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사’로서의 일본 마르크스주의
지금까지 본 연재에서는 고야마 히로타케(小山弘健)의 저서들을 통해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본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인식하여 변혁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전후 일본공산당의 패착이 마르크스주의 운동 및 전체 사회운동에 어떠한 굴곡을 초래했는지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일본에 마르크스주의가 처음으로 도입된 시기부터 1960년 안보투쟁 이후의 정세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일본 마르크스주의가 사상사적으로 어떠한 전개 과정을 거쳤는지 총괄해보고자 한다.
고야마가 이 저서를 남긴 1967년에 이르면 그와 일본공산당 간의 관계는 더한층 멀어져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에서 드러난 일본공산당에 대한 그의 충실성, 그리고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에서 표현된 일본공산당의 행태에 대한 격한 배신감과 분노는 점차 대상과 객관적인 거리를 둔 가운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자리를 내주었다. 1960년의 안보투쟁 이후 사회운동의 퇴조 국면은 일본공산당의 행태가 스스로 자임한 ‘전위당’으로서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냈고, 공산당과 독립적인 활동을 추구하던 여러 신좌익 분파들에게도 교착상태를 돌파해야 한다는 쉽지 않은 과제를 던졌다.
고야마는 그런 시기일수록 이론과 사상의 혁신이 더욱 급박하 게 요구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격변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서 그가 경험한 일본공산당의 패착은 강령적·정책적·조직론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실의 변화 앞에 이론과 사상이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그간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이론과 실천, 사상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자를 후자에 극적으로 종속시켜 온 데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았다. 이론과 사상이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채 혁신해나갈 공간을 인정하지 않고 모스크바의 정치적 지침에 모든 논리를 종속시키면서 운동의 비주체성과 경직성이 극심해졌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대학투쟁이 다시금 고조되기 이전까지 대중운동이 퇴조되던 시기에, 고야마는 일본 마르크스주의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이론의 전개과정에 내재하였던 각종 편향과 오류를 극복하고 발전적으로 계승해나가야 할 요소들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상사 자체내의 범주들을 내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비판하고자 노력하면서도 사상과 이론을 정치적 실천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과거 그에게 배격의 대상이었던 ‘노농파’ 비공산당 마르크스주의의 경향은 일본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중요한 계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공산당계와 비공산당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면서 전후 다양한 경향들의 가능성과 한계도 더 치밀하게 비판될 수 있었다.
1960년대 중반은 일본 대중운동의 일시적 퇴조기였으면서도, 1950년대 후반 스탈린 비판과 소련의 헝가리 침공 등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가한 충격을 올바른 ‘방향전환’으로 소화해낼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전환기’였다. 국내적으로 심화되는 대중소비사회의 경향, 대륙에서 불어오는 중소분쟁과 문화대혁명의 영향은 그런 전환을 더욱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 변화하는 현실에 이론과 실천을 부흥시켜나가고자 한 고야마의 시도는 사회운동 일반과 마르크스주의가 당시보다 더 심대한 침체와 위기에 놓인 오늘날에도 유의미할 것이다. 이제부터 고야마의 안내에 따라 일본이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적용되고 응용되어나갔던 사상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야마카와주의와 후쿠모토주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서구 사상의 일환으로서 일본에 도입된 것은 메이지 시대부터였지만, 천황제 국가권력은 당대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사회주의 활동가였던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를 처형하는 등 ‘대역 사건’을 통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 1910년대를 사회운동의 ‘겨울’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결국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 점차 대중적인 민주주의의 시민사회 공간이 열리게 되면서부터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이자 운동으로서 부활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 👉*대역 사건(大逆事件) : 1910년 일본 경찰 이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해 26명의 사회주의자와 아니키스트를 메이지 천황 암살 혐의로 체포해, 결국 고토쿠를 포함하여 총 11명을 사형에 처한 사건이다. 2차 대전 이후 재조사를 통해 해당 사건은 일본 정부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억누르기 위해 기획한 조작 사건임이 증명되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충격을 전해받은 메이지 사회주의 경향 내에서 아나키즘과의 치열한 논쟁(아나-볼 논쟁) 속에 분화하였던 마르크스주의는 단순히 현지에 이식된 서구 사상을 넘어 일본의, 그리고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군림하던 동아시아의 구체적 조건을 진단할 수 있는 사상으로 전화할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때 차례로 등장하여 구체적 정세에 조응하는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양대 계보를 형성한 인물들이 바로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와 후쿠모토 카즈오(福本和夫)이다.
