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뮤지엄, 박람회 |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국제 정체성

국보, 뮤지엄, 박람회 |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국제 정체성

2025 오사카엑스포를 위해, 공공재로서 다시 대중 앞에 우르르 불려나온 뮤지엄의 국보들은 여전히 일본 근대사의 내셔널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025년 8월 28일

[동아시아]일본일본, 민족주의, 국제주의, 문화예술, 근대

[필자] 이 글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분 없이 뮤지엄으로 부를 것이다. 한국어에서 뮤지엄museum은 박물관으로 번역하는데, 박물관이 미술관과 완전히 구별되는 단어로 사용되다보니 불러오는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본디 박물관학Museology의 개념을 따르면 미술관은 박물관의 하위 분야로서 미술박물관art museum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과학박물관이나 역사박물관처럼 말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이 글에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칭할 때 그저 박물관으로 적어도 된다. 그러나 이는 한국어의 미술관-박물관 구분에 익숙한 독자의 혼선을 빚을 수 있다. 따라서, 뮤지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칭할 것이다. ‘뮤지엄’이 전시, 연구, 소장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공공 기관이라는 정확한 개념을 혼선 없이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 앞에 쏟아져나온 국보

왕복 14만 원의 간사이행 티켓을 발견하고 곧바로 예매했다. 4월 23일 아침,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로부터 딱 열흘 전, 《2025 오사카 세계박람회》(2025.04.13.~2025.10.13., 이하 오사카 엑스포)가 개막했다. 이 메가 이벤트에 발맞추어, 간사이 지역의 많은 뮤지엄은 매우 공을 들인 전시를 기획했다. 몇십 년 만에 공개되는 국보, 복제품이 아닌 진품, 오랜 복원을 마친 유물,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중요 문화재들이 쏟아져나오듯 대중 앞에 공개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보러 일본으로 갔다.

여행 첫날, 바로 나라(奈良)로 이동했다. 교토 가까이에 위치한 나라는 8세기에 일본의 수도였던 도시다. 6세기에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해진 후 융성한 일본의 독자적인 불교 문화가 나라 전체에 짙게 남아 있다. 호류사와 동대사를 비롯한 오래되고 중요한 절이 많이 자리 잡고 있고, 7세기의 한 천황이 은거했던 요시노산 같은 역사적인 명소도 있다. 이곳에서 본 전시는 나라국립박물관의 《초국보-영원의 아름다움》(2025.04.19.~06.13.)이었다. 지역의 역사성에 의거해, 《초국보》전은 4~9세기 사이 정도의 고대 유물과 나라 소재의 사찰이 소장한 불교 예술품 위주로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선별해 기획되었다.

나라국립박물관의 《초국보》전 홍보 이미지. 왼쪽이 〈백제관음〉이다.
나라국립박물관의 《초국보》전 홍보 이미지. 왼쪽이 〈백제관음〉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백제관음〉이었다. 전시에서 첫 번째 섹션의 가장 앞에 놓이는 작품은 보통 그 기획의 방향성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백제관음〉은 1951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입상(서 있는) 불상으로,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도왜인) 장인이 제작했다는 가설이 있다. 제작자가 도왜인이 아니더라도, 그 양식적 특징으로 인해 백제의 불상 조각술을 배운 일본인이 만들었으리라고 추측되는 작품이다. 즉, 〈백제관음〉은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뚜렷이 지닌 독특한 불상으로, 일본 바깥 타국의 존재를 지시하는 국보다.

