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운동은 왜 ‘실패’를 반복하는가 | 『어떤 패배의 기록』 서평

일본 사회운동은 왜 ‘실패’를 반복하는가 | 『어떤 패배의 기록』 서평

일본의 좌파 운동은 왜 현 상황에 놓이게 된 걸까? 인상비평이 아닌, 엄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2026년 2월 5일

[동아시아]일본일본, 역사, 민주주의, 사회운동, 좌파, 서평

이 글은 2025년 출간된 김항의 저작 『어떤 패배의 기록 - 전후 일본의 비평, 민주주의, 혁명』 (김항) 서평이다.

전후 일본 정치의 굴곡

처음 일본 사회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즈음이다. 당시는 자민당 지지율이 줄어들고, 제1야당 민주당의 기세가 점차 높아질 때였다. 긴 임기를 이어나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의 ‘극장형 정치’가 한창이었다. 조금이라도 자민당 인기가 잠잠해지면 고이즈미 총리는 우정 민영화 등 ‘성역없는 구조 개혁’(聖域なき構造改革)이라 명명한 신자유주의적 '작은 정부론'을 통해 지지율을 유지시켰다.

한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후 등장한 총리들의 선거 결과는 성적표가 그리 좋지 않았고, 죄다 짧은 임기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전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제는 ‘대침체’(The Great Recession)로도 불리는 강력한 경제 불황이 일본을 강타했다. 고이즈미 내각의 적극적인 개혁으로 일본 경제가 긴 불황에서 벗어나 회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곧바로 사라졌다.

특정 시기를 제외하면 수십년 간 꾸준히 장기 집권을 이어나가던 자민당과 공명당 연립정권에 더 이상 일본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유례없는 압승을 기록하며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용산 참사와 집요한 노동운동 탄압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한국에서도 일본에서의 정권 교체를 부러워하는 시선이 있었다. 긴 침체에 놓였던 일본에서 사회운동이 다시 번성할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민주당 정권의 출범이 사회운동이 번성하는 계기가 되지는 못했다. 도리어 민주당 정권은 금세 지지를 잃더니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빠른 속도로 지지율이 추락했고, 2012년 아베 신조(安倍晋三)를 내세운 자민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아베 신조는 평화헌법을 무력화하는 온갖 시도로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역대 총리 중 가장 긴 재임 기록을 세우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아베 신조는 임기 내내 내각과 당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 사이 민주당은 이름을 ‘민진당’, ‘희망의 당’, 그리고 지금의 ‘입헌민주당’으로 바꾸면서 명맥을 유지했다. 좌파 정당의 상황은 더 나빴다. 사민당은 중의원과 참의원 의원을 모두 합쳐도 손가락으로 전부 셀 수 있는 처지가 됐다. 공산당은 캠페인이나 단일화 전략으로 존재감을 유지하려 했지만, 2020년 이후 지지율이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그 사이 레이와 신센구미(れいわ新選組) 등 좌파 혹은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이 생기긴 했으나, 대중성은 아직 미약하다. 오히려 참정당, 일본보수당 등 배외주의 메시지를 들고 나온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토양론’과 ‘실력론’을 넘어

2025년, 오랜 시간 이어진 공명당과의 연립을 해소하고,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을 통해 집권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는 아베 신조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발언과 행동으로 집권 100일이 넘어선 2월 초 현재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압도적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2월 중 열리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할 수도 있다는 예측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편집주: 그리고 2월 8일 중의원 선거 결과,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이젠 일본 사회운동에 대해 희망적인 관측은 별로 볼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매체나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는 소위 ‘토양론’이나 ‘실력론’이다. 전자는 현대 일본의 탄생과 형성에 미국이 강력하게 관여한 만큼,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후자는 20세기 일본공산당이 드러낸 문제적 행보, 아사마 산장 사건을 비롯한 ‘우치게바(内ゲバ)’ 같이 좌파들이 실력을 키우는 대신 내부 갈등과 자해를 반복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 우치게바 : 일본에서 ‘안’을 뜻하는 內와 독일어에서 ‘폭력’을 뜻하는 ‘게발트(Gewalt)’의 일본식 발음 표현인 ‘게바루토(ゲバルト)’를 합성한 일본식 조어

두 가지 서사 모두 얼핏보면 그럴 듯하게 들린다. 동시에 둘 모두 은근슬쩍 ‘중요한 순간에서 대규모의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는 한국의 상황과 빗대며 일본의 현 상태를 안타까워 하고, '한국 사회운동과 정치 상황이 일본보다 낫다'는 인식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일본의 좌파 운동은 왜 현 상황에 놓이게 된 걸까? 그저 앞서 말한 요인들 때문일까? 인상비평이 아니라, 엄밀한 접근과 분석이 필요하다.

