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에서 말레이시아까지 | 식민주의 유산과 민족국가

팔레스타인에서 말레이시아까지 | 식민주의 유산과 민족국가

1946년의 말레이 분할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영국의 실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탈식민화란 무엇인가?", "어떻게 자본주의적 착취를 끝낼 것인가?", "말레이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둘러싼, 모순으로 가득 찬 두 개의 인위적인 민족국가 건설로 이어졌다.

2026년 2월 9일

[동아시아]말레이시아팔레스타인 연대 행동, 역사, 식민주의, 반공주의, 공산주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제국주의

이 글은 싱가포르의 역사연구자이자 활동가 툼핑진(Thum Ping Tjin)이 2025년 10월 23일 영국 더럼대학교(Durham University)에서 강연한 것의 녹취록 From Palestine to Malaysia: The Nation-State as Colonial Construct 을 본인의 동의를 얻어 번역한 것이다. '뉴내러티프'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툼핑진은 말레이시아 민족주의와 탈식민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탈식민화를 그저 지역적 투쟁으로 취급하고 싶은 유혹이 자주 들긴 하지만, 제2차 세대전 이후 식민지 관료들과 민족주의자들의 과업은 사상, 승리, 실패 등 국제 정세의 격변 속에서 전개됐다. 당시 말레이반도의 미래를 결정했던 영국 고위관료들에게 팔레스타인보다 더 무겁게 다가온 실패는 없었다. 해럴드 맥마이클(Harold MacMichael), 헨리 거니(Henry Gurney), 맬컴 맥도널드(Malcolm MacDonald) 같은 인물들은 "우리 무슬림들"을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안정적이고 영국과 자본에 우호적이며, 반란으로부터 면역된 전후 식민지를 설계하기 위해 말레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조건에 맞춰 탈식민화를 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1946년 말레이 연합(Malayan Union)과 별도의 싱가포르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시도인 말레이 분할은 2년 만에 붕괴했다. 1948년의 두 번째 시도인 말레이 연맹(Federation of Malaya)은 즉시 12년간의 비상사태로 이어졌다. 1963년의 세 번째 시도인 말레이시아 역시 싱가포르가 한밤중에 빠져나가면서 2년 만에 깨졌다. 실패의 해트트릭이었다.

  • 📌 말레이 연합 : 영국의 직할 식민지 계획으로, 모든 거주민에게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려 했으나 말레이 특권층의 반대로 무산됨.

말레이의 탈식민화에 대한 이런 실패들은 영국 식민주의, 자본주의적 착취, 그리고 자결(self-determination), 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신흥 사상에 대응하여 발생한 세 가지 핵심 질문을 둘러싼 갈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첫째, 우리가 탈식민화를 한다면... 식민주의를 끝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명백히 그 목적으로 세워진 영토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적 착취를 끝낼 것인가? 셋째, 말레이가 말레이 민족국가가 되어야 한다면, 말레이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로 끝났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는 두 개의 국민국가로 귀결됐다. 이들은 식민주의 해결이 아니라, 식민주의를 제도화하기 위해 건설됐다. 민중의 진짜 대표자들과의 민주적 협상이 아니라 강압에 기반한 엘리트 간의 야합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탈식민화가 아닌 권력을 이양했을 뿐이다.

시야를 넓히면, 동남아시아 역사의 이런 경험이 팔레스타인에 어떤 교훈을 주었으며, 어떻게 되갚을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유비가 아니라, 피해야 할 것에 대한 경고이자 아직 구축될 수 있는 것에 대한 프레임워크가 될 수 있다.

식민주의 이전의 말라야

식민 지배 이전, 해양 동남아시아는 바다에 의해 정의되었다. 계절풍(몬순, monsoon)은 동남아 전역에서 무역, 이주, 문화 교류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동을 통해 공동체들을 연결했다. 제국은 육지가 아닌 수로에 의해 통합됐으며, 정치 권력은 영토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전반에 걸쳐 충성을 이끌어내고 후원을 분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체성은 땅이 아니라 주군과 씨족에 근거했다. 집이라는 개념 역시 특정한 지리적 장소에 묶여 있지 않았다.

식민주의는 이 질서를 뒤집었다. 1824년의 영란조약(Anglo-Dutch Treaty)은 하나의 해양 세계를 경쟁하는 제국들로 갈랐다. 영국은 말레이 반도를, 네덜란드는 수마트라와 자바를 차지했으며, 부의 창출을 바다에서 육지로 옮겼다. 주석과 고무가 이윤의 엔진이 되었다. 주석 마을이었던 쿠알라룸푸르는 식민지 수도로 재탄생했고, 철도, 항구, 도로는 농장과 광산의 필요에 따라 건설됐다.

