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영상으로, 댄스로…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저항을 위해
2023년 2월 20일
이번 인터뷰는 2022년 6월 28일에 진행됐는데, 바쁜 일정으로 인해 이제서야 공개한다. 이번 인터뷰는 보리, 현빈, 인영이 참여하고 정리했다.
활동가를 만나다 시리즈 시즌2의 세번째 주인공은 연분홍치마 활동가 빼갈이다. 플랫폼c 설립 때부터 회원이기도 했다. 연분홍치마는 여 성주의를 바탕으로 인권의 가치를 지키는 미디어 액티비즘을 실천해온 단체다.
플C : 음… 우선 간단하게 소개를 부탁할 수 있을까요?
빼갈 : 안녕하세요. 연분홍치마에서 활동하고 있는 빼갈이라고 합니다.
플C : 고량주(高粱酒)의 빼갈 맞나요?
빼갈 : 예 맞습니다.
플C : 좋아하시나봐요.
빼갈 : 친구들이랑 서로 닮은 술에 대해 얘기하다가 저보고는 '빼갈'(고량주의 속어)같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빼갈과 연분홍치마의 미디어 액티비즘
플C : 연분홍치마가 어떤 단체인지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려요.
빼갈 : 연분홍치마의 공식명은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에요. 저희는 ‘누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힘에 의해 어떻게 배제되는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여성주의를 바탕으로 인권의 가치를 지키는 미디어액티비즘을 실천합니다. 미디어가 운동에 도움이 되는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콘텐츠를 제작하는 단체죠. 그래서 주로 여러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미디어 기록을 하거나 다큐멘터리를 제작, 그리고 연대 운동을 하고 있어요. 같이 영화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트랜스젠더 실태조사 등의 사업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작업했거든요. 그 과정에서 운동 속에서 이걸 어떻게 더 확장시킬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던 결과가 다큐멘터리와 다른 미디어 콘텐츠들로 나왔어요. 실태조사를 포착하며 목격한 현실들을 포착하는 것을 목표하다 보니까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가 됐죠. 지금까지 나온 창작물로는 <너에게 가는 길>,
지금까지 나온 창작물로는 <너에게 가는 길>, <마마상>, <3xFTM>,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종로의 기적>, <두 개의 문>, <공동정범> 등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있고요. 연분홍TV라는 유튜브 채널을 바탕으로 공개한 퀴어예능 <퀴서비스>, 웹드라마 <으랏파파> 등이 있습니다.
- 📑<너에게 가는 길> : 연분홍치마가 제작하고 변규리 감독이 연출해 2021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로, 성소수자 자식을 둔 부모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22년 여름 플랫폼C가 진행한 '청천벽력' 프로그램에서도 상영회를 가졌다. 이 작품은 부모들이 성소수자 자식의 커밍아웃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면서 겪어온 변화와 그들의 고민을 담고 있다. 잘 모르는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지,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생긴 변화가 무엇이고, 어떻게 부모들의 성소수자 운동으로 연결되는지 잘 보여준다.
플C : 빼갈님은 연분홍치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가요?
빼갈 : 처음에는 연분홍TV의 조연출로 시작했고요. 최근에는 다큐멘터리 <무브@8PM>의 감독을 맡았어요. 2022년 8월 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했고, GV나 상영회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밖에도 차별금지법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고요. 미디어 아카데미인 '연분홍 아카데미'를 플랫폼C 망원동 사무실에서 진행한 적도 있어요.
플C : 연분홍치마에서 만든 최근 작품으로 <너에게 가는 길>과 <무브@8PM>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작품에 대한 생각이나 소감이 궁금합니다.
빼갈 : <너에게 가는 길>은 연분홍치마가 성소수자 부모 모임과 협력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에요. 연분홍치마 활동가인 변규리 감독이 3~4년 동안 고생해서 만들었죠. 부모가 자기 자식의 커밍아웃을 통해 ‘타자’로서의 성소수자 자식과의 관계맺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생긴 변화와 그것이 부모의 성소수자 운동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자식과 부모라는 가장 친밀하면서도 멀어질 수 있는 관계에서 평등하고 일방적이지 않은 상호 소통의 관계 맺음을 통해 서로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보여주죠. 제가 딱히 한 것은 없지만(웃음), <너에게 가는 길>이 사람들한테 전달되고 울림을 줄 수 있어서 연분홍치마 활동가로서뿌듯함을 느끼고 있어요.
