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무노조 신화를 깨다 |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투쟁의 교훈
2025년 12월 22일
이 글은 2025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아시아 노동운동 교류회에서 발표한 것을 글로 옮긴 것이다. ‘삼성 공화국’의 비극적이고 체계적인 노동조합 파괴 시도를 기록하는 동시에, 하청 수리 노동자들이 구조적인 비가시성을 극복해 한국 내 삼성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의 연쇄 효과를 촉발한 과정을 강조한다.
한국은 삼성 자본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흔히 ‘삼성 공화국’ 혹은 ‘삼성 왕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입니다. 2025년 현재 그 영향력은 다소 줄었지만, 삼성 자본은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기업입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이씨 일가가 지배하는 삼성그룹 산하의 계열사들은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진출해 있으며, 삼성의 영향력은 한국 국가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까지 미칠 정도로 강력합니다. 한때 고 노무현 대통령조차 삼성의 권력이 정부보다 강하다고 인정하기도 했을 정도죠.
삼성은 80년 동안 ‘무노조’를 통한 노조 조직화 차단 전략을 유지해왔습니다.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할 때마다 회사는 납치, 감시, 협박, 뇌물 제공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노조 설립이나 조직화를 차단하고 파괴했는데요. 2012년 삼성의 ‘노사 전략 문건’이 유출되었을 때, 노조 불인정 정책을 유지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삼성이 얼마나 치밀하고 상세한 전략을 준비했는지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삼성의 노조 파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노조 파괴 방법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 모든 조합원과 잠재적 조합원에 대한 도청 및 감시를 통해 대화를 수집한다.
- 지인 관계, 부패 여부, 재판 진행 상황, 재정 상태(부채 포함), 가족과의 휴가 활동, 본인 및 가족의 건강 정보 등 노조 탈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매일 보고한다.
- 주동자 및 적극 참여자에 대해서는 징계 및 해고 조치를 통해 노조 확산을 차단한다.
- 재취업을 막기 위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활용한다.
- 반복적으로 기소 및 공소를 제기하여 압박을 강화한다.
- 경찰 수사 전략 협의를 통해 체포하거나 압박을 가한다.
- 한국경영자총회(KEF)를 통해 단체교섭을 지연한다.
- 적극적으로 직장폐쇄 및 협력사 폐쇄를 유인한다.
- 노조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노동자에 대해 표적 감사를 진행한다.
- ‘그린화’(=노조 탈퇴)를 위한 회유 및 협박을 지속한다.
- 파업 무력화를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
이 글에서 제가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사례에 해당하는 삼성전자서비스(주)는 삼성전자의 100% 자회사입니다. 한데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자들은 삼성전자서비스 센터에 소속된 정규직 직원이 아니라, 삼성전자서비스가 불법적으로 유지해 온 100개 이상 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간접고용 노동자로 고용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노조가 설립되자, 이 불법적이고 억압적인 실체가 전 사회적으로 드러났죠.

이 노동자들은 전국 170여 개의 서비스센터에서 삼성전자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삼성전자 제품을 수리했습니다. 갤럭시 스마트폰과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청소기 등 이 노동자들은 삼성에서 만든 모든 전자제품들을 수리하는 일을 했고, 고장 수리를 접수하고 업무를 할당하는 콜센터들 역시 콜센터 용역업체를 통해 일했습니다.