야마카와는 1922년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전환」(無産階級運動の方向転換)을 발표하면서 사회운동 진영에 큰 충격을 안겼고 ‘야마카와주의’(山川イズム)로 지칭되는 일련의 사상적·운동적 흐름을 형성해나가게 된다. 당시 갓 건설된 제1차 일본공산당은 대중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소규모의 지식인 서클에 가까운 형태였는데, 야마카와는 ‘방향전환론’을 제시함으로써 ‘전위’가 대중운동에 결합해야 함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극적인 정치운동이 필요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전위정당을 표방하던 제1차 일본공산당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무산계급’적 요소 전체를 대중적으로 포괄하는 ‘공동전선당’이 ‘방향전환’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렇기에 1925년 보통선거법이 통과된 이후 야마카와는 공산당 재건 움직임과는 거리를 두면서 지속적으로 대중적 ‘무산정당’의 건설과 전국적 통일을 위한 정치적 노력에 매진하게 된다.
한편 1924년 유럽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쿠모토 카즈오는 칼 코르쉬와 게오르그 루카치 등 유럽 마르크스주의 혁신 흐름의 영향을 듬뿍 받은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혜성처럼 논단에 등장했다. 제1차 일본공산당이 해산된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공산당 재건의 움직임이 대두하던 시기 지식인 사회에서 고조된 후쿠모토의 인기는 일련의 ‘후쿠모토주의자’들이 공산당 운동의 주도권을 쥐도록 만들었다. 후쿠모토는 야마카와에 대한 비판을 주요하게 수행하며 대중운동으로의 결합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희석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이론투쟁’에 주된 방점을 찍으며 우선적으로 대중운동과 분리된 ‘전위’의 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결합 전의 분리’론은 일본공산당이 이후 대중으로부터 괴리된 분파로 전락하는 과정에 그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야마카와주의’와 ‘후쿠모토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일본에 갓 도입되면서도 동시에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라는 초 유의 사건 앞에 긴급한 혁신을 촉구받고 있는 정세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일본의 현실에 조응하는 이론을 구성하고자 노력한 진지한 시도였다. 1927년 코민테른이 ‘야마카와주의’와 ‘후쿠모토주의’를 권위적으로 비판하고 후쿠모토를 일본공산당에서 숙청해버린 사건은 현실의 서로 다른 면에 주목했던 두 사상의 계보가 건설적인 토론을 통해 상호의존적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단절시켜버렸다. 이전 사상의 편향과 성과를 균형 있게 평가하여 계승하기보다 상명하복식으로 배제해버리는 ‘코민테른 권위주의’는 이후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발달에 두고두고 질곡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마르크스주의와 노농파 마르크스주의
코민테른의 권위적 개입 이후 동인지 『노농』에 결집하여 야마카와와 뜻을 같이하던 ‘노농파’는 이노마타 츠나오(猪俣津南雄) 등을 중심으로 일본공산당 밖에서 별도로 사상과 실천을 발달시켜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본공산당 역시 지속적으로 사상적 계보와 정치적 실천을 조직해나가면서 1930년대 초에는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日本資本主義発達史講座)를 편찬하는 등 일련의 ‘강좌파’ 학자들을 통해 이론을 발달시켜나가게 된다. 공산당의 대표적 이론가 노로 에이타로(野呂榮太郎)와 강좌파의 거점이었던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プロレタリア科学研究所)의 이론적 실천은 이후에도 일본 사회경제사의 연구에 중요한 분기점으로 남았다.
노농파와 일본공산당 계열의 강좌파는 1920년대 후반의 일본 민주혁명 논쟁과 30년대 초반의 일본 자본주의 논쟁을 통해 치열하게 대결하였다. 노농파는 일본의 사회 성격을 이미 봉건제가 상당히 극복된 근대적 자본주의로 보아 노동자계급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고 있었고, 공산당과 강좌파는 천황제와 반봉건적 지주제를 비롯한 봉건 유제를 중시하여 이에 대항하는 반천황제·농업혁명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주창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공동전선당’으로서 무산정당의 전국적 통일을 추구하던 노농파의 조직론과 ‘전위당’으로서 공산당이 합법적 무산정당에 지도적으로 개입하는 형태를 지향한 일본공산당의 조직론 간의 논쟁도 결부되었다.
