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단학살에서 살아남기 | 로힝야족의 저항과 연대의 역사
2026년 5월 2일
우크라이나 독립언론 <커먼즈 Commons>의 편집자 데니스 필라시(Denys Pilash)는 2017년 로힝야 집단학살 이후 방글라데시 난민캠프로 피신한 로힝야학생네트워크(Rohingya Student Network) 활동가 누르 사데크(Noor Sadeque)를 만나 로힝야 집단학살의 참상과 그 역사적 배경, 로힝야 집단학살을 둘러싼 복잡한 역학관계, 로힝야인이 요구하는 ‘존엄한 귀환’의 조건,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글은 <Commons>에 실린 인터뷰 <집단학살에서 살아남기: 로힝야족의 저항과 연대의 역사>를 번역한 것이다.
미얀마는 1989년까지 버마(Burma)로 알려졌으며, 1948년 독립 이후 권위주의 정권과 내전으로 고통받아 왔다. 내전은 두 개의 공산주의 분파부터 샨, 카렌, 몬, 카친 등 차별받아 온 수많은 소수민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정부 무장세력을 상대로 벌어졌다. 양곤 공과대학 학생들이 시작한 ‘8888 항쟁’을 탄압한 이후 들어선 군사독재 정권은 극도로 부패한 경제체제를 만들었으며, 극도로 부유한 장군 중심의 과두 엘리트와 권리를 박탈당한 대중으로 양극화된 사회를 만들어냈다.
정권은 2007년 시위—승려들의 법의 색에서 이름이 유래한 ‘사프란 혁명’—이후 일부 양보를 강요받았고, 2015년과 2020년에는 보다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노벨상 수상자 아웅산 수치—독립 직전 우익 음모자들에게 암살된 버마 독립의 아버지의 딸—가 이끄는 민주 진영이 승리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군부와 권력을 공유하며 불명예스러운 타협을 했다.
이러한 타협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 라카인주에 거주하는 무슬림 집단인 로힝야 주민들에 대한 집단학살이었다. 한때 민주주의 투쟁의 상징이었던 수치의 묵인 아래, 보안군과 초민족주의적 불교 광신도들은 ‘이교도’에게 그곳에서 살 권 리를 부정하고 그들을 ‘외부인’으로 낙인찍으며 2016년 말부터 인종청소를 감행했다. 이러한 인종청소는 각종 잔혹행위를 동반했으며, 2017년 8월 25일 군사작전이 시작된 이후 잔혹행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수만 명의 무슬림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또 다른 150만 명이 인접한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강요당했다. 이곳에는 이미 1970년대부터 버마 당국의 박해를 피해 온 로힝야 난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양국 국경에 위치한 콕스바자르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난민 캠프가 형성되었다.
2021년 2월 1일, 군부는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민간 지도부를 구금하고, 처음에는 시민불복종과 파업으로 군정에 저항하려 했던 수천 명의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거리를 피로 물들이면서, 독재 정권은 다시 격화된 내전의 불길을 더욱 부채질했다. 러시아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정치적·정보적 지원에 의존한 군정은—초기에는 국가행정평의회(State Administration Council)로 불렸다—대지진 이후의 휴전 기간에도 합의를 노골적으로 위반했으며, 최근에는 기만적인 가짜 선거를 강행했다.
그러나 ‘모두가 모두에 맞서는’ 혼란 속에서, 미얀마 영토의 절반 이상은 군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여기에는 야권 성향인 국민통합정부(National Unity Government) 산하 인민방위군(People’s Defense Forces), 다양한 소수민족의 수십 개 민병대, 기타 소규모 무장세력—국제 아나키스트 자원병으로 구성된 반파시스트 국제주의 전선(Anti-Fascist Internationalist Front)도 여기 해당한다—이 모두 포함된다.