이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은 사회를 재설계했다. 그들은 계약직, 강압,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막대한 수의 중국인과 인도인 노동자들의 이주를 수용하는 한편, 협력자인 말레이 술탄들의 통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말레이인을 자본주의 경제에서 배제했다. 그 결과는 관리된 다원주의였다. 공동체들은 뚜렷한 경제적 역할을 할당받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격리된 공간에서 살았지만, 모두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주권적 논리에 종속됐다. 중국인과 인도인 이주민은 권리가 거부되고 외국인으로 취급되는 착취 가능한 노동력이었고, 말레이인은 영국이 권위를 강화해준 통치자들을 통해 온정주의적으로 통치받았다. 이 분기된 질서는 보편적인 소속감을 부정하면서 엘리트의 특권을 보존했다. 공동체 간의 분열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식민 국가의 구조 속에 구축된 것이었다.

식민주의에 의해 관계, 경제, 인구, 풍경마저 변화된 사회에서 '탈식민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탈식민화를 한다면, 미래의 탈식민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 질문이 말레이의 민족주의 운동들 사이에서 가장 치열하고 잔인한 싸움의 연료가 될 것이었다.

말레이 연합

이러한 상황에서 명백한 해답은 뒤가 아닌 앞을 보는 것처럼 인식됐다. 모든 이가 평등한 권리를 갖는 다민족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영국이 1946년 말레이 연합을 통해 시도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모든 거주 주민에게 공동 시민권과 평등한 권리를 약속하는 단일한 통일 국가였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그것은 말레이 지도자들에게 강요됐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이 박탈당한다며 이에 반대했다. 그들은 소수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말레이인은 인구의 약 40%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만약 모든 이가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면, 민주적인 말레이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외국인으로 간주하는 사람들, 즉 자신들의 언어를 말하지 않고, 종교를 따르지 않으며, 자신들의 땅에서 술탄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투표에서 패배할 것이었다.

이것은 분할에 의해 해결됐다. 말레이의 지배계급을 달래기 위해 싱가포르가 잘려 나갔고, 이는 말레이인을 다수파로 바꾸어 놓았다. (역주: 화인이나 인도인 상당수는 싱가포르에 살았기 때문) 민족주의와 탈식민화는 자결이라는 강력하고 대중적인 아이디어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고, 민족국가는 자결권을 위한 단순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했다. 즉, 각 "민족"은 자신만의 "국가"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깔끔한 아이디어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어떤 문화나 민족 집단도 명확하게 정의된 영토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한편, 수세기에 걸친 제국은 경계를 깔끔하게 그을 수 없는 혼합된 다민족 사회를 전 세계에 만들어냈다.

당시 분할은 복잡한 인구 구조와 민족주의적 요구를 화해시키는 한 가지 방법으로 보였다. 아일랜드, 인도, 팔레스타인의 분할은 모두 이러한 사고의 산물이었다. 즉, 대다수가 특정 "민족"인 국가를 만들어 권력을 이양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치 단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은 즉각적이었다. 다민족 정치를 빌미 삼아 어떤 지역이나 국가를 특정 인종 집단에 유리하도록 제멋대로 조정(gerrymandering)할 순 없다. 평등을 설파하면서 차별을 고착화할 수는 없다. 국경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가변적인지 보여주면서 영구적인 국경을 세울 수는 없다.

민족국가라는 이 아이디어는 국경을 정치적 무기로 바꾸었으며, 국가가 민족에 적합하도록 조정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이것을 티베트, 카슈미르, 우크라이나에서도 볼 수 있다. 나아가 만약 국가가 오직 한 민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적 정체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추방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정당화했다. 아르메니아인에서 유대인, 로힝야족에 이르기까지 20세기에 반복된 인구 이주와 제노사이드는 그 논리의 공포를 보여준다. 20세기의 과정에서 독재자들은 국가 정체성의 정의를 통제함으로써 적들을 민족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낙인찍고, 그들의 배제, 체포 또는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신화를 쫓는 일이다. 모든 이가 특정 민족인 국가를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개인이 우리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그 모든 복잡한 방식들에 대해 동일한 정의를 가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말레이에서도 같은 문제가 드러났다. 말레이 귀족계층은 다민족적인 말레이 연합에 반대하며 싸웠다. 그들은 영국이 오기 전 말레이는 말레이 국가였으므로, 탈식민화를 원한다면 말레이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외의 모든 사람은 시민권의 대가로 더 적은 권리를 받게 됐다. 우리가 다시는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식민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다른 이들—진보적인 말레이인과 비말레이인 모두—은 연합의 원칙을 받아들였지만, 그들 중 많은 이가 살고 있거나 가족이 있는 싱가포르와의 재통합을 요구했다.