<무브@8PM>은 제가 속한 퀴어댄스팀 큐캔디 멤버들이 두 개의 세계를 살아가면서 겪는 고민과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에요. 큐캔디로서 나를 드러내며 자긍심을 찾는 세계, 그리고 나를 숨겨야하는 일상과의 괴리 속에서 서로의 지지대가 되고, ‘나’와 다른 세계와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너에게 가는 길>이 이성애 부모의 ‘보편적’ 시각에서 성소수자 자식이라는 ‘타자’와의 만남을 조명한다면, <무브@8PM>은 ‘타자’인 퀴어 당사자가 ‘보편’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장인물들은 비록 쉽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고 혐오에 생존이 위협받기도 하지만, 큐캔디 멤버들과 투쟁 현장에서 연대의 춤을 추며 해방감을 서로 주고받고, 거기에서 용기를 얻어 자신을 긍정하고 주변인들에게 다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죠. 두 영화 다 커밍아웃이라는 소수자의 자기 가시화가 투쟁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어요.
- 📑덧붙이는 말 : 두 작품 모두 인상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를 넘어, GV 현장에서 서로의 고충과 위로를 나누는 점도 매우 인상적. GV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고, 영화 너머의 무언가를 볼 수 있다. 플랫폼C 인터뷰어들이 GV에 참석했던 날, 차별금지법 집회도 자연스럽게 가게 됐는데, GV에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우리가 걷는 길’로 확장시켜준다는 점에서 사회운동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농담을 위해
플C :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빼갈님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었더라고요. 유튜브채널 연분홍TV의 퀴어가족 시트콤 <으랏파파>나, 예능 프로그램인 <퀴서비스>에 참여하셨고요. <퀴서비스>에서는 특히 퀴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하며 웃고 떠드는 <호텔 엘루나>편을 재밌게 봤어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웃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문구가 연분홍TV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연분홍TV라는 채널은 어떤 고민으로 제작하게 됐나요?
빼갈 : 다른 콘텐츠들도 그렇지만, 연분홍TV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경험과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연대의 공동체적 감각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만들었어요. 저희는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 이런 것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죠. 주로 페미니즘과 관련된 주제를 많이 다루는데요. 유튜브 채널 컨텐츠를 제작하기로 고민하면서 정한 두 가지 모토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우리만의 농담을 발명하자"였어요.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PC‘하게 웃길 수 있다, 페미니즘을 하면서 웃길 수 있다, 퀴어만의 농담을 만들자! 이런 거죠.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가 불편하지 않은 웃음을 주고 싶었어요. 이걸 가장 신경 썼던 에피소드가 퀴서비스의 ‘호텔 엘루나’편이긴 한 것 같아요.
두 번째 모토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현장을 만들자’예요. 서로가 안녕한지, 괜찮은지를 묻는 것, 그리고 영상제작 현장 자체가 운동의 현장이라는 것이 저희의 중요한 목표예요. 현장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하는 것 자체가 실천의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이 두 가지 원칙 속에서 현장을 만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으랏파파>같은 경우에는 저희가 ‘스탠바이큐’ 활동을 하던 와중에 함께 만든 웹드라마에요. 대본 리딩할 때 퀴어-친화적인 현장을 위한 내규를 같이 읽는 등의 노력을 했고요. 실제로 퀴어 당사자가 많다보니, 현장 분위기가 바뀌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죠.
플C :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웃음을 만들자"가 "모두에게 안전한 현장"과 연결되는군요. 보통 주류 미디어의 경우, 제작 현장에서 위계적인 분위기가 많은데, 연분홍치마는 퀴어 친화적이고 수평적인 촬영 현장을 만들기 위해 많이 노력하는 것처럼 보여요. 이걸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과정은 어떤가요?
