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30청년학생투쟁문화제와 예행연습

2012년 4.30청년학생투쟁문화제와 예행연습

집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하나의 공간이다. 그곳에 모인 각각의 사람들에겐 제각각의 이야기가 있고,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끼는 순간 희열과 감동을 느낀다. 그 공동의 것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해방'의 관계맺음이 이뤄진다. 따라서 굳어진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 없이 새로운 형식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2012년 6월 19일

[읽을거리]사회운동문화예술, 학생운동, 노동절

2012년 6월에 발간한 독립 잡지 『얼룩진』 제3호에 실린 글을 조금 수정한 글로,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가 읽힌다. 그해 4월 30일에 열린 청년학생투쟁문화제 기획단 활동의 소회를 밝히는 내용이다. '투쟁문화제'는 사회운동 재현의 몇 가지 주요한 형식 중 하나다. 특히 1990년대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 매년 노동절 전야에 열린 청년학생투쟁문화제는 급진 정치의 내용과 나름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지속된 바 있다. 2012년 4.30문화제는 고정된 형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정치적·미학적 인식 속에서 기획되었다.

지루해진 시위

집회나 문화제의 형식은 대부분 천편일률적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시작되고, 매끈한 말솜씨에 목청도 좋은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와 집회를 이어간다. 물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민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 대학생 문예패들, 때로는 박혜경 같은 연예인이 노래를 부르고(실제 2011년 반값 등록금 집회에서는 박혜경 등 연예인들이 등장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사이 사이 정치 발언이 이어진다. 발언자들은 대개 진보정당의 유력 정치인들인데, 거의 항상 비슷한 말을 한다. 때때로 감동적이고 격정적인 발언, 외침, 공연 덕분에 공간의 열기가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관성에 빠지면 그 무대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매우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여러 목소리, 외침들이 공기를 가르고 광장에 울려퍼지지만 사람들은 그 외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앉아 있는 참가자들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위치에만 머무르기 때문이다. 이를 깨부수기 위해 사람들은 함께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때로는 춤을 추기도 한다. 그러나 한 자리에서 수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얼마 없다. (있다고 해도 효과가 오래가지 않는다.)

하기에 집회/시위의 에너지가 폭발하고 모두에게 새로운 균열의 경험을 선사하려면 어떤 뛰어난 선동가들의 능력에만 기댈 수 없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뛰어난 배우 한 두 명이 있다고 해서 그 공연 자체가 훌륭한 공연이 될 순 없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무대 그 자체, 그리고 그 무대를 이어가게 하는 형식이며, 그것이 어떤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느냐이다.

활동 과정에서 생긴 이런 고민들은 크고 작은 실험들을 거치며 진척되기도 했고,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는 지점도 있었다. 돌곶이포럼에서는 연극과 문학, 미학 따위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이런 공부가 도움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실패의 경험들이었다.

2012년경 돌곶이포럼 회의 모습
2012년경 돌곶이포럼 회의 모습

시위가 불러일으키는 공기

시위 현장의 공기가 대단히 인상적일 때도 있다. 그것은 닫혀 있던 폐쇄적 공간을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으로 바꿔놓는 마술적 힘을 갖고 있다. 일본의 청년 사회운동가 마쓰모토 하지메는 '시위(demonstration)'가 “혁명 후의 세계를 실제로 만들어 보이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어느 정도는 일이 있는 말이다. 사람들은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자신이 알던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어떤 것을 감지한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일종의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지배이데올로기의 균열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독서라든지, 영화라든지, 문학, 사랑 따위를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가 알던 세계의 창에 균열을 내고, 언젠가 우리가 이 창을 깨고 완전히 다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삼키고 2199년 즈음의 세계, 즉 매트릭스 바깥으로 갔을 때처럼 말이다.

‘집회'나 ‘시위'는 인상적인 기억을 남기는 사회운동의 재현 형식 중 하나다. 공간과 시간의 균열, 다양한 사람들과의 충돌 속에서 미끄러지는 관계들이 중첩되어 발생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일상 생활 내내 우리 자신이 매우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우릴 이해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어떤 집회 공간에서 무수한 사람들과 공동의 것을 외치고 이야기할 때, 내가 그리 고독하지 않은 존재임을, 그리고 진정한 변화를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 수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어서 마치 아련한 꿈 속의 이미지들처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멀어지기도 한다.