영국이 오기 전까지 싱가포르는 조호르(Johor)의 일부였다. 만약 탈식민화가 식민 통치를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식민지적 차별을 끝내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한 인위적인 식민지 국경을 해체하는 것도 의미해야 한다.

영국은 말레이 귀족계층의 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편에 굳건히 섰고, 연합을 말레이 연맹(1948)으로 대체했다. 이는 말레이인의 우위를 보장하고 말레이, 중국, 인도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대체로 분리하여 다스리다가 공동체 간의 중재를 위해 만나는 협의주의적 안치를 만들었다.

연합의 붕괴는 말레이를 정의하는 모순들을 결정지었다.

  • 첫째, 평등권의 원칙은 특권의 방어에 종속됐다. 시민권은 "국가" 안보라는 계산에 따라 확대되거나 철회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족'은 누구인가? 누가 그것을 정의하는가? (말레이에서) 인종은 차별의 근거로 합법화되어 정치의 중심에 놓였으며, 오늘날까지 그곳에 남아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수준의 소속감을 고착화했다.
  • 둘째, 그것은 엘리트 정치를 고착화했다. 왜냐하면 그 타협은 엘리트 통치의 안정을 우선시하고 인구의 상당수 소수파의 진정한 대표자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수결주의 통치의 강력한 전례를 남겼다. 즉, 사람들의 다수와만 타협하면 되고 소수는 무시하거나 억압하면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51%를 얻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정부 모두 "이보게, 우리가 51%를 얻는 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 셋째, 그것은 정치 단위가 가변적이며 국경은 엘리트의 편의를 위해 그려진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연합과 그 후계인 연맹은 공유된 공동체의 산물이 아니라 압박 속에서 이루어진 엘리트 간의 야합의 산물이었다. 영국은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었으며, 엘리트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유권자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말레이 비상사태

영국이 방어하고 있었던 특권은 무엇이었는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수익성, 즉 말레이 민중의 착취였다.

영국이 1945년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다. 말레이는 제국의 핵심 수익원이었으므로 질서 회복과 자본주의적 수탈이 가장 중요했다.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전쟁 전 수준으로 동결되었고, 일본의 노동 통제는 유지되었다. 1년 정도의 기간 내에 농장, 광산, 항구 전역에서 파업이 분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민족적이었고, 투쟁적이었으며, 종종 말레이 공산당(MCP)에 의해 주도되었다.

전쟁 전, MCP는 이미 항구, 주석 광산, 농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했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기 동안 그들의 게릴라는 단연코 가장 능동적이고 전투적인 항일 세력이었으며, 정당성과 법적 인정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한 후 이들은 인도네시아인들처럼 독립적인 말레이 공화국을 선포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기다리며 영국의 재점령을 인정하기로 선택했다. 영국은 그들에게 법적 인정을 보상으로 주었다. 법적 정당으로서 그들은 노동자계급 조직화를 추진했다.

  • 📌 역주: 당시 말레이 공산당 서기장 뢰텍(Lai Teck)은 "아직 혁명의 주객관적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무장 해제와 합법 투쟁 노선을 주장했다. 그 결과 말레이 인민항일군(MPAJA)은 영국군에 무기를 반납했다. 이는 당시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 연합국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경향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MCP 지도부는 영국이 전후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유화적인 정책을 펼칠 것이라 기대하는 전략적 오판을 저질렀다.

그들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은 재개된 착취에 항의했다. 이때 MCP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지지자들은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들이었고, MCP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식민주의에 반대했다. 그들은 공정한 임금, 공정한 대우, 차별의 종식을 원했다.

식민 정부는 수익성을 유지하길 원했고, 노동자운동에 체포, 검열, 탄압으로 대응했다. 많은 이들에게 영국의 통치는 이제 일본의 점령과 거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둘 다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탄압했으며, 국외로의 이익 탈취를 위해 잉여가치를 착취했다.

1948년경, 불안은 유럽 자본과 지역 엘리트들을 경악하게 했다. 6월에 연맹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공식적으로 그것은 "공산주의 반군"을 겨냥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반동이었고, 자본 축적을 위한 조건을 복구하려는 프로그램이었으며, 말레이에서 진보좌파 정치를 제거할 기회였다.