이 인터뷰에서 집단학살을 겪고 지 금도 전쟁과 망명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로힝야 난민들—이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다. 난민캠프에 있는 우리의 동지는 그들의 일상과 전망, 그리고 상호 경험에 대한 이해와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준다.
데니스 필라시(이하 데니스) |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당신의 여정을 간단히 들려줄 수 있나? 어떻게 난민캠프에 오게 됐나?
누르 사데크(이하 누르) | 내 이름은 누르 사데크(Noor Sadeque)로 미얀마 마웅도 타운십(MaungDaw Township) 끼 칸 표인 마을(Kyi Khan Pyin Village, Hawar bill) 출신으로 누르 알롬(Nur Alom)의 아들이다. 나는 25세의 로힝야인이다. 2016년에 마웅도 제1고등학교(Maung Daw No.1 High School)를 졸업했다. 그러나 2017년 8월 25일 라카인주의 폭력 사태로 따른 참혹한 상황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신해야 했다.
방글라데시 난민캠프로 피신한 뒤, 나는 캠프 8W, 17, 20에서 Premiere Urgence Internationale(PUI)의 현장조정팀 팀장(Site Coordination Team leader)으로 1년 3개월 동안 일했다. 이후에는 캠프 20 및 캠프 20 확장 구역에서 약 5년 동안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의 로힝야 캠프운영팀 팀장(Camp Operation Rohingya Team leader)으로 근무했다.
현재 나는 청년들의 역량 강화와 성장, 격려, 사회주의 및 사회 활동에 집중하고 있으며, 로힝야청년협회(Rohingya Youth Association), 로힝야청년권리옹호네트워크(Rohingya Youth Advocacy Network)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지금은 지역사회 권리 옹호를 위한 풀뿌리 조직인 로힝야학생네트워크의 설립자이자 자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교육 및 역량 강화 훈련을 제공함으로써 우리 공동체의 청년과 여성들을 지원하고, 우리의 권리와 정의, 기본적 권리를 위해 싸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미얀마와 가장 가까운 나라 방글라데시로 쫓겨나고 강제 이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미얀마 군사 정권은 우리가 시민권, 평화, 안녕과 같은 빼앗긴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우리를 이른바 ‘무국적자이자 집을 잃은(so-called homeless and stateless) 사람들’로 규정했다. 미얀마의 잔혹한 군부는 지역 경찰과 극단주의 집단을 포함해 조직적이고 점진적인 집단학살을 계획했으며, 우리를 이 지구상에서 가장 박해받는 소수민족으로 만들었다.
그 이면에서 수많은 학살, 집단 강간, 가옥을 불태우는 행위, 영아를 산 채로 훼손하거나 불길 속으로 던지는 행위, 노인을 산 채로 불태우는 일들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살해됐고, 아무런 조사도 없이 중앙 교도소로 보내졌다.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로 탈출할 때, 여성들이 길에서 출산하는 걸 여러 차례 목격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신을 내 눈으로 직접 봤고, 부모와 떨어져 울부짖으며 물에 빠져 죽어가는 아이들도 보았다. 몇몇 노인들은 긴 여정을 감당할 사람이 없어 집에 홀로 남겨지기도 했다.
나는 두 주 동안 걷고, 때로는 비를 맞으며 달리고, 때로는 산을 넘어야 했다. 식량도 약도 전혀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극심한 고열로 이동 중에 목숨을 잃었다. 이 모든 고난 끝에 우리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에 도착했다. 우리를 형제자매처럼 돌봐 준 방글라데시 정부와 국민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또한 방글라데시 군이 보여준 인도적 행동에 대해, 전능하신 신이 이 나라에 영원한 평화를 내려주기를 바란다.
