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얀마 쿠데타 1주년을 맞은 지난 2022년 2월 1일 미국의 좌파 매체 Jacobin Magazine에 공개된 인터뷰 글 “My Goal for 2022 Is to See the Return of Democracy in Myanmar”을 번역한 것이다.
인터뷰에 앞서
1년 전 마 모에 산다르 민트(Ma Moe Sandar Myint) 미얀마노총(FGWM) 위원장과의 인터뷰를 매듭짓던 즈음, 군부 쿠데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그때 우리는 미얀마의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조직력을 가동하여 군부 쿠데타에 맞서 전국적인 총파업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 몇 주 동안,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미얀마 경제의 거대한 물결을 차단하는 노동자 행동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대부분 공무원 신분인 의사와 교사들은 봉제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에 돌입했다. 철도 노동자들과 다른 공무원 노동자들이 곧 뒤를 이었고, 민간부문 은행 노동자들도 합류했다.
초기 쿠데타에 맞선 저항은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이끄는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정부를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2010년, 아웅산수지는 오랫동안 미얀마를 통치해온 군부 장성들과 권력 분점 협약을 맺은 바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위대의 요구는 더욱 급진화되었는데, 이러한 요구에는 군부가 주요 부처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고 의회 의석의 25%까지 보장받는 ‘2008년 헌법’을 폐기하는 것을 포함한다.
10년 동안 NLD는 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정치적 권리, 노동권 확대와 결합해왔는데, 이는 의류산업이 활기를 띠고 기층에서 노동운동이 구축할 수 있게 해준다. 비록 국제적으로 로힝야족 집단 학살에 대한 냉담한 사과로 망신을 당하긴 했지만, 현재 다시 구금되어 있는 아웅산수지가 부분적 개혁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미얀마에서의 인기를 유지했다.
그러나 쿠데타에 맞선 축제와 같은 거리 시위가 시작한 저항은 군부가 시위대 학살로 이동하면서 폭력과 유혈 사태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쌓고 새총과 수제 공기소총을 들고 맞서 싸웠다. 현재까지 약 1,500명의 시위자가 사망했고, 수십만 명이 피난갔으며, 1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체포됐습니다. ‘플래시몹’ 시위와 ‘침묵 시위’ 등을 통해 저항을 이어가고 있지만, 지난해 여름 이래 거리에는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사라졌다.
쿠데타로 꿈들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비폭력 저항에 환멸을 느낀 수많은 청년들이 집을 떠나 민족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overnment)의 무장조직인 인민방위군(People’s Defense Force)에 합류했다. 이 그룹은 군부가 신경써야 하는 치명적인 세력이 되었다. 수제 폭탄과 게릴라 전술을 사용해 인상적인 수확을 얻었으며, 군부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힘으로써, 더욱 높은 탈영 비율을 촉발시켰다.
한편, 마 모에 산드라 민트를 비롯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들에게 미얀마에 대한 불매운동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류 산업은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쿠데타 이전에도 험난했던 봉제산업 노동자들의 삶은 간신히 버틸만한 수준이다. 지난해 의류공장 대부분이 위치한 공단 지역은 노동자들과 군부가 충돌하면서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무차별적인 살인과 체포가 급증했고, 군부의 손에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사라졌다. 현재 공단 지역은 계엄령 하에 있으며, 검문소의 군인들은 주기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언어적·물리적 성폭력을 가한다. 쿠데타 이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의류공장 노동자들이 빚을 갚을 가능성이 제한되면서, 막대한 채무가 쌓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해외로 출국해 일하기 위한 비자 신청 대기줄이 급격히 길어졌다.
쿠데타 1주년 하루 전, 현재 잠적 중인 노동운동가 마 모에 산다르 민트와 자코뱅 매거진이 마 인 인 트웨이(Ma Yin Yin Htway; 25세), 마 우트 이(Ma Wut Yi; 23세), 마 산 예(Ma San Yee; 42세) 등 세 명(이상 가명)의 의류 노동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모두 양곤에 있으며, 미얀마의 노동운동가들이다.
인터뷰어로 참여한 마이클 해크(Michael Haack)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미얀마를 위한 미국 내 캠페인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그 전에 그는 예일대학 맥밀리언센터에서 비영리단체 Voice of Witness가 기획한 구술사 시리즈 ‘맥스위니’를 통해 미얀마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또 다른 인터뷰어 나디 흘라잉(Nadi Hlaing)은 버마계 미국인 프리랜서 작가로 최근 유튜브 채널 Padauk Stories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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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과 나디 : 저항운동은 어떻게 진행되어왔나요?
마 산 예 : 우리가 1년 전에 확인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정치 활동이 벌어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얀마 사람들이 군부에 맞선 저항을 멈춘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여전히 매일매일 우리의 방식대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공장 노동자들은 침묵 시위의 날(도시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날)에는 출근하지 않습니다. 우리 공장에만 약 3,000~4,000명의 노동자들이 있죠.