그래서 비상사태는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을 훨씬 넘어서 휩쓸고 지나갔다. 노동조합원, 학생, 좌파 정치인들이 집단적으로 체포됐다. 1948~1952년 사이 3만 명 이상이 재판 없이 구금됐다. 싱가포르에서는 9만 명이 심문을 받았고 2만 명이 추방당했다. 신문들이 폐간됐고, 정당은 금지됐으며, 파업은 불법화되었다. 비상사태는 정치적 반대에 대한 총체적 공격이 됐으며, 좌파의 다민족적인 민중 기반을 짓밟고 UMNO가 이끄는 보수적이고 친자본적인 동맹을 민족주의의 용인 가능한 얼굴로 유일하게 남겨두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영국은 막대한 만행을 저질렀다. 가령 바탕 칼리(Batang Kali) 같은 곳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됐다. 공산주의 게릴라의 식량 공급을 끊기 위해 마을들을 불태운 것이다. 50만 명의 사람들—대부분 화인(중국계)—이 "신촌(New Villages)"이라 불리는 수용소로 강제 이주됐고 지속적인 감시 하에 놓였다.

게릴라 시신들은 전시되거나 "식별"을 위해 참수됐다. 런던의 고위 관료들은 개별적으로 그러한 행위들이 '전쟁 범죄'였음을 인정했다. 윈스턴 처칠은 그 관행을 금지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영국에게) 해를 끼치는 선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학살로 인해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1948년 제네바 협약을 약화시키기까지 했다.

총탄과 함께 법률이 뒤따랐다. 비상사태 규정은 재판 없는 구금, 검열, 광범위한 행정적 재량권을 정상화했다. 광범위한 권위주의적 권력은 일시적인 것이어야 했으나 그것들은 선동법, 내부보안법(1960)—이는 말레이시아의 국가보안법(2012)가 되었다—등 영구적인 법이 되었다. 비상 통치는 예외적인 것이기를 멈추고 거버넌스가 되었다. 비상사태는 모든 실질적인 목적에서 말레이에서 끝나지 않았다.

  • 📌 말레이시아 국가보안법(SOSMA) : 과거 식민지 시절의 유산이자 무기한 구금이 가능했던 내부보안법(ISA)이 2012년에 폐지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령. 명목상으로는 테러리즘과 국가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인권 침해와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쓰인다.

재정착은 인종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 정책이 중국인에게 집중된 것은 평등 그 자체를 전복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MCP 당원 다수는 화인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화인"이자 "반국가적"이라는 말의 요약어가 되었다. 말레이 공동체들에는 반중 선전이 쏟아졌고 그들의 생존이 말레이인의 우위에 달려 있다는 말을 들었다. 따라서 비상사태는 단지 군사 캠페인이 아니라 정치적 재편이었다. 그것은 진보적 좌파와 그들의 시민적 비전을 파괴하여, 포스트콜로니얼 정치가 공동체적이고 보수적이 되도록 보장했다.

그것은 반자본주의 투쟁을 공산주의 폭동으로 재프레임하여, 엘리트들이 질서와 국가의 수호자로서 정당성을 주장하고 폭력의 사용을 독점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여전히 그 그림자 속에 살고 있다. 비상사태는 반대가 곧 위협이며 비정상적인 권력이 정부의 정상적인 도구라는 논리를 고착화했다.

그리고 이 프레임워크는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다.

우리에게는 식민주의의 결과인 이 영토가 있다. 이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점유하고 그 천연자원을 바닥까지 빨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땅을 훔치고, 부를 훔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고문하고, 살해하고, 사람들을 죽여 통치를 영속시켰다. 노골적으로 경찰과 군대를 사용하여 시민들을 괴롭히고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경찰은 민간인을 학살했고, 사람들을 수용소로 몰아넣었으며, 그들에게 식량 접근을 거부했고, 단지 그들이 다른 언어를 말하고 다른 종교를 따른다는 이유로 전체 인구에 대해 집단적 처벌을 가했다.

다른 한편에는 그 나라에서 태어나 무기를 들고 저항하며 외국 점령군과 싸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땅을 해방하려는 목표를 추구하며 폭력을 사용하고 범죄를 저질렀다.