그러나 노농파와 일본공산당은 사실상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p220)로서 상호의존적으로 발달해나갈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다. ‘비공산당 마르크스주의’로서 노농파 마르크스주의는 일본공산당이 지녔던 ‘코민테른 권위주의’와 각종 교조적 편향들을 극복하면서 다양한 분파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무산정당을 통해 정세에 유연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런 점에서 공산당의 폐쇄성과 대비되는 조직론적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천황제와 지주제 등 일본에 여전히 주요하게 남아 있었던 투쟁의 대상을 간과해버리면서 국가론에 있어서는 중대한 약점을 지녔다.
반면 공산당계 마르크스주의는 반체제 세력으로서는 유일하게 천황제라는 전쟁 이전 일본의 핵심적 권력을 직시하며 이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투쟁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일본공산당의 혁명론을 현실로 옮기기 위한 조직론에 있어서는 중요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스스로를 유일한 ‘정통파’로 여기는 독선적 태도 속에서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와 여러 비마르크스주의적 운동 세력을 배격하며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유리시켰던 것이다. 일본공산당은 천황제 폐지를 슬로건으로 외칠 뿐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대중운동에 어떻게 개입하고 일상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을 연결해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결국 격화하는 권력의 탄압 앞에서 이들은 공허한 말이 담긴 전단을 뿌리다 제지당하면 권총을 쏘기 일쑤인 ‘무장공산당’으로 전락하거나, 서로를 경찰 스파이로 몰아 고문하여 죽이는 ‘린치공산당’의 폐쇄적 분파로 처절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고야마는 “공산당의 혁명적 반체제사상은 노농파의 광대한 전망을 지닌 조직론적 구상과 결부되었을 때”(p220) 더 유의미한 운동을 건설할 수 있었으리라 평가하며, 당시 일본 사회운동이 필요로 한 서로 다른 측면에 주목하였던 양대 흐름이 왜 상호의존적 관계를 파악하고 생산적 만남에 이르지 못했는지 되묻는다. 노농파 마르크스주의가 패전 이전 시기에는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역할을 부정하기보다 그 개혁을 요구하였고 적극적인 인민전선의 제휴를 추구하였던 점을 볼 때, 이론적 흐름의 상호보완적 만남이 이룩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은 일본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정통파’적 독선주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비합법 영역의 일본공산당을 철저하게 궤멸한 천황제와 군부 권력은 1936년부터 ‘인민전선 사건’으로 합법 영역에서 활동하던 노농파마저도 탄압해버리기에 이른다. 결국 전후 야마카와가 술회하였듯, 그 누구의 승자도 없는 논쟁 속에서 “노농파와 공산당 모두 승리가 아니라 패배”(p213)하고 말았던 것이다.*
- 👉*인민전선사건(人民戦線事件) :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결정된 ‘인민전선 방침’이 일본에 전해진 이후 이 방침을 수행하기 위해 전면적인 운동을 펼쳤던 일본공산당 활동가 및 비공산당 마르크스주의 활동가 약 900여명이 1936년 검거된 이래, 1937년과 1938년에 걸쳐 재차 대규모 구속 사건이 벌어진 것을 의미한다.
일본 공산주의의 유례없는 ‘전향’
고야마는 전후 마르크스주의의 전개를 다루기에 앞서 왜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전향이 발생하였는지 그 원인을 고찰한다. 천황제 타도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며 대중운동과 유리되어간 공산당 마르크스주의의 난점 속에서 대중과의 결합을 핑계로 천황제를 인정해버리려는 ‘전향’의 가능성이 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고조되는 가운데 반전과 식민지 해방의 강령이 대중적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현지의 판단, 세계혁명의 주된 계기로서 반제국주의를 강조해온 코민테른이 그동안 지녀온 권위주의적 태도와 이에 대한 일본 활동가들의 회의감 등도 대규모 전향의 발생에 한몫했다.
