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미니즘, 한계에서 시작하다』 성, 사랑,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한' 질문들
2025년 12월 16일
이 글은 지난 11월, 플랫폼C 페미니즘 공부모임 『페미니즘, 한계에서 시작하다』 후기이다. 이 책은 AV여배우로 활동했던 작가 스즈키 스즈미와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12개의 주제에 대해 각자의 삶과 가치관, 페미니즘에 대한 솔직하고도 깊이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스즈키 스즈미는 교복이나 속옷을 성인 남성에게 파는 브루세라, 원조교제, AV여배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써왔다. 그는 '피해자'라는 말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졌고 그 말에 대한 저항감과 초조함이 있었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모습을 하지 않고서도, 내게 해를 입힌 것들을 단죄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을 내는 것 그의 오랜 과제였다. 자신과 주변의 여성들을 보며 그는 여성들이 상처만 입은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진화하고 있으며, 생각보다 더 강하고 재밌고 싸울 무기를 갖추고 있다는 감각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AV여배우의 사회학』을 쓰면서는 피해를 고발하는 방식 외에 착취 구조를 드러낼 다른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스즈키 스즈미 [출처 bkuma.hatena.ne.jp]](https://cdn.sanity.io/images/u0qigokj/production/f62be399009c80faf563dc85d3fe02fffbab736d-720x480.jpg?w=700&q=80)
두 사람이 주고받은 첫 편지의 주제는 '에로스자본'이다. 스즈키는 여성에게 상품가치를 부여하는 이 개념이 현실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공감했지만, 그것이 여성에게 강제로 부여되고 나이가 들수록 떨어져 나가는 '상품가치'라는 점에서 문제의식도 느꼈다. 한편, 우에노는 에로스자본이 사회학적으로 부정확하다고 지적한다. 자본은 이익을 만들어내고 축적되는 성질이 있는데, 에로스자본은 평가자가 일방적으로 가치를 매기며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소유자가 자본을 통제할 수 없는 재화는 자본이라 할 수 없다. 거대한 경제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성의 시장에서 여성은 '에로스상품'일 따름이다.
독립적으로 일하는 ‘성노동자’ 역시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여성에게 성노동은 경제행위이며, 대가가 발생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밤 일'로 많은 돈을 번다 해도 그것은 성산업 종사자에게 붙는 사회적 낙인에 대한 일종의 요금이다. 남성들은 돈을 대가로 ‘성’을 얻어서는 안됨을 알면서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방패로 찝찝함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상품으로서의 섹스는 회색지대이다. 스즈키는 성노동을 즉각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성노동이 일반적 노동과 동일하다는 주장에도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몸을 팔면 안된다고 누가 정했는가라는 반발심으로 '밤의 세계'에 발을 들였으나, 실은 몸을 팔면 안되는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우에노가 책 중반부에서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인용해 여성의 승인 욕구를 분석한 대목에 대해 스즈키는 오래 곱씹는다. 왜 ‘남자의 승인 따윈 필요없다'고 주장하며 살지 않았을까?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가 남자의 승인만으로 만족하기엔 너무 풍요롭고, 그 승인없이 만족하기엔 너무 빈곤한 자의식을 요구했다 지적한다. 사랑받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사랑하는 연습을 쌓아나가지 않는다면 남자의 승인없이 완결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피해자성과 약자혐오
'자기 결정'이라는 말은 여성에게 강렬한 자긍심을 채워주지만 동시에 그만큼 여성을 페미니즘에서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AV여배우였던 스즈키는 AV 출연료는 현장에서 수행하는 노동과 시간의 대가 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성 시장은 젠더 비대칭성이 압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하며, 포르노는 여성에 대한 모욕을 상품화한 것이다.
우에노는 스즈키에게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이 쓴 글이 누군가에게 칼처럼 돌아갈 때 가장 깊이 상처 입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피해를 밝히는 것이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강함의 증거라고 말한다. 피해자, 약자임을 견딜 수 없어 부인하려는 감정을 그는 '약자 혐오'라 지칭한다. 피해를 인식하는 것은 복종이 아니라 저항이다. 피해자가 어떤 옷을 입었든, 어디에 몇 시에 있었든, 얼마나 대책없고 무지했든 나쁜 쪽은 당연히 가해자다. 피해자는 아무 책임이 없다.