  • 💬 뮤지엄의 전시 기획에서 챕터 혹은 섹션 구성은 전시의 내용을 이끌어가는 목차의 역할을 한다. 각 챕터는 보통 공간적으로 구분되며, 챕터가 전환되는 벽이나 바닥에는 해설을 적어 기획 의도를 전달한다. 챕터를 가르는 기준은 시대, 주제, 매체 등으로 무궁무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각 챕터의 소주제들도 전시의 대주제만큼이나 특정한 관점과 의도에 따라 설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미술과 페미니즘’을 대주제로 삼는 챕터 2개짜리 전시를 기획한다면, 기획자는 ‘1. 여성의 노동과 돌봄’ 그리고 ‘2.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로 챕터를 구성할 수도 있고, ‘1. 20세기 후반 페미니즘 미술의 시작’과 ‘2. 2010년대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 미술’로 챕터를 구성할 수도 있다. 전자의 기획은 주제를 통해 작품을 나누며 가부장제의 규율과 그에 대항하는 예술적 실천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고, 후자의 기획은 시간대에 따라 작품을 나누며 한국 사회의 역사 속에서 페미니즘 미술가가 천착해 온 주제와 스타일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정립해 보여줄 수 있다.

이후에 놓인 전시품들에서도 당을 비롯한 중국의 왕조나 고구려, 신라 같은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작품 제목이나 캡션에서 종종 언급되었다. 〈백제관음〉처럼 양식이나 제작 기법을 통해 각국이 문화와 가치관, 기술을 공유하며 변용했음을 드러내는 예술품들이 꽤 많았다. 각 나라가 서로 교류했던 역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경전과 서신, 하사품 같은 유물도 전시되었다. 그런 작품들을 지나, 전시의 거의 끝부분에서는 〈칠지도〉가 전시됐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나라의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 되었다. 〈칠지도〉의 몸통에는 제작 시기와 선물의 경위가 적혀 있어,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료다. 그러나 백제가 〈칠지도〉를 일본에게 ‘하사’했느냐 ‘헌상’했는가의 문제로 한국과 일본 고고학계에서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지라, 캡션의 논조를 주의 깊게 살피게 되었다. 일본이 20세기의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칠지도〉의 명문을 사용해 고대에 한반도를 이미 지배했다는 식민사관을 펼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작품 앞에서 나는 약간 예민해져서 작품보다도 캡션을 더 집중해서 보았다. 내가 읽을 수 있던 영어 캡션에서는 ‘선물했다’라는 평이한 표현을 채택했다. ‘예민한’ 부분을 제거해 논란의 여지를 간단히 피하려는 의도가 느껴졌지만, 두 국가의 권력관계 대신 친밀감과 우호성을 강조하는 결과도 불러온 것 같았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온 후, 내심 놀랐다. 일본이 오사카 엑스포의 맥락 속에서 국보를 다룬다면, 십중팔구 그 유구한 내셔널리즘을 휘둘렀으리라 예상했다. 분명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이 많으리라고 확신했다. 사실 일본의 국보들이 그 불편함을 어떻게 야기하는지 관찰하려고 여행을 온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시장의 시작과 끝이 하필 백제와의 교류를 전면화하는 〈백제관음〉과 〈칠지도〉라는 점이 머릿속에 오래 머물렀다. 한국사 속에서 고대 동아시아사가 설명될 때, 일본은 ‘발전이 늦은’ 나라로 묘사되곤 한다. 물론 이것은 가까운 과거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사회탐구 과목인 동아시아사 교과서는 한반도의 도왜인이 일본에 불교, 도자기 제작 기술, 제철 기술 등을 전수해 ‘가르쳐주’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한국인의 인식 속에서 일본이 한반도의 것들을 귀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그들의 미개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오용되는 경향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 속에서 한반도 또한 중국 본토에 비하면 발전이 느린 존재로, 근대사에 접어들고 나면 중국이 유럽권에 비해 발전이 느린 존재로 그려진다.

2025 오사카 엑스포 지도
2025 오사카 엑스포 지도

《초국보》전의 기획은 그러한 시각을 조심스럽게 밀어놓고 ‘상호영향’의 흔적을 미학적으로 그리기 위해 집중했다. 일본의 국보는 명백히 아시아의 혼종적 결과물로 보였다. 작품을 제작한 사람이나 선물한 사람의 출신 국가, 작품이 참고한 양식의 출처 등이 캡션에 비교적 명확하게 기재되며 일본 국보를 다국적으로 드러냈다. 다국적인 작품들 속에서 각각의 독특성과 이질성이 나란히 펼쳐지는 동안, 누가 ‘문화적 원형’을 만들었고 누가 그걸 ‘수용’했는가 하는 권력관계가 약해지고,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근대적 시간은 흐트러진다. 《초국보》전의 기획은 국보를 다원주의적이고 다문화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었다.

