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탕핑주의자 선언 躺平主义者宣言」 번역
2023년 2월 2일
서문: 거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일부 청년들은 일찍이 누워(躺平)있었다. 그들은 험난한 삶에 쓰러졌다기보다는 그저 목숨이란 것의 본능적인 형식을 존중했을 뿐이다. 휴식하거나 잠에 들 때, 아프거나 병에 들었을 때 우리는 죽음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거나 멈추지 않고, 시간 질서 자체에 대한 거 부에 몰두한다.
생명을 연료로 바꾸려는 위대한 시대의 부름들은 일찍이 극도로 흥분하며 앞으로 가라고 그들을 재촉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한 마리의 파리처럼 밉살스럽게 귓가에 맴돌고 있다. 이는 일종의 마법이 효력을 상실하는 순간이자, 또 다른 마법이 부활하는 순간이다.
사실 만약 탕핑주의자들의 각성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아직 ‘정의’란 것이 남아 있다는 걸 잊었을 것이다. 마치 사축(社畜)이 먹고 살기 위해 착취자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호소하려는 듯, 같은 길을 따르는 탕핑주의자들은 지난 시간에 대한 한계치 없이 가불한 착취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그 배상 요구들 중 어떤 결말은 실행자가 개인의 요구를 압축하도록 요구하여, 최소한의 소비와 최소한의 노동으로 생존을 이어가도록 힘쓰고 있다. 그보다 더 높은 요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사회 전체가 시간과 공간의 분해와 재설정을 요구하는 것에 있다. 이때 눕는다는 것(躺平)은 대다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실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앞서 드러난 것은 전자의 탕핑(躺平)이었다.
특권을 지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결여하고 있는 신구 귀족들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노동력을 거꾸로 떨어뜨리고, 백신이 무효하다는 해로운 생각을 지닌 이러한 전염병과 같은 흐름에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철학(그것은 매우 빠르게 철학으로 성장했다)이 인민들이 맞닥뜨린 현실 문제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거울상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예전처럼 적대세력이 조장하는 망령이라고 공언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떠드는 것도 실은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우리 인민들은 언제나 가장 모범적인 생산도구였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매우 드물고 유별난 사회 공장은 기계들이 매끄럽게 작동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마치 기계 자체가 일종의 허공인 것처럼 마찰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인민 스스로가 허공을 방불케 했고, 이 나라는 기적처럼 허공 속에서 구할 수 있는 일종의 실재하는 형식이었다.
탕핑주의자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들은 누워 있는 사람들이 고개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진부하고 창백한 것이었다. 탕핑주의자들이 게으른데다 천성적으로 불량하고 아무런 포부가 없는 거렁뱅이 같은 오합지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한번쯤은 반박을 들어야 한다. 눕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손쉬운 행동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로, 탕핑주의자들은 오히려 누워버리는 그 순간부터 이미 국가의 외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또 다른 종족집단을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몸을 뉘인 그 땅조차 이전의 국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편제 바깥의 땅이 되어버렸다. 만약 이러한 상태에서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길 원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주권이나 재산권과는 무관해야 하지 않을까? 신체는 소유나 분배로부터 끊겨져(脱钩) 있고, 토지는 경영이나 통치와 아무런 연원이 없다. 일종의 급진적인 탕핑주의는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를 지향한다. 탕핑주의자들은 체제에 대한 수렴을 매정하게 조롱하고 있으며, 어떠한 우대나 위문, 폄하 모두에 대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세계를 90도만 돌려서 보면, 사람들은 평소에는 말할 수 없는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눕는 것이 서는 것이고 서있는 것은 기어가는 것이란 점이다. 이 같은 객관적인 시각은 탕핑주의자와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기 전에는 탕핑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자세를 바꿀 이유가 없다.