보트와 수영, 도보를 통해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뒤, 나는 가족과 함께 난민캠프에 몸을 의탁했다. 부모님은 나를 포함한 자녀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큰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다행히도 나는 로힝야학생네트워크에서 운영 코디네이터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자원활동가로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나와 형제자매들은 공부나 자유로운 이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방글라데시 무장경찰대대(Armed Police Battalion, APBn)에 의한 자의적 체포와 갈취, 그리고 캠프 내 무장단체들이 자행하는 고문 때문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일,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과 캠프 안의 찻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조차 두렵다. 뉴스를 보거나 목소리를 내는 일조차 때로는 위험을 초래한다.
더 나아가 나의 미래와 운명, 그리고 꿈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해 버렸으며, 나는 비좁고 열악한 난민캠프와 난민 생활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곳에서는 이동의 자유와 교육에 대한 접근권조차 없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 온 목표인 대학 진학과 졸업, 그리고 전문 학위 취득에 대해 밤낮으로 계속 생각하게 되면서 마음속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없는 상태다.
해외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며 일상에서 성취를 쌓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스스로 아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실제로 그런 기회를 충분히 추구할 능력이 있음을 알면서도, 캠프 생활 때문에 그것이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상황은 미래에 대한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데니스 | 전 세계 사람들이 로힝야 집단학살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할까? 버마/미얀마에서 로힝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박해와 아파르트헤이트식 정책이 어떻게 전개됐나?
누르 | 전 세계 사람들은 먼저 로힝야가 누구인지 이해해야 한다. 로힝야는 수세기 동안 미얀마 라카인(아라칸)주에 살아온 토착 무슬림 소수민족이다. 그런데도 로힝야는 체계적으로 존재를 부정당했고, 1982년 시민권법으로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미얀마가 공식 인정하는 135개 민족 목록에서도 배제됐다. 이러한 법적·정치적 말살이 집단학살의 토대를 마련했다.
박해는 종교적 차별과 민족적 차별 양쪽에서 비롯된다. 1948년 미얀마 독립 이후, 로힝야는 독특한 정체성과 신앙, 그리고 역사적 존재를 이유로 표적이 돼 왔다. 우리는 국적 취득권, 정치적 대표성, 교육 및 이동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치밀하게 계산되고 제도화된 과정을 통해 박탈당해 왔다. 로힝야는 미얀마 군부와 정부 전반에 의해 체계적으로 탄압을 받아 왔으며, 특히 아라칸주(라카인주)에서 시행된 정책들에서 그러한 탄압이 두드러졌다.
더 최근인 2024년 8월 말에는 라카인 지역 세력과 아라칸군(Arakan Army)이 각각 고문을 자행하고, 로힝야를 아라칸 땅에서 지워버리려는 유사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아라칸군이 수세기 동안 로힝야 공동체가 거주해온 주요 지역들을 장악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로힝야에 대한 아파르트헤이트식 정책은 식민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에 맞서 자신들을 지원한 대가로 로힝야에 미얀마 사회의 구성원 자리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이 독립 이후 깨졌고, 미얀마의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1942년 일본의 침공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돼 광범위한 공동체 간 폭력을 촉발했고, 로힝야 사회를 심각하게 붕괴시켰다. 이 시기는 대규모 강제이주와 인명 손실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로힝야의 삶을 규정하는 장기적인 분리, 불신, 그리고 구조적 주변화의 토대를 형성했다.
수십 년에 걸쳐 반복된 군사작전은 로힝야를 강제이주로 내몰았다. 1978년에는 나가민 작전으로 20만 명이 넘는 로힝야가 방글라데시로 탈출했다. 1991~92년에는 또 다른 군사적 탄압으로 25만 명 이상이 강제로 이주했다. 상황이 2012년과 2016년에 더욱 악화됐고, 2017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이때 70만 명이 넘는 로힝야가 대규모 학살, 마을 방화, 그리고 조직적 폭력 이후 방글라데시로 탈출했다. 이러한 범죄는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를 포함한 국제 기구들에 의해 집단학살로 인정돼 왔다.
세계는 이것이 단순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아니라, 국가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잔혹성과 차별을 통해 실행되어 온 의도적이고 장기적인 말살 캠페인임을 이해해야 한다.

