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들의 눈으로 전쟁을 보다 | 천자오빈의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 서평

‘벌레’들의 눈으로 전쟁을 보다 | 천자오빈의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 서평

천자오빈의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 서평

2026년 2월 9일

[동아시아]중국대륙한국전쟁, 한반도 문제 다시보기, 중국, 서평, 역사

하워드 진(Howard Zinn)의 『미국 민중사』를 처음 읽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전에 읽은 역사책들이 권력자의 눈으로 본 ‘위로부터의 역사’였다면 『미국 민중사』는 기존 역사책에서는 기록 한 줄 없거나 기껏해야 엑스트라에 그칠 보통 사람들의 시각으로 본 ‘아래로부터의 역사’였다. 이런 역사책을 처음 접한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천자오빈(陈兆滨)의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를 읽으면서 그때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평범한 중국 사람들이 겪은 ‘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이 생생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존 중국학계의 한국전쟁 연구는 마오쩌둥(毛泽东)과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정책 결정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 책은 정책 결정자가 아니라 이름 없는 시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10쪽) 바로 그 이름 없는 시민들의 눈에 비친 한국전쟁, 그들이 온몸으로 겪어낸 한국전쟁의 실상을 저자 고스란히 기록한다.

‘항미원조전쟁’이란 국가 서사를 거부하다

중국 시민들이 한국전쟁에 보인 반응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계급‧직업‧지역‧정치성향‧전황 등에 따라 반응이 달랐고, 표면적으로 같은 반응을 보일 때조차 동기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부가 내세운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는 명분, 즉 ‘미 제국주의의 불법적 북한 침공에 대항해 북한을 도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국가 서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며, 전쟁을 두려워하고 해외파병에 반대하는 시민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인민지원군 입대를 신청한 뒤 언제 출발하는지를 매일 묻는 학생과 “마오 주석의 말은 틀림없다. 전쟁이 나면 우리는 후방 생산을 통해 해방군을 지원하겠다”는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다수는 아니었다. “국공내전이라는 국내 정치에 기인한 일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민은 평화를 간절히 희망했다. 그리고 동맹국이나 가치관을 공유하는 준동맹국 때문에 자신들이 전쟁에 휘말릴 수 있음을 염려했다.”(31쪽)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을 지지하던 이전 정권 관계자 일부와 시민들은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여겼지만, 소수였다는 의미다.

이 책에는 노동자, 농민 등 전쟁과 해외파병에 반대하거나 그 앞에서 동요한 다양한 시민들의 발언이 여럿 나온다.

또 다른 직원은 “뭐니 뭐니 해도 중국과 조선은 별개의 나라다. 허난성이나 허베이성처럼 자유롭게 병력을 움직일 수 없다. 우리 중국 인민의 해방에 (파병까지 해서) 원조한 나라가 있었는가. 조선을 돕기보다 먼저 타이완을 해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시종일관 평화를 외치던 정부가 아직 미국의 공격을 받지도 않았는데 먼저 공격에 나서는 건 이상하다”라며, 이른바 “전수방위”(공격받을 때 방어용으로만 무력을 행사하는 것-옮긴이 주) 원칙을 넘어선 선제공격을 비판한 사람도 있었다.(212쪽)

그러나 정권의 주된 지지 기반으로 여겨지던 빈농들이나 고농(雇農, 지주나 부농에게 고용된 농민-옮긴이 주)들에게서는 강한 동요가 감지됐다. 이 보고에 따르면, 이들은 정권이 발행한 “지폐를 사용할 수 없을까 봐 물품을 사재기하고 폭음‧폭식하며 생산 의욕을 잃었고, 전쟁의 향방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상즈현의 빈농과 고농은 이렇게 말했다. “만주국은 철제 양동이처럼 생겼다. 하지만 무너질 땐 한순간이었다. 지금의 정권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241쪽)

