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부에서 김예찬 활동가가 몸 담고 있는 운동의 현황과 전망 등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활동가 개인으로서의 신념과 관점, 생활과 운동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한다.
인터뷰 당일, 우리(플랫폼c 활동가 인터뷰팀)는 신촌에 위치한 정보공개센터 사무실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잠시후 김예찬 활동가가 등장했는데, 자전거 헬멧을 쓰고 땀에 젖은 상 태였다. 앞 일정을 마치고 양재동에서 자전거 수리를 하고, 신촌까지 왔다고 했다. “한강에 자전거 도로가 있어서 괜찮아요. 양재에서 사무실까지 자전거를 탈 때 어려운 구간은 교대를 지난다는 것이죠. 윤석열 대통령의 출퇴근길이고 거기가 언덕이거든요. 자전거 전용도로는 아니지만 우선도로라 탈 만해요. 다만 차가 잘 비켜주지는 않죠.” 아무래도 자전거 이야기를 한참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 첫 계기
활동가들을 인터뷰할 때 항상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초반의 활동들이다. 어떻게 사회운동을 접했고,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에 대한 사연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서태지 팬이었고, 인디 음악을 듣거나 공연 보는 걸 좋아했어요. 당시 인터넷상의 인디음악 커뮤니티에서 <문화연대>라는 단체의 홍보를 접했죠. 문화연대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문화 관련 비평이나 여러 대안적인 사업을 위한 모임을 조직했거든요. 그 중 어떤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회운동을 처음 접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2002~3년에는 안티조선 운동이 활발했어요. 관련된 팜플렛들을 읽으면서 한국의 언론지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죠. 특히 안티조선 운동하는 사람들이 <우리모두>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거기 올라오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문화연대가 청소년이었던 제게 사회운동을 접할 수 있는 원초적 역할을 제공했던 거죠.”
2000년대 초반, 이 단체는 대중문화 관련 이슈들을 많이 다루었다. 진보적인 문화평론가의 문화비평 교육이나, 유명 가수들의 팬클럽과 활동가, 그밖의 좌파적인 연구자들이 모여 대중음악 개혁을 목표로 <문화 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단체를 꾸리기도 했다.
지금 대중음악 방송 프로그램은 1위만을 공개한다. 당시에는 대중음악 방송 프로그램에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가 매겨졌다. 이런 순위 매기기를 폐지하는 음악 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 한미FTA에 따라 시행된 스크린쿼터제 폐지 반대 운동 등 문화연대는 다양한 활동들을 주도해 왔다. 김예찬 활동가는 뮤지컬 <헤드윅> 상영회나 하자센터의 주민등록증 지문날인 거부운동 등 문화연대가 매개한 여러 사업들을 통해 기존에 가졌던 인식틀을 바꾸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그냥 학교 잘 다니고 공부만 하는 청소년이었는데, 이 분들은 주민등록증 만들 때 지문날인을 거부하시더라고요. 그런 저항의 개념을 상상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게 ‘인권 침해’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새로운 경험들을 문화 연대가 많이 알려준 것 같아요.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많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는 경험이었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후 새로운 세상이 열렸죠.”
활동가들은 누구나 운동을 처음 접하면서 생각이 전환되는 경험을 겪는다. 그 과정에서 받는 충격은 각자 다르겠지만, 형언하기 어렵고 귀중한 경험이 된다. 작은 팜플렛 하나를 집에 가져가는 소소한 행위조차 나중에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는 계기가 되고,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는 씨앗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은 경험들이 모여 김예찬은 지금의 ‘활동가’가 됐다.
가장 억압적인 조직에서 활동 결심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해서 곧바로 ‘활동할 결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김예찬 활동가도 원래는 활동보다 대학원을 목표로 여겼다고 한다. 대학시절 학생회 활동에 적당히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편이었지만,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학생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진보정치를 책이나 인터넷으로 혼자 공부했다. 역사와 관련된 자신의 전공 공부에 좀 더 집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군대에 들어가 억압적 국가 조직의 폭력을 겪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저한테 충격이었던 건 너무나 폭력적인 조직이란 점이었어요. 군대에서 저는 좀 맞았거든요. 이런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을 왜 계속 존치시키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나중에 권력이 있는 자리(병장)에 올라가자 일은 편했는데, 행정의 꼼수같은 게 자꾸 보이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군대 내 사업비가 남으니까 갑자기 문방구에 가서 ‘사고 싶은 거 다 사’ 이러는 거예요. 국가 예산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 그리고 법적으로 병사가 하면 안 되는 일인데도 시키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폭력적인 조직을 국가가 왜 계속 놔두고 있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군대에 있으면 일체의 ‘정치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 금지된다. 여기서 정치적 행위란 국가가 용인하는 이데올로기 바깥의 모든 것들을 말한다. 휴가 나가는 병사들에게 집회나 투쟁 현장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오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당장 올해와 작년에도 군대 내부에서 많은 억압적인 사건들이 있었고, 독립적 사법권을 가진 군사법원조차 인권에 대한 기초적 개념이나 감수성이 없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큰 사건이 터지면 국방부 장관이 사퇴하는 식으로 책임을 묻지만, 최고 책임자 1명이 사퇴한다고 사건의 구조적 원인인 위계적이고 폐쇄적인 조직 구조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김예찬 활동가는 사회에 굉장히 큰 이슈들(촛불, 용산 참사, 쌍용차 옥쇄파업 등)이 있는데 군대에 있어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제대 후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군대에 있을 때, 인트라넷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어요. 군 인트라넷 링크들을 타고 찾다보면 게시판 형태의 은밀한 커뮤니티들이 있었는데 당시 독서 관련 커뮤니티가 있었거든요. 그때 그곳에서 활동한 사람들 중 지금까지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도 있고 여러모로 유명한 분들도 많았어요. 그 커뮤니티가 저에게 되게 의미 있었어요. 앞으로 뭘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와 있더라고요.”
