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 활동가에게 자전거와 추리소설이 중요한 이유

인터뷰 | 이 활동가에게 자전거와 추리소설이 중요한 이유

김예찬 활동가 인터뷰②

2022년 12월 8일

[읽을거리]인터뷰, 인터뷰, 진보정당, 활동가

인터뷰 1부에서 김예찬 활동가가 몸 담고 있는 운동의 현황과 전망 등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활동가 개인으로서의 신념과 관점, 생활과 운동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한다.

인터뷰 당일, 우리(플랫폼c 활동가 인터뷰팀)는 신촌에 위치한 정보공개센터 사무실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잠시후 김예찬 활동가가 등장했는데, 자전거 헬멧을 쓰고 땀에 젖은 상태였다. 앞 일정을 마치고 양재동에서 자전거 수리를 하고, 신촌까지 왔다고 했다. “한강에 자전거 도로가 있어서 괜찮아요. 양재에서 사무실까지 자전거를 탈 때 어려운 구간은 교대를 지난다는 것이죠. 윤석열 대통령의 출퇴근길이고 거기가 언덕이거든요. 자전거 전용도로는 아니지만 우선도로라 탈 만해요. 다만 차가 잘 비켜주지는 않죠.” 아무래도 자전거 이야기를 한참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 첫 계기

활동가들을 인터뷰할 때 항상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초반의 활동들이다. 어떻게 사회운동을 접했고,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에 대한 사연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서태지 팬이었고, 인디 음악을 듣거나 공연 보는 걸 좋아했어요. 당시 인터넷상의 인디음악 커뮤니티에서 <문화연대>라는 단체의 홍보를 접했죠. 문화연대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문화 관련 비평이나 여러 대안적인 사업을 위한 모임을 조직했거든요. 그 중 어떤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회운동을 처음 접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2002~3년에는 안티조선 운동이 활발했어요. 관련된 팜플렛들을 읽으면서 한국의 언론지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죠. 특히 안티조선 운동하는 사람들이 <우리모두>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거기 올라오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문화연대가 청소년이었던 제게 사회운동을 접할 수 있는 원초적 역할을 제공했던 거죠.”

안티조선운동 커뮤니티 우리모두
안티조선운동 커뮤니티 우리모두

2000년대 초반, 이 단체는 대중문화 관련 이슈들을 많이 다루었다. 진보적인 문화평론가의 문화비평 교육이나, 유명 가수들의 팬클럽과 활동가, 그밖의 좌파적인 연구자들이 모여 대중음악 개혁을 목표로 <문화 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단체를 꾸리기도 했다.

지금 대중음악 방송 프로그램은 1위만을 공개한다. 당시에는 대중음악 방송 프로그램에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가 매겨졌다. 이런 순위 매기기를 폐지하는 음악 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 한미FTA에 따라 시행된 스크린쿼터제 폐지 반대 운동 등 문화연대는 다양한 활동들을 주도해 왔다. 김예찬 활동가는 뮤지컬 <헤드윅> 상영회나 하자센터의 주민등록증 지문날인 거부운동 등 문화연대가 매개한 여러 사업들을 통해 기존에 가졌던 인식틀을 바꾸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그냥 학교 잘 다니고 공부만 하는 청소년이었는데, 이 분들은 주민등록증 만들 때 지문날인을 거부하시더라고요. 그런 저항의 개념을 상상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게 ‘인권 침해’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새로운 경험들을 문화연대가 많이 알려준 것 같아요.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많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는 경험이었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후 새로운 세상이 열렸죠.”

활동가들은 누구나 운동을 처음 접하면서 생각이 전환되는 경험을 겪는다. 그 과정에서 받는 충격은 각자 다르겠지만, 형언하기 어렵고 귀중한 경험이 된다. 작은 팜플렛 하나를 집에 가져가는 소소한 행위조차 나중에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는 계기가 되고,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는 씨앗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은 경험들이 모여 김예찬은 지금의 ‘활동가’가 됐다.

