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사회의 억압과 모순
2026년 1월 17일
지난 연말, 이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리알화(이란의 통화) 가치가 사상 최저치로 폭락하고 생필품 가격이 수백 퍼센트까지 급등하자,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느낀 민중들이 대규모 시위에 돌입한 것이다. 수도 테헤란의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바자리’(상인계층, Bazaari)가 점포 문을 닫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1월 5일, 상인들의 파시(罷市)에 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는 기존의 경제적 요구에서 정치적 요구로 발전했다. 그리고 1월 8일, 이란 당국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쏘는 진압을 펼쳤고, 시위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테헤란, 마슈하드, 이스파한 등 주요 대도시에서는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이를 포함한 160개 이상의 중소 도시에서도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바자리 뿐만 아니라, 석유 채굴 노동자들이나 교사, 트럭 운전사 등이 동참하는 전국적 총파업이 전개되면서, 이란은 현재 국가 기능이 상당 부분 마비된 상태다.
‘이란인권운동가들(HRANA)’ 같은 비영리조직발 소식이나 외신 보도들에 따르면, 시위가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최소 30,000명 이상이 체포되거나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시위대는 당국의 극심한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있으며, 사망자가 늘어날수록 조문 행렬이 새로운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1월 15일 현재 기준, 확인된 사망자 수만 2,5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2009년 부정선거 반대 시위, “여성, 생명, 자유”란 구호로 알려진 2022년 시위 등 이란으로부터의 반정부 시위 소식은 그리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번만큼 규모가 크고 반정부적 색채가 강했던 시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 항쟁은 왜 촉발됐는가? 그리고 오늘날 이란 사회의 모순은 어떤 역사적 연원을 갖는가?

바자리는 왜 항쟁에 나섰나
현재의 이란 내 항쟁은 몇 가지 면모에서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전 시위들이 대학생과 여성, 소수민족, 세속주의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됐다면, 이번에는 상인계층인 ‘바자리’가 중심에 있다. 이들은 전통적 중산층이자, 주요 도시들의 전통시장 ‘바자르(Bazaar)’를 중심으로 거대한 사회·경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상인과 노동자가 결합한 총파업 투쟁이 체제에 치명적인 이유는 이란 현대사 특유의 경제 구조 때문이다.
이란 현대사 전반에서 바자리는 국내 유통의 약 3분의2, 수입이나 소매업의 절반 이상을 점해 왔다. 특히 신용 거래 같은 비공식 금융망을 통해 국가 금융 시스템이 닿지 않는 곳까지 자금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문화적으로 이슬람 가치관, 대가족, 전통적인 상거래 관습을 중시하며, '아스나프(Asnaf)'라 불리는 길드들로 조직되어 있다. 그러니 조직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1979년 혁명 당시에도 상인들이 가담하면서 왕정이 무너졌던 전례가 있다.
많은 외신들은 이란 민중의 분노가 리알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생계고 때문이라 말하지만, 이는 결정적 마지노선을 넘기는 계기였을 뿐, 그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다. 현재 시위대 내에선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에 대한 비판도 나오지만, 가장 큰 비판 대상은 ‘혁명수비대(IRGC)’ 관료들이다. 혁명수비대가 국가 경제 전반에 지나치게 개입해 이권을 독점하고 비리를 저지르면서 상인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수비대가 이란의 민생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된 것은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면서부터다. 당시 대통령 라프산자니는 군의 유휴 인력과 장비를 국가 건설에 동원하기 위해 '카탐 알 안비야(Khatam al-Anbiya)' 건설 본부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혁명수비대 경제 활동의 시발점이 됐다. 그리고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 재임 시기(2005~13년), '민영화' 정책 아래 국영 기업들이 매각되어 나갔다. 자금력을 가진 혁명수비대 산하 법인들과 종교재단(보냐드, Bonyad) 산하 법인들은 이를 헐값에 독점적으로 인수하며 거대 군부-상업 복합체로 거듭났다. 혁명수비대는 인프라, 석유화학, 금융 등을 아우르며 지배적인 경제 주체로 부상했다. 모스타자판 재단, 이맘 레자 성지 재단(Astan Quds Razavi), 세타드(Setad)를 포함한 주요 종교 재단들 역시 국영 기업을 인수하고 거대 기업 제국을 건설하며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들은 광범위한 복합체를 이루고 새로운 정치 블록을 형성했다.
