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빅테크의 콜센터 하청 기지, 필리핀 BPO의 민낯

글로벌 빅테크의 콜센터 하청 기지, 필리핀 BPO의 민낯

영어권 국가에서 유명 브랜드를 이용하는 소비자가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면 누가 받을까? 필리핀과 인도에 위치한 하청 콜센터 기지 노동자들이 받는다. 필리핀에서 BPO산업은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 착취로 작동하고 있다.

2026년 7월 26일

[동아시아]필리핀필리핀, 글로벌 공급사슬, 노동조합, 하청, 노동조건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

필리핀 메트로마닐라를 구성하는 16개 도시 중 하나인 케손시티(Quezon City)는 면적이 가장 넓기도 하거니와 많은 유동인구가 오고가는 구도심이다. 그리고 쿠바오(Cubao)는 케손시티 내 상징적인 대중교통의 요충지이자, 필리핀 현대사의 명암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거대한 상업·문화 거점이다. 마닐라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최대 간선도로인 에드사(EDSA)와 동서를 잇는 아우로라 대로(Aurora Boulevard)가 교차하며, 전철 LRT 2호선과 MRT 3호선이 만나는 유일한 환승 구역으로, 출퇴근 시간 매일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곳을 통과한다.

오늘날 쿠바오를 특징 짓는 또 다른 사실은, 이곳이 신자유주의적 도시 개발과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와도 밀접하게 연결된 노동집약적 제조공장 및 서비스업 기지라는 점이다. 글로벌 사모펀드와 빅테크 자본이 24시간 굴러가는 '디지털 생산 기지'로 변화한 이 도시는 접근성 덕분에 고층 빌딩숲이 밀집해 있다.

쿠바오에서 일하는 20~30대 정규직 일자리 중 절대다수는 BPO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여기서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는 기업이 자신의 핵심 업무를 제외한 특정 비즈니스 프로세스 전체를 외부 전문 기업에 통째로 맡겨 운영하는 경영 전략을 가리킨다. 일손이 부족할 때 인력을 파견받는 인력 아웃소싱이나 단순 하청을 넘어, '업무의 기획, 운영, 관리 프로세스 전체'를 넘긴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초고도화된 외주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BPO 산업의 무노조와 착취

BPO 산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형태는 ‘콜센터’다. 과거 삼성이나 구글 같은 대기업들은 자사 내에서 상담원을 직접 고용해 콜센터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객 상담 프로세스 전체를 유베이스나 텔레퍼포먼스 같은 'BPO 전문업체'에 통째로 위탁한다. 원청 기업은 상품 개발이나 마케팅 같은 핵심 사업에만 역량을 집중하고, 까다로운 감정노동과 인사관리가 필요한 콜센터 업무는 비용을 깎고 또 깎아 하청을 주는 것이다.

콜센터 말고도 기업 운영 전반에 걸쳐 BPO 공급망이 활용된다. 노동자들의 급여나 보험, 복리후생, 상벌 처리 등을 관리하는 HR(인적자원관리) 잡무, 기업의 다양한 재정 처리와 회계 업무, 서버관리나 고객 데이터 입력 업무 등 매우 다양한 업무들이 아웃소싱된다.

필리핀에서 BPO 산업은 연간 300억 달러(국내 GDP의 약 7.5~8%) 이상의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종사자 수가 18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실제 필리핀 경제를 지탱하는 두 축은 해외로 나간 이주노동자들에 의한 송금 경제와 국내 BPO 산업이다.

필리핀 정부는 BPO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구역들을 '특별경제구역(PEZA)'으로 지정하고 있으며, 쿠바오의 사이버파크 타워(Cyberpark Tower)를 비롯한 BPO 전용 빌딩들은 그 중 하나다. 이곳에 입주한 글로벌 BPO 기업들에는 법인세 면제 등 특혜를 제공하는데, 자본 입장에서 이 구역의 매력 요소는 세제 혜택만이 아니다. '노동 분쟁이 없는 환경(Labor-free dispute environment)', 즉 사실상의 무노조 경영을 보장해준다는 점이야말로 이 구역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다. 콜센터 업무라는 게 결국 노동자들을 극도로 착취해 최대한의 잉여가치를 뽑아먹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가 입장에서 ‘무노조’만큼 매력적인 요소가 없다.