특히 파병 장병들은 다양한 형태로 전쟁을 피하려 했다. 저자는 80사단 정치부가 작성한 1951년 3월 1일 자 보고서 <조선 진공 작전 당시의 정치 공작에 관한 총괄>을 인용해, 이렇게 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조선 진공 작전은 전에 없이 힘들고 어려워 사상자 수가 많고 참혹했다. 신흥리 전투를 겪으며 간부와 병사 상관없이 사상이 흔들리고 우경화돼 목숨을 아끼고, 위축돼 전진하지 않고, 전장에서 도주하고, 경상인데도 진지를 이탈하고, 심지어 포로로 잡혀 정보를 누설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 부대는 쉬면서 장병들에게 “설명, 동원, 사정, 장려‧징벌, 교육 등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도 일부 동지는 전쟁의 참혹함을 되새기면서 우경화되고 타락해,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 간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하고 자해‧자살하거나 도망쳤다. 왼쪽의 숫자가 이를 뒷받침한다. 즉, 병사부터 중대장급 장교까지 “도망” 95명, “자해” 2명, “자살” 4명, “진지 이탈” 33명이 발생했다.(325~326쪽)
  • 📌신흥리 전투 : 한국전쟁 당시 함경남도 장진호 동쪽의 신흥리에서 미군과 중국군이 벌인 전투. 이때 양쪽 모두 격렬한 전투, 혹한, 보급 부족 등으로 큰 피해를 봤다.

강제나 속임수로 입대한 이들 또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분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의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책은 1951년 3월 5일 자 보고서 <둥베이 각 성의 최근 활동 상황에 대해>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일부 마을에서는 강제나 명령으로 입대시키기도 했다.” 사람을 때리거나 얼리거나 뜨거운 온돌로 화상을 입히는 “제병(擠兵)”, 입대자의 채무를 떠맡거나 집을 사 주거나 좋은 땅으로 바꿔 주는 “매병(買兵)”, 입대라고 밝히지 않고 광산‧철도 경비나 지역을 떠나 현 밖으로 가지 않는다고 속이는 “편병(騙兵)” 등이었다. 징병을 피하려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자르거나, 일부러 다리를 다치거나 자살을 기도한 일도 있었다.”(428~429쪽)

이렇게 많은 이들이 전쟁을 피하려고 한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생사의 경계선이라 느꼈을 압록강 앞에서 최후일지도 모를 말을 남기는 장병들의 이야기는 마음을 무겁게 한다.

1951년 3월 25일 저녁, 같은 사단의 87연대와 동행한 푸옌썬 부사단장은 부대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시찰했다. 그는 강을 향해 큰 소리로 “푸옌썬이라고 합니다. 쓰촨성 출신입니다. 어릴 적 소를 키웠고, 1932년에 홍군에 참가해…”라고 외쳤다. 부하들에게도 도강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남기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사단 군무과장은 “장옌원이라고 합니다. 허베이성 우안현 출신입니다”라고 외쳤다. 이어서 “허우잉제라고 합니다. 군 기수입니다”, “어머니, 이제 연세가 있으시니까 너무 일 많이 하지 마세요. 장작패기와 모내기는 며느리에게 시키고…”, “어머니, 보고 싶어요”와 같은 다양한 외침이 조용한 강에 울려 퍼졌다. 전국 각지의 사투리를 비롯해 민요와 희곡 멜로디가 더해졌다. 중일전쟁 때 입대한 마부 웨이 아무개는 “지금까지는 이름 있는 사람이었지만, 내일부터는 이름도 없는 영혼이 될지 모르니까”라고 정스원에게 설명했다. 이것은 해외에 파병되는 장병들이 국경선 안쪽에 남겨 두고 떠나는 “유언”이었다.(361쪽)

벌레 편에 서는 일

책을 읽는 동안 베헤이렌 대표였던 오다 마코토(小田 実)의 조감도-충감도란 표현이 떠올랐다. 1945년 6월 15일 미국 공군의 오사카 대공습을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서 그는 생각한다.