2018년, 트럼프 행정부의 핵합의(JCPOA) 탈퇴와 경제 제재 부활 이후, 이란 집권세력은 ‘저항 경제’를 내세우며 혁명수비대에게 경제 전반에 대한 초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혁명수비대가 운영하는 법인들의 경제 지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실질적으로 국가 경제의 절반 이상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상인들이 주도해 온 영역을 혁명수비대가 '국가 안보'와 '제재 회피'를 명분으로 잠식한 것이다.
바자리는 쌀, 설탕, 가전제품 등 생필품 수입과 유통을 장악해 왔다. 수입 면허를 확보해 대규모 무역 회사를 운영했으며, 시장가보다 훨씬 낮은 공식 환전에 우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한데 혁명수비대가 항구와 세관을 이용해 무관세로 물건을 들여오고 유통망을 선점하면서 상인들이 설 자리가 사라졌다. 설상가상 바자리의 핵심 경쟁력이었던 사설 환전이나 신용거래 영역에 혁명수비대 관련 은행들이 진입하더니 자금 흐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이 주도하던 해외 자본의 투자를 혁명수비대가 중간에 개입해 자신들의 사업으로 탈취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기도 했다. 즉, 혁명수비대가 민생 경제를 잠식한 것은 단순히 부패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이 ‘저항 경제’란 명분으로 군부의 특권을 제도화한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던 2025년 말, 이란 리알화 가치가 사상 최저치로 폭락하면서 상인들은 물건을 팔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에 다다랐다. 상인들은 환율 위기의 배후에는 외환을 매집하고 암시장을 통제하는 혁명수비대의 부패가 있다고 봤다. 정권이 생필품 가격을 강제로 동결하려 하면서 상인들을 '매점매석꾼'으로 몰아 처벌하는 동안, 정작 혁명수비대 고위 간부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모습이 폭로됐고, 이것이 바자리의 집단적 분노를 낳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위는 일시적 불만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10여 년 간의 정치경제적 변화의 결과이며, 기존에 헤게모니를 지탱하던 중추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십 년 동안 정권은 위기 시기에 바자리의 지지에 의지해왔다. 따라서 최근 정세에서 바자리의 저항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직면한 도전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는 것을 방증한다.

1979년 이란 혁명
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비 왕정의 급격하고 내려 꽂는 방식의 권위주의적 근대화는 농촌 인구의 대거 도시 유입을 초래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통적 가치에 대한 향수와 이슬람 지하 사회(모스크, 마드라사, 소규모 종교 모임 등)에 혁명적 동력을 제공했다. 빈부격차 확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도시 빈민가 확산 등으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었고, 이때 종교적 언어가 대중 동원의 핵심 수단이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유입된 막대한 자금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이는 실질 임금 하락으로 이어져 도시 노동자 계급과 중산층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이란 사회는 근대화된 도시의 중산층과 노동자계급, 상인, 농민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어지럽게 충돌하는 장이었다. 특히 전통적인 상인 계층인 '바자리'는 국가가 시장경제를 장악하고 서구식 대형 유통망을 도입하려 하자 체제에 등을 돌렸다. 반면, 왕실과 결탁한 일부 상업 부르주아지는 외세와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은 경제 성장의 과실에서 소외되는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졌다.
1953년 쿠데타 이후 권력을 공고히 한 팔레비 국왕 은 비밀경찰 조직인 사바크(SAVAK)를 동원해 모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다. 일인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며 지식인, 노동자, 중산층의 정치적 참여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다. 시장(Bazaar) 경제에 개입하고 성직자 계층의 토지나 재원을 잠식하자, 상인과 종교인들이 정권에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지식인과 학생들의 정치적 참여가 원천 봉쇄됐고, 사회적 불만을 평화적으로 수용할 제도는 작동하지 않았다.
- 1953년 쿠데타: 미 CIA와 영국 정보부가 '아약스 작전'을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키고 샤의 전제 군주제를 복원시켰다. 이 사건은 이란 민중이 스스로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위협했으며, 이란인들에게 서구 개입에 대한 깊은 불신을 안겨주었다.
역사학자 아바스 아마나트(Abbas Amanat)에 따르면, 1979년 혁명은 단순한 '종교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결합한 '경합하는 혁명(Contested Revolution)'이었다. 세속적 자유주의자, 좌파 사회주의자, 전통적 상인(바자리), 그리고 이슬람 성직자 계층은 팔레비 왕정의 전제주의에 반대한다는 공통분모로 뭉쳤다. 물론 혁명 운동 당시 혁명의 주도권은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 세력에게 있었다.