우리는 김항의 저작 <어떤 패배의 기록>을 통해 그에 대한 실마리를 탐구할 수 있다. 저자는 2015년 <제국일본의 사상>에서 제국주의 시기 형성된 의식이 지속되고 있음을 제시한 바 있다. ‘일본 제국’이 입헌군주제 국가 ‘일본국’이 되었으나, 국가와 국민,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과거의 시선이 그대로임을 짚었다. 그리고 <어떤 패배의 기록>에서는 일본의 좌파 담론과 사회운동이 어떻게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게 되었는지 짚는다.

책의 부제인 ‘전후 일본의 비평,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말대로 김항은 3개의 부분으로서 일본 좌파의 곤경을 들여다 본다. 하나는 일본 제국 시기부터 활동한 맑시스트 문예비평가였던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70년대부터 비평가이자 맑시스트를 자임하며 활동해온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다. 두 번째는 태평양 전쟁의 광풍이 일던 일본 제국 말기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설파했던 난바라 시게루(南原繁)와 한국에도 잘 알려진 평화주의 지향의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등을 중심으로 전후 일본에서 등장한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접근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에 대한 거센 탄압을 겪으며 활동했지만 배신자 누명을 쓰며 오랜 시간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일본공산당 활동가 이토 리츠(伊藤律), 그리고 ‘요도호 납치사건’과 앞서 언급한 ‘우치게바’ 등 사건·사고로 매스미디어의 비난을 받았던 1970년대 일본 학생운동에 대한 정리다.

이 책이 다루는 담론들 중 가장 최근의 것은 2000년대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이지만, 2장에서는 2012~2020년 아베 신조 2기 내각의 평화헌법 무력화 시도, 2010년대 한국에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킨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와 그의 이전 저서였던 <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분석을 다루기도 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포스트 3.11’이란 화두를 중심으로 2010년대 이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역사적 사건들을 언급했던 <제국일본의 사상>에 비교하면, 문턱이 높은 편이다. 처음부터 사건을 언급하는 대신, 일본이라는 국가와 국민에 대해 형성된 담론의 특성과 함의를 짚고, 제국주의 시기 이후 일본에서 민주주의를 놓고 벌어진 여러 사건과 주장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주요 인물과 활동,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푼다. 이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1~2장을 건너 뛰고 바로 3장이나 에필로그부터 읽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1장과 2장을 통하여 일본 담론과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은 이들이 그들 내부에서 형성하고 변화시킨 사상과 담론이 갖는 특성과 한계를 지적한다. 이를 기반으로 20세기 후반 이후 일본 사회운동의 어려움이 그저 토양이나 실력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음을 통렬하게 짚는다. 특히, 현 상황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담론이 거꾸로 운동이 널리 퍼져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운동 내부에서 이미 형성된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짚는 부분이 핵심적이다.

탈정치화된 평화와 좌파의 고립

1장에서 저자는 1930년대 고바야시 히데오가 발표한 <사소설론>, <현대문학의 불안>, 그리고 1938년 일본 제국의 공작으로 만주국이 된 상태의 중국 만주 지역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한 기행기 등 일련의 저작에서 ‘꿈 같은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는 생활가의 태도’(p.35)를 강조했던 것, 특히 만주 기행을 통해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니고, 이국이지만 이국이 아닌 만주의 모습을 보며 ‘일본인이 일본인을 제대로 이해해왔는지를’(p.39)를 묻는 것에 주목한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지식인들처럼 "일상에서 얻거나 잃을 수 있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당연한", "일본 국민이라는 자신감"(p.48)을 느꼈음을 소회했는데, 그 점에서 고바야시 히데오가 "긴장에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리얼리스트의 태도’(p.51)의 일관성이 있음을 짚는다.