폭격의 본질은 새의 눈으로 보는 조감도鳥瞰圖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보면 폭격은 불꽃놀이처럼 황홀했다. 땅 위 벌레의 입장에서 볼 땐 끔찍했다. 이른바 충감도蟲瞰圖였다. 그는 새가 아닌 벌레의 편에 서서 싸우기로 했다.(『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 366쪽)

  • 📌베헤이렌 :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미군 탈영병 지원운동 등을 벌인 일본 평화운동단체. 정식 명칭은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ベトナムに平和を!市民連合)’이지만 베헤이렌(ベ平へい連れん)으로 줄여 부를 때가 많다.

전쟁을 할지 말지를 결정짓는 이들의 눈으로 볼 때와 달리, 일반 시민의 처지에서 전쟁은 그저 끔찍할 뿐이다. 자신이 속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해도 그렇다. 내가 사는 고장이 폐허가 되고, 사랑하는 가족‧연인‧친구‧이웃이 죽거나 다치고, 전쟁 전에 누리던 일상이 파괴되는데, 심지어 내가 전쟁에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으며 누구를 위한 ‘승리’일까?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분에 시민들이 좀처럼 동의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당시 중국 정부는 전투를 기피하는 이들에게 ‘우경화돼 목숨을 아낀다’고 비난했지만, 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심리일뿐더러 전쟁에서 죽을 일 없는 이들이 언제 죽을지 모를 ‘벌레’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시민들이 전쟁을 그토록 두려워한 건 나와 사랑하는 이들의 안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 못지않게 큰 이유였을 것이다. 아무리 전시라 해도, 설령 상대가 ‘인민의 적’이라 해도 타인을 죽이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보편적 인간성’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1942년 5월 옌안에서 열린 문예 좌담회에서 “(사람에게는 추상적인 인간성은 없고) 구체적인 인간성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사회의 인간성은 계급성을 지니며 계급을 초월하는 인간성은 없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성을 주장하고, 부르주아나 프티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 계급의 인간성을 주장한다”라며 보편적 인간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지만, 전쟁에 관한 여러 연구과 기록은 인간을 죽이는 데 본능적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보편적 인간성임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일본군과 근접전을 벌인 400개 이상의 보병중대를 대상으로 한 마셜의 연구에 따르면, 미군 소총수 중 15~20%만 적군에게 총을 쐈다. ‘살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입증하는 수치와 사례는 그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1876년 6월 16일의 로즈버드강 전투에서는 미국 육군이 2만 5천 발을 쏴서 99명의 원주민 사상자를 냈다. 한 발을 적중시키는 데 탄환 252발을 쏜 것이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벌인 전쟁은 “미식축구보다 조금 더 위험했을 뿐”(아너 노크, 하버드대학 교수)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살인의 심리학』 47~49쪽)

  • 📌로즈버드강 전투 : 미국 정부의 원주민 강제이주 정책에 저항하는 원주민 연합군과 미군 제7기병대가 벌인 전투로 원주민 연합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미국 서부 개척사와 아메리카 원주민 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를 지낸 데이브 그로스먼(Dave Grossman)은 이런 연구와 사례를 살펴보면서 “사실, 전쟁의 역사는 동료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한 타고난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을 계발하는 과정의 역사”(『살인의 심리학』 49쪽)였으며 “이러한 거부감은 강력한 힘을 지닌 채로 존재하며, 그 존재는 그래도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믿을 만한 여지를 남겨 준다”(『살인의 심리학』 85~86쪽)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계급적 인간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인간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오쩌둥의 주장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 사랑하는 이들이 죽지 않고 평온한 일상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적군이라 해도 나와 똑같은 인간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 어느 것도 ‘우경화’ 같은 말로 폄하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보편적 인간성’을 복원함으로써 살해행위를 조장해온 국가와 지배자들의 선동과 조작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벌레’들의 편에 서서 시민들의 삶과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동아시아 곳곳에서 벌어지는 위기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참고 자료

  • 데이브 그로스먼 지음, 이동훈 옮김, 『살인의 심리학』, 열린책들, 2011
  • 고경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 한겨레출판, 2021

글 : 김경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