탕핑주의자의 ‘동반자’
하지만 이를 두고 통일적인 탕핑주의가 존재한다고 봐선 안 된다. 탕핑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이 처음 출현했을 때, 그는 이것이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탕핑주의에 대한 옹호가 이처럼 열렬하다보니 위협을 느낀 사람들마저 스스로 이러한 이론의 지지자인 척 행세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사람들 중에서 진정한 동지가 있을까? 가장 먼저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은 바로 담론의 도움으로 더 열심히 전심전력으로 기어다녔을 뿐이다. 탕핑주의자의 ‘동반자’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의 얼굴에 배설물을 돌려주는 것말고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까?
먼저 얼굴을 노출 시킨 것은 당당한 탕잉(躺赢; 탕핑에서 파생된 유행어로, ‘눕는게 이득’이란 뜻)주의자였다. 오래된 저택을 드나들고 화려한 수레와 훌륭한 말(香车宝马)에 오르내리는 ‘고귀하게 누워있는’ 일족인 그들은 탕핑주의가 자신들이 따르는 그러한 질서의 우월성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질서 속에서 그들보다 더 앞서 누웠던 이들이 또 있었던가? 다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매우 큰 발언권을 점유할 수 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을 등사지로 삼은 그들은 탕핑이 일종의 풍부한 물질적 기초 위에 세워진 향락주의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풍유로운 국가일수록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한량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나라에서 탕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탕잉’의 일종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서 이해하는 게 보다 정확할 것이다. 만약 지금껏 탕잉(Lie to Win)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탕핑(Lie to Equality)’를 추구했겠는가?
일류 탕잉주의자들은 더욱 미혹적이다. 그들은 “탕핑 자유”라는 말을 빌려와 이 유행어를 재테크 상품을 판매하는 광고의 카피로 무난하게 포장했다. 모두가 과로하는 시대에 불로소득(“누워서 돈벌기”)을 찾는 것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게 뭐가 있을까. 그렇기에 탕핑주의자들은 두말할 것 없이 그들은 기대에 어긋났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탕핑주의자들은 너무 많은 자산을 위해 고민하기 보다는 어떻게 현실의 가치를 보전할 것인지 고려하면서, 언제나 자기 명의의 빚을 어떻게 탕감할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다. 과거에 탕핑주의자들이 오로지 주류 질서가 그들에게 부여한 채무를 다 갚아내기만 할 때에는, 그들은 항상 채무란 저 앞 어딘가에서 기다리는 무엇이라고 느꼈다. 마치 빚을 갚기 위해 사는 것 같다고 느꼈고, 마치 산다는 것이 바로 마이너스 자산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에게 빚을 졌는가? 그들이 철저한 탕핑의 자세로 이러한 구조적인 착취에 저항할 때, 비로소 출구를 찾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탕핑주의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자유일 것이다.
바짝 뒤따른 것은 일군의 온건파 탕핑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마치 어떤 기회를 놓칠세라 두려워 하면서, 당당한 사람들의 발뒤꿈치를 밟고 달려왔다. 그들은 “이제 와서 누가 이 세상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뻔뻔스럽고 범상치 않은 인물인 그들이 국면을 좌지우지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탕핑주의는 한마디로 탕핑이 아니라, 일탈하지 않고 일분일초라도 개인의 능력 범위를 초과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사회에서 처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본분을 지키자고 한다. 살아 있다면야 물러설 수 없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전원생활(田園生活)로의 퇴각을 호소하는 탕핑주의도 있다. 물론 우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관료 나으리들의 힐난을 마주했을 때 그들 곁에 누워있는 “급진주의자들“은 당에서 결정된 사안을 집행하는 이들보다 더 그들을 떨게 만들었다. 결국 ‘습민(刁民; 시진핑 또는 중국공산당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의 무뢰하고 난폭한 짓은 개같은 관료들의 질서를 더욱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때 그들은 그저 “대인과 소인은 그저 (종복처럼) 적당한 때에 서서 권리를 구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릎을 꿇고서 한 말이다. 이처럼 무릎 꿇는 식의 속물적인 탕핑(Lie to Peace)주의*를 어찌 연단 위의 통치철학과 구분할 수 있겠는가?