김항은 고바야시가 맑시스트를 지향했지만 인간의 생사, 희로애락, 노력 같은 요소를 주목하며 미학적으로 감탄했던 모습을 발견하고, 그저 고바야시 뿐만이 아니라 일본 제국 시기 전향했던 많은 좌파 지식인과 활동가, 그리고 전후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같은 정치학자 등 모두 비슷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근대화는 통상 개방을 요구하며 함선을 끌고와 무력 시위를 했던 미국으로부터 받은 충격으로 촉발됐고, 그렇게 국가나 지식인 주도로 이뤄졌다. 외견은 근대화지만 정작 ‘근대 국민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형성 과제는 진행 중이었다는 것이다.(p.78) 저자는 크든 작든 좌파 담론에서 전향을 택한 이들이 왜 ‘일본’의 이름을 언급하며 회귀하는지를 이에서 찾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한계는 가라타니 고진 또한 다르지 않다. 고바야시 히데오도, 마루야마 마사오도, 그리고 이들의 담론을 통해 맑시즘에 대한 계보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가라타니도 모두 "맑시즘이 죽었다"는 움직임에 대항하는 학자들이다. 가라타니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왜 맑시즘이 실제 적용 단계에서 한계를 겪었는지' 짚고, 자신의 시각으로 맑시즘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라타니는 변증법적 논리를 거스르는 등 ‘그저 완성된 것을 뒤집고 해체하는 일에 몰두’했고, 정작 ‘사물의 무질서한 교환이 인간과 사물과 자연을 어떤 모습으로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결여’(p.93)했다. 가라타니는 자신의 저작을 통해 맑시즘 담론이 자본주의 체제가 표면적으로는 정상성을 말해도, 결국 근원적으로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경계의 존재를 양산하고 있고 이를 맑시즘 담론이 짚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 (p.88 ~ 89) 김항은 오히려 가라타니에게 신체, 역사, 젠더, 정치 등의 이유로 이동할 수 없이 묶인 이들을 위한 담론의 자리가 없어 보인다고 지적한다. (p.94)

일본을 탈정치적으로 자극하는 담론적 흐름은 지속되었다.(p.138) 제국주의 시기엔 신변의 안전을 무릅쓰고 자유주의자로 활동했고, 태평양 전쟁 후 소위 ‘올드 리버럴리즘’으로 불리던 이들이 "국민 정신의 재건"을 위해 ‘메이지 유신’과 ‘천황’을 정신적이자 문화적인 차원에서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언급했던 것(p.121), 구체적 맥락에 대한 논의는 탈각시킨 채 국민공동체를 보편성 획득을 위한 조건으로 언급했던 것(p.131)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김항은 전후 민주주의 담론이 "식민주의와 보편주의의 결탁"으로 이뤄졌으며, "과거의 기억을 안이하게 화해시키거나, 평화주의를 도그마 삼아 정치를 형해화하는 발상"과 "과거의 역사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갈등에서 눈을 돌리며", 도리어 "미래의 공생 질서를 방해"했다고 지적한다.(p.140)

당연히도 이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와다 하루키 등 국가주의 흐름에 정면으로 대립하고 심지어 조선(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도 역사에서 쌓인 앙금과 갈등의 기억을 회피하며, 그저 ‘미래를 향한 지역 내 주체들의 대화’가 이뤄지면 제국주의 시기 이후 일본의 문제나 냉전 붕괴 이후 일본이 마주한 과거사 문제를 ‘스스로 탈피할 수 있다’고 안이하게 오판(p.159~161)했다. 이들은 오히려 이전의 자유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천황을 '국민 통합의 존재'로 간주했고, 그런 전제 아래 평화헌법과 평화국가의 발상으로 뻗어나갔다.(p.165~166) 이런 리버럴 논리에 따르면, 일본이 제국 시기 저지른 온갖 침략과 전쟁 범죄는 일탈 행위(p.171)에 불과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일본 연구자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나 <화해를 위하여>를 통해 일으킨 논란에는 이유가 있다. 근대화 이후 국가와 국민의 존재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국가 주도의 흐름이 강하게 흘러가는 일본 체제에 대해, 박유하는 순진할 정도로 '신뢰'같은 태도의 요소를 강조하고, 그 과정에서 탈정치화된 담론에 이미 친숙해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와다 하루키나 다른 현대 일본의 담론가들처럼, 일본의 근원에 제대로 탐구하는 대신, ‘선량한 마음’이나 ‘제국주의 일본과 보통 국가 일본은 다르다’는 식의 불분명한 개념과 인식에 의거해 식민주의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p.11~0~113) 이러한 인식에서는 와다 하루키를 비롯해 아시아평화기금 같은 시도를 적극 찬성했던 이들이 분명 지속적으로 한국과 연대를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왜 제국주의 식민지와 피식민지 간에 벌어졌던 문제를 쉽게 은폐하고 넘어가는 흐름을 낳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정치적인 판단이 필요한 순간에서 김항은 박유하가 정치 자체를 비판하며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 자체를 도리어 ‘도덕적 오만’이라 비판하게 되었음을 짚는다.(p.114~115)

