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각자도생 실리주의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정의당, 각자도생 실리주의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방향 없는 실리주의는 진보정당이 설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누적되고 있을 때 역사적 과정은 쉽사리 망각되고, 구조적인 공백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방해받는다. 결과적으로 이는 ‘흥행’ 노선에 올라타 덩달아 춤 추는 것 외의 선택지를 피하기 어렵게 할 뿐이다.

2020년 1월 18일

[읽을거리]정치진보정당, 정의당, 기후위기, 선거

지난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세 가지 화두가 있다면 ‘기후위기’와 ‘극우주의’, 그리고 ‘대중봉기’였다.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자들과 청소년들의 경고가 세계 주요 도심을 뒤흔드는 250만 명의 도심 시위로 이어졌고, 서울에서도 5천 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외쳤다. 유럽 등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준동했고,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흐름들과 경쟁했다. 또 칠레와 홍콩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 광장 시위가 일어났고, 삶을 피폐화시키는 권력에 맞선 대중의 분노를 드러냈다. 

물론 서울에서도 ‘대중봉기’라고 규정하기엔 부족하지만 광장에서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광화문에 기독교-극우주의자들이 모였고, 서초동과 여의도에는 친정부 우익 개혁주의자들이 모여 토요일 밤을 떠들썩케 했다. 하지만 기후위기나 불평등, 불안정 노동에 맞선 항의, 야만에 맞선 변혁의 운동은 아니었다. 검찰 권력이나 사법권 침해 등에 대한 비난은 있었지만, 노동 개악과 주거 불평등 등 우리 삶을 좌지우지할 현실의 모순에 대해선 아무 비판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정의당 주류 정치인들은 당내의 혼란스럽고 복잡한 여론 지형 안에서 헤매다가 손 쉬운 해법을 택하려 했다. 조국 국면에서는 민주당 편에 서서 이 국면에서 사람들이 느낀 불만이 무엇인지 포착하는데 실패했고, 문재인 정부가 부드러운 친자본 정부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 온갖 반노동 반복지 노선으로 치달을 때에는 제대로 된 대립각을 세우는데 실패했다. 최근 유시민-진중권 간 논쟁에서도 윤소하 원내대표는 진중권 논법의 부박함만을 탓하며 부질 없이 논쟁했다. 유시민류가 보인 비논리와 거짓말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었고, 부박함으로도 결코 다른 이에게 뒤지지 않았다.

양당 정치의 굴레에 빠지다

자유한국당이 정의당의 어정쩡한 노선을 “민주당 2중대”라고 비난하는 것은 경청할 가치가 별로 없다. 하지만 왼쪽 혹은 아래로부터 정의당의 어정쩡한 실리주의를 바라볼 때, 정의당은 민주당의 왼쪽 대안이 되기엔 한참 부족하다. 집권정당과 정책적으로 대결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자유한국당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왔고, 정의당의 자리가 양당의 어느 옆 자리가 아니라, ‘제3항’에 있다는 걸 인식시키지 못하게 방해했다. 정치인의 화법, 논쟁 구도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문재인 정부가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분명한 대립각을 세우지 못했다.

지난해 정의당이 가장 선명하게 민주당과 싸웠던 사안과 시기는 패스트트랙으로 상정된 ‘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재협상 과정이었다. 당시 사태는 하나같이 민주당의 파렴치한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의당이 이보다 실질적인 사안들에 있어서 포지셔닝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정의당도 결국 자기 지분만 신경 쓰는 정당일 뿐”이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를테면 탄력근로제 확대가 시도되거나 ILO 핵심협약 비준이 기약없이 미뤄질 때, 정보인권을 자본에 팔아넘기는 ‘데이터 3법 개악’이 오히려 바른미래당 의원들에 의해 가로 막히고 있을 때 정의당은 분명한 선을 그어 싸우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노동이 당당한 나라”에 대한 정의당의 비전이 무엇인지 보여줄 기회를 흘려보냈다. 이는 기성 정치에 실망하고 한국 사회의 모순에 절망한 민중들에게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양당 정치의 굴레에 더욱 빠지게 할 뿐이다.

인재 영입과 개방형 공개경선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선택한 생존법은 ‘인재영입’과 ‘개방형 공개경선’이었다. 이는 과거 기성정당들이 선거 직전에 보인 시민사회 영역의 젊은 인재 영입을 통한 이미지 세탁이란 점에서 다르지 않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민주당의 ‘마이너리그’처럼 보이는 정의당에서 치뤄진 일이란 점 하나 뿐이다.

개방형 공개경선 역시 시행이 명백해진 이후에도 당내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지역 활동가들은 중앙당이 지역 출마자들에 대해선 아무 대책이 없고, 내용 없이 흥행만 쫓음으로써 지역을 홀대한다는 비판이 많다. 흥행 역시 실패하고 있다. 후보 출마를 결심한 정치인들이 제각각 지인들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애초 목표로 했던 10만 명이 제대로 모여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감 기한이 10일 남은 현재 모인 선거인단수는 현저히 낮다.)