BPO 노동자들은 깔끔하고 세련되고, 에어컨도 잘 나오는 오피스에서 일한다. 더구나 필리핀의 다른 일자리에 비해선 초봉도 조금 높은 편이다. 그러나 BPO산업은 철저하게 비정규직화 돼 있고, 글로벌 하청구조의 가장 밑단에 위치해 있다. 노동자들은 회사가 부여한 실적 목표치에 못 미치면 바로 해고될 정도로 상시적인 고용 불안 상태를 감내해야 한다.

업무 강도도 극심하다. 초 단위로 통화를 제한하고, 가혹한 패널티 시스템이 있는데다 밤낮이 바뀐 교대근무로 인해서 수면장애나 면역력 파괴 같은 산업재해도 심하다. 고객들을 응대하는 B2C 인바운드/아웃바운드 콜센터의 경우 성차별적 언사나 인종차별적 폭언을 퍼붓는 서구 고객들을 상대로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로 인해 극단적인 감정노동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글로벌 공급망이란 무엇이며, 오늘날 자본주의는 왜 그것을 필요로 할까?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자본은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특히 대기업일수록 더 그렇다. 자본이 그런 ‘효율성’을 위해 구축한 것이 바로 글로벌 공급망이다. 예를 들어, 2008년과 2013년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생산물량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베트남에 대규모 공장을 설립했다. 가전제품 공장은 일찌감치 1995년에 구축한 바 있다. 삼성전자의 베트남 현지법인 대규모 공장에선 거의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직고용돼 있으며, 현지 하청업체들에도 최소 30만 명 이상이 일하고 있다. 삼성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 더 저렴하게 착취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미국·유럽의 글로벌 브랜드들도 정보통신기술(ICT) 발달 이후 기획과 금융 기능만 본사에 남겨두었다. 그밖에 고객 응대(콜센터)나 데이터 입력, 재무·회계 가공, 의료 기록 관리, 콘텐츠 모니터링 등의 '화이트칼라 하위 노동'은 인건비가 저렴한 나라들에 하청 외주를 맡기기 시작했다. 영어에 능통한 (예비)노동자가 많은 필리핀과 인도, 가나는 영어권 선진국 브랜드들이 가장 선호하는 노동시장이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넷플릭스, 스포티파이, AT&T, 삼성전자 글로벌 사업부, 씨티은행, 아마존, 페덱스 등 온갖 글로벌 기업들이 영어 콜센터를 이런 방식으로 외주화하고 있다. 특히 필리핀 노동자들은 미국 소비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유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미국의 대중문화와 소비 양식에도 익숙하다. 그런 만큼 미국 고객과 공감대를 갖고 있고, 까다로운 불만을 처리하는 '감정 노동'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필리핀 등 국가들에 영미권 선진국 자본의 글로벌 BPO 공급망이 구축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들에게 19세기부터 20세기를 아우르는 식민주의 점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인 셈이다.

필리핀은 전 세계 보이스(Voice) 기반 BPO 시장에서 압도적 1위(글로벌 마켓 셰어의 약 13% 내외)를 차지한다. 미국 노동자 1명을 고용할 비용으로 필리핀에서는 대졸+숙련 노동자 4~5명을 고용할 수 있고, 미국과 필리핀의 시차(12~16시간)는, 미국 기업들이 자국 고객들이 서비스 이용시 겪는 물리적·시간적 한계로 인한 불편함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하며, '24시간 끊기지 않는 글로벌 고객 관리 공급망'을 완성시켜준다.

‘물소가 일어서는 날’

지난 6월 6일, 서울 혜화동에서 열린 서울인권영화제에서 단편 다큐멘터리 <물소가 일어서는 날>이 상영됐다. 이 영화는 필리핀의 시인이자 전설적 활동가였던 에릭슨 아코스타의 시 <Walang Kalabaw sa Cubao(쿠바오에는 물소가 없다)>를 재해석한 나레이션과 함께 진행된다. 에릭슨 아코스타는 2022년 11월 30일 새벽, 필리핀 군당국에 의해 비무장 상태에서 체포된 후 잔혹하게 처형됐다.