당신의 동정은 누구에게 향하는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말레이와 말레이 공산당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만약 지금의 팔레스타인 정세에 대한 대다수 말레이시아인의 감정은 압도적으로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에 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자국에 대해 정확히 똑같은 원칙으로 이야기하면, 말레이시아의 관심은 그들의 식민 지배자들에게 향한다. 왜 그럴까? 권력의 논리가 도덕적 프레임워크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영국, 연맹, 싱가포르 정부는 모두 말레이 공산당을 괴물 같고 반국가적인 위협으로 악마화했다—마치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묘사하듯이 말이다. 두 서사 모두 대규모 억압, 지우기, 반대 목소리의 침묵을 정당화한다. 이 중 어떤 것도 MCP의 폭력을 면죄해 주지는 않지만, 정부의 범죄 규모와 폭력 사용은 그들의 것을 압도했다. 어떤 상황에 대해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쪽이 그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가진다. 우리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식민 지배당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비난할 수 있는가? 오늘날까지 "공산주의"는 권위주의를 합법화하는 편리한 망령으로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즉 누가 프레임을 통제하는가, 누가 "질서", "안보", "국가"를 정의하는가이다. 말레이의 통치자들은 제국으로부터 공포와 정당성의 언어를 말하는 법을 배웠고, 우리는 그것을 말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

그래서 비상사태는 역사가 아니라 거버넌스의 기술로서 지속된다. 그것은 반대가 위협과 같으며 억압이 안보와 같다는 생각을 정상화했다. 이 논리는 여전히 예방적 구금, 검열, 이데올로기적 치안 유지, 선동법, 감시 체제, 그리고 표현의 제한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 및 종교적 화합"을 끊임없이 소환하는 것의 밑바탕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파괴했으며 착취에 대한 반대를 오늘날까지 위험한 좌익 반국가 이데올로기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프레임워크는 아니다.

우리는 종종 동남아시아가 유럽인들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 프레이밍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것은 지역 엘리트들이 식민 지배를 물리쳤다고 주장하거나, 동반자가 아니라 희생자였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말레이는 영국에 의해서라기보다 자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다. 즉 영국 자본과 글로벌 자본이다. 그리고 많은 지역 엘리트들이 그 정복에 협조했다.

영국은 식민지 자본주의로부터 혜택을 받은 사람들, 즉 귀족과 상인 계층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함께 MCP와 다른 좌파 운동을 통해 저항했던 노동자계급에 맞서 통치했다. 따라서 비상사태는 식민-자본주의 계급의 특권을 보존했다. 독립이 왔을 때, 그 동일한 계급이 통제 도구들을 상속받았다. 유일한 차이점은 꼭대기의 얼굴들이 백색 대신 갈색이었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국이라기보다 자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는 하나의 지배 논리로 융합되었다. 자본과 식민주의 사이의 동맹을 보는 대신, 우리는 경제적 착취를 애국적 성취로 가장하는 민족주의적 렌즈를 통해 역사를 서술한다.

이처럼 우리의 정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국가 안보"와 "안정"을 위한 투쟁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정치뿐만 아니라 역사—누가 역사를 쓸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직접 경험했듯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형성했다.

말레이시아 국가 건설

1946년의 분할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말레이 정치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는 여전히 싱가포르와 많은 말레이인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UMNO 지도자들에게 싱가포르는 의심스러운 존재였다. 압도적으로 화인 인구가 많았고, 이들은 (당시) 대체로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당에 투표했으며, 부유한 상인 엘리트가 있고, 말레이인들이 우위를 점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는, 도시 노동자계급들이었다. 어떤 형태의 재통합도 말레이인의 우위를 위협할 것이라 우려했다.

1959년 이후,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와 그의 인민행동당(PAP)은 선거 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과 재판 없는 구금 같은 식민지적 검열 및 억압 도구를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들에게 사용했고, 이 때문에 강력한 정치적 역풍에 직면했다. 1961년 두 번의 보궐선거 패배는 리콴유의 권력 장악을 더 위태롭게 했다. 그는 '재통합'이라는 대중적 보상이 다음 선거에서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도박을 걸었다. 쿠알라룸푸르와 런던을 설득하기 위해 리콴유는 자신의 좌익 반대자들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 맞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는데, 그렇게 하면 선거에서 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직 싱가포르에 대한 연방의 통제만이 말레이를 전복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 그러자 런던은 인종적 산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사바와 사라왁을 그 계획에 추가했다. 다시 한번, 인위적인 인종적 계산으로 건설된 국가였다.

