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기행 | 일본 산리즈카 투쟁에서 본 동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2025년 11월 21일
지난 10월 초, 플랫폼c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 동아시아 노동운동 교류회에 참가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지점은 중국의 활동가들을 만나보고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쿄에 처음 도착한 날부터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알튀세르, 바부쉬킨(Ivan Babushkin) 등 여러 사상가와 자신의 활동, 현재의 중국 체제 진단 등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교류회 세션에 참가하며 페미니즘 관련 활동을 하 는 사람, 저널리스트,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해온 노동운동가, 대만에서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사람 등 여러 중화권 활동가들과 마주치며 서로를 알아갔다.
그러던 중 중국인 활동가들이 도쿄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의 장, 산리즈카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산리즈카 투쟁 현장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여유롭게 중화권 활동가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아침 8시, 도쿄 도심에서 출발해 나리타공항으로 가는 미니버스, 22석의 자리가 꽉 차고 추가로 승용차까지 동원해야할 정도로 중국, 대만, 홍콩의 활동가들은 산리즈카 투쟁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나는 일정 중 가까워진 활동가 옆에 앉아 필담을 나눴다. 나는 중국어를 할 수 없고 상대방은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할 수 없으니 번역 어플이 유일한 통로였다.

처음 물어본 질문은 자연스럽게도 산리즈카 투쟁에 대해서 중국의 노동운동과 여러 지하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갖는 인식이었다. 그 활동가는 중국에서는 산리즈카 투쟁의 발단이 된 토지 수용(특정한 공익사업을 위하여 법률에 근거하여 토지 등 타인의 재산권을 강제로 취득하는 것)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중국은 도심을 확장하면서도 도시 행정구역과 후커우(호적)제도를 바로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시 행정 체계에 지역과 인구가 통합될수록, 관료들 입 장에서 이에 따라 맞춰야 하는 도시민 권리의 항목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도시에 편입이 되어있지만, 행정상으로는 농촌으로 남아있는 곳을 성중촌(城中村)이라고 한다. 이런 성중촌을 중심으로 국가폭력을 동원한 토지수용이 쉽게 일어난다고 한다. 또, 농촌에서도 공항이나 산업단지 등을 짓는 데에 토지 수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농촌이란 주제가 나오자 문득 중국의 농촌의 시스템과 농촌-도시 산업화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인클로저’💬까지 가지 않아도, 한국에는 수출 드라이브라는 박정희의 아주 명확한 농촌 수탈의 모델이 있지 않은가. 중국도 한국의 성장 모델을 많이 참고한 만큼,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그(녀)는 중국 농촌의 토지 소유권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중국의 농촌에서 토지는 세 형태로 나뉘는데, 마을 공동소유인 공동경작지, 가족 단위로 소유하는 공동경작지, 개인이 소유하는 사유지가 있다고 한다. 마오쩌둥 시기 지주제가 사라졌기 때문이지만,💬 소련식 콜호스(집단농장)와는 다르게 가족과 개인의 (사실상)사유지가 존재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런 사유지는 임차권을 사용할 수 있어서, 농민에게 적지만 추가적인 소득의 통로를 만들어 전반적 불만을 조금이나마 잠재운다고 한다.