- 📑*탕핑(Lie to Peace) : 저자는 ‘탕핑(躺平)’에서 ‘平’의 여러 의미를 활용해 탕핑주의 현상에서 드러난 여러 이데올로기적 분화를 영어로 풀어 평화, 평형, 평등 등 다양한 말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탕핑주의의 ‘합리성’을 논증하는 경제학자들이다. 탕핑주의가 국가와 민중에게 불러올 재앙을 비판하는 학자들과는 다르게, 이들은 타고난 낙관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어느 부유한 나라의 젊은이들이 탕핑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말한다. ‘네이쥐안(内卷)’**을 맞닥뜨릴 때 탕핑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없다. 이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해결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탕핑주의자 자신의 논리 아닌가? 하지만 사실 이 이면의 해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이 경쟁으로부터 물러나 탕핑을 선택하게 되면, 자연스레 총노동력은 줄어든다. 이에 따라 잉여의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협상력을 가져올 것이고, 그리하여 노동력의 평균가격은 오를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논리의 가설은 ‘내권’의 근원에는 노동시장에서의 공급과잉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설령 짧은 기간 안에 탕핑은 소비 수요를 감소시킬 수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반드시 시장이 균형을 찾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 📑**네이쥐안(内卷) : 질적 성장 없는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내부 경쟁. 이로 인한 노동자계급, 청년들의 집단적인 번아웃 현상.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가리킨다.
이러한 시각의 문제는 이들 학자들이 그저 탕핑을 일종의 시장경쟁의 ‘자연적인’ 결과로 볼 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내권은 상호 쟁탈의 민족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 말고도, 인구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많다. 이는 멜서스 《인구론》***의 또 다른 당대 버전에 불과하다. 다행히도, 시장은 변함없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거다. 그들의 탕핑(Lie to Equilibrium)주의는 바로 이러한 질서 속에서 자연적으로 조절되는 동태적 요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그들 현대판 멜서스주의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탕핑주의자들보다 이 사회에 더 큰 공헌을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멜서스의 인구론 : 고전파 경제학자였던 토머스 맬서스(Thomas R. Malthus)는 1798년 출간한 《인구론》에서 임금이나 토지, 식량은 계속 증가하지만,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과잉인구로 인한 식량부족과 빈곤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결함을 안고 있지만,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남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저렴한 인건비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반)실업상태에 놓인 산업예비군을 필요로 한다. 저자 역시 탕핑주의 논쟁에서 드러난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자진해서 퇴출되는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들처럼 자생적인 (이론적 지도를 결여하고 있는) 탕핑주의자들은 항상 노동시장의 정기적인 순환 속에서 가장 말단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주류 경제 시스템은 빠르게 성장하는 긱이코노미(Gig Economy)**** 시스템을 육성하고 있다. 만약 탕핑주의자들이 해낸 가장 큰 기여가 있다면, 여기서 함의하는 바에 따르자면, 질서의 존속을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온건파 탕핑주의자들은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급진적 탕핑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모자란 성도들인만큼 무릎을 꿇고서 기다리는 게 확실히 가장 유리한 것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 경제학자들은 그들을 실망시킨 일이 무언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노동의 민주가 결여된 상황에서 긱이코노미 시스템에 포획된 탕핑주의는 사람들의 급여를 증가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시간을 더 길게 만들 수도 있다 는 점이다.