과거 필리핀 농경 사회에서 물소는 평생 지주에게 쥐어짜이면서도 묵묵히 쟁기질을 하던 '소작농'들의 분신이었다. 시 구절과 영화 속 콘크리트로 뒤덮인 쿠바오에는 진짜 ‘물소’란 없다. 놀이공원의 가짜 '회전목마'와 철로 만든 승합차 '타마라우 FX(Tamaraw는 야생 물소 뜻)'가 내뿜는 매연만 가득할 뿐이다. 시가 묘사하듯, 땅을 빼앗겨 쿠바오로 흘러 들어온 농민들의 후손들은 이제 물소처럼 신성하게 일하는 대신, 밤새 매연을 마시며 동전을 구걸하는 호객꾼과 본드를 흡입하는 길거리 부랑 청소년이 되었다. 노동의 주체 ‘물소’는 사라지고, 자본의 잉여로 남은 것이다.

영화 <물소가 일어서는 날> 속에는 BIEN 소속의 여러 활동가들과 노동자들이 나온다. BIEN은 ‘BPO산업 직원네트워크(BPO Industry Employees Network)’의 약자로, 노조 결성 자체가 매우 어려운 필리핀의 BPO산업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조직된 독립적인 노동자 네트워크다. BPO 노동자 조직화가 어려운 이유는 이 분야 기업들이 경제특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무노조 경영 전략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고 하면 업체를 폐쇄하거나, 주동자를 해고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등 온갖 교묘한 수단을 동원한다.

주지하다시피 필리핀 정부는 노동조합이나 BIEN 같은 노동자 네트워크를 합법적인 권리 주장 단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을 "외자 유치를 방해해 국가 경제를 좀먹고, 후방에서 공산주의 반군(NPA)을 지원하는 테러 단체"로 낙인찍기만 한다. 가령 BPO 기업이 입주한 빌딩에서 노동자들이 부당해고나 열악한 환경에 맞서 파업을 모의하거나 유인물을 나누어 주면, 경찰과 사설 보안요원들이 즉각 투입된다. 그리곤 '사유재산 침해 방지'와 '외자 유치 보호'라는 명목하에 노동자들의 결사할 권리를 진압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정부와 경찰을 국민 안전의 지킴이라고 말할 수 없다. 초국적 자본의 헌법 위에 존재하는 사설 경비대에 불과할 뿐이다.

당연히도 필리핀 고용노동부(DOLE) 등 정부 기관들은 노동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BPO 기업들이 노동법상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인력 파견 업체를 통해 노동자들을 6개월 단위로 쪼개기 계약을 자행하는 상시적 불안정 노동 구조를 정부는 적극적으로 규제하지 않고 방치할 뿐이다. 설령 노동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노동조합을 결성해도, 서류 미비나 복잡한 절차를 이유로 합법적 노조 등록을 몇 년씩 지연시키기도 한다. 자본과 정부 관료들 사이에 강력한 정경유착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물소가 일어서는 날> 속 콜센터 노동자들은 자본의 통제와 식민지적 착취 구조에 맞서 다양한 층위의 저항을 지속한다. 이들은 사측의 감시 카메라와 모니터링 시스템을 피해 연대망을 만들고, 비밀리에 만나 BIEN 활동에 참여한다. 함께 콜센터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발하고, 노동권을 교육하는 자료를 배포하며 동료들을 조직한다. PEZA 빌딩 아래에서,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우리는 로봇이 아니다", "야간 수당을 보장하라", "사모펀드의 수탈을 중단하라"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친다.

국내에도 콜센터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투쟁하는 사례는 점차 늘고 있다. 유베이스 같은 기업들은 삼성, 현대카드, 쿠팡, 당근마켓 등 500여 개 이상의 원청 대기업·플랫폼 기업들의 상담 업무를 위탁받아 운영하며, 콜센터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며 인공지능 자동화를 위한 상담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이런 투쟁들은 필리핀 BPO 산업 노동자들의 투쟁과 무관하지 않다. 글로벌 브랜드들의 BPO 공급망 착취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장 밑단의 국제연대를 조직해 원청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는 것에 있다. 물소와 ‘황소’는 함께 일어서야 한다.

영화 '물소가 일어서는 날'의 한 장면
영화 '물소가 일어서는 날'의 한 장면

글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