데니스 | 미얀마의 주류 민주진영은 한때 군부와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이 로힝야 집단학살을 벌이도록 사실상 용인하는 ‘악마와의 거래’를 했고, 이후 따마도(Tatmadaw, 미얀마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미얀마 인구 전체에 전면적인 탄압을 가하면서 그 대가를 치렀다. 광범위한 반군정 운동이 이러한 교훈을 배우고 소수자들의 권리를 포용하게 되었다고 보나?
누르 | 미얀마의 광범위한 반군부 운동은 로힝야 집단학살 당시 자신들의 침묵과 공모에서 일정 부분 교훈을 얻은 징후를 보여왔다. 특히 젊은 활동가들과 저항 세력 내 일부 소수민족 연합은 포용적 민주주의 이상을 수용하고, 로힝야를 포함한 주변화된 집단의 권리를 인정하려는 더 큰 의지를 보여주고 있 다. 그러나 뿌리 깊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전략적으로 계산된 정치적 접근은 여전히 소수자 권리에 대한 통일된 입장 형성에 중대한 장애물로 남아 있다.
연대의 표명과 미래의 연방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존재해왔지만, 이러한 움직임들이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인정하기 위한 구체적 약속으로 일관되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많은 경우 이러한 지지는 원칙적이라기보다 전술적인 것으로 보인다. 미얀마에서 진정한 민주적 전환이 뿌리내리려면 저항 세력이 단순히 군부에 대한 반대를 넘어 정의, 평등, 그리고 모든 공동체에 대한 책임성을 약속해야 하며, 여기에는 로힝야와 같이 역사적으로 억압받아 온 집단도 포함되어야 한다.
데니스 | 오늘날 로힝야 정치 내부에 (예를 들어 세속적 좌파, 이슬람주의자, 혹은 생존 중심의 실용주의자들 사이의) 세대적·이념적 분열이 존재하나? 또 여성과 청년들은 정치적 담론에 어느 정도로 참여하나?
누르 | 오늘날 로힝야 정치 내부에는 분명한 세대적·이념적 분열이 존재한다. 이러한 분열은 해외 로힝야 공동체의 원로 지도자, 젊은 활동가, 그리고 종교적 영향을 받은 집단 사이에서 나타난다. 디아스포라의 많은 원로는 수십 년에 걸친 경험과 로힝야의 정치적 역사 및 위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다. 반면 젊은 세대, 특히 망명지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이들은 직접적인 박해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으며, 미얀마 군부 통치에서 겪은 자기 경험을 보다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경향 이 있다. 일부 이슬람 성향의 세력, 특히 무장단체와 연계돼 있거나 이에 동조하는 이들은 종교적 지식을 활용해 영향력을 확대하며 지도자 역할을 주장하기도 한다.
현재 이른바 ‘지하드’를 통해 로힝야 저항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주요 무장 단체는 로힝야연대기구(Rohingya Solidarity Organization), 아라칸로힝야군(Arakan Rohingya Army),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 세 곳이다. 이들 단체는 항상 신학생들과 성직자들에게 지지를 끌어모은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로힝야 청년들은 교육과 인도주의 활동, 특히 NGO와의 협력을 더 중시하며, 평화적 해결과 교육 기회의 확대를 촉구하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러한 경향은 때때로 이념적 성향의 집단들과의 마찰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들은 특히 난민 캠프 내에서 정치적 지도력에서 여전히 크게 과소대표돼 있다. 이동의 자유, 공적 옹호 활동,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그들의 참여를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외에 거주하는 일부 로힝야 여성들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권리 보장과 차별 없는 사회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정치적 지형이 여전히 분열되어 있으며, 로힝야 공동체에 대한 지속적인 주변화, 정치 참여 공간의 제한, 그리고 계속되는 구조적 억압으로 인해 통합된 지도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