- 📑****긱이코노미 : 긱(Gig)은 1920년대 미국재즈 공연장 주변에서 필요에 따라 연주자를 일회성 계약으로 섭외해 공연한 데서 유래한다. 플랫폼 서비스의 부흥 이후 온라인 플랫폼 업체와 단기 계약 형태로 용역을 제공하는 공급자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마지막 집단은 비록 설령 뒤늦게 도달하긴 했지만 자동화의 위기를 퍼뜨리는 기술전문가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내부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게, 이들은 자동화 기술의 보급이 인간의 노동력을 빠르게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때 가서 실업의 물결에 대처하려면 너무 늦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탕핑은 바로 대규모 자동화 위기에 대한 예행연습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위기가 닥치면 사회는 탕핑의 기본적인 생활 요구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탕핑주의가 가리키는 것이 노동의 폐지를 의미한다면, 가속주의는 그러한 변화가 가져올 선물을 그들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보기에 탕핑주의는 여전히 머나먼 일이다. 당원들이 말하듯,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처해 있는 경제적 토대(특히 여기서는 ‘기술’)에 서로 부합한다. 현실에 목이 졸린 이러한 발상에서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곧 탕핑하겠다는 사람들이야말로 “시대는 거듭해서 새벽마다 그들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가속주의자들과 당이 통일전선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시대는 거듭해서 새벽마다 그들을 일깨운다”(时代都会一次又一次把他们在黎明时分唤醒) : 애국주의 포퓰리즘 성향이 짙은 중국의 관영매체 『환구시보』에 실린 논평의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환구시보는 ‘탕핑’을 비난하며 이렇게 서술했으나, 저자는 이 말이 드러내는 진실을 역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조는 바로 탕핑주의가 본래 가족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가속주의자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의 기술발전이 어째서 노동시간의 감소를 가져오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탕핑주의자들은 어떠한 기술도 신봉하지 않는 메시아였고, 현존하는 통치 기술시스템에서 ‘우리는 대안적 사회를 개시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그들이 실제로 목소리 냈던 것은 만약 노 동이 폐지될 것이라면 지금 당장 한꺼번에 멈추어 버릴 것을,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해방될 수 없을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탕핑주의자의 곤경
다양한 동반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탕핑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의 진짜 딜레마를 드러냈다.
사실 탕핑주의자들이 여전히 개인주의적인 실천 방법론을 고수하는 한, 그들은 고행하는 승려들이 하는 금욕주의와 피할 수 없는 속임수를 반복하도록 강요당하게 된다. 분명 고행을 수행하는 단계에서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은 우리가 착취당하는 정도를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숨기려 했던 것처럼, 그것은 그리 새롭지 않은 통치술이 될 수도 있다. 상대적 잉여인구가 소득이 없는 ‘실업자’와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긱노동자’ 사이를 오가는 것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주체적으로 탕핑주의에 의탁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그러한 억압적인 조건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하거나, 아니면 계속 억압을 감당하거나, 혹은 둘 모두를 해야 한다. 이는 모두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에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가로막는 중요한 수단(마르크스는 이를 ‘산업예비군’이라고 불렀다)이었다.
개별 탕핑주의의 부자연스러운 지점은 바로 대규모 실천의 통로가 부족하다는 것, 그렇기에 탕핑주의가 또 다른 유예의 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천성적으로 탕핑을 실천하는 사람일수록 탕핑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주류 질서에서 소외되어, 포기할 무언가를 아예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탕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수록 탕핑주의의 함의를 거스르게 된다——그들의 입장에서 본래부터 질서는 너무 많고, 포기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혼인과 가정의 법칙에 빠진 사람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들, 업무고과와 성적표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 주택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만약 탕핑주의자들이 이렇게 많은 반대자를 규합했다면, 어떻게 그 질서가 그들을 놓아주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회피적이고 황량한 탕핑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탕핑주의자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가장 먼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나타난다. ‘비인도적인 일들에 사회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렇기에 자신을 값싼 임대주택에 유폐시켜, 집 바깥의 세계와 서로 간섭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만약 디지털 플랫폼에서 파견한 배달 노동자가 대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루종일 일어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몇 평방미터의 작은 방 안에 갇힌 물건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 자신이야 말로 자신들이 거부하려는 질서의 일부라는 걸 깨닫지 못한 듯하다. 그와 같은 생산 지속의 통치술은 제도적 활동이면서, 창조를 감축하는 통치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들은 이미 그러한 급진적인 탕핑주의의 신조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해내지 않았나? 오늘날, 사회생산과 생명정치는 너무나 촘촘하게 얽혀 있다. 우리는 우선 전자에서 벗어나면 곧 죽을 것처럼 여기지만, 그것은 과연 사실인가?