- 💬인클로저 : 공유지나 경작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재산임을 명시하고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하는 과정. 실비아 페데리치는 『캘리번과 마녀』에서 인클로저가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 과정에서 필수적이었다고 말한다. 또, 토지 사유화를 넘어 여성 의 신체와 재생산 능력까지 통제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 💬마오쩌둥의 토지개혁 정책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중국공산당은 지주들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빈농 및 소작농에게 재분배하고, 이후 농업 집단화를 통해 사유 재산 제도를 근본적으로 폐지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몇 년 후 중국 정부는 합작사(협동조합)를 거쳐 토지를 국유화하거나 집단 소유로 전환했다. 이로써 개인의 토지 소유권이 소멸됐고, 지주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한데 1979년 개혁개방 정책 실시 이후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인민공사 체제를 해체하고 '가정연산도급책임제(家庭联产承包责任制)'가 도입됐다. 이는 농민 가구가 집단소유 토지를 장기 임차해 경작하고, 생산 할당량을 국가에 납부한 후 남은 잉여 생산물은 개인이 자유롭게 처분하거나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그(녀)는 개혁개방(산업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관료화라는 문제를 짚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혁명을 지속하려는 마오쩌둥과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하는 군부 세력 이익집단 간 투쟁이 발생했고, 이 투쟁은 대약진운동을 거쳐 문화대혁명 초기에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이 시기를 사회주의 혁명 시기로 규정하면서, “해방의 배당금(解放紅利)”이 축적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해방의 배당금을 초등교육의 보편적 접근, 토지개혁, 의료 접근성 강화, 인프라 구축 등으로 지칭했다.
소련에서도 이는 1917년 10월 혁명과 1921년 내전 승리 이후 대대적으로 시행된 바 있고, 한국에서도 미군 정의 토지개혁, 한국전쟁, 초등교육 의무화 등으로 실행된 바 있다. 이런 해방의 배당금은 대대적인 혁명 과정을 경험하지 않은 인도 등과 비교했을 때 자본가계급의 요구에 부합하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력을 만들어냈다. 또, 농촌 지역의 의도적 저개발로 인해 저비용의 노동력 재생산이 가능해졌다. 한국에서도 계절노동자가 되거나, 이촌향도를 통해 산업화의 저비용 인력 공급이 이뤄진 바 있다. 중국이 겪은 이런 과정은 국가자본주의의 규칙과 다르지 않다.
이야기가 오고 가는 와중에 버스는 도쿄를 벗어나 나리타에 가까워졌다. 이제 가이드의 해설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산리즈카 마을과 투쟁의 발단, 지원 세력의 형성과 투쟁의 격화, 지원 세력의 분열과 90년대 심포지엄을 통한 합의까지, 일본인 특유의 간단한 어휘를 사용한 설명이 이어졌다. 가이드는 총 세 명이었는데, 중핵파(中核派,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全国委員会)나 거주 농민으로만 이루어진 세력이 아니라, 논섹터라 불리우는 지원세력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젠로렌(全国労働組合総連合) 등 노동운동과도 접점이 있었지만, 산리즈카 투쟁에 지원 활동을 하는 것이 주된 활동 지점이었다. 모두 70-80년대부터 활동을 이어온 고령의 활동가들이었다. 중핵파가 다른 정파와의 노선 갈등으로 이 활동가들을 습격하여 사망까지 이어지게 만든 일을 태평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은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리타 공항에 진입하자 78년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에 침투용으로 사용된 맨홀과 구 관제탑이 있는 장소가 나타났다. 이를 지나 외곽으로 나가자 “하늘과 대지의 역사관”이라는 첫번째 방문 장소가 나 타났다. 이 곳은 1990년대 이뤄진 심포지엄을 통해 공항공사 측의 자금과 운영으로 만들어진 전시관으로, 토지수용 이전 산리즈카 마을부터 고조되는 투쟁의 여러 자료와 사용된 물품, 심포지엄까지 반대 투쟁을 인정하는 방향의 전시를 하고 있었다.

전시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당시 일본 학생운동의 특징이었던 여러 헬멧이었다. 혁공동(日本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 중핵파, 통신파(通信派) 등 각자 여러 정파들의 이름을 새기고 빨간색이나 흰색으로 칠한 헬멧들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이 작업 안전모를 쓰고 시위에 나온 것과 달리 대부분 제국주의 일본군에서 쓰인 ‘90식 철모’나 70년대풍 오토바이 헬멧에 색을 칠한 것이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서 미군 M1철모가 그랬듯, 이 ‘90식 철모’는 민간에서도 안전모 등으로 자주 쓰였고, 일본 전경의 철모로 채택되어 80-90년대까지 같은 철모를 쓴 이들이 치고 받는 광경이 자주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90식 철모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소련군 철모가 아니라 90식 철모를 채택해 80년대까지 사용했다. 한국과 중국의 산업화 모델까지 겹쳐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 근현대에 남긴 영향을 실감한 장면이었다.
