짓는 데 익숙해 있고, 이 사회는 그 구분이 개성 있는 '나'를 만든다며 끊임없이 '남과는 다른 개인'이 되기를 강요한다.
정체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가 본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옳지만, '정체성'을 강조하고, '당사자주의'를 말하는 것이 그 이분법적 구도를 강화하는 방식이 되지는 않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그 정체성과 당사자성이 나를 나와는 다른 존재들과 선을 긋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의 당사자를 위해서도,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위해서도 생각해 볼 지점이다. 여러 사회 운동 속에서, 내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는지 - 차별받는 장애인, 퀴어, 트랜스젠더, 여성, 노동자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는지, 나를 그의 삶 속에, 그 깊은 고민 속으로 끌고 들어가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성찰하게 되었다.
우리가 무심코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관'이나 '관념'은, 보통 특정한 이유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동성애혐오도 근대 이후 국가의 엄중한 탄압 아래 만들어진 것으로 '보통 사람'과 구분되는 남성 동성애자라는 인구집단을 대중의 심상에 각인시켰다. '장애인'이란 용어를 만들어 비장애인과 분리시킨 것도 근대 자본주의 역사가 발전한 시기와 겹친다. 여성억압은 인간역사에서 여러 형태로 존재해 왔으나, 무엇보다 잉여생산물이 생긴 후 장자 상속이라는 재산권보호가 중요해 지면서 가부장제와 맞물려 더 체계화되었다.
동성애자는 이런 억압적이고 불리한 조건에서 국가 혹은 이성애 규범에 의해 벽장으로 처박아지고, 이용할 필요가 있을 때 다시 꺼내어 조리돌림 당한다. 벽장과 커밍아웃 흔히들 벽장과 커밍아웃을 대립적 구도로 이해하지만, 둘은 깔끔하게 분리되지도 않고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항상 옳은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개개인이 자기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큰 맘 먹고 커밍아웃을 한 이반들에게도 매일매순간 모든 곳에 벽장이 새로이 만들어진다. 이 책은 “벽장과 커밍아웃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당사자의 결심만으로 완벽한 비밀을 유지하거나 고백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하며, 개인의 결심 문제로 치부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공적 공간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사적정보를 말하는 것이 곧 죄가 되었다가, 이내 '사적정보'로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 퇴출된 미국 초등학교 교사 아칸포라의 해고 소송은 그 단적인 예이다. 누군가(백인중상층 남성 이성애자)는 공적인 존재로 사회에서 표상이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동성애자, 장애인, 트랜스젠더 등)공적인 장에 진입해도 끊임없이 사적영역으로 밀 려나고, 급기야는 없어도 되는 존재로 격하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구분 짓고 공적인 장에 진입하기 위해 애쓸 것인가, 아니면 그 경계와 잣대를 허물고 서로를 좀 더 이해하려 애쓸 것인가.
인식론적 겸손
1533년 영국은 항문성교금지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식민지에 수출해 자메이카 등 제3세계 동성애혐오의 뿌리가 되었다. 영국은 이 법의 폐지 이후 뻔뻔하게도 자메이카의 호모포비아를 비난하며 우월감을 드러냈고, 서구는 진보적이며 제3세계 국가들은 미개하다는 또 다른 이분법의 구도를 만들어낸다. 피식민지 지배자들 역시 국내의 빈곤, 부패, 불평등을 분산시키고 국민지배를 강화하는 도구로 동성애 혐오를 활용하는 '호모 내셔널리즘'을 지속적으로 이용한다. 동성애규범성은 이런 식으로 불평등과 인종차별, 전쟁, 폭력의 심화에 기여한다.
'내가 남의사정 따위를 왜 알아야 돼?'라며 무지를 정당화하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다 알지 못하니 겸손하게 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자. 잘 모르지만 무지를 핑계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부당함에 맞서 싸우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인식론적 겸손'은 이런 폭력적인 이분법적 사회에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이다.
흔히 퀴어들은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기 때문에 슬픔, 우울, 죄책감,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에 사 로잡힐 수 있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책의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싸움을 시작해 나가기도 한다. '퀴어 느낌'이라는 본질적 ‘정동’이라는 것은 없고, 어떤 감정도 누군가의 본질이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퀴어하다’는 감정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될 수 없다.
아이의 편에 서지 않는 퀴어들
'아이의 편에 서지 않는 퀴어들' 장 은 아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미래를 위해 보호받아야 마땅하며, 현재의 우리가 희생해야 할 존재로써 그려지는 추상적 '아이'에 대한 논쟁적 시각이다. 이런 귀한 ‘아이’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존재인 어른,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지워지는 퀴어. 이런 생각들은 경제적 영역뿐 아니라 우리 일상의 도덕규범 속에도 깊게 파고들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회로부터 온갖 규제를 받는 보호대상이었던 미성년자에서 갑자기 삶을 오로지 자신이 모두 떠맡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암묵적 합의를 받아들여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저절로 모든 것을 다 알게 되고, 다 아는 척 해야 하는 압박을 만들기도 한다. 어른-아이의 위계적인 관계, '다 아는 척 하는' 어른이라는 규범적인 의무감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더 자유롭게 배우는 것의중요성을 깊게 깨달았다. 내 생각이 깨지는 것이 나라는 사람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는데 참 오래 걸렸다.
나에게 세상을 바꾸는 사회운동이란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객관적 시각, 이론,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원론적인 이데올로기를 외치는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국 '살아있는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사람을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론은 결국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작업이어야 하지 않을까.
『퀴어 이론 산책하기』 세미나 후에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은 “우리가 다르지만 같은 존재이고, 유기적인 존재로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우리를 억압하는 체제에 맞서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바꿔야 할 세상은 특정 몇몇의 힘으로 바꿀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는 계속되는 부딪힘 속에서 서로의 차이와 공통점을 확인하며 서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글 : 김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