1929년~32년 발생한 ‘해당파(노동자파)’ 그룹, 1933년 이후 사노 마나부(佐野学)와 나베야마 사다치카(鍋山貞親) 등 일본공산당 최고위 지도부에 의해 주도된 ‘일국 사회주의 그룹’ 등은 천황제를 인정 하고 전쟁 반대와 식민지 해방의 강령을 부정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적 운동을 일본 대중에 결합하겠다고 주장했다. 물론 각국의 구체제 지배를 용인하거나 국제적 혁명의 전망을 부정하면서 국민국가 내에서 노동자운동을 재편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여러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꾸준히 등장해왔다. 그러나 일본의 전향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후 빠른 속도로 노골적인 천황주의나 국수주의적 침략 옹호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자는 이토록 전향이 대규모로 그리고 철저하게 발생했던 이유를 당시 일본 사회 및 일본 공산주의 운동의 독특한 양태에서 찾는다.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된 근대에 있어서 개인 내면의 회심을 주된 근거로 하는 ‘전향’은 성립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종교적 역할까지도 수행하던 천황제의 지배가 강하게 존속한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의 내면까지도 국가의 관심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본공산당의 운동 또한 천황제라는 하나의 종교적 지배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서 천황제 타도의 슬로건에만 집착하였고, 이러한 “종교결사”(p259)적 운동 속에서 성장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권력의 탄압 앞에서 유연하게 ‘위장전향’을 하기보다는 종교적인 죄책감 속에 내면적으로도 천황제에 귀의하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에서도 드러나듯, 이처럼 ‘전향’이 만연하는 가운데 ‘비전향’을 일종의 도덕적 ‘순교’로서 절대화해온 태도는 전후 일본공산당의 재건 과정에서도 중요한 질곡으로 드러났다. 변화하는 현실을 포착하고 대중운동의 조직에 개입하기 위해 이론을 혁신하기보다 도덕적 권위와 신념에의 충실성만을 강요하던 태도는 파멸적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전후 강령 논쟁의 ‘구조개혁론’
패전과 해방은 반체제 사상과 사회운동이 다시 일본에서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미군의 점령과 냉전의 격화라는 복잡한 정세에 대응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남기기도 했다.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에서 보았듯 재건된 일본공산당은 초기에 미군정에 협조하는 점령하 평화혁명 노선을 채택하면서도 천황제 타도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에 대해서는 매우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며 고립을 자초하였다. 이후 냉전이 격화되면서 코민포름의 권위적 지침에 따라 반미 무장투쟁 노선으로 급선회하는 일본공산당은,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시기 분파투쟁과 극좌 모험주의 속에 막대한 희생을 초래한다. 이러한 혼선이 일정하게 정리된 것은 무장투쟁 노선을 청산하고 분파 간의 당 통일을 이룬 1955년 ‘6전협’(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에 이르러서였다.
한편 다양한 혁신 세력을 규합하여 결성된 일본사회당과 아직 사회당에 참여하지 않은 채 민주인민연맹을 결성한 야마카와 등의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미군정의 점령군 권력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를 두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사회당은 군정 하의 총선에서 1947년 가타야마 데쓰(片山哲) 내각을 통해 잠시 집권하기에 이르지만 내각이 빠르게 붕괴하면서 향후 50년간 집권하지 못하는 ‘만년 야당’의 길을 노정한다. 당내의 노선 차이로 사회당은 1948년 좌파사회당과 우파사회당으로 분열되었으며, 야마카와와 노농파는 좌파사회당의 이론과 노선 형성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1955년 이룩된 좌우 사회당의 통일은 좌파의 우위 속에서 이루어졌고, 자민당과 사회당의 1.5당 체제(55년 체제) 속에서 노농파의 비공산당 마르크스주의는 제도권 혁신세력의 대표적 노선으로 자리잡았다.