이런 가운데 당내 혁신 세력이 되어야 하는 일군의 좌파들과 청년 활동가들은 단결과 혁신보다는 ‘각자도생’으로 나아가고 있다. 정의당 안에는 3~4개의 크고 작은 좌파 활동가 그룹들과 몇 개의 청년 의견그룹들이 있는데, 이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공유하고 있고 정의당의 무엇을 혁신하고자 하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평등사회네트워크, 진보좌파, 민주적 사회주의자 등을 비롯해 여러 명의 청년 활동가들이 제각각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이름이 알려진 여러 좌파 정치인들은 비례후보 경선에 제각각 출마를 선언하고 상호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이들을 공히 지지하고 있던 이들로써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며, 지역 강화가 진보정당의 살길이라고 주창해왔던 혁신세력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낙관을 점치기 어려운 상황임에는 분명하다. 좌파적 혁신엔 구심이 필요한데 끌어당기는 힘은 없고 벗어나는 힘만 강하다. 20년 이상 진보정당 활동가로 살아온 이들이 2~3개월 전 심상정 대표가 영입한 ‘유명인’들의 벽을 넘어, 당선 가능한 번호를 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공도공망(共倒共亡)’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당내 좌파가 마주한 난제

주지하다시피 방향 없는 실리주의는 진보정당이 설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누적되고 있을 때 역사적 과정은 쉽사리 망각되고, 구조적인 공백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방해받는다. 결과적으로 이는 ‘흥행’ 노선에 올라타 덩달아 춤 추는 것 외의 선택지를 피하기 어렵게 할 뿐이다. 그 사이 우리는 무엇이 논박되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한국의 당-좌파가 맞닥뜨린 난제가 무엇인지 드러낸다. 첫째, 대중운동과 괴리된 정치운동(진보정당)은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둘째, 입시와 세대 갈등, 불평등 등 사회 모순의 복잡성을 간과한 민주당-자한당이라는 이원대립적 구도에서 좌파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셋째, 좌파의 지리멸렬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선 이념적 혁신을 바탕으로 한 좌파 재구성이 필요하다.

오늘날 ‘진보정당 노선’에 대해 전망을 세우고 논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별 정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단지 특수한 사례에 대한 논평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민중당이나 노동당 활동가는 정의당의 일에 대해 “우경화 한 집단일 뿐이지”라며 냉소할 뿐이며, 정의당 활동가는 여타 진보정당들에 대해 “노 관심”으로 일관한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그간 진보정당의 단결을 목표로 했던 몇 차례의 시도들이 참담하게 실패했고, 더 이상 ‘통합’이 각자가 그리는 비전의 타임라인에 위치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낳고 있는 병리적 효과에 대해 모른척 한 채로 상황을 설명할 순 없다. 엄연히 존재하는 ‘후과’가 있고,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모순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번 총선을 혼란스럽게 맞이 하는 정의당의 상황이다.

실리주의를 넘어 재구성으로

2020년은 분명 <원더키디>가 그린 아포칼립스적 풍광은 아니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모습인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 사회와 사회운동의 상황을 응시하노라면,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진보정당’에서 ‘진보정당들’로 분열된 상황은 ‘뉴노멀’이 됐다. 그것이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전반에서 낳는 병폐들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이에 대해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저 “별 수 없지, 뭐”라며 냉담 할 뿐이다. 한 노조 안에서 여러 진보정당들이 경쟁하는 상황은 노조의 단결마저 방해하지만, 냉소와 무기력 속에서 좌파가 재생할 길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진보정당이 노동자운동을 향해 외칠 호소력도 끝발 한참 덜어지는 얘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급할수록 잠시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시 무엇을 놓치고 지나왔는지, 나아가 어디로 돌아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짚어보자. 놓친 것은 ‘노선’이었으며, 미쳐 걷지 못한 길은 ‘이념적 혁신’과 ‘조직적 재구성’이었다. 청년 활동가 재생산 루트를 만드는 것을 놓쳐 새로운 활로 구축에 실패했다. 좌파의 무기력은 오늘날 심상정식 실리주의를 낳은 주요 요인이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총선 과정에서 우리가 최소한의 기준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야 한다. 첫째, 좌파 후보군의 공도공망을 피하고 단결을 해치지 않을 길을 찾아야 한다. 둘째, 진보정당에 어떤 정치인이 필요한가에 대해 보다 사회운동적 기준을 근거로 당원들을 설득하며 경선을 치뤄야 한다. 셋째, 총선 직후 좌파의 재구성을 도모할 준비를 해야 하며, 총선 과정이 이런 재구성의 비전을 만드는 한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넷째, 총선 이후 정의당 및 진보정당들의 좌파적 혁신을 위한 전방위적 노력을 개시해야 한다. 모든 걸 열어놓고 만나고, 논쟁하고, 공동 사업을 실험하며, 가치를 기준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글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