그러나 좌파 역시 중요한 한 축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1978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폭발한 중산층과 노동자계급의 항쟁은 혁명을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이끌었다. 특히 석유 산업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규모 산업 노동자들이 벌인 총파업은 국가 경제를 완전히 마비시켰으며, 이는 샤(Shah) 정권의 물리적·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되었다. 1940년대 독재자 레자 샤의 퇴위 이후 열린 정치적 자유와 1941년 투데당(Tudeh Party of Iran) 창당, 이란노총(CCFT)의 조직화 물결 속에서 구축된 조직적 전통과 영향력은 혁명 시기 좌파 세력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또 다른 이란계 역사학자 에르반드 아브라하미안(Ervand Abrahamian)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이란 좌파를 대표하던 투데당은 '반제국주의'와 '사회정의'라는 보편적 명분을 공유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왕정 타도를 위한 투쟁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1979년 혁명을 주도한 세력들은 혁명 이후의 국가 모델에 대해 완전히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혁명 초기 이들의 동상이몽은 갈등으로 분출됐다. 노동자계급은 왕정을 타도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으나, 혁명 이후 수립된 신정 체제는 이들의 계급적 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성직자 중심의 권력 독점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무엇보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현대적인 공화국 모델과 전근대적인 ‘이슬람 법학자의 통치(Velayat-e Faqih)’ 개념이 충돌하며 체제의 정체성 위기가 폭발해버렸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리더 메디 바자르간(Mehdi Bazargan)이 이끌던 과도 정부는 종교 강경파들의 초법적 활동과 충돌하며 무력화됐고, 이는 결국 자유주의 세력의 정치적 퇴출로 이어졌다.
두 개의 결정적인 사건들이 이런 흐름을 촉발시켰다. 신정 체제는 내부의 분열과 모순을 해결하기보다, 외부 위기를 활용해 반대파를 침묵시키는 방 식을 취했다. 하나는 1979년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이는 대중을 반외세 민족주의로 결집시켰다. 이로 인해 정권 내 온건파는 물러나고, ‘혁명 수호’라는 명분 아래 강경 신정 체제를 수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둘째, 1980년대 내내 전개된 이란-이라크 전쟁 역시 내부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으로 인해 정권은 내부 비판을 “이적 행위”로 규정하고, 투데당과 모자헤딘 등 좌파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할 수 있는 “성스러운” 명분을 제공했다. 정권은 미디어와 교육 체계를 통해 성직자만이 가난한 민중을 대변하는 유일한 수호자였다는 신화를 유포하고, 좌파의 혁명적 기여를 지워나갔다. 숙청 과정에서 좌파 지도자들을 TV에 출연시켜 자신들의 사상이 틀렸음을 자백하게 함으로써, 좌파 운동의 도덕적 정당성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란 좌파 세력은 왜 이슬람 혁명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하고 신정 체제에 의해 숙청당했나. 우선 기반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못했다. 종교적 조직망을 가진 성직자 계층이나 경제적 네트워크를 가진 바자리 계층에 비해 좌파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좁은 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또, 좌파들은 이슬람주의의 강력한 대중 동원력과 그 내부 역동성을 충분히 분석하고 대응하지 못했다. 전통 좌파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 온건한 협력 노선을 취한 반면, 페다이안(Fadaiyan) 등 일부 급진 무장 세력은 독자 노선을 걷는 등 내부분열이 심각했다.