가장 억압적인 조직에서 활동 결심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해서 곧바로 ‘활동할 결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김예찬 활동가도 원래는 활동보다 대학원을 목표로 여겼다고 한다. 대학시절 학생회 활동에 적당히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편이었지만,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학생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진보정치를 책이나 인터넷으로 혼자 공부했다. 역사와 관련된 자신의 전공 공부에 좀 더 집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군대에 들어가 억압적 국가 조직의 폭력을 겪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저한테 충격이었던 건 너무나 폭력적인 조직이란 점이었어요. 군대에서 저는 좀 맞았거든요. 이런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을 왜 계속 존치시키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나중에 권력이 있는 자리(병장)에 올라가자 일은 편했는데, 행정의 꼼수같은 게 자꾸 보이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군대 내 사업비가 남으니까 갑자기 문방구에 가서 ‘사고 싶은 거 다 사’ 이러는 거예요. 국가 예산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 그리고 법적으로 병사가 하면 안 되는 일인데도 시키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폭력적인 조직을 국가가 왜 계속 놔두고 있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군대에 있으면 일체의 ‘정치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 금지된다. 여기서 정치적 행위란 국가가 용인하는 이데올로기 바깥의 모든 것들을 말한다. 휴가 나가는 병사들에게 집회나 투쟁 현장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오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당장 올해와 작년에도 군대 내부에서 많은 억압적인 사건들이 있었고, 독립적 사법권을 가진 군사법원조차 인권에 대한 기초적 개념이나 감수성이 없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큰 사건이 터지면 국방부 장관이 사퇴하는 식으로 책임을 묻지만, 최고 책임자 1명이 사퇴한다고 사건의 구조적 원인인 위계적이고 폐쇄적인 조직 구조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김예찬 활동가는 사회에 굉장히 큰 이슈들(촛불, 용산 참사, 쌍용차 옥쇄파업 등)이 있는데 군대에 있어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제대 후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군대에 있을 때, 인트라넷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어요. 군 인트라넷 링크들을 타고 찾다보면 게시판 형태의 은밀한 커뮤니티들이 있었는데 당시 독서 관련 커뮤니티가 있었거든요. 그때 그곳에서 활동한 사람들 중 지금까지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도 있고 여러모로 유명한 분들도 많았어요. 그 커뮤니티가 저에게 되게 의미 있었어요. 앞으로 뭘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와 있더라고요.”

그는 국가 폭력의 집결지이자 가장 위계적인 조직에서 구조적 폭력을 겪은 후, 이런 폭력적이고 비효율적 조직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활동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는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데, 그 중 플랫폼c 상근활동가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군 인트라넷 내 '책마을'은 2002년경부터 2010년까지 유지됐다
군 인트라넷 내 '책마을'은 2002년경부터 2010년까지 유지됐다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는

김예찬 활동가는 또래들보다 활동을 늦게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싸우는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단순히 연대하는 걸 넘어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활동에 막 입문하던 시기의 경험들은 여전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조금 늦게 운동에 입문했죠. 군대 갔다와서 활동 시작하면서 압축적으로 경험을 많이 한 것 같아요. 특히 제대 직후인 2010년~11년이 중요한 때였는데, 홍대 앞 두리반 강제 철거 반대 투쟁, 홍대 청소노동자 투쟁과 결합하면서 기억에 남는 경험들을 많이 했죠. 학교에서는 생활도서관 활동과 동아리연합회를 하면서 총학생회 회칙 만들기 등의 활동들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대에서 법인화 반대 투쟁에 연대하며 본관을 점거하던 시절도 있었네요. 반값등록금 투쟁 시기 집회에도 많이 갔죠. 무엇보다 당시 서울에 농성장이 많았거든요. 여성가족부 건물 앞에서 현대차 성폭력 피해자의 농성장이나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에도 연대했죠.”

김예찬은 2010년 3월 군대 전역과 함께 진보신당에 입당했다. 한데 우연치 않게도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에게 당직자로 일할 기회가 왔다.