잠시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의 시대로 돌아가보자.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나무통 안에 누워 세상을 바라보았는데, 그때 그는 결코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대 그리스 세계 한복판에서 가장 번화한 길목에 나무통을 설치했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펼쳤다. 그는 가난했지만 생기가 넘쳤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면서 진정한 인간을 찾겠다고 했고, 플라톤의 비싼 카펫을 밟으면서 이 관념론자의 가엾은 허영심을 밟고 있노라 선언했다. 극장에서 공연이 끝날 때 쏟아져나오는 인파를 역행하면서 평생 연습했던 일이라며 하기도 했다. 그가 개와 어린이, 방랑자로부터 배우고 귀족이나 상인으로부터 배우지 않음으로써, 가난은 질서를 유지하는 조건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조건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조반(造反)’*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의 지혜를 나누기 위한 반란이기도 하다. 그가 법을 어겨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순리대로 모든 나라의 망명자가 되었다. 그가 강도들로부터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을 때, 그는 자신을 산 구매자에게 주인을 살 필요가 있는지 물었다. 그의 나무통이 쇠발굽에 밟혀 박살났을 때, 그 는 곧 또 다른 나무통을 찾아냈다.
- 📑*조반(造反) : ‘반란을 일으키다’는 뜻. 문화혁명 당시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마오쩌둥의 선동에 많은 학생들이 호응했는데, 칭화대학 부속중학에 다니던 한 학생이 쓴 대자보가 돌고돌아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이에 응답하며 “혁명은 죄가 없다. 모든 반항에는 이유가 있다(革命無罪 造反有理)”고 답장을 썼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억압받는 자들이 처해있는 질서가 노예 대부분을 감금해두고 있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시대보다는 더욱 광범하고 견고하다고 말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또 어디로 가서 우리의 무너진 나무통을 건지길 기대할까?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생명이 여전히 생산에 의해 집어삼켜지는 역사적 과정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가 해방을 이야기할 때 만약 그것이 그저 질 낮은 노동조직에서 다른 종류의 조직으로 몰아내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회적인 공포와 도피는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활동이 점차 더더욱 노동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조정되고 체험되고 있기 때문이다. 탕핑주의자들의 황량함은 바로 이런 사회 공장으로부터의 벗어나려는 시도가 실패해버린 결과다. 만약 우리가 절대다수의 수형자들이 우리를 가두고 있는 질서를 거부한다면, 우리를 격리시키고 분할하여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질서만이 유일하게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다르지 않은데, 대체 우리는 무엇을 거절한 것인가?
마지막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 한 기술 이데올로기가 자동화가 불러온 편리를 통해 노동이 필요 없는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대주택에 사는 탕핑주의자란 살아 있지 못하다는 것일까? 이 생생한 만화적 이미지에 힘입어, 우리는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미래는 강제 폐지된 노동 이후의 생명을 예시하는 게 아니다. 자발적으로 노동에 복역하는 생명을 활용해 비자발적으로 노동에 복무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우리의 생명과도 결부되어 있어, 인간의 정신도 이러한 활동 속에서 손실된다.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면, 마치 시시포스(Sisyphos)의 거대한 바위를 방불케 하는 어렵고도 힘든 일이 될 수 있을까. 영원히 그 문을 나설 수는 없겠지만,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밥 먹을 때든, 아니면 잠을 잘 때든 말이다. 잠결에 꿈 속에서도 마치 이미 오랫동안 걸어 쉬지도 못하는 것처럼. 노동의 의지는 이처럼 우리가 배척하는 노동의 신체 안에 관철된다. 앞서 찾아온 미래에서 우리는 이처럼 치유할 수 없는 가속주의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다.