역사관 이후 다음 탐방 장소는 ‘A활주로’ 근처 농가였다. 산리즈카 투쟁이 남긴 것 중 하나는 동아시아에서 거의 최초로 유기농 농법을 실천하는 농가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땅을 죽이는 공항에 맞서 제초제로 베트남의 숲과 논 을 초토화시키는 미 공군에 맞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농약을 사용한 농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이 유기농법을 사용하게 된 이유였다. 수직으로 여러 층에 닭을 가둬놓는 일반 양계장이 아닌, 평면식 양계장과 유기농 농법을 사용한 단호박 등 여러 야채를 기르는 농가를 둘러보았다. 생산량 중 30%는 ‘원팩’이라는 이름으로 신청한 가정에게 매주 혹은 매달 보내는 상품으로 출하된다고 한다.

농가를 지나 다시 향한 곳은 인근의 히라가 씨가 운영하는 산리즈카 락교 공장이었다. 히라가 씨는 6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산리즈카 투쟁에 열심히 참여하다가, 산리즈카에 정착해서 살게 된 사람이었다. 그의 공장은 ‘B활주로’ 바로 옆으로, 3분마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머리 위를 지나가 설명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음이 심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지 않는 시간에는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평화로운 시골이었지만,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이곳이 ‘투쟁의 땅’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히라가 씨는 굉장히 초연한 태도와 차분한 말투로 자신의 삶과 투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특히 산리즈카 투쟁 당시 일본 내 미군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있었기에 나리타 공항 역시 처음에는 ‘군사공항 반대 투쟁’으로 시작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중국 활동가들 앞이라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마오주의와 문화대혁명에 대한 동경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활동가는 중국에서 순환 농업(휴경지를 두는 유기농 농업)을 장려하는 노인을 만난 적 있는데, 히라가 씨와 같은 연령대의 일본인이었다고 언급했다. 베트남전쟁 반대, 공산당, 전공투, 문화대혁명, 마오주의 등 중국과 일본의 ‘68세대’에겐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농가를 떠나 점심 도시락을 먹으러 향한 곳은 키노네(나무뿌리) 펜션이었다. 70년대부터 조성된 이 곳은, ‘C활주로’ 확장을 위해 2000년대부터 이뤄진 토지 구매로 인해 반쯤은 공항 울타리에 막힌 언덕에 서 있었다. 공항 울타리는 활동가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거의 10m 높이로 세워져 있었고, 울타리를 넘는 순간 전기 충격은 기본에 사이렌까지 울린다고 한다. 마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가두고 세운 장벽처럼 말이다. 키노네 펜션에서는 활동가들이 찾아와 바베큐 파티를 연다고 한다. 지지활동의 숙소 역할도 한다. 야외바도 있는 그럴듯한 펜션이었으나, 한켠엔 망루가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 망루가 ‘투쟁의 역사’를 말없이 드러냈다.