“2012년 통합진보당 만들겠다고 진보신당에서 고 노회찬 의원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탈당했죠. 탈당하면서 기존 인력들이 대거 나갔어요. 중앙당이나 시당에서도 채용을 해야 하니 공고가 나오더라고요. 채용공고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당직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한데 당시 마침 제가 학생회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졌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채용공고가 나온 거죠. 그래서 ‘한 번 써볼까’하는 생각에 쓴 건데 채용이 됐고,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김예찬은 대외협력부장으로 일했다. 중앙이 아닌 서울시당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이제 막 운동을 접한 그에게 좋은 경험이 됐다. 중앙의 일과 서울이라는 한 도시를 전담하는 일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시당의 대외협력부장으로서 장기 투쟁을 하는 농성장과 많이 연대했는데, 그런 활동을 통해 도시라는 공간이 어떻게 공공의 것이 아니라 사유화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한다.

“박원순 시장이 막 부임했을 때였어요. 그 분이 뭔가를 바꾼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노동자, 빈민, 상가 세입자 등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치에 맞는 변화인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많이 했죠. 그러면서 도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게 됐어요. 공간을 사유화하고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면서, 시민들이 도시의 주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농성장은 보통 투쟁하는 건물 앞 인도에 깔리잖아요. 거기에 농성장을 차리면 반대 세력들은 “불법시설”이라며 철거하려 하고, 지나가던 시민들도 보행에 방해가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죠. 그런데 실제로 을지로에 가보면, 많은 철공소가 도로에 물건을 적재해놓고 길을 자유롭게 쓰거든요. 소유권이 있는 건물은 그렇게 자유롭게 쓰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못 쓰는 건지…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이어야하는데 누구는 사유화해서 쓰고, 우리는 집회도 못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도시 공간이 건물주나, 소유권을 가진 사람이나, 자동차를 타는 사람 등의 위주로 재편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당시에도 서울 지역에는 재능교육, 골든브리지, 세종호텔 등 장기투쟁 농성장이 많았다. 사안별 대책위원회 같은 공간에 진보신당 담당자로 함께 하다보니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많이 만났다. 또,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동선은 여러 농성장들을 왔다갔다 하는 시간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현대차 직장 내 성희록 피해 노동자 연대 집회에서 발언 중인 김��예찬 활동가
현대차 직장 내 성희록 피해 노동자 연대 집회에서 발언 중인 김예찬 활동가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그의 입장에서는 혼돈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나면 시급하게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장기 투쟁 농성장은 쉬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투쟁하는 이들과 동고동락하며 연대의 관계를 맺어나가는 경험은 든든한 동지애를 형성하기도 한다. 비록 싸움의 결과가 좋지 않아도 ‘관계’라는 유산이 남는다. 물론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어떻게 투쟁의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라는 고민과 연대의 관계 맺음, 투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을 유념하며 나아가는 것은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다.

“알고 간 것 아니냐”는 물음에 김 활동가는 이렇게 답했다. “제 입장에선 모든 게 처음 듣는 이야기니까 그냥 가서 듣는 거죠. 이 사업장은 어떤 일 때문에 투쟁하는지 얘기 듣고, 성명 내야 된다 그러면 성명 내고, 규탄하고 그런 것만 했던 거죠. 집회 있다고 하면 집회 홍보도 하고, 당원들이 많이 안 오면 속상하기도 했고, 그런 경험들이 재밌었어요.”

김예찬에게도 활동가로서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는 완벽한 활동가의 전형을 만드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와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역할 배분이 잘되면 훌륭한 조직이 되지만, 자원의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걸 다 채울 수는 없고 빠지는 부분들이 생겨요. 예를 들면 저는 꼼꼼하게 챙기는 걸 잘 못하는데요. 그런 부분을 똑같은 사람에게 계속 맡기면 문제가 있죠.”

활동가들이 모든 걸 다 잘하지는 못해도 공부하고 배우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많다. “이를테면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단체 활동과 관련된 모든 뉴스를 다 챙겨볼 순 없잖아요. 하지만 키워드를 넣어서 ‘정보공개청구’라는 문구가 있는 뉴스만 따로 보는 건 가능하죠. 제가 매일같이 꼼꼼하게 챙기지는 못해도, 누군가 기술적으로 쌓아두면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만약 재정 결산을 잘 못한다면, 엑셀을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죠. 이런 것들은 공부를 통해 메울 수 있는 부분일 거에요.”