빼갈 : 사실 기획 단계가 중요한 것 같아요. <호텔 엘루나>는 출연자별로 사전 인터뷰를 3시간 정도씩 했고, 그걸 바탕으로 기획했거든요. 그리고 그 기획을 다시 한 번 출연자분들과 맞춰봤고요. 그러니까 여러번 체크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그걸 옆에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어떻게 하면 더 불편하지 않겠냐’, ‘혹시 이런 것들이 불편하지는 않겠냐’같은 논의를 같이 해보는 게 필요하겠죠.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함께 ‘정치인이 전부 퀴어라면’이라는 설정으로 한 컨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한 적도 있는데요. 무지개행동의 성소수자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활동의 맥락 안에서 웃음 코드들을 발견할 수 있었죠. 이렇듯 사회운동과 접목되었을 때, 비로소 깊이도 갖추어지고, 웃길 수 있는 예능이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로운 길을 위한 새로운 형식
플C : 유머라는 건 조금만 삐끗해도 약자를 비웃는 방식으로 갈 수 있는데, 이런 세심한 과정이 있었기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유머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호텔 엘루나>에서 익명성을 위해 출연자 개개인에게 표정인식 이모지를 따로 제작해서 덮어씌운 것에서 배려와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빼갈 : 익명성을 유지하되 표정이 드러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 고민을 좀 했죠. 영상을 미리 촬영해서 아이폰으로 다시 찍어서 얼굴 부분에만 이모지 영상을 붙이자는 아이디어가 나와서 그렇게 했어요. 근데 이게 좋은 사양의 아이폰이 필요하더라구요. 용량도 엄청 많이 차지해요. 그것 때문에 스태프 중 한 명이 자신의 폰을 바꿨죠. (웃음) 또, 편집하다 보니 출연자 중 한 분은 너무 흥이 많아서 도저히 이모지가 그 흥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포기했는데 그것도 나름 재밌었던 것 같아요.
맥락이 조금 다르지만, <두 개의 문>용산역 광장 상영 때 AR(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것도 새로운 시도 중 하나죠. 그때 전시해놓은 큰 사진이 있었잖아요. 거기에 휴대폰 카메라를 가져다 대면, 그 배경으로 영상이 상영되도록 했어요. 그게 폰이 조금 돌아가도 촬영이 되더라고요, 사람이 카메라를 직접 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퀴어나 운동권들이 활동하는 방식에 이런 기술적 요소를 접목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어요.
플C : 사회운동의 발상과 방식의 ‘경계를 변형시키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거네요. 좁은 범주의 ‘보통 사람’만 향유할 수 있는 웃음뿐인 세상에서 연분홍TV는 소중한 미디어 생산자인 것 같습니다. 구독 좋아요 버튼도 눌렀습니다. (웃음)
퀴어 친화적 현장을 위해
플C : 퀴어 시트콤 <으랏파파>도 재밌게 봤는데요. 퀴어의 일상을 시혜의 시선이나 타자화하는 게 아니라, 생생하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줘서 편하게 볼 수 있었어요. 이런 퀴어 웹드라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빼갈 : <으랏파파>는 중년 레즈비언 부치 체육 선생 고현미, 친화력 좋은 청소년 성소수자 혀크, 이방인 택배 기사 쌀차비가 한 집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배달노동자로 일하는 쌀차비가 코로나로 인해 고시텔에서 일방적으로 퇴출을 당하고, 혀크가 ‘아빠’인 고현미의 집으로 쌀차비를 무작정 데리고 오면서 이들의 가족 생활이 시 작되죠. 말씀대로 <으랏파파>는 퀴어의 일상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어요. 저희는 대중들에게 퀴어를 설명하거나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퀴어를 기준으로 설정하고 퀴어가 살아가는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당사자도 향유할 수 있고 사람들이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퀴서비스> 시리즈에서 <애기레즈의 고백법>이라는 웹드라마를 시도했는데요. 결과적으로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웹드라마나 시트콤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서 <으랏파파> 제작으로 재도전한 거죠. 퀴어 드라마를 잘 만들고 예상을 뛰어넘는 것을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엔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와 이반지하님의 노래 ‘우리가족 LGBT’, 이 두 가지를 모티브로 했어요.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등장인물인 뱀파이어 가족이 서로의 관계조차 연기하며 ‘보통 인간’의 역할을 수행하거든요. 퀴어들이 일상에서 숨어 사는 것이 <안녕 프란체스카>의 뱀파이어들이 인간들 사이에 숨어 사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점에 착안해서 기획하게 됐죠.