탕핑주의자의 친구
작금의 세상은 순탄치 않다. 탕핑주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처지로부터 구해내 현존 질서에 대한 총체적 거부를 실현하려면, 개인주의 이외의 연결고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사실 대규모 탕핑주의에 관한 보편적인 구상은 사람들의 처음 구상했을 때부터 급진적이었다. 탕핑주의는 어떤 한 사회의 순환로에서 벗어나(脱钩) 발생하는 게 아니라, 모든 고리로부터 발생한다. 탕핑주의는 특정 사회계층과 신분집단의 결별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에서 발생한다. 입시와 일, 보육과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거절을 연결시키고자 했고, 그렇게 해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현 질서 하에 억압받는 모든 세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강요와 복종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 남성과 여성, 노동자와 실업자, 시민과 농민, 유목민, 건달, 학생과 지식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그리고 그밖의 성소수자들, 노숙인과 마이너스 주택 대출자들을 연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에 있다. 이보다 더 비밀스러운 협약 속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총파업이 또 있을까?
우리가 연결하고자 한 동맹군은 다음을 포함한다.
- 여성과 성소수자. 우리는 그들에게 전가된 억압과 착취,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결혼, 가정, 성관계를 거부한다. 우리는 가부장제의 연장을 위한 출산을 거부한다.
- 노동자(풀타임 직장인이든, 긱 노동자든, 실업자든). 우리는 착취와 소외된 노동질서의 조성을 거부한다. 우리는 관료와 관리자, 자본가들을 위해 자본의 근원인 노동가치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한다.
- 농민과 유목민. 우리는 강요된 현대화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경제적인 수탈과 문화의 절멸을 거부한다. 우리는 환경 재난을 거부한다. 우리는 강제 이주를 거부한다.
- 학생과 지식인. 우리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지식과 문화 생산을 거부한다. 우리는 지식 독점과 사유화를 거부한다. 우리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거부한다.
- 청년, 시민, 부랑자, 실업자. 우리는 높은 월세와 집값을 거부한다. 우리는 주택 대출금과 이자의 지불을 거부한다.
- 노인. 우리는 정년퇴직의 지연을 거부한다. 우리는 값비싼 의료비와 간호비를 거부한다. 우리는 무관심과 동반자 없는 노년을 거부한다.
- 보수 질서가 아닌 급진 개혁을 주장하는 기타 이론가와 활동가. 예컨대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 페미니스트, 생태주의자, 협동조합 운동가들.
대안적 자치구 替代性自治区
급진적 탕핑주의는 광범위한 동맹들에 대한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상호협력의 공동체 관계와 이미 존재했거나 앞서 존재했던 대안적 자치구의 네트워킹에서도 나타난다. 만약 이와 같은 선구자들의 시도가 없었다면, 탕핑주의자들은 그들의 비전을 실현하는데 기댈 곳이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탕핑주의자는 바로 가장 작은 자치구이며, 그들의 몸은 이리저리 떠다니는 편제 바깥의 땅이다.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일이든 교제든 수업이든 아니면 밥을 먹거나 누군가를 애도할 때, 혼례를 할 때에도 탕핑주의자는 그들 자신의 의식, 즉 탕핑을 실천한다.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마주하든, 그게 지도자이든, 직장 상사이든, 사단장이든, 아니면 돈이나 훈장, 국기일지라도, 탕핑주의자는 그들 자신의 지표, 즉 탕핑에 충실한다.
탕핑주의자는 그들 자신의 명절을 발명한다. 이러한 명절에서 그들은 풍작이나 승리를 축하하지 않는다. 자동차가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기계가 돌아가고 몸이 마비된 공장 안에서도 탕핑주의자는 눕는다. 그들은 돈을 쓰지도, 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현대의 교회인 쇼핑몰에, 장엄하거나 웅장한 궁전과 현대 건축물 같은 곳들에서 드러눕는다. 이러한 경축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더 많은 여가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해 그렇게 한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피난처를 마련하는 게 아니라,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피난처를 세운다.