한국에서 소비자들은 삼성과 LG가 제공하는 매우 빠르고 전문적인 수리 서비스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고장 수리가 하루만 지연되어도 어떤 고객들은 불쾌함과 불편함을 표현합니다. 심지어 어떤 소비자들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한 편이죠.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그 분노로 인한 감정 노동을 견뎌야 했을 뿐만 아니라, 회사 관리자들로부터의 압박에도 빈번하게 직면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 서비스 수리 기사들은 하루 15시간 근무했으며, 주당 80시간 근무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2013년 여름, 약 1,000명의 삼성전자서비스 A/S(고장 수리, after service) 엔지니어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는데요. 이들은 어느 산별노조나 연맹에 가입할지 고민하다가, 금속노조(KMWU)가 “강성”인데다 투쟁도 잘한다는 풍문을 듣고 금속노조에 가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술자 노동조합은 삼성 80년 역사상 처음으로 1,000명을 넘는 규모를 이룬 노동조합이었습니다. 한국의 민주적인 노동조합들과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이 노동조합은 반드시 성공적으로 조직되고 안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 설립 초기에 우리는 여러 노동자들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과로로 죽은 노동자, 노조 탄압으로 자결한 동료들이 있었던 거죠. 이것은 삼성의 작업 환경이 얼마나 혹독하고 열악했는지 보여 줍니다. 노조 설립 직후, 대구 칠곡센터에서 일하던 엔지니어 고 임현우 씨가 출근길에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이 노동자는 주당 80시간이라는 극도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3년 10월 말, 32세의 노동자 최종범이 자신의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인이 된 최종범 열사는 1970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를 언급하며, “자신의 죽음이 노조 탄압에 저항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 유서를 같은 센터 동료 노동자들이 있는 카카오톡 그룹채팅방에 남겼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슬픈 일이었지만, 노동조합과 동료 노동자들은 그 즉시 투쟁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당시 삼성의 협상 거부로 인해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파업권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소 우회적인 접근법을 취해야 했으며, 겨울 내내 우회적이고 유연한 방식의 거리 투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약 50개 센터에 흩어져 있던 조합원들 중 각 센터(분회)의 간부들은 연차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업무를 중단하고, 서울 강남에 위치한 삼성그룹 본사 앞 길거리에 모여 겨우내 노숙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영하 15도까지 떨어지는 엄혹한 날씨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삼성 자본으로부터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측은 아주 낮은 수준의 합의안을 내놓았는데요. 노조를 탄압하지 않을 것과 수리 노동자들에게 회사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지급하겠다고 밝혔으며, 약간의 상여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매우 작은 성과에 불과했지만, 쟁의권이 없는 상태에서 거둘 수 있는 최대치의 성과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합의안은 삼성 자본에 의해 직접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내 자본가들의 연합체인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가 주선하고, 각 센터(하청업체)들의 위임을 받은 7명의 지역 사장들이 한 약속들이었기에, 사실상 삼성과의 직접적인 협상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나중에 확증하게 되지만 협상의 모든 과정과 결과 뒤에는 삼성 자본이 있었죠.
다음 투쟁을 위한 치밀한 준비 과정에서 우리는 이듬해인 2014년 2월, 전국 동시다발 경고 파업을 벌였습니다. 노동운동에서 흔히 사용되는 경고 파업 전술은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을 갖습니다. 우선 그것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자본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전술적 지렛대로 기능합니다. 또, 전면 파업을 위한 일종의 ‘예행연습’으로서 노동자들의 조직력을 고조시킬 수 있었습니다.
경고 파업 역시 실제 파업이지만, 투쟁의 수준을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단계적 전술로 활용될 수 있죠. 이번 경고 파업은 전국 각지에서 투쟁하는 조합원들이 파업에 얼마나 헌신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 연습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을 교육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꾸준히 말하고 경청하는 과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일련의 요구 사항이 도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동시다발적 파업이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동시에 노조는 삼성전자 서비스 수리 노동자들 대부분이 젊은 노동자들이고, 금속노조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다양한 투쟁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지회 지도부는 ‘경고 파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의 경우, 경고 파업은 4일간 진행되었죠.
- 첫날에는 투쟁을 지지하는 춤을 창작했습니다. 조합원들이 함께 춤을 배우고, 파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함께 배우고 춤추는 날로 정했습니다.
- 파업 둘째 날은 영화 관람의 날로 정했는데요. 마침 그 무렵 '또 다른 약속'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었습니다. 이 영화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산업재해를 폭로하는 극영화인데요. 이에 맞추어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함께 영화관에 가서 이 영화를 관람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삼성전자 공장의 착취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전국 동시다발적로 열었습니다.