<으랏파파>의 주인공들도 바깥에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집에서는 퀴어가 기준인 세상이 되잖아요. 고현미와 혀크와 쌀차비가 살고 있는 집은 ‘갈 곳 없는’ 퀴어와 사회적 약자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아늑한 ‘가족’이자 집이기도 해요.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을 현실에서 찾기 힘드니까, 시트콤에서라도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인거죠.
플C : 한 인터뷰에서 쌀차비 배역을 맡은 문혜인 배우가 “촬영현장이 서로 끊임없이 괜찮냐고 묻고 확인하는 공간이여서 좋았고 ‘서로가 괜찮은 현장’이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말했던 게 인상적이더라고요. 연분홍치마의 모토인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와 퀴어프렌들리한 현장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함께 했다고 들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빼갈 : 스탠바이큐(STANDBY-Q) 프로젝트는 ‘카메라 뒤에도 퀴어가 있다’라는 모토를 중심으로, 영상제작 현장에서 일어나는 퀴어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방지하고, 퀴어의 권리가 존중되는 미디어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퀴어 미디어 노동자들의 고충을 토로하고 차별을 고발할 수 있는 익명 대나무숲, 퀴어 차별·혐오를 방지하는 스탠바이큐 가이드라인, 토크쇼 등을 진행했죠.
<으랏 파파> 조명감독님이 다른 독립영화 현장에서도 조명감독으로 일하고 있어서 한빛센터와 같이 미디어 노동자를 위한 커피차를 보냈고, 그 영화 시나리오 앞에 스탠바이큐 가이드라인을 적용했어요. 퀴어 관련 굿즈도 가져가고, 가이드라인도 읽으면서 현장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죠. 가이드라인에는 나와 타인이 다름을 인지하고, 성소수자를 동료 시민으로서 배제하거나 타자화하지 않고 대우하며, 성중립적 현장을 만들고 현장의 차별에 맞서자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이후에 저는 <무브@8PM>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연분홍치마도 차별금지법 투쟁에 합류하면서 진행을 멈추게 됐죠. 앞으로 영향력과 인지도를 더 넓히는 시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플C : 가이드라인을 보니 영상제작 현장뿐만 아니라, 노동 현장 전반에 적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히 퀴어 노동자는 현장의 위계적 분위기에 더 해 ‘이성애자'인 척 가장해야 하는 이중 억압을 받는데요. 퀴어들에게 지지대를 마련해줄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디어 액티비즘
플C : 연분홍치마의 미디어 운동에 대한 비전을 듣고 싶어요. 연분홍치마 활동가인 김일란 감독의 ‘퀴어 방송국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들었던 것 같은데요. 빼갈님은 연분홍치마가 어떤 포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빼갈 : 현재는 다양한 장르를 계속 시도를 하고 싶고, 좀 더 규모가 큰 활동에 대한 갈증도 있는 것 같아요. 퀴어 페미니스트 작업자들이 함께 모여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마련할지 생각하고 있어요. 연분홍 아카데미도 그런 고민에서 나오게 된 프로젝트였죠. 그리고 저희의 커밍아웃 시리즈들 중 최근에 작업했던 것이 <너에게 가는 길>과 <무브@8PM>이거든요. 커밍아웃의 운동적 의미들이 있는데, 퀴어들을 가시화하면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깊이 있게 드러내고 싶었어요. 영화 상영회와 GV가 커밍아웃 티켓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던 것 같거든요. 성소수자의 주변인들이 와서 자신들의 감상을 얘기하고, 퀴어들은 자신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모두가 함께 하는 길로 운동을 확장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일상 속의 운동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운동을 확장하고 싶어요.
