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처리장으로 전락한 제도정치에서 살아남으려면

하수처리장으로 전락한 제도정치에서 살아남으려면

위성정당으로 편입하는 방식은 진보정당의 길이 될 수 없다. 사회운동적이고 급진적인 의제를 선점해 지역과 현장에서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

2020년 3월 30일

진보정당, 사회운동, 선거

지난해 12월 27일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되고, 비례의석 30석에 한정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지난해 선거 제도 개혁에 전력을 기울였던 진보정당에게는 마른 땅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고, 유권자의 표심을 조금이나마 더 반영하는 방향이었기에 얼마간 유의미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보수 야당의 반대와 막판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어깃장으로 인해 패스트트랙 통과 당시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각 정당이 합의한 개정안 내용에서 상당 부분 후퇴했기에 기대보단 한참 퇴색됐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본격적인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당시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지역구 의석이 많은 자당이 비례 의석에서 ‘손해본다’는 명목으로 위성 비례정당 창당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미래통합당은 미래한국당이라는 위성정당을 창당해 여론으로부터 “꼼수 창당”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당은 ‘가짜 정당’ ‘꼼수 정당’ ‘나쁜 정치’ 등 날선 비판을 쏟아내며 이것의 위헌성과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두 개의 위성

선관위가 위성정당 창당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미래통합당이 위성 정당 창당을 위한 몇 가지 구색을 맞추자 위법성과 ‘정치적 중립’ 간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미래한국당 창당을 승인해버렸다. 한데 놀랍게도 민주당의 이중적 행태가 펼쳐졌다.

2월 한 달 온 국민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한 불안에 시달리던 사이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었던 하승수는 갑자기 옛 민주화운동 원로들과 뜻을 모아 민주당을 비롯한 정의당·민중당·미래당 등 소위 ‘범민주진보’ 세력에 선거 연합을 위한 ‘연합정당’을 제안했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정치개혁연합을 결성하고, 자신들이 추진하는 ‘비례정당’은 “미래통합당이 만든 위성정당과는 다르다”며, ‘정책 연합 정당’을 주창하며, 민주당과 기타 진보적 색채의 소수정당들을 묶어 비례용 임시 정당을 만들자고 온갖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의당은 거절했고, 미래당은 빠르게 참여를 결정했다. 녹색당은 몇 차례 오락가락하는 메시지를 내더니 이내 당원 총투표에 돌입했으며, 민중당마저 참여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하지만 연합정당 참여를 놓고 민주당의 전 당원 투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민주당 지도부의 손익 계산표는 정개련 측이 그린 그림과는 차이가 있었다. 민주당은 “민중당이 참여하는 연합정당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한 발 빼는듯 하더니 이튿날 바로 정개련과 더불어 비례 연합정당 창당을 추진하던 ‘시민을 위하여’ 측에 손을 들어줬다.

3월 첫째주와 둘째주 하루가 다르게 터져나오는 뒷통수와 말바꾸기가 관전자들마저 혼란스럽게 했다. 하승수 집행위원장은 민주당의 실세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하며 합의와 원칙을 뒤집었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이런 배신은 빤히 예상된 결과였다. 애초 미래통합당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구상을 펼쳐놓고 뭔가 대단히 다른 척 하며 순진하게 민주당에 손을 내민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우선일 것이다. 하승수 전 운영위원장이 총체적으로 털리는 사이 녹색당 평당원들의 가슴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이번 총선 민주당은 두 개의 위성을 창조해냈다. 공식적인 위성정당은 ‘시민을 위하여’라는 울타리에 모인 민주당과 소수정당들로 ‘더불어시민당’이란 당명으로 창당됐다. 명목상 ‘연합 정당’을 내세우지만, ‘가자~’를 앞세운 민망한 수준의 소수정당과 사실상 친민주당 계열이었던 ‘시대전환’과 기존에 자신들이 추구하던 비판적인 사회운동의 가치를 제거한 채 투항한 ‘기본소득당’을 제외하면 민주당의 위성 정당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더불어시민당의 공천 과정은 사실상 민주당의 주도로 이뤄졌고, 모든 게 이뤄진 후에도 이들은 민주당의 위성 정당임을 공공연히 내세우고 있다.

또 다른 위성은 무소속 손혜원 의원과 성추행 혐의로 공천에서 배제된 정봉주 전 의원이 주도하는 열린민주당이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친문-친조국 인사들을 앞에 내세워 비례 후보를 선정하며, 일명 ‘문파’로 분류되는 민주당의 강성 지지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길 잃은 진보정당들