-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몇 달 전 목숨을 잃은 동료를 함께 추모하고, 파업을 통해 요구 사항을 쟁취함으로써 그 동료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경고 파업 일정을 통해 조합원들은 전국적으로 동시 파업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서로 믿을 수 있게 됐죠.

파업 준비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우선, 우리는 매일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정기적인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우리의 요구 사항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직장에서 어떤 불만이 있는지 논의했죠. 그리고 이러한 불만 사항들을 모아 왜 우리가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우선 매주 조합 소식지를 발행했는데요. 매주 한 호의 소식지를 통해 협상 진행 상황과 전국 50여 곳에 흩어져 있는 각 지부 간의 갈등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협상이 완전히 결렬되었을 때는 조합원 투표를 통해 합법적인 파업권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이 절차는 한국의 노동조합법에 따라 요구되는 절차의 일부입니다. 조합원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만 노동조합은 합법적인 파업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파업 경험이 없는 노동자들도 파업에 참여하고 업무를 거부할 의지를 얻을 수 있었고요. 동시에 우리는 회사 내부에서만 지지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쳤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의 여러 센터들 곳곳에서 시민(고객)들을 만나 우리의 우려 사항을 전달하고,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우리의 문제를 알렸습니다. 이러한 캠페인을 통해 얻은 대중의 지지가 사회 전체에 걸쳐 삼성 자본에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기존 전략은 삼성의 반노조 정책으로 인해 가난한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이를 바꿔야만 한국 사회 전체가 변화할 수 있다는 메시지에 기반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해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서비스센터 내부 피켓 시위, 침묵 시위 등 투쟁 수위를 점차 높여가며 투쟁 강도를 높였습니다. 파업은 단순히 업무를 중단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경영진과 사회에 우리의 단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 스스로 투쟁의 목적을 깨닫는 과정이었습니다.
3월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전국 동시다발적인 시위 계획을 세웠습니다. 삼성 본사는 대한민국 수원에 있습니다. 수원은 서울 근교에 위치한 인구 약 100만 명의 도시로, 많은 삼성 관련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삼성 공장과 본사 건물 앞에서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격렬한 집회를 열었습니다. 약 10만 명의 삼성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거리 행진과 집회가 열린 것입니다. 이는 투쟁의 강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삼성은 조직적 영향력이 가장 컸던 세 곳의 서비스 센터를 폐쇄했습니다. 1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하룻밤 사이에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해고에 놀랐지만, 이들은 투쟁을 위한 대표단을 조직했습니다. 50명씩 두 팀으로 나뉘어 서울로 향한 이들은 한 번에 일주일씩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서울 도심 곳곳에서 투쟁을 펼쳤습니다. 미술관, 프로야구 경기장, 대학교, 삼성 갤럭시 스마트폰 판매점 등 삼성 소유 장소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 여 도시 전역에서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삼성은 이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투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복직시키는 방안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이들이 근무하던 세 곳의 서비스 센터(부산 해운대, 충청남도 아산, 경기도 이천)는 모두 주요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완전 폐쇄는 불가능했습니다. 직장 폐쇄와 해고는 노조를 탄압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임이 분명했고, 이에 노조는 해고된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탄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5월 16일, 노조 간부 중 한 명이었던 염호석 씨가 고된 삶과 노조 탄압으로 인한 고통을 담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염호석 분회장의 죽음은 삼성의 기업 문화가 낳은 가혹하고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염호석 열사의 시신을 서울의료원에 안치하고 영결식장에 조의를 표했죠. 그곳에서 조합원들은 앞으로 어떻게 투쟁을 이어갈지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5월 17일 저녁 6시경, 경찰 300여 명이 갑자기 장례식장에 들이닥쳐 시신을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총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전면적인 전국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하고 모든 조합원에게 서울로 집결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1,000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들은 삼성그룹 본사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고 노숙하며 쉴 새 없이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서울에 살지 않았습니다. 부산, 창원, 아산 등 남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50일 동안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남에 있는 삼성그룹 본사 바로 앞 거리에서 침낭을 깔고 잠을 잤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한강 다리 밑에서 잠을 잤습니다. 일요일에는 함께 바둑이나 풋살을 두거나 연을 날렸습니다.