우리 공장 관리자들은 우리한테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아요. 우리가 저항하는 이유를 알고 있고, 그래서 암암리에 우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거리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관리자들을 포함해 우리 공장 노동자들이 수천 명씩 집단으로 나가 보름 연속 거리 시위를 벌이기도 했어요. 우리는 시위대를 실어나르는 버스와 자동차들을 렌트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져 모금을 했죠.
이제 우리에게 쿠데타는 더 이상 새롭지 않아요. 지금처럼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했던 1988년 저항이 일어났을 때 저는 어렸죠. 그때 엄마가 거리에 나가 시위했던 걸 기억해요. 하지만 그 저항은 고작해야 며칠 동안 지속됐을 뿐이었죠. 이번 쿠데타에서 사람들은 1년 동안 내내 멈추지 않고 있어요.
마 모에 산다르 민트 : 이번에는 달라요. 우리는 독재 정권을 뿌리 뽑고 싶습니다. 우리는 힘든 시간을 통과해야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곳까지 가는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나아가야 해요.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저 스스로 왜 싸우고 있는지 되새겨요.
쿠데타 이후의 노동조건
마이클과 나디 : 쿠데타 이후로 근무 환경은 어떻게 변했나요?
마 모에 산다르 민트 : NLD 집권 시기에도 노동자들의 삶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나빠졌죠. NLD 정권 하에서는 비록 완전한 보호가 이뤄지지는 않았더라도 규탄의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었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가 있었어요. 비록 항상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죠.
이제 우리는 지하 노조에요. 현재 미얀마에는 합법적인 노조가 없어요.
고용주들의 탄압은 계속되고 있죠. 노동자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도피 중이죠.
또한 노동 자들은 직장에서의 언어폭력을 견디고 있고요. 아무런 혜택 없이 해고를 받아들여야 하죠. 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용직으로 전락해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노동자들의 상태는 모든 곳에서 위태로워졌습니다.
마 인 인 트웨이 : 쿠데타 이전에도 의류 공장들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어요. 우리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힘든 시간을 보냈죠. 그리고 막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자 쿠데타가 일어난 거에요.
요즘 어떤 공장들은 (원청으로부터) 충분한 주문을 받지 못해 조업을 단축하고 있고, 또 어떤 공장들은 장시간, 저임금, 휴식 없는 현장이 되어 노동자들을 한계로 몰아넣고 있어요. 그리고 꽤 많은 공장들이 가동을 재개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렇다면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것들이 꼭 좋고 바람직하기만 한 걸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2020년 3월부터 계엄령이 시행되고 있는 흘라잉따야 공단에 위치한 공장들 같은 경우에는, 이 지역에 출입하려면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관문을 통과할 때 돈을 갈취하죠. 쿠데타 초기에는 핸드폰까지 뒤지곤 했어요.
쿠데타 이후로, 저는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옮겨다녀야 했어요. 일용직 노동자로서 저는 일당으로 4,800미얀마캬트(미화 2.70달러에 상당)의 박봉을 받고 있는데요. 그럭저럭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돈이에요. 물가와 임대료가 올랐거든요. 게다가 우리는 이전에는 내지 않았던 항목들에 대한 세금을 추가로 내야 합 니다. 예를 들어 새로 핸드폰 유심칩을 살 때에도 그에 대한 세금을 내야 하죠.
마 웃 이 : 제 직장은 슈웨 파이 타르 산업단지(Shwe Pyi Thar Industrial Zone)에 위치한 군부 소유의 공장입니다. 관리자도 군 출신이죠. 그들은 우리에게 장시간 근무를 시키면서도 초과 근무에 대한 보상은 해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여기서 일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고 말합니다. 고용시장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참아야 합니다.
지난해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공장장은 우리에게 시위에 합류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내가 군부에 너희들이 [정치적으로]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지 폭로하면,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겠어?”라면서 우리를 두렵게 했죠. 그들은 그저 자기 일에만 신경을 쓸 뿐이에요.
폭력 진압이 절정에 달했을 때조차 공장주와 소장은 공장을 계속 열어놓고, 노동자들에게 ‘아무 일 없으니 일하기에 안전하다’고 말했죠. 공장 안에서 그들은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있고, 더 좋은 편에게 운영되고 있다는 식의 말을 퍼트렸어요.
마 산 예 : 저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다니는 공장은 쿠데타 기간 내내 문을 열어왔고 임금 삭감도 없었거든요. 우리 공장 사람들은 모두 지금까지 그럭저럭 일해왔어요. 가장 큰 변화는 초과 근무가 없어졌다는 건데요. 초과 근무가 없다는 것은 임금이 줄어든다는 걸 의미하지만, 업무량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 정규 근무 시 간 내에 서둘러서 해야 하기 때문에 업무량(+노동강도)은 증가한 셈이죠.
다른 공장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공장 노동자들은 관리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들은 우리의 걱정거리를 목소리 낼 약간의 자유를 주고 있죠.