하지만 그것조차 UMNO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길게 말할 것 없이, 그 결과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내에서 "격리"되는 헌법적 합의였다. 의회에서 과소 대표되고 섬 밖에서는 제한된 정치적 권리를 갖는 대신, 우리는 교육과 노동에 대한 자치권을 얻었다. 기본적으로 싱가포르인은 싱가포르 섬에서만 말레이시아 시민이었고, 북쪽으로 코즈웨이를 건너는 순간 정치적 권리를 잃을 것이었다. 이 제한은 사바와 사라왁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리콴유의 주요 라이벌인 임진상(Lim Chin Siong)과 반식민 좌파는 그러한 불평등이 지속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이 서로 다른 권리를 누리는 국가는 견딜 수 없다. 평등이야말로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국가를 위한 유일한 기초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 미만의 어떤 것도 식민주의를 재현할 것이라고 말이다.

합병을 확보하기 위해 1962년 싱가포르 국민투표는 조작되었다. "아니오" 옵션은 없었다. 유권자들은 오직 세 가지 변형된 "예" 중에서만 선택할 수 있었고, 그중 두 개는 명백히 PAP의 제안보다 열등했다. 몇 달 후, 콜드스토어 작전(1963년 2월)에서 임진상과 그의 동료들은 재판 없이 구금되었다. 좌파가 파괴된 상태에서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가 선포되었고, PAP는 며칠 후 선거를 간신히 통과했다.

  • 콜드스토어 작전 (Operation Coldstore) : 싱가포르 리콴유 정부가 합병을 앞두고 주요 반대파 좌익 인사들을 대거 구금한 사건.

임진상이 예측했듯이, 모순은 빠르게 표면화되었다. 리콴유는 2년 동안 섬의 중국인들을 위협으로 묘사하며 싱가포르의 중국인은 신뢰할 수 없고 격리되어야 한다는 UMNO의 의견에 동의했었지만, 이제 즉시 태도를 바꿔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 즉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평등한 시민권을 주장했다. 이는 UMNO의 말레이 우선주의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UMNO에게 이 반전은 그의 이중성을 증명했고 싱가포르의 중국인은 신뢰받지 못할 것임을 증명했다. 갈등은 화해 불가능했다. 1965년 8월, 싱가포르는 비밀 야합에 의해 축출되었고 기정사실로 대중에게 발표되었다. 그 후 PAP는 제국으로부터 상속받은 동일한 통제 도구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국가에 적합한 민족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말레이시아 국가 건설이 엘리트 특권의 보호라는 논리에 의해 어떻게 추진되었는지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근본적으로 리콴유를 보호하고 싱가포르의 반식민 좌파를 파괴하기 위해 건국됐다. 그들이 파괴되자 리콴유는 즉시 말을 바꿔 더 큰 특권을 요구했다. 그는 싱가포르에 평등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말레이시아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UMNO가 무엇하러 그것에 동의하겠는가? 그래서 말레이시아는 빠르게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더 큰 특권은 물론 자본주의적 수탈을 위한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엘리트들은 자본주의적 프레임워크를 재현하고 지속적인 수익성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들을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자산이 연결된 말레이인들과 측근들의 손에 놓이는 인종화된 국가 자본주의 모델을 통해 자원의 착취가 계속되므로 비교적 단순하다. 사바와 사라왁은 특히 착취당한다. 그들은 말레이시아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의 70%를 보유하고 있지만 수익의 약 5%만을 돌려받는다. 서말레이시아는 고도로 개발되었지만 동말레이시아는 거대하게 저개발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경우 상황은 더 복잡하다. 싱가포르의 독립 후 성공은 종종 모방해야 할 모델로 인용된다. 하지만 그 번영은 글로벌 자본과의 불균형한 동맹에 기반하고 있다. 천연자원이 없는 싱가포르는 저렴하고, 훈육되었으며, 교육받은 노동력과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는 식민지 모델로 돌아감으로써 외국인 투자를 유치했다. 즉 국제 자본이 싱가포르에 투자하도록 자본주의적 수익성을 보장하기 위한 임금 억제다. 이 동맹의 약점은 정부가 고부가가치 고임금 제조업으로 전환하려 했던 1980년대에 증명되었다. 자본은 즉시 떠났고, GDP는 수축했으며, 주요 불황이 있었고, 국가는 자본주의적 수익성을 회복하기 위해 임금 억제로 회귀했다. 싱가포르 GDP의 50%는 외국 소유 기업에서 나온다. 또 다른 3분의 1은 정부 자신이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불충분한 자본가 계급, 불충분한 국내 시장, 자신의 주권을 방어할 불충분한 레버리지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까지 싱가포르 노동자들은 생활비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비슷한 규모의 경제국들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는다. 정부는 이제 착취하기 위해 임금이 매우 낮고 노동 규제 법률에서 제외되는 저임금 이주민들을 수입한다. 610만 인구 중 약 140만 명이다. 이들의 초과 가치는 국제 자본에 의해 걷어내어질 수 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익숙하게 들리는가? 그렇다, 이것이 우리가 시작한 지점이다. 글로벌 자본에 봉사하기 위한 저렴한 노동력의 대규모 수입이지만, 이제는 "국가 발전"이라는 깃발 아래 있다. 다시 한번, 민족이 등장한다. 주요 차이점은 정부가 그들을 정착시키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싱가포르의 주권은 경제적 허구에 불과하다. 정부는 글로벌 자본에 맞서 행동할 경우 스스로를 훼손하게 된다. 그 성공은 착취—먼저 자국민을, 그다음 이주민을—와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탄압에 달려 있다. 싱가포르인들이 항의할 때면 그들은 외국인 혐오주의자라는 말을 듣는다.