그런 가운데 이론 전선에서는 전쟁 시기 중단되었던 일본 자본주의 논쟁이 재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공산당과 좌파사회당 내에서 일본 사회의 인식과 변혁 전략의 수립을 둘러싼 강령 논쟁이 전개되게 되었다. 두 세력의 정세 인식은 전쟁 이전의 흐름을 일정하게 계승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공산당계는 천황제와 미군 점령에 맞서는 토지혁명 및 민족해방 성격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우선적으로 달성한 이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한다는 2단계 혁명론을 수립했다. 한편 좌파사회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과제의 완수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1단계 혁명론을 주창하되, 이를 의회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방식으로 대중정당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50년대 말에 이르자 여전히 일본이 미국의 종속국인 것인지, 혹은 일본의 독점자본이 고도화되어 오히려 아시아에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재조정하고자 하는지를 두고 ‘일본 제국주의 부활 논쟁’이 자본주의 논쟁의 일환으로서 치열해졌다. 1955년 일본공산당은 6전협을 통해 평화혁명노선으로 선회하였지만, 공산당은 여전히 일본 자본주의의 ‘자립화’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발달한 자본주의와 미국의 지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두 개의 적’ 노선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 내에서부터 이탈리아 공산당의 그람시-톨리야티 노선에 영향을 받은 ‘구조개혁파’가 형성되어 주류파에 반기를 들었다. 일본 독점자본의 자립화와 제국주의의 부활이라는 추세를 인정하고자 한 구조개혁파는 공산당 주류파의 민족주의적 노선을 비판하고 반독점 과제를 토대로 한 노동자운동에 주력하고자 했다.
결국 공산당 구조개혁파는 일본공산당의 폐쇄적 구조에서 점차 당 밖으로 배제되었고, 이후 당과 독립적인 신좌익 분파로서 활동하거나 혹은 사회당 내의 구조개혁 논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 이후 제1야당인 사회당 내에서 벌어진 구조개혁 논쟁은 원칙론적 사회주의와 현실론적 사회민주주의 간의 논쟁으로 와전되고 말았으며, 구조개혁파는 오히려 ‘우파’로 몰려 논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구조개혁 노선이 지나치게 경제주의적으로 이해되면서 구조개혁파는 이를 현실적인 사회경제 정책의 차원으로만 표방하고자 했고, 이에 경계심을 품은 노농파 계열의 사회당 주류파는 구조개혁을 ‘개량주의’로 인식하여 배격하였던 것이다. 이는 구조개혁론 자체가 구체적인 정치적 이행을 사고하기보다 경제정책에 매몰되어 있었기에 발생한 일이기는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화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 내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고민하고자 한 구조개혁론의 고민 자체가 질식된 것은 여러모로 비극적이었다.
스탈린 비판 이후 ‘독립 마르크스주의’
일본공산당의 통일 직후에 발생한 56년 제20차 소련 당대회의 스탈린 격하와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중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탈린 비판을 타율적이고 비주체적으로 수용하던 일본공산당 주류파에 대한 혁신의 움직임은 ‘사상혁신파’와 ‘강령 반대파’라는 두 가지 갈래로 제기되었는데, 당내 혁신의 실패는 이들이 당의 지도에서 독립적인 여러 ‘독립 마르크스주의’ 흐름과 신좌익 분파들로 분화되어 나가도록 추동하였다.
1960년 미일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반발하는 안보투쟁이 대규모 대중운동으로 전개될 때, 일본공산당의 안일한 대응은 스스로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훼손하였다. 미국의 주도성이 확실하였던 1951년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 당시와는 달리, 1960년 신안보조약의 체결에 대해 사회운동 전반은 해당 조약이 단순한 미국의 강제가 아닌 일본 독점자본과 보수적 정치세력의 적극적 관계 재조정 시도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여전히 안보투쟁을 민족주의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일본 민족과 미국 간의 대립으로 인식하였으며, 안보조약 저지를 위한 대규모의 자발적 대중동원과 자연발생적 가두투쟁이 발생하자 이를 ‘트로츠키주의’의 폭력적 책동이라며 비방하기에 급급했다. 스스로 ‘전위당’을 자임하는 공산당이 “(대중에게) 능가당한 전위”(350면)가 되어버리자,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독립 마르크스주의’와 신좌익의 사상과 운동은 크게 트로츠키주의를 수용한 쿠로다 칸이치(黒田寛一) 등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日本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 혁공동), 전학련 내의 일본공산당 학생운동가들이 실천적으로 당의 방침에 반발하여 분화한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공산동, 분트)*, 그리고 이들과는 거리를 둔 채 보다 근본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혁신을 추구한 연구 경향들로 분화하여 전개된다. (고야마는 그 중 세 번째 흐름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 👉*분트(ブント) : ‘공산주의자동맹’의 별칭인 ‘분트’는 19세기 중반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해 독일에서 영국 런던으로 건너온 사회주의자들이 결성한 ‘공산주의자동맹’의 독일어 호칭인 ‘Bund der Kommunisten’에서 가져온 것으로, ‘동맹’을 의미한다.