어떤 면에서는 야근이 없는 게 좋아요. 왜냐하면 의류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늦게까지 일하다가 어둠 속에서 출퇴근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죠. 여전히 흘라잉따야 공단과 슈웨파이타르 공단은 계엄령 하에 있는데요. 그 말은 곧 우리 노동자들이 엄격한 통행금지 조치와 군인들로 구성된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죠. 관리자들은 정치 상황이나 계엄령 때문에 우리가 야근하는 게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야근이 없어진 부분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죠.
쿠데타 이후의 일상
마이클 해크 : 쿠데타 이후로 여러분의 일상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마 인 인 트웨이 :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저는 정규직 노동자였습니다. 그때 생활은 좋았어요. 저 자신뿐만 아니라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부양할 수 있었죠. 5년 전에 전 좋은 직장을 구하고 가족을 부양하려고 양곤에 왔거든요. 학교 돌아가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했고, 제가 받는 월급은 대학 학비를 감당하기에도 충분했어요. 그렇게 대학 1학년이 끝나갈 무렵에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했 고, 그 후로 저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언제 다시 학업을 재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양곤에 사는 스무살 짜리 여동생이 하나있는데요. 걔는 양곤에 왔을 때부터 공장에서 일했는데, 그때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어요. 그러다보니 어머니와 다른 여동생을 부양하면서, 우리 둘이 살아가기에는 참 힘들었죠.
마 산 예 : 지금 저는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어린 자식들이 셋 있어요. 먼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생했을 때 학교는 문을 닫았죠. 그리고는 쿠데타가 일어나니 학교들은 문을 닫았고요. 지금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게 안전하지 않아서, 집에 머물도록 하고 있어요. 저와 남편은 가능한 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책도 제공하려고 노력했지만, 우리는 종종 각자의 일 때문에 너무 바빠요. 남편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다니던 의류공장이 문을 닫아서 일자리를 잃었어요. 이제는 사방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죠.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저랑 남편 모두 잘 살 수 있었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노후를 위해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이제 우리는 적은 수입과 오르는 물가와 더불어 생계를 꾸려나가야 해요. 우리가 그럭저럭 버텨나가려면 저축한 돈을 써야 하는데요. 인터넷 사용료가 인상되어버렸죠. 군부는 VPN 서비스를 쓰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VPN을 사용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아요. 이제 우리는 VPN 어플을 핸드폰에서 삭제해야 하죠.
기생충을 박멸하기 위해
마이클과 나디 : 미얀마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에 대한 보이콧과 군사 정권에 대한 제재 요구에 대해 당신은 생각하시나요?
마 인 인 트웨이 : 양면적이에요. 한편으로는 군부와 거래를 계속하는 대신 (미얀마를) 떠나기로 한 기업들이 있어 다행이고요. 반면에 그것은 일자리를 잃어가는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만약 공장들이 문을 닫고 양곤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된다면, 제 유일한 선택은 고향으로 돌아가 밭에서 일하는 건데요. 그 상태에서는 가족을 계속 부양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직장 없이는 양곤에 머무를 수 없거든요.
마 모에 산다르 민트 : 미얀마에 대한 경제 제재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타격을 줄 수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기생충(미얀마 군부)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피흘리게 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포괄적 경제제재를 요구로 내세우기로 합의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것의 위험성과 장점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포괄적 경제 제재의 도전과 미묘한 차이에 대해 노동자들과 솔직하게 소통하기 위해 웨비나를 조직했었는데요. 이 웨비나에 참석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우리의 제재 요구를 이해하였고, 이를 지지하길 원했습니다.
우리는 포괄적 경제 제재에 대해 노동자들 안에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포괄적 경제제재에 대해 우리와 의견이 다른 노동자들이 우리가 취한 조치의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도 생각해요.
마 산 예 : 저는 기업들이 미얀마를 떠나면 노동자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해요.
국제사회의 이빨 빠진 발언과 무반응에 질렸어요
마이클과 나디 : 여러분에겐 미얀마의 미래가 어떻게 보이나요?
마 인 인 트웨이 : 노동조건의 악화, 만연한 실업, 치솟는 물가, 재정적인 어려움은 우리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겠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도록 강요받습니다. 범죄 행위와 무법 상태는 늘어날테고요. 그래서 안전이 걱정돼요. 여성로서 저는 어두운 밤에 거리로 나올 엄두를 못 내는데요. 바깥이 위험하단 걸 알기 때문에 집에 머무르죠.
노동자들을 위한 도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국제 사회가 우리를 잊지 않고 우리가 겪고 있는 부당함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 해줬으면 해요.
마 모에 산다르 민트 : 노동자로서, 우리는 변화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야 해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미얀마에서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노동자들의 기여는 간과되어 왔죠. 하지만 이 나라의 저항운동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노동자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저 항 운동의 선두에 서 왔습니다. 우리는 민족통합정부(NUG) 관계자들에게 “나라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회복하게 되면 노동자들의 희생과 공헌을 잊지 말라”고, “우리를 남겨두고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미얀마 상황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빨 빠진 발언과 무반응에 질렸어요. 대신 우리는 행동을 보고 싶어요. 2022년 한 해 저의 목표는 미얀마 민주주의의 귀환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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