파업을 지속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똑같은 구호와 똑같은 투쟁이 계속된다면 노동자들은 지루함을 느끼거나 사기가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투쟁이 노동자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50일 동안 매일 다른 전술을 시도했습니다. 같은 집회를 여는 대신 매일 다른 장소를 찾아갔는데, 중국 대사관 앞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중국 대사관 앞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시진핑 주석이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매주 방송할 팟캐스트도 제작했습니다. 또, 전국 동시 지방선거 투표일(2014년 6월 4일)에 단체로 주요 언론 기자들이 올 투표소로 가서 줄지어 투표를 했는데요. 투표소를 가득 채울 만큼 방문해 언론 지면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노동조합원들은 조끼를 입고 함께 투표했죠. 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댄스 파티를 열어 노동자들이 투쟁을 계속하고 있음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노조는 파업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생들을 만나고, 사회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약 200명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모든 편지는 노동자들이 직접 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들 스스로가 우리의 투쟁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특별한 이야기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이 투쟁은 약 50일간의 끝에 막을 내렸습니다.
단 한 번의 파업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것이 전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 투쟁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되돌아볼 부분이 많고, 노동자들에게는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습니다.
노조 지도부 간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투쟁을 통해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점에서 분명히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노조원들을 위한 교육과 토론회가 자주 개최되었지만, 휴대전화 수리 부서와 세탁기 수리 부서 간의 의견 차이처럼 갈등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음이 분명합니다. 몇 년 후 단체협약이 체결되었지만, 여러 가지 취약점이 있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노조의 초기 파업은 결국 단체협약 체결로 이어졌습니다. 2018년에는 삼성그룹으로부터 정규직 전환과 노조 공식 인정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이후 삼성 내부에 점점 더 많은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삼성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노조 금지" 정책은 마침내 종식되었습니다.
몇 년 후,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삼성의 노조 탄압 정책과 관련된 문서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약 7,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문서들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삼성전자 서비스 사장과 경찰관 등 7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서비스 노조를 인정하고 노조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투쟁은 삼성전자 서비스 수리공 노조의 투쟁과 연계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삼성전자 서비스에서 노조가 결성되자, 삼성전자 영업직과 LG전자 수리 노조원들도 노조 결성을 시도했습니다. LG전자가 운영하는 가전제품 렌탈 서비스 회사에서도 노조가 결성되었는데, 이곳의 근로자 대부분은 여성이었습니다. 2018년 삼성이 반노조 정책을 종료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삼성그룹 산하 노동조합들이 곳곳에서 결성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 대형 공장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고,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입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엄청난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두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수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고용주 측 노조연합회인 한국산업연맹과의 협상 과정에서 삼성 측이 제시한 협상안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노조의 노사 원로 간부가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하여 삼성 측의 제안을 수용하고 협상을 종료했습니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동의에 의한 후퇴가 아니라, 비밀 협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조합원이 협상 결과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노동자 파업에서 후퇴 전술은 전진 전술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투쟁은 더 큰 단결과 조직력을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노조 협상은 조합원 전체의 폭넓은 이해와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합의안을 지지하든 거부하든 하나로 뭉칠 수 있습니다. 협상이 결렬되거나 길어지더라도 노동자들의 단결은 투쟁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줍니다.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 지회의 투쟁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이 투쟁은 저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었고, 대부분의 노동자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업이 길어지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이어가면서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저는 리더의 카리스마보다 교육과 토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작은 승리는 상처와 트라우마로 얼룩진 채 끝났지만, 그 승리가 일으킨 도미노 효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노동자 투쟁에서도 완전한 승리나 패배는 없을 겁니다. 승리 혹은 패배로 끝난 어떤 투쟁이 궁극적인 승리가 될지 패배가 될지는 우리가 그 투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이어가느냐에 달려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 : 홍명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