플C : 페미니즘과 퀴어 운동은 ‘일상’ 속의 권력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온 역사이기도 하죠. 연분홍치마가 만드는 컨텐츠도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컨텐츠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상 속 운동’이란 말이 많이 와닿습니다.
학생운동에서 단체상근을 거쳐, 연분홍치마까지
플C : 빼갈님의 개인적인 활동 궤적이 궁금해지는데요. 처음으로 한 집회 사회나 발언은 뭐였나요? 사회운동과 관련해서 처음 맞닥뜨린 경험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본다면?
빼갈 : 저의 첫 발언은 대학 새내기 때의 정리집회 발언이었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열심히 평택 대투쟁 시위를 하던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는데요. 장애인 차별 철폐 문화제라는 집회가 있다면서, 거기 같이 가자고 너희 선배들에게 전해달라고 제게 부탁했어요. 그런데 저희 과/반 학생회장이 못 간다고 해서 제가 대신 가게 됐죠. 과학생회장이 다짜고짜 집회에 가서 특정인을 찾으라고 알려줘서 간 거에요. 가서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그분'이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그 사람이 아니지만, 저쪽에 계시다고 알려주더라구요. 그렇게 찾아갔죠. 그러더니 사람들이 정리 집회 때 동그랗게 모여 앉아 발언을 시키더라고요. 덜덜덜덜 떨면서 사회과학대학 대표로 발언을 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플C : 대학 시절 학생회장으로서 법인화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등 아주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학생운동 시절의 경험이 지금의 연분홍치마 활동과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빼갈 : 사실 (연관성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학생운동 때 매년 반빈곤연대활동을 갔고, 반(反)빈곤이라는 의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졸업 이후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을 하게 됐죠. 연분홍치마에서 용산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이라는 다큐를 만든 적이 있는데요. 그러면서 용산참사 진상규명이라는 접점이 빈곤사회연대와 연분홍치마 사이에 생긴 거에요. 그래서 셋이 연결되는 것 같긴 하지만, 딱히 어떤 뜻을 두고 연속적으로 한 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플C : 학생운동과 반빈곤활동, 드라마 PD등 여러 분야를 거쳐오셨네요. 중간에 활동과 멀어진 때도, 가까워진 때도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빼갈 : 사실 법인화 반대투쟁이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당시에 저를 둘러싸고 여러 공격들이 있었고, 그래서 제 이름을 걸고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일단은 활동과 거리두기가 필요하겠다 싶어서, 드라마 기획PD를 하게 됐죠. 그런데 드라마판의 노동환경은 열악하거든요. 그래서 다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빈곤사회연대에서 상근자로 활동했어요. 근데 그 사이에 대학생 시절부터 알던 이한빛 PD가 <혼술남녀> 조연출을 맡던 중 과로와 직장 내 괴롭힘, 각종 부당한 대우를 겪다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일했던 드라마 현장을 바꾸는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년 동안 일했던 것만으로 드라마 현장의 생리나 환경 등을 알기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다시 현장으로 갔는데, 드라마 PD를 하다 보니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생기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하다가 연분홍치마와 만나게 됐죠.
플C : 어떻게 보면 지금 있는 연분홍치마가 운동과 드라마를 접목시킨 거네요. 그럼 어떻게 연분홍치마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건가요?
빼갈 : 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떤 영화 상영회에 갔다가 김일란 감독님을 만나게 됐어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연분홍TV에서 조연출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하다 보니까 하게 됐어요. 제가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을 했었고 드라마 기획PD를 한다는 걸 알아서 조연출을 제안하셨던 것 같아요.
활동가로서, 연대하는 춤꾼로서
플C : 활동은 누구나 할 수 있나요? 활동가에게 필요한 자질이라는 게 있을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자질을 어떻게 서로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빼갈 : 직장 생활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필요한 게 있진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활동가로서의 훈련은 좀 필요하겠죠. 누구나 활동가로서의 자질을 훈련할 수 있지 않을까요?
플C : 그렇겠죠? 다 들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네요. 활동가든 직장인이든 남은 여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미디어 컨텐츠 생산자이자 활동가로 살면서, 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할 것 같은데요. 취미 생활이 어떻게 되나요?
