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25일, 서울 망원동 플랫폼c에서 「심장에서 굳센 노래 솟을 때까지: 민중가요의 역사와 2022년의 민중가요」란 제목의 월례포럼이 열렸다. 민중가요를 주제로 한 이날 포럼에는 35명의 사람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참가했는데, 두 시간 가량의 긴 강연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거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강연자 대중음악의견가 서정민갑(존칭 생략)은 199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했고, 2000년대부터는 음악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써왔다. 2004년부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동시에 여러 공연들과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활동도 병행해왔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좋은 음악』, 『음악편애-음악을 편들다』, 『밥 딜런, 똑같은 노래는 부르지 않아』 등 책들을 집필했다.
📌한 독립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평론도 하나의 의견”이라면서 스스로를 ‘의견가’로 호명하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처음부터 평론을 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웠”다며, “작품에 대해 어떤 평론가는 좋다고 하고 어떤 분은 별로라고 하고. 결국 그게 자기 의견을 낸다는 생각이 들어 ‘의견이다’라고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랫폼c 월례포럼에서도 그는 민중가요에 대한 자신의 의 견임을 강조했다. 민중가요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고, 또 다르게 규정되어왔기 때문에 정해진 정답이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커뮤니케이션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노래는 현실을 기록하고 탈주한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가 언제 발표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즉, 노래가 현실을 드러낸다고 할 때, 가사의 메시지가 시대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비판적인 메시지가 없더라도 시대를 반영하기도 한다. 따라서 노래가 지닌 은유를 개방적 자세로, 답을 정해두지 않고 듣는 것은 중요하다.
민중가요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서정민갑의 질문에 월례포럼 참가자들은 “저항적 의미를 담는 노래”, “민중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노래”, “운동에 쓰이는 노래” 등 다양한 견해를 보였다. 우리가 흔히 민중가요를 생각할 때에는 문제의식을 고발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다시 만난 세계>는 민중가요일까? “민중가요가 아니었지만, 민중가요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한 참가자의 답변은 꽤나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하지만 민중의 생각과 감정을 담은 노래를 모두 민중가요라고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가령 트로트 곡 중에도 민중의 생각을 담은 노래들은 많다. 김국환의 <접시를 깨뜨리자> 같은 노래는 평범한 서민의 시선에서 자신의 삶과 감정을 이야기한 노래로 많은 인기를 구가했지만, 쉽사리 ‘민중가요’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민중가요의 짧은 역사
대답을 잠시 보류하고, 민중가요의 역사를 돌아보자. 해방 정국의 반공주의적 좌파 탄압으로 단절된 남한 사회운동의 역사는 70년대에 이르러 다시 불붙는다. 처음에는 전문 창작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됐는데, 해방 이후 맞이한 반공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따라서 현실 비판적인 노래를 부르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에 가까웠다. 그 포문을 연 것은 김민기가 짓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1971년)였고, 그밖에 대부분의 경우엔 찬송가나 가곡, 민요 등을 불렀다.
이외에 손에 꼽는다면 <농민가> 같은 노래가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지속된 대규모 농활(농민 학생연대활동) 때까지도 널리 부르던 노래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민중가요 역사는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중가요는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다수의 집단을 만났다. 이후로 민중가요는 이른바 ‘운동권’이 만들고, ‘운동권’이 부르는, ‘운동권의 하위문화(subculture)’가 됐다. <오월의노래2>, <전대협진군가>, <애국의길>,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나의 소망>, <파업가>, <철의 노동자> <출정전야>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열정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대학생들은 대중문화나 대중가요에 대해 강하게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것이 지배계급에 의해 발휘되는 효과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노래란 사회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매개라고 여겼으며, 노래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세계관, 지향, 논리를 생산했다. 그런 점에서 민중가요의 초기 특성은 복음성가와 유사했다.
70년대 시작된 민중가요는 유신 독재의 검열과 탄압으로 인해 은유적인 가사가 많았고, 포크풍의 스타일에 연민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80년대에 접어들어 1980년 광주 항쟁을 통한 각성, 학생운동가들의 집단적인 노동 현장 진출과 저항적 노동자운동의 형성 과정에서 이런 경향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펼쳐졌다. 민요가 갖는 민중성과 직설적 성격이 강화된 노래들이 쏟아졌고, 혹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 이후 노동자 투쟁의 구체적인 양식이 담기기도 했다.