밥을 먹고 나서 현재 분쟁 중인 ‘C활주로’ 건설 예정 지역으로 향했다. 이 지역 농민들은 대부분 토지를 팔아 공항 공사의 대금과 보상금을 받아 인근 지역에 새롭게 집을 짓고 있었다. 한국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새마을 운동식의 슬레이트/플라스틱 기와 농가나 회색 석재를 쓴 집들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2층이나 마당을 갖춘 깔끔한 단독주택들이었다. 농촌의 빈곤화와 양극화는 한국이 더 심각하다고 느꼈다. 건설이 진행 중인 마을을 지나자 한창 기초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레미콘 트럭과 시멘트를 만드는 시설, 가설 도로, 포크레인까지 대규모 공사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 한복판에는 숲이 조금 남아있었다. 지원 세력 중 일부가 과거 구매한 토지였다. 숲 안에는 건물들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지원 세력 활동가들의 숙소와 회의 장소로 쓰여졌다고 한다. 이제는 화재로 불에 타 잔해만 남은 곳이 있었고, 그 옆에 하루만에 지은 대체 건물과 버려진 숙소가 있었다. 경찰이 세운 울타리는 세월이 흘러 나무에 의해 휘감겨 있었다. 숙소를 떠나기 위해 버스를 타니 사람이 많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감시하러 온 기동대 순찰차가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약 5시간 후 경찰이 출동한 셈이니 한국 경찰에 비해서는 꽤 느린 셈이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철탑이었다. 1970년대에 망루 역할과 항공기 이착륙 제한을 위해 여러 철탑이 세워졌는데, 우리는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철탑으로 향했다. 이전에는 30m였 으나, 노후화와 안전 문제로 활동가들이 15m로 줄였다고 한다. 여전히 높은 그 철탑 옆에는 작은 건물이 있었고, 안에는 오키나와 활동가들이 1972년 오키나와 반환 직후 산리즈카에 연대하러 와서 글귀를 적어놓은 깃발, 프랑스 활동가가 남긴 지지 메시지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철탑이 서 있는 땅을 구매한 활동가가 90세를 넘긴 고령까지 소유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철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변색 하나 없이 마치 어제 글을 쓴 것마냥 남아있는 깃발에는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택동 사상으로 무장하여 싸움을 올바르게 발전시켜 승리를 쟁취하자”, “인민의 승리는 반드시 온다” 등 문장들이 이리저리 써있었다.

투어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도쿄까지 가는 1시간반 남짓의 버스 시간동안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특히 대만 활동가들의 질문이 많았는데, 타이페이의 신공항인 타오위안 공항 건설 과정에서 토지수용과 생태계 영향 문제 등이 발생했던 탓이다. 또 다카이치가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고, 참정당이 급부상한 일본 정치라는 주제가 극우에 대한 경각심과 맞물려 뜨거운 토론 주제가 됐다.
산리즈카 투쟁은 2000년대 이래 일본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무조건적 고립과 강제된 신자유주의를 벗어나 참혹한 폭력의 역사와 현재, 저항의 역사를 증언한다. 일본 국가폭력이 폭발한 20세기 초 일본 제국은 만주국의 산업화, 조선의 식민화, 중국 침략을 통해 전쟁과 수탈의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 조선인과 중국인 지배계급이 국가폭력의 길을 따라갈 씨앗을 뿌렸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한은 만주군 장교의 지휘를 따라 발전주의를, 중국은 개혁개방 슬로건 하에 자본주의의 길을 압축적으로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국가폭력은 노동자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한때 일본군이 침략과 학살을 자행할 때 쓴 90식 철모를 쓴 중국군, 같은 철모를 쓴 일본 경찰, 미군 철모를 쓴 한국군과 경찰은 20세기 역사에서 피의 지도를 그리며 동아시아의 공장을 수호했다. 중국 도시의 성중촌에서, 일본 도쿄의 나리타와 오키나와에서, 서울의 수많은 재개발 철거촌들에서 국가와 자본은 재산이 없는 이들의 삶을 빼앗고 돈이 되는 시설로 바꾸는 ‘인클로저’를 집행했다. 동아시아의 공장은 처음에는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서구의 소비를 위해 물품을 찍어냈고, 지금은 전 세계의 소비를 위해 물품을 찍어낸다.

산리즈카 투쟁에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질문하던 중화권 활동가들의 모습에서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얼키고설킨 곳에서 저항을 조직해온 이들의 공동전선이 힐끗힐끗 보였다. 더구나 중국인 활동가들은 <전태일 평전>이나, 한국 노동운동사를 대부분 꿰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크다.
이제 한국과 일본, 대만, 중국의 공장들이 멈추면 세계가 멈추고, 자본주의가 멈춘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은 국가폭력과 탈정치, 장시간 노동의 착취로 얼룩진 동아시아에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담아 바라본 도쿄는 조금은 덜 차가워 보였다. 그리고 버스의 종착지에는 팔레스타인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글 : 이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