이 중 1960년대초 신좌익 운동을 이끈 혁공동과 공산동은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였지만, 공통적으로 ‘전위’로서 자격을 잃은 일본공산당을 대체하여 새로운 ‘전위당’을 건설함으로써 혁명을 이룩하고자 목적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녔다. 하지만 이들은 학생운동에서 지녔던 막강한 영향력을 노동자운동에 있어서 발휘할 수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들의 조직론은 점차 비현실적이고 관료적인 형태로 나아가고 있었다. 올바른 노선을 담지한 ‘전위당’만 존재한다면 노동자계급에 자연히 잠재한 투쟁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대중의 현실에 대한 실제적 파악이 미흡하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었다. 결국 신좌익 분파들은 현실적 운동과의 결합 과정에 실망해갔고 동시에 스스로의 ‘전위당’적 정통성을 다투며 소모적인 갈등과 파편화된 분열로 치달았다.
그런 과정에서 운동이 잠시 침체해가던 60년대 중반, 고야마는 요시모토 류메이(吉本隆明)의 ‘자립주의’와 대중론을 통해 일본 독립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도달한 난점을 극복하고자 한다. 요시모토는 스탈린주의의 ‘관료화’를 극복하고 ‘혁명적 전위당’을 건설하겠다고 주장해온 신좌익 분파들이 사실상 스스로 비판해온 스탈린주의 정당과 비슷한 형태의 조직론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요시모토는 이데올로기론에의 천착을 통해 노동자계급 안에 잠재적 혁명성과 계급의식이 내재하고 있으며 올바른 지도가 필요할 뿐이라는 신좌익 분파들의 일면적 인식을 비판하고, ‘생활의식’을 가진 대중은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접목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중은 때로는 전쟁에 찬성하거나 군사주의를 용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투쟁적인 주체로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다는 점을, 그리고 ‘전위당’의 지도보다 대중의식의 ‘자립화’와 ‘자기권력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 류메이의 대중론은 “독립 마르크스주의의 사상과 운동의 전개에 현실적 유효성을 지닌 가능성을 부여하였다”(p381)라고 고야마는 지적하고 있다. 이는 60년대 후반 기존 분파 중심 운동과는 다른 형태로 대학가와 시민사회에서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폭발할 향후의 정세를 예고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 👉**안보투쟁 패배 이후 : 요시모토 류메이의 대중론과 자립론은 안보투쟁 과정에서 일본공산당을 비판하며 급진적 투쟁에 돌입한 학생운동 및 노동자운동 등 대중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안보투쟁의 패배 이후 ‘패배의 구조’를 의식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일본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고민 심화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대중의 ‘생활의식’에 대한 요시모토의 고민은 이후 점차 비관주의적으로 기울었고, 70년대에 이르면 소비자본주의와 과학기술 발달이 대중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전망으로 흘러간다. 요시모토가 이후 적극적인 찬핵론자가 되며 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도 그러한 사상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요시모토의 사상에 대한 고야마의 고평가는 60년대 그의 사상이 정치조직과 지식인의 ‘전위적’ 지도가 지닌 한계를 비판하고 대중의 ‘생활의식’을 더 심층적으로 고민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여졌던 ‘이데올로기론’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 마르크스주의’가 남긴 과제
지금까지 고야마가 정리한 50여 년에 걸친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빛나는 혁명의 승리가 아닌 뼈아픈 좌절의 역사였고, 이론과 실천의 종합이 아닌 긴장과 갈등의 역사였다. 정치적 조직과 긴밀한 연계를 지니면서 때로는 조직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사상과 이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사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가능성이 어떻게 여러 제약 속에서 ‘현실성’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했다. 스탈린 비판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아야 했던 전환기로서의 1967년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회운동 전반이 더 극심한 침체에 놓인 오늘,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기는 과제는 무엇일까?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의 전반적 성격에 대한 분석과 이를 변혁해나가기 위한 전략 수립에 대한 총체적 사상·이론의 체계라고 할 때,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은 시종일관 비서구 자본주의 성격의 분석과 함께 변혁을 위한 조직론으로서 ‘전위’의 역할에 집중되었다. 변화하는 일본 자본주의의 현실에 부합하도록 이론과 노선을 개조해나갈 운동 주체로서 ‘전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의 문제는 야마카와와 후쿠모토의 논쟁에서 시작되어 공산당과 노농파의 논쟁으로, 전후에는 여러 신좌파 경향의 분화적 발흥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코민테른과 코민포름 등 국제 공산주의 운동 지도부의 권위주의적 개입은 지속적으로 이론적 논쟁을 ‘정통파’ 다툼으로 왜곡시켰고, 이론의 발달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거나 서로 다른 사상 경향 간의 생산적이고 보완적인 만남을 가로막았다.