2012년 4.30문화제에 설치된 서브 무대
2012년 4.30문화제에 설치된 서브 무대

4.30문화제

올해(2012년) 메이데이 전날인 4월 30일에 치러진 ‘122주년 노동절 맞이 4.30 청년학생투쟁문화제’는 지극히도 정치적인 행사이다. 따라서 '예술'보다는 ‘정치적인 것'에 가깝다. 그러나 구성적 측면에 있어서는 문화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노래, 춤 등 공연이 연달아 이어지고, 몇 년 전부터 사라지긴 했지만 탈패나 사물놀이패 같은 전통예술 공연도 배치할 수 있다. 이런 공연 형식을 통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4.30 문화제'의 목적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사회운동에서의 문화제라는 재현 양식에 대해 완전히 만족스러웠던 적은 별로 없다. 매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른바 ‘문예운동'이라는 것이 거의 소멸되면서, 내용이 지닌 급진성만큼이나 형식적 급진성을 담보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형식도 아닌, 엉성하고 딱딱한 것이 지속되기 일쑤였다. 관성 때문이다. 아직 새로운 형식의 예술 공연들을 담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관성들을 단번에 버릴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 변화의 기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느꼈다. 바로 이런 목적에서 문화제 기획단에 참여했다.

3월 즈음 광화문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문화제 <눈물을 멈춰>는 이러한 고민에 좋은 힌트를 주었다. 그 문화제는 강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었다. 여든의 노장 백기완 선생님의 '달거지 이야기'로 시작해서 집단의 퍼포먼스로 끝났는데, 이와 같은 스토리텔링 기반 구성이 매우 흥미로웠다. 전국 곳곳에서 정리해고로 일터를 잃고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수십여 명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준비한 공연이었다. 4.30 문화제에도 이런 에너지들이 있기를 바랬다. 그 에너지는 문화제 속에 구전민담과 같은 서사가 내재되어 있기에 작동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투쟁 문화제들, 넓게는 집회는 무엇보다 ‘연극'과 닮아있다. 혹은, 보다 연극적이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이 시작된 이래 인간은 언제나 정치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충돌 속에서 연극을 체현해 왔다. 그리고 ‘데모'(집회)는 우리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상상하는 것들 속에서 펼쳐보이는 일종의 ‘새로운 세계'와 다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실험'을 통해 상상 속의 이야기들을 펼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획단으로 모인 10명 남짓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다니고 있는 대학에서 문화/예술을 주제로 ‘활동’을 하는 학생 활동가들이었다. 우리는 문화제의 테마를 정하는 데 많은 토론과 고민을 나눴다. 지금 시기 문제들을 환기시키고, 배제된 사람들을 ‘호명’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귀에 쏙 박힐 만한 테마를 찾고 싶었다. 이전까지는 ‘반격’이나 ‘해후’, ‘다시 싸움을’같은 민중가요 노래 제목을 따온 테마가 대부분이었다. 이것들은 어떤 ‘제스쳐’를 요청하는 의미를 담는다. 올해에는 그것보다 우리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려면 투쟁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징검다리 같은 언어가 필요했다.

청년찾기

최종적으로 ‘청년실종’과 ‘청년찾기'를 놓고 고민하다가 ‘청년찾기’를 선택했다. ‘실종’이 임팩트있게 현실의 공기를 환기하긴 하지만 다소 씨니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청년찾기’는 좀 더 넓은 시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청년’담론이 난무하는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청년’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낭만적 기대를 넘어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저항하고 대안을 상상하는 ‘진짜 청년’을 찾자는 것이었다.

물론 ‘청년찾기’가 끝나고 벌어진 논쟁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청년찾기라고 해서 갔더니 ‘대학생’만 있더라”는 게 이 문화제에 대한 비판의 주된 요지였다. 4.30 문화제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연대를 위한 문화제라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이는 당황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사실 이런 점들이 예리하게 지적되지 못한 이유에는 문화제 기획단 멤버들 자체가 대학생들이었던 까닭도 있지만, 4.30 문화제가 저항하는 학생들의 단결과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한다는 목적으로 기획되어왔다는 역사적 맥락도 있다. ‘청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선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으로 시대적 모순에 맞서 싸우는 주체이기도 하다. ‘공동선’을 찾고 세대간 갈등을 넘어선 보편적 문제에 맞선 저항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앞으로 대학생이 아닌 청년들과 대학생이 어떻게 조우해야 할 것인가는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들

우여곡절 끝에 문화제가 끝났다. 현실적 조건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올해 문화제 기획단의 목표는 시간과 공간, 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와 예술 사이의 징검다리를 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목표는 영원히 달성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끊임없이 간극을 좁혀나가는 이 실험들은 그것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그만큼 의미 있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앞으로를 위해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들, 실패했던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나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처음엔 마당극 형식의 무대를 설치해 관객들이 무대와 거의 밀착한 상태로 ㄷ자로 모여 무대의 3면을 감싸는 형태를 기획했다. 이렇게 하면 무대 양면의 관객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더 깊이가 생긴 무대의 공연자들은 공연 자체를 다면화시켜야 하는 부담이 생기지만 확실히 무대와 관객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비용과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야외라서 갖는 한계도 있었다.