빼갈 : 저는 퀴어 댄스팀 ’큐캔디‘에서 춤을 춰요. 거기서 랩 파트를 담당하고 있죠. 사실 제가 원래 몸치였는데요. (웃음) 2014년에 큐캔디 몸치 탈출 클래스에 들어가서 2017년에 몸치에서 탈출했어요. 친구가 저를 조직했죠.
큐캔디 댄스팀은 2013년부터 '큐캔디'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어요. 첫 무대는 2014년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을 규탄하며 열린 서울시청 점거 농성장이었죠.
큐캔디가 서는 무대에 딱히 선정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큐캔디 멤버들이 연대하고 있는 곳들을 중심으로 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발달장애인들의 시설을 만드는 무대, 피플퍼스트라든가, 이전에 인턴으로 있었던 이주여성센터라든가, 저희가 연대 활동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무대 등에 가요. 낙태죄 폐지 집회에서도 춤을 췄는데, 거기서는 정말로 연대의 느낌을 생생하게 느꼈어요. 어떻게 보면 퀴어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대의 선정 기준인 것 같아요.
플C : 연분홍치마에서 제작한 <두개의 문> 용산역 상영회를 갔었는데요. 큐캔디 무대가 시작되니까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보더라고요. 그때 인상 깊게 봤어요. <무브@8PM>에서 나오는 춤 장면도 봤는데, 춤과 노래가 특정 젠더에 한정되지 않고 다채로웠어요. 빼갈님이 가장 좋아하는 춤이나 무대는 뭔가요?
빼갈 : 말씀하신대로 성별이분법을 횡단하는 의미의 무대를 많이 기획해요. 투쟁 현장에 어울리는 가사를 가진 노래나, 연대의 의미로서 쓰일 수 있는 노래를 많이 선곡하는 것 같아요. 큐캔디는 아이돌 NCT의 체리밤으로 유명합니다. 큐리밤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나 춤은 자주 바뀌긴 하는데, 눈이 오는 날에 차별금지법 댄스파티에서 ‘거침없이’라는 노래에 맞춰서 셔츠를 벗어서 돌리는 안무가 있었어요. 파워풀해서 좋아해요.
플C : 혹한을 연대의 열기로 다 녹이셨군요. 멤버는 어떻게 구성되나요?
빼갈 : 처음에는 언니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모였고, 그 사람들 주변의 춤추는 사람들을 모아 큐캔디를 만들었어요. 매년 멤버들이 바뀌기도 하는데 지금은 퀴어 페미니스트댄스 공간 ’루땐‘이라는 걸 운영하고 있고요. 그곳 수강생분들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최근에 큐캔디 오디션을 봤는데, 5명이 지원해서 전원 합격했습니다.
플C : 자신의 취미가 탈출구이자 혐오와 배제에 대한 저항, 그리고 사람들에게 연대의 힘으로서 작용하는 걸 보며 느끼는 게 많으실 것 같아요. <무브@8PM>도 큐캔디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잖아요. 어떻게 해서 이 영화를 찍게 됐나요?
빼갈 : 2017년에 게이 합창단 지보이스에 대한 다큐를 봤어요. 그때 결심했죠. "우리 그래도 잘 살아가고 있어", "힘든 사람들끼리 같이 연대하며 잘 살아보자"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서 <무브@8PM>를 만들게 됐어요.
큐캔디는 퀴어들의 쉼터이자 삶의 용기를 주는 존재에요. 저희는 큐캔디에서 용기를 얻고, 커밍아웃으로 성별이분법과 이성애라는 ‘보편’에 균열을 냅니다. 투쟁 현장에서 연대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그 순간만큼은 두렵지 않아요. 저희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무지갯빛 물결로 하나가 되는 순간은 정말 소중한 경험입니다. 코로나라는 위기가 와도 무너지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계속되고 확장될 거라 믿어요.
플C : 앞으로도 여러 현장에서 이어질 무대들이 기대됩니다. 곧 있을 퀴어퍼레이드나 투쟁 현장에서 뵐 수 있길 기대할게요! 🪅
인터뷰어 : 보리, 김현빈, 정인영
인터뷰이 : 빼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