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온주의의 태동
유대인 공동체 사이에서 시온주의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다. 당시 서유럽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상승된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렸지만, 러시아와 동유럽에 퍼져 살던 훨씬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극심한 차별과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1880년대 러시아 전역을 휩쓴 대규모 유대인 집단 학살(Pogroms)은 유대인 지식인층에게 정신적 충격을 안겼다. 제도상의 차별 해소와 이른바 ‘문명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향한 사회적 폭력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현실을 목격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던 프랑스에서는도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대 지식인들을 불안에 빠뜨렸다.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 누명을 쓰는 모습은 유럽 사회에서 동화되어 살 수 있으리라는 상층 유대인들의 믿음을 뒤흔들었다.


이런 격변의 배경은 경제적 불안정성과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19세기 후반 유대인들이 신분 상승을 이루며 주류 사회 고위직에 진출하자, 유럽 내에서는 이들의 성공에 대한 깊은 거부감과 위기감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적대감이 부상했다. 더구나 당시 유럽에선 제국주의의 발흥과 함께 ‘인종 과학’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주류 학계와 정치가들은 유대인을 정신질환이나 질병에 취약해 동화 자체가 불가능한 ‘열등한 인종’으로 의학적·생물학적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동화하려 한 유대인들조차 차별받은 현실을 볼 때, 유럽의 ‘유대인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주류 질서가 가하는 인종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레오 핀스커(Leo Pinsker)는 저서 『자동 해방』에서 시혜에 기대지 말고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며, 유대인만의 안전한 물리적 공간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시온주의에 중요한 힌트가 됐다. 시온주의 운동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본래 히브리어도 모를 정도로 오스트리아-유럽 문화에 동화된 세속주의자였다. 그는 유대인 문제의 해법이 유럽 사회로의 완전한 개종이나 동화라고 진지하게 믿었었다. 한데 파리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유럽 백인 군중들의 “유대인을 죽이라”고 외치는 증오를 목격한 헤르츨은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적 신념을 받아들여 동화되려 한들, 유럽 사회는 유대인을 결코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그가 세속적 유대인들을 규합해 『유대 국가』(1896년)의 비전을 제시하고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구체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시온주의는 유럽 제국주의의 모방
시온주의 운동은 등장과 함께 다른 유대인 공동체들의 비판을 맞닥뜨렸고, 192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시온주의자가 아니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종교적 정통성을 근거로, 혹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근거로 시온주의자들에 반대했다. 평생 유대인 역사와 유대 철학을 연구해온 샤울 마지드(Shaul Magid)에 따르면, 19세기 말 유대계 지식인들은 유럽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거나(부유한 주류 유대인), 평등과 노동권을 위한 더 큰 글로벌 운동의 일부가 되거나(사회주의 분트), 메시아가 오기 전에 인간의 힘으로 망명을 끝내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거나(초정통파), 유대인 국가를 설립하는 쪽(시온주의)으로 분화했다. 유대계 내에서 시온주의가 주류가 된 것은 1920~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에 대한 모방과 폭력의 결과, 이 경쟁은 시온주의의 부분적인 성공으로 귀결됐다. 실제 초기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유대인 정체성의 근거로 삼지 않았다. 그 이름과 달리 시온주의야말로 당대의 타락한 제국주의 질서를 잘 반영이었으며, 유럽으로의 동화나 문화적 변용에 맞선 반응이기도 했다. 베냐민 발타자르(Benjamin Balthaser)에 따르면, 시온주의는 “노동자계급 국제주의에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우익 민족주의이자 제국주의의 한 형태”였다.
20세기 초중반 유대인 분트(The Bund)는 동유럽에서 강력한 조직력을 발휘한 운동이었다. 분트주의자들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이 바로 우리의 조국”(Doikayt, 여기 있음)이라는 슬로건 하에 팔레스타인 땅으로 도피하는 시온주의를 “부르주아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유토피아”라고 비판했다. 분트는 반유대주의와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은 유대인 민중이 전 세계 노동자계급과 연대해 현지의 반동적인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이들은 이디시어(Yiddish)를 유대 민중의 진정한 언어로 내세우며, 시온주의자들이 고대 히브리어를 인위적으로 부활시켜 아랍계 팔레스타인 민중을 축출하려는 식민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비판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점령당국에게도 유효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고,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가 시작되면서 시온주의자들의 조직적인 식민화가 본격화됐다. 처음에는 인구적이고 지리적인 잠식이 이뤄졌고, 점차 군사적 축출과 영토 정복의 역사로 점철됐다. 먼저 시온주의 조직들은 유대 자본가들의 모금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땅을 대거 매입했다. 그리곤 매입한 토지에서 토착 아랍인 소작농들을 내쫓고, 유대인 노동자들만 고용함으로써 다수 팔레스타인 민중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 이 시기 제에브 자보틴스키 같은 수정주의 시온주의자들은 ‘오직 압도적인 군사적 '철의 장벽'을 통해서만 유대 주권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오늘날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100년 전에 구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억압 때문에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서 저항들이 일어나자,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강탈한 땅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무장조직 '하가나(Haganah)'를 창설했다. 이는 나중에 이스라엘군 IDF의 모태가 된다.