노농파의 야마카와와 이노마타는 일본공산당과의 논쟁 과정에서 전위를 하나의 ‘기능’으로 이해하며 “전위가 전위일 수 있는 것은 전위라는 이름을 자칭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운동에서 그것이 해내는 역할의 계급적 특질에 의해서”(p216)라고 주장했다. 노농파가 일본의 사회운동에 있어서 그러한 ‘전위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있겠지만, 전위당만을 자칭하면서 대중운동 내의 역할에는 소홀하던 일본공산당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날카로운 것이었다. 교조주의 및 ‘정통파 무오류’의 신앙과 결합된 ‘전위주의’는 전후 일본공산당의 양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공산당을 비판하며 분화한 혁공동과 공산동 등의 신좌익 분파들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되며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운동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일본 좌파의 궤멸을 초래한 ‘전위주의’적 신좌익 분파 간의 폭력행위(内ゲバ, 우치게바)*와 70년대 초 연합 적군의 내부적 린치 사건**도 결국은 ‘전위’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어떻게 답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 👉*우치게바 : ‘안, 내부’를 뜻하는 ‘우치’(內)와 독일어로 ‘폭력’을 뜻하는 ‘Gewalt’의 일본어 음역 ‘게발트’(ゲバルト)를 합친 단어이다. 일본 사회운동 내부의 폭력 행위를 뜻하는 표현이다.
- 👉**산악 베이스 사건(山岳ベース事件) :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일본 적군파)와 ‘일본공산당(혁명좌파) 가나가와현위원회’가 통합된 정치조직 겸 게릴라 집단 ‘연합 적군’이 산악에 설치한 아지트에서 군사 훈련 도중 ‘자아 비판’ 등을 명목으로 총 12명의 적군 단원을 폭행, 가혹 행위로 사망케 한 사건을 의미한다. 연합 적군은 이 사건 이후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위치한 한 별장에서 일으킨 인질극 ‘아사마 산장 사건’까지 겹치며 몰락하게 되었고, 동시에 이 두 사건은 2023년 현재까지도 일본 좌파 전반을 폭력적인 집단으로 낙인찍는 용도로 인용되고 있다.
고야마는 “정치와 사상·이론의 관계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실체”(p383)가 스탈린주의 비판의 의미를 되돌아보아야 할 일본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과제라며 책을 마무리한다. 당장의 정치적 필요에 지나치게 조급해하기보다 변화하는 현실에 부합하는 노선을 정립해낼 사상적·이론적 혁신의 자율적 역할을 보다 근본적으로 중시하는 것. 그리고 비현실적인 대중관에 근거하여 조직적으로 ‘전위’를 자임하기보다 정치운동이 퇴조하고 소비자본주의가 고도화되는 정세 속에서도 대중의 의식적 자립화와 주체화를 위해 끊임없이 대중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고야마가 남긴 전환기의 과제는 오늘날 우리가 사회운동의 재활성화를 위해 고민해야 할 지점과도 여전히 공명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 사회운동 논쟁 다음 편에서는 1960년대 후반 침체기를 뚫고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던 대학가의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운동과 시민사회의 베트남전 반대 운동 등을 야마모토 요시타카 당시 도쿄대 전공투 의장의 “나의 1960년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70년대 초에 이르러 빠르게 몰락하지만, 사회당-공산당의 기성좌파 및 여러 분파 운동으로 전개된 신좌파와 다른 방식으로 대학 및 시민사회에서 발흥하였던 대중운동의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는 일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 ① 비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 ② 전후 일본공산당의 오류
- ③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가능성과 현실성
- [계속]
글 :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