배반된 약속
혁명 이후 이란 사회는 억압적인 체제로 후퇴했다.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은 역설적으로 체제 수립 직후 도입된 강제 히잡 착용과 가족법 개정 등을 통해 가장 먼저 탄압의 대상이 됐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란 사회의 핵심적 모순으로 남았고,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시위의 배경이 됐다. 1980년대 초반 대학 내에선 세속주의적인 연구자들이나 학생들이 억압의 대상이 됐다. 신정 체제는 이들을 축출하고 교육 과정을 이슬람화함으로써, 정권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원천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또한 호메이니는 전통적인 코란 용어들을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용어로 탈바꿈시켜 좌파와 지식인 계층의 언어를 흡수했고, 교리 대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조하며 대중의 분노를 조직화하고자 했다. 가령 그는 사회를 '모스타카베린(압제자)'과 '모스타자핀(압제받는 자)'으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팔레비 왕조의 부패에 신음하던 하층민과 중산층의 정서를 자극했다. <코란>에서 모스타자핀은 '고아나 과부 등 단순히 수동적 주체로 규정된 약자'를 의미하지만, 호메이니는 이를 '억압받는 민중' 혹은 '분노한 가난한 이들'이라는 투쟁적 의미로 바꾸어 사용했다. 이는 당시 이란 사회를 지배하던 제3세계 비동맹운동과의 친연성을 갖고 있던 좌파와 학생운동의 지지를 끌어내는 교량이 됐다. 그리고 때로는 "이슬람 사회에는 빈민가가 없을 것"이라거나 "부의 재분배"를 약속하는 등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급진적으로 부의 재분배나 빈곤 퇴치를 약속하며 대중의 마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권력 장악 후의 신정 체제 수립을 위한 포석이었을 뿐이다. 혁명 이전 호메이니는 자신의 가장 논쟁적인 사상인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법학자의 통치)'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권을 잡은 후에는 혁명 당시의 급진적 용어들을 체제 수호의 언어로 다시 재정의했다. 우선 혁명 이후 '모스타자핀'은 경제적 빈곤층이 아니라 '정권을 지지하는 정치적 지지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확장되었으며, 여기에는 부유한 바자리까지 포함됐다. 정권이 안정되자 호메이니는 혁명 초기의 부의 재분배 수사 대신 "이슬람은 사유 재산권을 보호한다"는 점을 강력히 천명하며 중산층의 안정을 꾀했고, 초기 동맹이었던 좌파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듯 호메이니는 '이슬람 법학자의 통치'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이 개념은 사실 시아파 전통의 ‘정치적 침묵주의’와 배치되는 혁신이었지만, 동시에 이슬람교계 내부에서는 많은 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이슬람 공화국'이란 국호는 현대적인 공화제(선거와 의회제도)와 전근대적인 신정(절대적 법학자 권위)을 결합한 모순적 구조를 반영한다. 이 독특한 체제는 헌법적으로 오늘날의 프랑스 정치 모델을 차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성직자의 독점 권력 을 강화하고 있다. 1979년 대중 투쟁을 통해 이뤄진 신정 체제는 대중이 ‘팔레비 왕조가 추구하던 서구화된 근대’보다는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이슬람적 대안’, 그러나 세속주의적인 좌파들이 연합한 듯했던 대안을 선택한 것이었다.
현 정권은 이 체제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이란의 현대사를 재구성해왔다. 교육과 언론을 통해 성직자들이 역사적으로 언제나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 있었으며, 외세에 맞서 민족을 지켜온 유일한 수호자였다는 식의 스토리텔링과 신화를 만들었다. 또, 영국이나 미국 등 외세가 이슬람 공화국 이란을 파괴하려 한다는 공포를 강조함으로써 대중을 결집시키고 내부 비판을 억압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 반제국주의적이었지만, 억압적인 기제로 작동하기도 했다.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정권이라 하더라도, 내부의 암묵적인 대중 지지를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통치세력에게 바자리의 지지는 필수적이다. 따라서 정권은 현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혁명수비대 관련 대기업들의 지배력을 억제함으로써 바자리를 다시 포섭하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미국 및 유럽과의 긴장이 심화되는 가운데 제재 완화는 요원한 일이며, 혁명수비대의 경제 권력을 축소하는 것은 그 관료들의 불만을 살 수 있다. 설령 바자리와의 타협이 이뤄지더라도, 이란 노동자계급에게 가해진 정치경제적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다. 따라서 혼돈의 정세 속에서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 이란 노동자계급에 대한 좌파적 전통의 영향력을 회복해 모순적 체제에 맞서 재도전하는 수밖에 없다.

항쟁 지지! 진압 규탄! 군사 개입 반대!
1월 8일을 기점으로 당국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과 기관총을 동원한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있다. 테헤란, 시라즈, 라슈트 등 주요 도시의 광장과 거리에서 "대량 학살"이라 불릴 만한 수준의 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이란 당국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전국의 인터넷망을 차단했고, 이 때문에 정확한 피해 규모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블랙아웃 중에도 위성 통신 등을 통해 참혹한 영상들이 외부로 유출되고 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1월 14일 기준 최소 2,571명이 사망(시위대 2,403명, 군인 147명)했으며, 그밖에 다른 언론들은 적게는 2천 명(익명의 공무원들이 외신에 누설한 내부 집계치)에서 많게는 6천 명(병원 보고를 토대로 한 전문가 추정치)까지 추정하고 있다.