플랜B로 만들어진 게 중앙의 메인무대와 좌우측 서브 무대 설정이다. 공연들 중 일부는 관객들이 앉아있는 곳 한복판에서 시작되기도 했다. 엄보컬은 관객석 맨 뒤에 서서 핀라이트를 받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성균관대 몸짓패 아성은 커다란 깃발을 들고 소리치며 관객들을 가로질러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쌍용자동차 투쟁 SET의 경우에는 송경동 시인이 공장 서브무대에서 시 낭송을 하고, 노래패 <함께 가는 길>이 오른쪽 서브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김정우 지부장이 메인무대에서 발언을 하는 식으로 세 방향에서 연쇄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여러 공연 SET에서 이런 공간 활용을 시도했다. 공간을 여러 스팟에서 활용할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이런 장치들이 공연 전체에 예측불가능성을 준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관객들은 다음 공연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어느 지점에서 핀조명이 들어올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상상을 할 수 있다.

각 공연 단위들이 더 다양하고 새로운 창작을 시도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몸짓’(춤) 공연은 지나치게 양식화되고 전문화되어 그 공연들의 화려한 몸짓들에 비해 저항, 삶의 감각적인 영역을 드러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고민이 든다. 때로는 전문적이고 정교한 몸짓보다는, 상투성에서 벗어난 직관의 몸짓이 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독일의 전설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몸짓은 매우 자유롭고 인간 감정을 어떤 ‘자세’(게스투스)로 드러낸다. (물론 그의 이런 몸짓은 아주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할 것이다.) 과거 노동자문예운동으로서의 ‘몸짓’이라는 장르가 현대적이고 정치적인 춤-운동이었다면 이런 급진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청년찾기' 문화제의 4부에 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이 펼친 퍼포먼스는 인상적이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쌍용차 희생자들의 분향소, 그 앞을 좌우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서브무대 양쪽에서 시작되는 노래,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춤을 추는 사람들. 사소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퍼포먼스였지만 많은 현상과 감정의 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하나의 공간이다. 그곳에 모인 각각의 사람들에겐 제각각의 이야기가 있고,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끼는 순간 희열과 감동을 느낀다. 바로 그 공동의 것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해방'의 관계맺음이 이뤄진다. 따라서 굳어진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 없이 새로운 형식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이번 4.30문화제 ‘청년찾기’는 그런 공동의 공간을 만드는 하나의 예행연습이었다.

곳곳에서 시시각각, 보다 더 많은 예행연습들을 하자. 예술과 정치가 마주치는 공간을 만드는 시도를. 그것들이 하나하나 쌓이다보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

[참고] 2012년 4.30청년학생투쟁문화제 리플렛 내용
“청년찾기 :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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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등록금, 대학 구조조정, 국립대 법인화, 자치활동 탄압, 무한경쟁, 자살, 침묵하는 캠퍼스.
그리고 시대는 우리를 이렇게 규정한다.
‘88만원 세대’ ‘3포 세대’ ‘아프니까 청춘이다’
선거를 앞두고 위정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청년이 투표해야 세상이 바뀐다.”
“등록금 문제해결하고 일자리를 줄테니, 나에게 표를 달라!”
하지만 이러쿵저러쿵 오가는 말들 속에 정작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도 없었다.
“우리도 말 좀 하자!”
광장에 터져 나온 목소리들은 정치인들의 쇼에 가려 자리를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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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아프게 하는 숫자들이 있다.
2646. 정리해고로 삶이 갈기갈기 찢긴 쌍용차 노동자들.
1000. 이렇게 살 순 없다고 몸부림쳐온 날들.
22. 더 이상 늘어나서는 안 될, 생의 희망을 놓아버린 죽음.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변형근로제, 비정규직법.
인간을 일회용품으로 만드는 꼼수들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옥죄고 있다.
나만 아픈 것도, 청년이기 때문에 아픈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이 시대 모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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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우리의 무기는 ‘표 뿐’이란 말인가?
4년에 단 하루, 5년에 단 하루만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투표는 거의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당선만 되면 말 바꾸기 바쁜 사람들은 지금껏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명박만 지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당연히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는 오만한 야권은,
패배 속에서도 교훈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다.
이제, 투표장이나 국회에서 멈춘 우리의 목소리를 되찾고자 한다. 함께 손잡고 나아갈, 서로서로를 찾고자 한다.
그들이 아는 청년은 없다. 세상을 움직일 이 시대의 ‘청년’들은 바로 여기에 있다!