그 역시 지난 박상은 활동가 인터뷰의 ‘조직화’에 대한 부분을 인상 깊게 봤고, 동의하는 편이다. 한데 개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조직화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고백했다. 조직화라는 게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는 것인지 고민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화 역시 ‘어느 정도는 누구나 배워서 할 수 있는’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평등한 관계와 조직적인 규율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혼자서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그만큼 못한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잘 하자’인 거죠.”

자전거와 오픈스트리트 운동

김예찬 활동가는 평소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휴일에도 자전거를 즐겨 탄다. 그의 가까운 지인들은 어렵지 않게 “같이 자전거 타자”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인터뷰 당시에도 자전거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해서 인터뷰팀을 만나러 왔다.

김예찬 활동가의 자전거 VÄNLIGT
김예찬 활동가의 자전거 VÄNLIGT

“원래 자전거 타는 게 취미에요. 생활에서나 여행용으로도 타죠. 저는 운전면허가 없거든요. 근데 전기자전거는 법적으로 시속 25km 속도 제한이 걸려 있으면 자전거로 취급을 하기 때문에 원동기 면허가 필요 없어요. 어쩌다보니 면허를 안 땄는데 굳이 면허를 따야 하냐는 생각이 든 거죠.”

게다가 그는 오늘날 현대 도시가 지나치게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문제적으로 여긴다. 명분이 생긴 셈이다. “자동차 위주로 설계된 도시 공간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면허를 아예 따지 말자고 다짐했죠.”

한국에서 살다보면 차 없는 생활이 불편할 때가 자주 있다. 그 역시 피치못해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타인에게 부탁해야 하고, 그럴 땐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이 계속 필요하니 자신도 면허를 따야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데 ‘면허를 안 갖고 있는 것도 나름의 저항성을 갖는다’는 한 선배 활동가의 말을 듣고 면허를 따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의 무면허는 만인의 이동권을 위한 개인적 저항인 것이다. 김예찬 활동가의 소셜미디어 계정에는 도시 내외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는 좋은 점과 불편한 점, 도시의 자전거 정책, 공공자전거에 대한 단상, 해외 도시의 자전거 정책 등의 소식들이 자주 올라온다.

“공공자전거 정책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선 도시에 자전거 도로가 너무 없다보니까 일상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힘들죠. 도시 공간을 재편해서 보행자나 차 없는 사람 대신, 자동차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프랑스 파리에는 ‘15분 도시’라는 게 있어요. 파리는 지난 십몇 년 동안 도로를 자전거 중심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안 이달고(Anne Hidalgo) 파리 시장이 ‘15분 도시’를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자동차의 적’이라고 불리기도 했죠. 당선 후 자전거 도로를 신축하고 기존 차도도 자전거 도로로 바꿨는데, 유튜브 영상으로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요.”

김예찬 활동가에 따르면, 도심의 자전거 도로 확장은 코로나 이후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꾼다. 파리는 그 대표적 사례다. 미국의 경우에는 도시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자동차 위주로 공간이 주로 설계되는데, 중소 도시 중심으로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실내 행사가 어려워지니까 도로 위에서 커뮤니티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존 도로를 보행자나 자전거,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오픈스트리트 운동).

공간을 공유하는 문화는 세계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한국의 포차 문화나, 청계천이나 신촌에서 시행하는 “차 없는 거리”도 비슷한 걸까?

“한국의 차 없는 거리는 이벤트 성격이 강한 것 같아요. 시에서 하향식으로 밀어붙인다는 특징도 있죠.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운동을 민간에서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한국에서 집회 신고 내고 길을 막듯이 민간단체들이 교통을 막는 로드콘을 깔아두고 ‘여기는 오픈 스트리트다’라고 선언하더라구요. 처음에는 점거 형태로 시작했는데 점차 협의가 됐죠. 미국 도시는 자동차 중심인데, 코로나 때문에 대중교통이 위험하니까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인구가 늘었다고 해요. 미국,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인 것 같아요. 한국도 코로나 덕분에 자전거 인구가 많이 늘었습니다. 따릉이도 많이 타고요. 도입 당시 5천 대에서 이제 5만 5천 대니까 많이 늘어난 거죠.”