‘하가나’는 영국 제국주의 당국과 협력해 민중들의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저항과 진압은 이후로도 수십년 간 끊이지 않고 지속됐다. 마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 조선반도 곳곳에서 농민항쟁과 의병들의 저항이 지속됐듯이 말이다. 시온주의자들이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의 협력 하에 전개한 이 집요한 폭력과 학살의 결과, 1947년 UN(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내놓았다. UN은 당시 팔레스타인 땅의 6% 남짓을 소유했던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영토의 56%를 할당하는 불평등한 분할안을 통과시켰는데, 당연히도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명백한 식민지적 침탈로 보고 거부했다.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과 함께 이뤄진 ‘나크바(대재앙)’는 이런 식민주의 점령이 전면화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시온주의라는 사상과 프로젝트 자체를 팔레스타인 땅에서 복제된 제국주의 침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대인만의 힘이 아니라 당대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주의 패권 국가들의 군사적 비호를 받아 팔레스타인에 진입했으며, 외지인이 이주하여 원주민을 대체하는 정착식민주의의 경로를 정교하게 밟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뤄진 원주민 대량학살과 축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유사한 사례다. 20세기 초 시온주의 조직들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수백 년간 농사를 짓던 토착 농민들을 강제로 내쫓았으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철저하게 격리했다. 나아가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문명화되지 않은 땅”, “주인 없는 땅”이라 묘사하면서,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했다. 이는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곳곳에서 펼친 제국주의 침략과 쏙 빼닮은 것이었다. 실제로 헤르츨은 『유대 국가』에서 유대인 국가가 아시아에 세워진다면 “유럽을 위해 아시아에 대항하는 요새가 될 것”이라며, “야만에 대항하는 문명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아시아 토착민을 ‘야만’으로, 자신들을 서구 문명의 대리인으로 상정했던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온화 프로젝트
이스라엘 점령당국은 자신들을 ‘생존 위기에 처한 피해자’로 묘사하는 서사 전략을 택해왔다. 1970년대 이래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지 않는 유대인은 일종의 비유대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온화’ 프로젝트를 심화시켰다. 오늘날 시온화 프로젝트는 엄청난 돈과 제도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시온주의 국가의 팽창과 침략을 정당화한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 조 바이든은 2023년 알아크사 홍수 작전이 있기 보름여 전, 네타냐후를 만났을 때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안전할 유대인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그를 비롯한 미국의 통치 엘리트들이 시온주의에 동기화돼 있음을 방증한다.
- 시온화(Zionization): 이스라엘과 홀로코스트를 미국 유대인 세대를 위한 유대인 교육의 중심으로 만드는 교육 프로젝트 https://ayinpress.org/the-necessity-of-exile/
1997년 리쿠르당의 집권 이래 이스라엘 여론은 점차 우경화 경로를 밟아왔다. 2020-21년 네타냐후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에서조차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목소리를 청취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설상가상 가자지구에서 대량 학살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이스라엘 내 여론은 더 심하게 우경화됐다. 이스라엘 자유주의 중도정당 예쉬 아티드(Yesh Atid) 소속의 메이레브 벤-아리(Meirev Ben-Ari)조차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사망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들과 관련해 “가자지구의 어린이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망언을 내뱉을 정도다.
“함께 하면 승리하리라(Together We Will Win)!”라는 슬로건은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있다. 2023년 11월 이스라엘 민주주의 연구소(Israel Democracy Institute)와 텔아비브대학 평화지수(Peace Index) 조사팀이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 유대인 중 44.3%는 전쟁을 중단하지 않은 채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답했고, 26.6%는 협상조차 시도해선 안 된다고 답했다. 단 10%만이 인질 교환을 위해 전투를 중단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2월 중순 같은 기관이 실시한 또 다른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자지구 내 어린이들이 가자지구에서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내 유대인 중 68%는 “인도적 지원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전 세계가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각하며, 심지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마구 사들이고 있기도 하다. 일란 파페가 “진정 이 집단학살이 멈추길 바란다면 이스라엘 사회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기대해선 안 된다”며, “이스라엘을 멈출 방법은 외부로부터의 압력 뿐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테러 국가 내부로부터 변화에 기댈 수 없음을 봐왔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내 상황이 매우 나빠졌고, 좌파 정치의 입지는 크게 소멸했다. 따라서 변화 역시 외부의 행동으로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미국 유대계의 반시온주의-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유대인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비(非)이스라엘 거주 디아스포라이고, 모든 유대인이 시온주의자는 아니다. 국제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유대인들 자신이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대량학살과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유대인 내부 및 전 세계의 비판을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폄훼해왔다. 하지만 이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중요하고 세간의 이목을 끌어온 미국 내의 안티-시온주의 유대인들을 비가시화하거나, 영향력을 통제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미국의 진보적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점령당국에 의한 팔레스타인 대량학량에 반대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운동을 강경하게 전개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북부에 지상군 투입 초읽기에 돌입한 2023년 10월 13일, 랍비나 홀로코스트 생존자, 대학생과 평범한 시민 등으로 이뤄진 ‘평화를 위한 유대인들’(Jewish Voice for Peace, 이하 JVP)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시애틀 등 미국 5개 도시에서 2천여 명의 활동가들과 함께 정치인들의 사무실 앞에서 "팔레스타인 대량 학살"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대치 끝에 81명이 체포됐다. 10월 18일, 워싱턴D.C의 의사당 앞에 5천여 명의 JVC 회원 및 ‘IfNotNow(지금이 아니라면)’의 회원들이 집결해 이 중 500명은 의사당 안으로 진입해 원형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