2009년(녹색 운동), 2019년(유류세 인상 반대 시위), 2022년(마흐사 아미니 시위)과 달리 현재의 항쟁은 장기화·격화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많다. 과거의 시위들이 특정 계급에 국한되었다면, 이번에는 전통적 지지 기반이었던 바자리와 도시 빈민들이 결합해 체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설령 현 정권이 혁명수비대를 동원한 압도적인 폭력과 학살로 거리 시위를 잠재우더라도, 민중들의 불복종운동은 지속될 것이다. 세금 납부 거부, 국영 매체 시청 거부, 공공장소에서의 히잡 미착용 등 바야트식 '일상적 저항'은 지금의 시스템을 서서히 붕괴시킨다. 혹은 시위가 격화되고 경제가 마비되면서 군부와 혁명수비대 사이, 혹은 성직자들 등 통치 엘리트 그룹 내부에서 분열이 촉발될 수 있다. 이는 급격한 정권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 항쟁은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종식을 요구하고 있고, 민중의 정확한 분노는 혁명수비대의 부패와 불평등에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질서의 관점에서도 이란 사회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란 이슬람 국가의 형태는 종교나 문화적 요인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흐름과 계급구조가 상호작용한 산물이며, 외딴 섬이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높게 점쳐지는 전망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개입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두 나라는 지난해 이란을 향해 미사일 공격을 가한 바 있고, 오랜 세월 이란을 적대하며 가혹한 경제 봉쇄 조치를 가했다. 한데 트럼프의 군사 개입은 이란의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트럼프는 자국 땅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고, 이민단속국(ICE)의 폭력을 동원해 시민사회와 이주민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베네수엘라를 무단으로 침공해 현직 대통령을 납치하기도 했다. 이런 자가 머나먼 이란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군대를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결국 미국의 개입은 이란의 혼돈을 틈 타 군사적 개입을 꾀하는 것은 더 큰 폭력과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중동 정책은 역내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미 국가의 리더인 이란의 붕괴를 유도하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20세기 초 서구의 침략, 1953년 쿠데타 지원, 그리고 그 이후의 잇따른 개입에 이르기 까지 이란 민중에게 서구 제국주의는 자국의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존재해왔다. 이란 민중은 자국의 운명은 외부의 폭격이나 외교적 압력이 아닌, 이란 민중 스스로의 투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를 모르는 것은 오직 ‘왕세자’를 자처하는 옛 권력자 뿐이다.
우리는 이란 시민들의 항쟁에 연대하고 학살에 반대하면서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개입을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이는 이란 좌파의 잊혀진 노선이기도 하다.. 그것은 신정 체제의 폭압에 맞서면서도, 제국주의에 항거한 가장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노선이었다. 이를 기억하면서, 현 정세에서 권위주의 폭력과 불평등에 맞서 민중들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전 세계 모든 세력은 다음의 세 가지 입장을 분명히 견지해야 한다.
- 첫째, 이란 정권의 잔혹한 시위 진압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 이란 시민들을 향한 어떤 국가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를 ‘서방의 음모’로 취급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궤변일 따름이다. 일부 시도가 있을지라도, 이를 전부로 치부해선 안 된다. 압제자 트럼프가 아니라, 전 세 계 좌파와 민중운동의 목소리로, 투쟁하는 이란 민중을 향해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 둘째, 이스라엘과 미국의 군사 개입 및 전쟁 획책에 강력히 반대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이런 방식의 개입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으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로 내몬 미국과 이스라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주류 미디어가 유포하는 허구적 쟁점에 휘둘리지 말고, 왜 이런 모순이 심화됐는지 살피는 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도다. 이란 민중의 항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외부의 군사적 개입이라는 독배를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 셋째, 강고한 국제연대를 통해 이란 민중의 자발적인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하고, 이란 정권이 더는 시위에 대해 학살로 대응하지 말 것을 요구해야 한다.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자신들의 민주주의와 생존을 지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란 항쟁과 동시대 전 세계의 저항들은 연결돼 있다.
참고 자료
- Haneen Adi, 「Operation Ajax illuminates the history of US and UK intervention in Iran」, Verso Blog, 2015.07.
- Kayhan Valadbaygi, 「Why the once loyal bazaar merchants are now protesting in Iran」, Jan 10. 2026, Al Jazeera
- Arron Reza Merat, 「As Protests Engulf Iran, Israel Sees an Opportunity」, Jan 11, 2026, Jacobin Magazine
- Saeid Golkar, 「Why Iran is not repeating 1979」, Jan 13. 2026, Al Jazeera
- 「Iran signals fast trials and executions for protesters, despite Trump's warning」, Jan14, 2026, The Associated Press/N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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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ahram Kholdi, 「Iran’s crisis and the limits of sovereignty」, Jan 14, 2026., Iran 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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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