2020년 서울시의 데이터에 따르면, 코로나로 인해 서울 시민 4명 중 1명이 공공자전거인 ‘따릉이’를 이용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기후위기로 인해 자원과 환경, 공간의 공공성이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자동차가 아닌 이동 수단들이 주목 받고 있는데, 자전거도 그 중 하나다.

김예찬 활동가는 평소 이동할 때 어디에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야 되는지 생각하며 이동한다. 개인 취미에서 모두에게 이동하기 좋은 공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사고를 확장한 셈이다. 자전거 사회운동단체 설립이라는 그의 꿈이 이뤄지길 바란다.

프랑스 파리의 'Plan Velo'
프랑스 파리의 'Plan Velo'

추리소설 읽는 활동가

김예찬 활동가에겐 활자 중독증이 있다. 평소 소설을 많이 읽는데, 주로 사회파 추리소설과 미스테리, SF, 판타지 등 장르소설을 즐긴다. 특히 사회파 추리소설을 많이 읽는데,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범죄’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내는 게 사회파 추리소설의 묘미라고 한다.

“일본의 경우 장애인등급제나 부양의무제 같은 사회 제도와 범죄를 관련시킨 소설들이 있어요. 북유럽에는 재벌 범죄를 다룬 사회파 추리소설도 있고요. 각 나라마다 한국과 양상이 조금씩 달라요. 예를 들어 북유럽 추리소설을 보면 정말로 과거에 ‘계급 타협’이 일어났구나 싶은데요. 북유럽 자본가들은 세금을 많이 내는 대신, 대중들이 거의 간섭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아예 평범한 사람들과 분리된 채로 산다고 느껴지더라고요. 자신들은 귀족으로서 의무를 다했으니 간섭받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인식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한국의 경우에는 금방 풀려나긴 하지만 어쨌든 재벌도 감옥에 가는데, 북유럽은 재벌들의 범죄에 대해 수사를 못하는 상황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요. 정치로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 있는 거죠. 북유럽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많이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거기도 전쟁 범죄 등 어두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걸 볼 수 있었어요.”

사회파 추리소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다보니, 김예찬 활동가가 요즘 읽는 책이 뭔지 궁금해졌다. “(추천하고 싶은 책이) 많아요. SF소설 중에는 보르코시건 시리즈라고 있죠. 판타지와 추리가 가미된 소설인데요. 왜소증 장애인이 주인공이고, 미래가 배경이라 지금과는 다른 기술적 발전이 있으면서도 주인공의 성장 배경을 통해 억압적 사회 풍경을 보여주죠. 자신의 콤플렉스랑 싸우고, 사회 억압과 투쟁하면서도 영웅적인 일들을 하는 줄거리에요.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와 억압적인 사회와 싸우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요. 모험담이 엄청 재밌어요. 인공 자궁이라는 소재도 나오는데, 인공 자궁이 생기면 재생산에서의 해방이 오고 성평등이 실현될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이 사회는 인공 자궁이 보편화되어도 복합적 맥락으로 주인공이 장애를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된 거죠. 기술로는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줘요. 꼭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취미가 다양한 활동가를 보면 언제 그럴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그냥 의식적으로 쉬는 시간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독서는 도서관이 있으니 돈도 별로 안 들어요.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비우자고 정해놓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하루는 아무 일정도 잡지 않는 거죠. 예전에는 저도 주말에 이런저런 세미나를 많이 참가했는데요. 활동가들은 쉬는 시간도 어차피 활동과 연관된 걸 하거든요. 의식적으로 쉬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

활동가들은 일도 많고, 예측 불가의 상황이 발생해 퇴근 후 집에서도 일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다가 번아웃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을 지탱하는 심리적 기반이 무너지면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랫동안 투쟁할 수 있는 충전의 시간과 조건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운동을 지지하는 기반이 단단해지고, 동료들이 평등한 관계를 조직할 때 가능할 것이다. 🚴‍♂️🚴‍♂️🚴‍♂️

🏀인터뷰 다시 읽기

김예찬 활동가 인터뷰①

김예찬 활동가 인터뷰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