“122주년 노동절, 청년학생들은 요구한다!”

<노동> 쌍용차 노동자들이 해고된 지 1000일, 22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재능 노동자들이 “학습지교사 노동권 인정하라”라고 거리에서 이야기한지도 1500일을 넘겼다. 청년 노동자 300만, 그러나 이들의 절반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목숨은 파리목숨이고, 정규직 역시 상시적인 정리해고에 노출되어있고, 최저임금으로는 한 시간 일해서 한 끼 밥 먹기도 힘든 현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은 다른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들 자신의 문제이다. 우리는 요구한다!
정리해고 철폐하라! 비정규직 철폐하라! 생활임금 보장하라!

<교육> 2011년, 거리에 모인 많은 청년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등록금을 내려라! 대학의 기업화에 반대한다! 그리고 2012년, 변한 것은 기껏해야 교재비정도 깎인 생색내기 등록금 인하뿐이다. 여전히 고액인 등록금은 등골을 휘게 만들고, 국립대학들은 하나둘씩 법인화되었으며, 팔리지 않는 학과들은 구조조정당하고, 고려대 성폭력사건/서울대 성폭력사건에서 확인한 것처럼 학교에는 성차별적 문화가 만연해있다. 우리는 요구한다!
등록금문제 해결하라! 재단 적립금 환수하자! 국립대 법인화를 중단하라! 성폭력 없는 대학으로!

<주거> 안정적인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집이다. 그러나 전체 비정규직의 절반이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받는데 평균 주택가격은 2억 6천만원을 넘나들고, 작은 원룸을 유지하기 위해서만도 30만원이 드는 이 땅에서 내 한 몸 누일 곳을 마련하는 것은 한 사람이 평생을 걸쳐 노동해도 이루기 어려운 꿈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살 곳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요구한다!
주거권을 보장하라!

<정치> 선거의 계절이 되자, 너도나도 현실의 부조리를 이야기하고 고달픈 일상을 달래주고자 하며 자신들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5년 동안 우리의 삶을 나락으로 빠트린 이들도, 그 이전 10년 동안 비정규직을 양산한 시작한 이들도 앞으로 살기 좋게 만들어주겠다고 하며 우리를 ‘한 표’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표’이길 거부한다. ‘한 명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미래를 우리 손으로 열어가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에 반대한다! 노동자-학생 연대로 1%만의 세상을 바꾸자!

출연진 : 성균관대 ‘볼륨을 높여요’, 고려대 몸짓패 ‘비상’, 중앙대 ‘어퍼컷’, 성신여대 ‘악어잡기’, Occupy 대학생운동본부, 고려대 노래패 ‘함성’, 이화여대 ‘질주’+이화여대분회 청소노동자들, 한신대 부총학생회장 황은권, 경희대+한국외대 희망행동, 경희대 몸짓패 ‘미결’, 진보신당 도레미 실천단+재능지부+도레미실천단장 이유준희, 김석환+임솜이, 대구대 ‘봄비’ 빛나+재석+소원, 송경동시인, 경희대 정경대 학생회장 최유정, 서울대 몸짓패 ‘골패’, 성신여대 몸짓패 ‘메이데이’, 돌개바람,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노래패, 가수 ‘엄보컬과 김선수’, 악어들, 김재의, 국립오페라단 노동조합, 고려대 문과대 학생회장 조명아, 성균관대 몸짓패 ‘아성’, 연세대 ‘희망행동’+이화여대 ‘박하’,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정나위, 서강대 총학생회장 고명우 (다함께 선언문 낭독자) (+ 연기자들, 인터내셔널가 피아노 연주자)

기획 : 문화제 기획단 newwave
극 : 전성현
미술 : 손희민 임솜이 정래윤 황유진 홍은교
무대 : 음향자유
인쇄물 디자인 : 서희강
사진 : 이민휘
영상제작 : 돌곶이포럼, 연세대 영상제작동아리 ‘Channel&U’

문화제를 후원해주신 수많은 단체, 개인들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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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