일본의 사상적 뿌리를 직시하지 못한 결과, 소위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심연에 닿지 못하는 한계가 드러났다. 이러한 인식이 고착화됨에 따라 개인적 차원의 대안 추구나 전공투와 같은 집단적 시도조차 동일한 한계를 반복하는 데 그쳤다. 억울하게 배신자로 몰려 고초를 겪은 일본공산당 활동가 이토 리츠 또한, ‘현실 세계와 단절’된 채 ‘아포리아의 알레고리’가 가득한 세계에 고립되고 말았다.(p.234~235)

전공투와 적군파로 대표되는 급진적 신좌파는 관료주의에 침잠한 운동 사회의 타성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국가 체제와 결착된 주류 운동의 구도 속에서 내부 분열과 상호 대립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p.272~274) 일본 국가 권력은 이러한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경찰이라는 국가 폭력과 미디어를 통해, 이들의 정치사회적 실천을 단순한 ‘놀이’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끊임없이 음모론을 양산함으로써, 이들을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프레임 속에 고립시켰다.(p.282~288) 이런 경향은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분출된 ‘안전에 대한 갈망’마저 체제 변혁으로 향하는 대신 안온한 일상을 지키는 동원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비판적인 목소리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p.308~310)

체념적 진단을 넘어선 연대

저자는 이렇게 담론에서 주장, 주장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며 발생하는 인식의 틈과 한계가 증폭되는 과정을 통해 일본 좌파 운동이 처한 난맥상을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일본 사회운동의 몰락은 어쩔 수 없다'는 숙명론이나 '역량 부족'이란 단편적 평가보다 유익하다. 역사적 근원에 접근해 다시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과를 살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서술은 내게 한 가지 고민을 갖게 했다. 인식과 담론이 어긋나게 굳어진 상태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파멸 같은 극단적인 일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걸까.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다. 저자는 "텅 빈 거리에 승전 퍼레이드"가 "오래된 혐오를 타고 끝을 모른 채 울려퍼지는 중"이라며, 그다지 대항할 수단이 없다고 말한다.(p.310) 그에 앞서 7장에서는 "보편주의와 식민주의의 중첩을 문제화하는 정치는 파도와 풍랑을 헤치며 인민의 바다를 향해하는 혁명의 선박으로는 수행 불가능"하며, 그런 정치조차 "산산조각 난 선박의 파편을 붙잡고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에 가까울 것’이라 강하게 비관하고 있다.(p.288)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생존의 길"이 있다면, "표류하는 바다에서 물에 빠진 이들이 서로 손을 잡는 일에 있"을 뿐이다.(p.288) 20세기 후반 일본 좌파들은 서로가 서로를 무지비하게 공격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저자의 서술 속엔 여전히 반목과 대립이 계속되는 일본 사회운동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이 담겨 있다. 하지만 김항의 말 대로라면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모든 것이 꼬였고, 이 체제의 운영과 여론을 장악하는 정부가 계속 강력한 권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서로 손을 잡는다고 해서 풍랑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저자의 서술은 분명 체계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체계적인 악순환의 고리가 너무 단단하고 많이 늦었기에, 현 상황을 체념하듯이 받아들이게 되는 귀결이 나고 만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상황은 한국은 물론 사회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간 다른 나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의 좌파 활동가들이나 지식인들도 기존의 체제의 순응하기 쉽고, 그로 인해 여러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김항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그간 회피했던 국가 체제의 근원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이를 바꿔나갈 수 있다면, 또는 이를 위한 움직임을 꾸준히 수행할 수 있다면, 역사적 한계를 넘어설 방향 전환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일본에서 '개항'은 갑작스레 일어났고, 메이지 유신을 위시한 근대화 과정도 체계적인 계획이 맞아 떨어져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기존 체제를 수호하려는 기득권 세력도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지속적인 갈등에 시달린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흐름을 만든다면, 악순환의 고리에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없지 않다. 저자는 깊은 우울과 동시에 연대 등을 통한 약간의 가능성읖 짚었지만, 이 책을 각자의 현장과 장소에서 읽거나 각자의 현실에 맞게 실천할 이들은 그 작은 ‘가능성’을 더욱 키우고 살리는 방법을 지금 이 순간에도 궁리하고 있다. 그 꾸준함과 치열함이 일본과 한국, 그밖의 여러 나라에서 공고한 체제에 쉽게 순응하거나 전향하지 않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글 : 성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