민중가요는 목적의식적 음악이다. 독재와 불평등에 반대하고, 평화와 인권을 노래한다. 물론 민중가요를 부른 음악가들이 처음부터 이런 의식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민중가요를 소비한 대학생들은 노래를 들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 결과 대학 노래패들이 정치화되어 ‘민중가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가령 전대협노래단이 부른 <애국의 길> 같은 노래는 NL(민족해방)계열 학생운동 진영에서 가장 널리 불린 노래 중 하나다. 꽃다지의 조민하가 작사·작곡해 1993년 발표한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역시 학생운동 전반에서 오래도록 불린 노래다.
나의 삶은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한가
오늘밤 퇴근길 거리에서 되돌아 본다
이세상에 태어나 노동자로 살아가며
한편생 떠나고 싶지않은 동지들 앞에
불빛 속을 스쳐가는 수 많은 사람들
땀과 눈물 속에 피어난 노동의 꿈을 위하여
마음이 고달플 때면 언제라도 웃음으로
나의 사랑과 믿음이 되는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부끄럽지 않은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과하면서 민중가요의 하위 장르로 ‘노동가요’가 널리 생산됐다. 김호철의 등장으로 만들어진 <파업가>, <딸들아 일어나라>, <짤린 손가락> 등 노래들은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행진곡 풍의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포크풍 민중가요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1987년 항쟁에서 1991년 5월 투쟁에 이르는 학생운동의 짧은 흥기, 이후에도 1996년 8월 연세대 사태 전후까지 지속된 ‘대중적 학생운동의 시대’에 민중가요는 학생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문화였고, ‘운동권들의 문화’였다. 운동권이 음반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체계를 구성했다. 여러 캠퍼스에서는 과마다 노래패가 있었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대중조직으로 발전했으며, 대학가 앞의 인문사회과학서점에서는 앨범을 판매했다. 또, 한총련 출정식이나 노동절 전야제 같은 자리에 수만 명이 모여 함께 부를 수 있었다. 거대한 문화 생태계였던 셈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예술성이 아니라, 얼마나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집단의 생각을 반영하고 분출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파업가> 같은 노래가 3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조직된 노동자들에 의해 여전히 불리는 이유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예술에 대한 감각이 없어 <파업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78년 김민기는 <공장의 불빛> 앨범을 제작해 불법 카세트 테이프를 생산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대학 노래패 운동을 주도하던 활동가들은 1980년대 초반 사회 진출을 고민하면서 노래모임 새벽을 결성한다. 새벽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모아 불법 카세트 테이프를 복사했는데, 이는 민중가요 생태계를 크게 확장시켰다. 이들은 자신을 ‘음악가’가 아니라, 노래하는 운동가로 자임했고, 학생운동에서부터 사회운동 전반에서 ‘노래운동’을 확장할 수 있는 조직적인 틀을 구성한다. 전대노협, 서대노협, 민음협, 새벽 등이 그 산물이다.
민중가요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음악을 자기만의 저작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운동 속에서 불리길 원했고, 모두의 것이 되길 바랬다. 대학 노래패 등 창작 집단이 노래를 만들어 발표하면, 그 노래를 학생 사회에서 함께 불렀고, 투쟁의 현장에서 널리 전파됐다. 반대로 운동가들은 파업의 현장에 함께 연대하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다시 노래로 만들기도 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노래를 만드는가 하면, 노래를 만든 후에 그것을 함께 배우면서 ‘함께 투쟁하는 방식’을 생각하는 시간을 조직했다. 즉, 민중가요는 단순히 전문 창작자들의 생태계가 아니라, 전문 창작집단과 비전문 향유층을 포괄하는 사회운동 안팎의 대중들에 의한 생산-소비의 평등한 공동체 윤리를 갖고 있었다.
민중가요의 다양성
민중가요는 민주주의나 평등, 통일 등 거창한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변화했고, 여러 주제를 포괄했다. 젠더 문제나 여성 노동 같은 노래들도 있었는데, 노래마을의 <일이 필요해>가 대표적이다.
또, 지배계급의 행태를 풍자하는 노래들도 많았다. 민요 풍으로 부패한 지도층을 비판하는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같은 노래가 있었는가 하면, 가사 속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태도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독점 자본 타도가> 같은 노래도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2000년대 초반 힙합의 부흥에 힘입어 노동자운동의 내용을 입힌 노래들도 등장했다. Z.E.N이 대표적인데, 2001년부터 2004년 사이에 반짝 활동하였다.
강연자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런 노래도 있었다.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의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에서 문정현 신부가 한 연설을 토대로 활동가 조약골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 <평화가 무엇이냐>를 더 실버라이닝(the SILVER LINING)이라는 음악가들이 리메이크한 버전이 그것이다. 2005~2006년 당시 여러 차례 공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