팔레스타인을 위한 프레임워크

팔레스타인과 말레이는 서로의 거울이 아니다. 각자는 자신만의 비극과 이해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 계보는 명확하다. 동일한 행정가들, 아이디어들, 어휘들이 그들 사이를 이동했다. 말레이시아의 탈식민화 과정이 팔레스타인의 실패를 교훈 삼았다면,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틀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과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국가의 모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창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민족은 상상의 산물이며, 그 경계는 끝없이 다툼의 대상이다.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해 분열을 조장한다. 일부는 "민족의 일원"이라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규정함으로써 정복이나 추방을 정당화한다. 말레이에서는 인구통계를 근거로 한 분할이 영구적인 인종적 위계질서를 고착화시켰고, 시민권을 협상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실질적인 국가는 인종, 언어, 종교에 관계없이 평등한 시민권을 보장해야 한다. 권리는 양도 불가해야 하며, 엘리트들 사이에서 협상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양도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분리해야 한다. 국가는 자국 영토 내 모든 이들을 보호해야 하며, 민중(인민)에게는 국가를 초월하는 정체성에 자유롭게 속할 자유가 있다.

정치적 합의는 에스노-민족주의나 인구학적 편의에 보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국가 자체의 고유한 존재 권리는 없으며, 그것은 오직 인민에게만 존재한다. 만약 국가가 인민을 살해하거나 배제한다면,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현지화가 아닌 권력의 탈식민화

말레이(현대사)는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 권력을 탈식민화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보여준다. 식민주의에 의해 재편된 사회는 단순히 통제권을 지역 엘리트들에게 넘겨줌으로써 해방될 수 없다. 그것은 강압과 특권의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탈식민화는 권력 그 자체를 재구성함으로써, 권력이 책임성과 참여성을 확보하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실제로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가 20세기에 엘리트 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이재킹됐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개념 전체가 특히 미국과 함께 시작됐고, (미국이란 나라의) 정당화와 권한 부여로서의 민주주의 대 정부 시스템으로서의 민주주의, 특히 대의 정부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원칙을 생략하도록 의도적으로 모호해졌다.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대표 정부(representative government)를 국민이 집단적 능력으로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한 형태의 정부로 구체적으로 주장하였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국가에서 여러분의 유일한 실질적인 통치 참여는 투표소에서이다. 우리는 자주 대표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후보들과 정당들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 📌 제임스 매디슨 : 미국 헌법의 기초를 닦고 권리장전(Bill of Rights) 작성을 주도하여 '미국 헌법의 설계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알렉산더 해밀턴 등과 함께 '연방주의자 논집(Federalist Papers)'을 집필해 '강력한 중앙정부'의 필요성과 그 원리를 정립했다.

그러나 진정한 탈식민화는 사람들을 그 과정에 재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개 청문회, 참여 예산제, 시민 의회, 상호 이익을 위한 협회의 조직, 인내심 있는 합의 도출 등이 그것이다. 싱가포르에서 림친시옹(林清祥, Lim Chin Siong)은 한때 그러한 과정들을 바탕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조직했었다.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엘리트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즉각 인식되어 빠르게 짓밟혔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여전히 가능하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흐름이 진행 중이고, 우리가 보유한 기술과 도구로 인해 그 가능성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진정한 해방은 권력을 지속적으로 아래로 재분배하는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엘리트들은 항상 권력을 독점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발전으로부터 누가 혜택을 받는가?