책 후반부에서 스즈키는 ‘난 상처입지 않아'라고 생각하고, 아픔을 못본 척 무시하면 튼튼해질 거라 여기며 자신의 강인함에 도취됐지만 고통을 마주해야 할 때 마주하지 않으면 끝내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될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우에노는 여성의 자기결정을 과도하게 강조할수록 구조의 책임을 외면하게 된다는 점을 말했다. 주체의 능동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되 구조에서 비롯된 억압에 대한 책임을 면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애, 섹스, 결혼

스즈키에게 남자의 근원적 이미지는 1만 5천 엔을 내고 여고생의 팬티를 뒤집어쓰고 자위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우에노가 하룻밤 섹스나 성매매 행위를 '시궁창에 내다 버리는 행위'라 한 것에 대해 그렇지 않은 섹스가 있는지, 어떻게 남자들에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보통 '성애'라고 한 단어로 말하지만 성과 사랑은 다르다. 성, 사랑,생식을 일치시키는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가 근대의 섹슈얼리티를 유지시켜왔다. 다만 성과 사랑의 일치는 오랫동안 ‘여자’에게만 요구되었다. 성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던 시절 여자의 성이란 사랑의 증표로 남자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후기 근대에 이르러서야 여성의 성욕과 쾌락이 인정되었다. 우에노는 말한다. 쾌락도 품과 시간을 들여 학습해야 하는 것이고 능동적 수용과 몰입 없이 쾌락은 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성과 사랑이 분리된 이후에도 특권적 커플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LGBTQ 내부에서도 커플 중심주의는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은 로맨틱한 사랑으로 채워지던 곳을 여성은 스스로 채울 수 있을까?
우에노는 연애란 자아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여자가 되기 위해 게임 상대인 남자가 필요했던 그는 여자라는 정체성이 남자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점을 깊이 자각했다. 성적 정체성이 이성애적이라는 점을 자각했기에 남자를 찾은 것이다. 연애를 안 하기 보다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연애 속에서 자신과 타자에 대해 배우기 때문이다. 연애는 스스로의 욕망, 질투, 지배욕, 이기심, 관대함, 초월을 가르쳐 준다. 현재의 연애는 '상대의 자아를 빼앗고 스스로의 자아를 포기하는 투쟁의 장소'로 종종 표현된다. 내 자아를 타자에게 드러내고 타자도 그러라고 요구하며 비로소 자신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또, 타자란 결코 소유도 통제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유한한 인생에서 질 좋은 섹스와 연애를 하는 게 안 하는 것 보다 낫다는 말도 덧붙인다. 사람은 투자한 만큼 보답 받을 수 밖에 없다.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는 편이, 욕망받기보다 욕망하는 편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스즈키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진전되었음에도 결혼이 강한 이데올로기로 남아있다는 게 의문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는 경제와 육아 문제 때문에 결혼이 선택되는데,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의 자립에 한계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결혼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불편하고 육아에서는 결정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이다. 스즈키는 부모의 간병을 경험하며 사람들이 파트너와의 결혼을 선택하는 이유를 체감했다. 그는 투병 생활로 피폐해진 사람이 가족에게 바라는 건 형식적 계약과 사랑, 그 두 가지를 합친 무엇일 것이라고 말한다. 기혼의 여자친구들이 늘어나면서 친구를 잃은 솔로 여성들의 외로움도 커진다. 여성들이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해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그는 결혼제도의 유연성을 넓히면서도 결혼 바깥의 세계가 넓어진다면 마음이 편할 것이라는 바램도 덧붙인다.
우에노에게 '결혼'이란 서로의 몸에 대한 성적 사용권을 유일하고 특정한 이성에게 전 생애에 걸쳐 배타적으로 양도하는 ‘무서운 계약’이다. 지킬 수가 없는 계약임에도 이런 약속을 하는 남녀가 끊이지 않는다. 그는 타인은 소유할 수도 소유될 수도 없다는 것을 배웠고, 성과 사랑이 의무 관계에 놓이는 것도 견딜 수 없다. 그럼에도 결혼이 쇠퇴하지 않는 이유는 안심하며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말해준 것이라고 분석한다. 결혼과 출산 후 육아가 최우선 과제가 되어버린 여성 친구들을 보며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인생에서 지나가는 한 때라 말한다. 소수라도 나를 잘 알고 내 마음을 알아줄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를 생각만해도 안도감이 들 수 있다. 함께 하는 배우자가 있다고 해도 인생 마지막엔 누구나 혼자가 되며, 그 시기가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생에서 결혼도 가정도 안전보장재가 못된다는 건 ‘결혼과 가정생활'에서 졸업한 여자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온 것이다.