정개련 참여를 타진했던 정당들(녹색당, 미래당, 기본소득당)은 모두 ‘진보정당’을 표방하면서, 민주당의 비례 위성정당 논의에 참여했다. 이들은 민주당 집권 3년의 실책과 후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미래한국당의 비례의석 ‘강탈’을 막고, 공통 의제를 제시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녹색당 핵심 인사들은 “기후 국회”를 위해 비례 위성정당에 참여하자고 당원들을 설득하려했지만, 집권 여당의 기후 위기 대책과 녹색당이 내세운 정책 사이의 드넓은 차이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었다. 기본소득당 역시 다를 바 없다. ‘기본소득’이라는 자신들의 ‘원포인트 대의’를 앞세우지만, 집권여당 위성정당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 외에 그것을 반노동-친자본 정책으로 회귀한 민주당과 같은 깃발 아래에서 얼마나 유의미한지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다. ‘국회의원 한 자리’를 위한 타협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정의당 법률지원단은 미래한국당에 대한 집행정지를 법원에 신청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그 때문에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에 대한 법적 대처에 대해선 머뭇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시민들은 이런 차이를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

나아가 보름 전 심상정 대표는 “전략 투표”를 호소하기도 했다.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선명성에 기반한 ‘독자적인 정당’의 ‘실력’과 ‘명분’을 어디에서 회복할지 알기 어렵다. 선거법 개정안이 정당 정치의 의의를 실천하기 위한 기본전제였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만큼 민주당과 차별화된 정책과 노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더 이상 ‘범민주’라는 두루뭉술한 프레임과 알리바이 뒤에 숨는 모습으로는 지지세를 확장할 수 없다. 정의당의 정치는 진보정당다운 노선과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사회운동적이고 급진적인 의제를 선점하고, 이에 발맞춰 지역과 현장에서 대중과 호흡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진보정당이란 무엇인가

진보정당이란 무엇인가? 장석준 기획위원은 최근 출간한 『세계진보정당 운동사』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에서 단호히 전자 편에 서는 정당”이면서도, “리버럴 정당과 진보정당이 다른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시기나 상황에 따라서 민주주의 확장을 선택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단일하고 단호한 입장으로 지배세력과 노동대중 사이의 힘의 균형을 바꾸려 하는 정당”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덧붙여, 제도정치 하에서 진보정당은 “자본주의 구조의 균열을 내”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정치의 ‘형식적 완결’을 지향”해야 한다. 즉, 진보정당이 ‘진보정당다우려면’ 자신의 이념과 노선을 놓쳐선 안 된다.

한편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시기나 상황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민주주의의 확장을 고려하고, ’지배세력과 노동대중 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형식적 완결보다는 ‘효율적’ 완결성을 선택한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민주당은 ‘보수 정당’이자 ‘리버럴 정당’으로 분류하는 것이 합당하다. 만약 진보정당이 여론을 의식해 무원칙적이고 정치공학적인 계산들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진보정당’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 국면에서 정의당은 녹색당 등이 크게 휘청거린 것에 반해 진보정당으로서 지켜야할 마지노선을 견지했다. 하지만 지난 시기 정의당이 그런 원칙을 항상 지켰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정의당은 이름이 알려진 당밖 인사들을 영입해 인기 투표의 형식을 통해 후보를 선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와 역량 속에서 낳은 인사들을 배제했다. 이들 중 유의미한 수준의 득표를 얻은 것은 최대 정파 소속 후보 둘과 민주당 노선에 적극 찬동하는 대외 활동을 했던 일부 후보 뿐이었다. 또, 지난해 ‘조국 사태’에서도 비판적 포지션을 견지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스스로 ‘2중대’임을 반증했다. 이에 대해 한 인사가 당의 태도를 비판하자, 한 국회의원은 적극적으로 이 인사과 대적하며 더 큰 실망을 안겨줬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어이없는 태도였다.

긴 호흡으로 진보정당다운 길 가야

정의당 각 지역 활동가들은 다양한 경로로 반성적 논의를 해왔다. 그나마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최근 정의당 청년 후보들이 조국 사태 때 보인 정의당의 타협에 대해 “반성한다”고 밝힌 것 역시 그나마 다행이다. 제도정치가 쓰레기장으로 전락하고, 진보정당들과 일부 시민사회 활동가들마저 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가려는 노력이다.

이번 총선은 유례 없는 혼돈 속에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기성 정당들의 꼼수와 반칙이 난무하다보니 정치에 대한 대중의 실망감이 높아졌고, 코로나19로 인한 재난 상황이 장기화되어 투표율은 현저하게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또, ‘N번방 사건’이라는 항상 존재했으면서도 유례가 없는 ‘집단적 성폭력’ 범죄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명명백백 보여주고 있다.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전선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사회(운동)과 동행해야 하며, 말해야 되는 순간과 실천해야 되는 순간에 머뭇거릴 수 없다. 때늦은 후회와 반성은 진보정당의 실패를 반증하는 일밖에 되지 못한다. 일상적 시기엔 지역과 현장에서 단단한 체력을 키우고, 깊은 호흡과 넓은 안목으로 ‘진보정당’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

한국 정치가 처한 총체적 위기 국면 속에서 양대 정당의 행태는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을 양산하고 있다. 동시에 진보정당의 역사적 과오로 인해 스스로의 운신의 폭 역시 매우 좁아졌다. 진보정당은 이런 험난한 구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매우 어렵지만 지금이야말로 진보정치의 필요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국면이다.

김두범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