사실 싱가포르는 1965년에서 1978년경까지 짧은 사회주의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토지는 집단화됐다. 정부는 싱가포르 토지의 90%를 소유하고 있으며, 더 적은 정도로 자본 또한 집단화됐다. 이는 두 가지 희소 자원의 사용을 공공의 이익에 종속시켰으며, 빠르게 상승하는 생활 수준으로 이끈 싱가포르의 위대한 공공 프로그램들인 공공 주택, 연금, 교육, 보편적 의료의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비용 상승은 국가를 다시 식민지 모델로 밀어냈다. 임금을 억제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수입하며, 성장을 위해 글로벌 자본에 의존하는 모델이다. 그것(싱가포르의 초기 모델)은 초국적 자본과의 기싸움에서 패배했고, 결국 자본의 요구에 상응해 민중의 주권을 상실했다.

한편 말레이시아는 특권의 조직 원리로서 계급을 인종으로 대체했다. 글로벌 자본으로부터 더 큰 자유를 얻었으나 단지 내부로 눈을 돌려 사바와 사라왁 주민들 및 다른 이들에 대한 내부 식민주의에 관여했다.

  • 내부 식민주의(Internal Colonialism): 한 국가 내 지배적 지역이 주변 지역의 자원을 수탈하고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현상.

결과적으로 두 나라 모두 이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경제국들 중 하나가 됐다. 이코노미스트의 '정실 자본주의 지수'에서 두 나라는 3위와 4위에 올라 있다.

  • 정실 자본주의 지수(Crony Capitalism Index) : 정경유착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각각 세계 3위와 4위를 기록한 바 있음.

탈식민화 과정에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경제적 주권 없는 독립은 환상이다. 재건이 외국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위한 '개발'의 문을 열어주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경제 개발 계획'과 '특별 경제 구역… 우대 관세 및 접근률' 등 계획이 포함된 도널드 트럼프의 가자 평화 구상(Comprehensive Plan to End the Gaza Conflict)'은 [기만]이다. 누가 그 혜택을 누릴 것인가? 노동권은 개발의 기반이 되어야 하며, 토지, 주택, 인프라 시설은 공공재로 남아야 한다.

결론: 국가를 재상상하기

팔레스타인에서 지속적인 정치적 정착을 원한다면, 그것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다민족 국가여야 한다.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다른 집단보다 우대하거나 보호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국가도 소수자들이 침묵당하거나 억압받음에 따라 필연적으로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강요된 헌법과 선거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평범한 사람들이 정부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국가여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의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실질적이고 진정한 권력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대표자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의사 결정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고 보호할 수 있는 국가여야 한다. 만약 경제가 외부 세력, 특히 외국 자본에 의해 통제된다면, 그 외국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과 일본이 재건되고 재산업화된 이유 중 하나는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말레이의 건국 과정은 유별난 사례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패턴들이 탈식민화된 세계 전역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목격해왔다. 미얀마, 인도, 아프리카 식민지들 등 수많은 다른 영국 식민지들에서 이러한 동일한 패턴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들 중 많은 것들은 우리 모두가 점차 더 빈번하게 직면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개인의 존엄성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화적인 '민족'이라는 아이디어 등. 주류 후보들에게 대표성이 없고, 선거 후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헛수고가 되어가는 선거들. 노동자들의 협상력과 임금을 억제하기 위해 착취를 목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의 대규모 수입을 장려하는 글로벌 자본.

그런 점에서 팔레스타인이 직면한 문제들은 우리 모두가 직면한 문제들이다. 이제 우리는 국가를 정당화하고 개념화하는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 우리는 신화화된 '민족 개념'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의 기초라고 여기며 출발해야 한다. 국가는 그 안의 모든 개인에게 존엄과 정의를 전달하는 도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역사에 기반한 국경이라기보다, 주어진 지리 내에서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사람에 대한 존엄과 존중을 가장 잘 제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치 단위를 만들기 위해 국경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되물어야 한다. 국가의 정당성은 국가가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에서 비롯될 수 있다.

우리가 국가 그 자체를 설계하고, 개념화하고, 상상하는 방식이 기후 변화 상황에서의 제노사이드(학살), 불평등과 빈곤 등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기여하며, 심지어 그 원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국가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먼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민족국가 또한 한때는 먼 이야기처럼 보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 제국의 종말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 사이에서 통치의 기본 형태는 제국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빠르게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오늘날 모든 국가는 가장 제국주의적인 국가조차도 상상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민족'의 기초 위에 자신을 정당화했다. 따라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상상하는 우리의 능력일 뿐이다. 나는 우리가 상상을 시작하는 것이 꽤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지 않는다면, 과거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 : 툼핑진(Thum Ping Tjin)

번역 : 플랫폼c 동아시아 사회운동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