그는 국가 폭력의 집결지이자 가장 위계적인 조직에서 구조적 폭력을 겪은 후, 이런 폭력적이고 비효율적 조직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활동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는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데, 그 중 플랫폼c 상근활동가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는
김예찬 활동가는 또래들보다 활동을 늦게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싸우는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단순히 연대하는 걸 넘어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활동에 막 입문하던 시기의 경험들은 여전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조금 늦게 운동에 입문했죠. 군대 갔다와서 활동 시작하면서 압축적으로 경험을 많이 한 것 같아요. 특히 제대 직후인 2010년~11년이 중요한 때였는데, 홍대 앞 두리반 강제 철거 반대 투쟁, 홍대 청소노동자 투쟁과 결합하면서 기억에 남는 경험들을 많이 했죠. 학교에서는 생활도서관 활동과 동아리연합회를 하면서 총학생회 회칙 만 들기 등의 활동들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대에서 법인화 반대 투쟁에 연대하며 본관을 점거하던 시절도 있었네요. 반값등록금 투쟁 시기 집회에도 많이 갔죠. 무엇보다 당시 서울에 농성장이 많았거든요. 여성가족부 건물 앞에서 현대차 성폭력 피해자의 농성장이나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에도 연대했죠.”
김예찬은 2010년 3월 군대 전역과 함께 진보신당에 입당했다. 한데 우연치 않게도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에게 당직자로 일할 기회가 왔다.
“2012년 통합진보당 만들겠다고 진보신당에서 고 노회찬 의원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탈당했죠. 탈당하면서 기존 인력들이 대거 나갔어요. 중앙당이나 시당에서도 채용을 해야 하니 공고가 나오더라고요. 채용공고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당직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한데 당시 마침 제가 학생회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졌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채용공고가 나온 거죠. 그래서 ‘한 번 써볼까’하는 생각에 쓴 건데 채용이 됐고,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김예찬은 대외협력부장으로 일했다. 중앙이 아닌 서울시당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이제 막 운동을 접한 그에게 좋은 경험이 됐다. 중앙의 일과 서울이라는 한 도시를 전담하는 일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시당의 대외협력부장으로서 장기 투쟁을 하는 농성장과 많이 연대했는데, 그런 활동을 통해 도시라는 공간이 어떻게 공공의 것이 아니라 사유화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한다.
“박원순 시장이 막 부임했을 때였어요. 그 분이 뭔가를 바꾼다고 얘기 하긴 했지만 노동자, 빈민, 상가 세입자 등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치에 맞는 변화인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많이 했죠. 그러면서 도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게 됐어요. 공간을 사유화하고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면서, 시민들이 도시의 주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농성장은 보통 투쟁하는 건물 앞 인도에 깔리잖아요. 거기에 농성장을 차리면 반대 세력들은 “불법시설”이라며 철거하려 하고, 지나가던 시민들도 보행에 방해가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죠. 그런데 실제로 을지로에 가보면, 많은 철공소가 도로에 물건을 적재해놓고 길을 자유롭게 쓰거든요. 소유권이 있는 건물은 그렇게 자유롭게 쓰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못 쓰는 건지…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이어야하는데 누구는 사유화해서 쓰고, 우리는 집회도 못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도시 공간이 건물주나, 소유권을 가진 사람이나, 자동차를 타는 사람 등의 위주로 재편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당시에도 서울 지역에는 재능교육, 골든브리지, 세종호텔 등 장기투쟁 농성장이 많았다. 사안별 대책위원회 같은 공간에 진보신당 담당자로 함께 하다보니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많이 만났다. 또,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동선은 여러 농성장들을 왔다갔다 하는 시간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