대안적 자치의 원칙을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고압적인 질서에 포위 당해 허우적거려도, 혹은 아무도 찾지 않는 산꼭대기나 정글에 은밀하게 숨어 있을지라도, 또는 이 세계의 변방과 모퉁이에 물러나 있거나 시끌벅적하고 번화한 광장 한복판에 주둔하고 있든, 탕핑주의자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시도들 속에서 영감을 찾고 계발하려 시도한다. 우리는 다음에 열거하는 선구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그들은 파리코뮌을 세운 무정부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공장을 접수했던 노동자들이었다. 미국의 디즈멀 스왐프(Great Dismal Swamp)에서 마룬 공동체들(marron communities)*을 형성했던 도망간 흑인 노예들이었고, 독일 베를린에서 주택을 점거**한 유랑자들과 예술가들, 학생들, 퀴 어들이었다. 멕시코 치아파스주의 사파티스타 원주민들***, 시리아 쿠르드지역에서 가부장제에 맞서 협동조합을 조직한 여성들****이었다.
- 📑*디즈멀 스왐프의 마룬 공동체 : 16~17세기 유럽에서 온 착취자들은 아프리카에서 납치한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착취하고 학살했다. 이렇게 착취 당하던 노예들 중 어떤 이들은 탈출하거나 반란에 성공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버지니아나 조지아,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곳곳의 늪지대에 살았는데, 때로는 수천 명 규모의 공동체를 유지하며 백인 침략자들과 무역 거래를 하기도 했다. 백인 농장주들은 종종 이들을 잡아들이기도 했다. 19세기까지 살아남은 마룬 공동체들은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 참전했다.
- 📑**독일 베를린 주택 점거 : 베를린은 다양한 방식의 세입자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도시 중 하나다. 1970년부터 2014년 사이 630채 이상의 주택 점거운동이 일어났고, 투쟁을 통해 이 중 3분의1이 합법적인 점유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베를린 주택 공유화 흐름으로 이어졌다.
- 📑***사파티스타 원주민 투쟁 :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의 원주민들은 1990년대 이후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시장화에 맞서 원주민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급진적인 참여민주주의와 무정부주의,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념을 결합해 자신들의 공동체 운동을 광범하게 전개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이 운동이 낳은 전 세계적인 스타이다. 그는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구호로도 유명하다.
- 📑****쿠르드족 로자바 자치구 : 시리아 북부에 위치한 비공식적인 쿠르드족 자치구로, 근대국가 성립에 실패한 쿠르드족 민중이 구성한 정치 공동체이다. 로자바 정부는 민주적이고 생태주의적이며, 성평등에 입각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운동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
상호협조와 자결을 통해 탕핑주의자들 역시도 나름의 코뮨을 만들 것이다. 우리는 생산과 확장을 핵심으로 하여 과잉생산을 야기하는 질서를 대체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탕핑하고자 한다. 우리는 황폐하고 비어있는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거처를 마련하고자 한다. 우리는 휴식과 오락을 목적으로 한 인프라와 공간 디자인, 도시 설계를 추구한다. 우리는 선물과 호혜가 가능하고, 착취로부터 자유로운 경제관계를 추구한다. 우리는 직접 민주주의와 성평등의 집단 거버넌스를 추구한다. 우리는 공동 소유를 수호할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 임대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과거에 빼앗긴 것을 돌려받으려 한다. 우리는 나무통 생활기금을 추구한다. 우리는 주민들이 최소한의 노동 외에 그들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노역의 기술보다는 탕핑의 가속을 추구하며, 이를 통해 노동시간 감축을 실현해나갈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공동 돌봄을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국경을 없애고, 각 자치구 간에 자유로운 이주를 모색할 것이다. 특히 우리는 곤경에 빠진 이들에게 관심——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한 요양, 빚으로 궁핍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보조, 거동이 불편하고 자기관리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을 위한 돌봄, 차별받거나 누명을 쓴 이들을 위한 공간——을 가질 것이다.
당분간 우리와 합류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 탕핑주의자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바가 있다면…
바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결핍 속에서 서로 다투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항의 철학은 우리의 행동으로부터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쯤이면 탕핑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보다 상세한 단계쩍 임무를 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전에, 우선 우리의 첫번째 나무통을 만들자.
전 세계의 탕핑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제1판 2021년 6월 1일 | 제2판 2022년 6월 1일
출품 : qua
목각 : 刺纸
디자인 : 阿绿鹅
교열:黄小狼
번역 : 홍명교
교열 : 성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