페미니즘
스즈키는 과거 자신이 페미니즘이 차별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우리 세대를 구할 만한 사상은 아니라고 여겼음을 고백한다. 지금은 페미니즘이 얇고 넓으며 색채가 풍부한 카펫같은 사상으로 느껴지는 면도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사는 대부분의 여성이 페미니즘의 혜택을 보았으나, 페미니스트는 왜 성해방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표현의 규제를 요구하는 사람으로만 그려졌을까. 여성 운동은 때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지만, 일회성 행사처럼 느껴지도 한다.

스즈키는 성매매 산업이 좋진 않다고 생각하기에 성노동자 단체와 맞지 않다고 느꼈다. 반면 성매매로 돈을 버는 순간의 즐거움도 있었기에 성노동자 단체의 여성들과 마음이 맞는 면도 있었다. 그래서 성매매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질문을 받으면 어느 쪽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또한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방식의 페미니즘이 젊은 세대를 돌아서게 만들지는 않을지 우려한다. 그는 일상이 즐거울 때, 딱히 이렇다 할 문제를 느끼지 못할 때 사상 따윈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처지에 대체로 만족하고, 여자로서 즐거움도 느끼고, 때로는 남녀의 기울어진 상황조차 즐겁고, 성해방은 필요 없다거나 포르노를 즐기는 여성들도 다가갈 수 있는 페미니즘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인다.
우에노는 ‘어차피 남자는 다 그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런 생각이 오히려 페미니즘을 공허한 울림으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비열하고 교활하'기도 하지만, '고매하고 숭고하'기도 하며, 모든 남자가 무책임한 것은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만날 때 우리는 사람을 믿을 수 있다. 믿을 만한 관계 속에서 내 안의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낼 수 있으며, 내 속에서 좋은 것을 키우고 싶다면 손익계산을 넘어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여성 혐오는 여성을 분단 지배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여성이 집합적 정체성으로 자신을 일컬을 때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성노동관련 논쟁에서 종종 보여지는 흑백논리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페미니즘이란 스스로 깨닫고 알리는 자기 신고의 개념이므로, 누군가를 이단으로 판정하거나 제명할 수 없다. 페미니즘은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의견의 각축장이자 무대여야 한다. 페미니즘은 ‘내가 나이기 위해 남자의 승인 따위 필요 없다’고 주장해 온 사상이다. 내 가치는 내가 만들며, 사랑은 능동적 행위이다. 능동적 행위야말로 자율성의 증거이다.
마치며

스즈키는 AV산업이 번성하는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의 투쟁으로 사회가 진보해 왔다고 믿는다.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이 현실에서의 실질적인 대처법 사이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에노와의 편지를 통해 자신을 조금은 변화 시킬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요령 좋고 둔감한' 자신에 안주하지 않고 내적인 저항을 넘어 표현하는 용기를 갖겠다는 다짐을 남긴다. 우에노 역시 편지를 통해 새로운 발견을 했다. 남자란 무엇인지 논하고, 성을 사고 성산업을 이용하는 남자들에게 분노하지만, 남성들의 감상도 들어보고 싶고, 또 언젠가 다른 세상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책을 읽고, 페미니즘 공부모임 참가자들은 풍부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포르노에 사용되는 스타킹 판매 규제와 표현의 자유 문제,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의 붕괴 여부, 불안한 현실을 결혼과 가족의 강화로 해결하려는 마음에 대한 이해와 구조로서의 복지 및 안전망 강화 필요성, 성노동을 노동이라 부르는 순간 그것이 가지는 착취와 폭행까지 감수하게 되는 복잡한 상황에 대한 고민 등에 대해 토론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다만, 우에노가 말하는 성차별적 ‘구조’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성 전체가 성차별적 구조인 것인지, 가부장제가 핵심인지, 혹은 자본주의인지는 분명히 제시되지 않는다. 남성의 왜곡된 성의식을 조장하고 천문학적 이익을 거두는 진짜 ‘에로스 자본’의 소유자인 자본주의 성산업이 더 조명 되었다면 조금 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열 두 가지 주제의 편지가 솔직함과 깊이, 균형과 통찰을 두루 갖춘 감동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두 사람의 페미니즘은 이미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적 기반과 한계를 넘어선 듯 하다.
글: 김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