일본인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 발전했는걸 하고 생각하며 다음날 교토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교토국립박물관은 “오사카·간사이 만국박람회 개최 기념 특별전”으로 《일본, 미의 도가니: 문화 교류의 궤적》(2025.04.19.~06.15.)을 열고 있었다. (이 전시는 5월 18일을 기점으로 해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 전시품이 교체되었다. 나는 전기 구성의 전시를 관람했다.)

“문화 교류”라는 단어와 함께, 이제는 “샐러드 볼”을 자처하는 미국이 과거 자국의 다문화성을 묘사하던 “도가니”라는 단어가 전시명에 사용됐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나라박물관과 비슷하게, 거의 모든 전시품은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들로 구성 되었다. 하지만, 고대에 치중한 《초국보》전과 달리 《도가니》전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다루었다.

교토국립박물관 《도가니》전 홍보 이미지. 우키요에의 대표주자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835)가 크게 배치되어 있다.
교토국립박물관 《도가니》전 홍보 이미지. 우키요에의 대표주자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835)가 크게 배치되어 있다.

《도가니》전은 파리만국박람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프롤로그] 섹션의 첫 챕터 제목 “세계가 본 일본 미술”을 읽자마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직감할 수 있었다. 역시나 전시장에는 우키요에와 인상파 회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챕터 해설은 다음과 같았다.

“메이지 일본이 국제 사회에 나왔을 무렵, 서양 미술 시장에는 … 우키요에 등이 넘쳐났으며 그러한 것들로 일본 미술의 이미지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는 미술품 수집가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작은 일본 붐이 일어 호쿠사이(1760-1894)나 고린(1658-1716)의 작품이 주목 받았습니다. … 메이지 정부는 유럽과 미국에서 팔리는 것들을 골라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키는 식산흥업을 꾀했고 서양 미술 관점에 입각한 감상용 작품 제작도 장려해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서 국위선양에 힘썼습니다.”
  • 💬 교토국립박물관, 《도가니》전 ‘프롤로그 : 만국박람회와 일본 미술 - 1. 세계가 본 일본 미술’의 여는 글. 번역은 교토국립박물관. 강조는 인용자.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 시대의 대표적인 대중예술로, 당시의 일본이 고급으로 간주하던 장르는 아니다.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할 때 자기가 깨지지 않게 우키요에가 인쇄된 종이로 감싸 포장했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일상적인 장르였다. 도자기의 포장지로 유럽에 도착한 우키요에는 강렬한 색채와 선명한 외곽선을 지닌 색다른 시각물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새로운 시각 언어를 갈구하던 프랑스의 신진 화가들이 기존 유럽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우키요에를 참조한 것이다. 클로드 모네, 카미유 모네나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19세기 중후반에 일었던 이러한 경향은 자포니즘Japonism으로 불린다. 프랑스의 인상파와 자포니즘을 경유해, 일본의 하층민들이 고루 즐기던 대중예술은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국보급 보물로 승격된 것이다. 이 첫 섹션은 국제 무역과 만국박람회를 통해 서구에서 인정 받은 일본의 예술성을 강조했다.

19세기 무렵에서 시작한 《도가니》전은 그다음 섹션인 [동아시아 속 일본의 미술]에서 고대로 되돌아간 뒤 연대를 따라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갔다. 하지만, 전시의 기획이 문화재를 통해 보여준 “문화 교류”는 단순한 출처 찾기에 가까워지곤 했다. 또, 아시아의 다양한 국가들이 일본과 교류하며 미친 영향을 일본의 ‘독자적 변용’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보였다. 작품의 질과 캡션의 의미는 부족했으며 때로는 유치할 지경이었다. 가령, 표범의 존재가 불경이나 소문 등을 따라 인도에서부터 일본으로 전래되었지만, 표범을 실제로 보지 못한 일본인이 상상과 오해를 기반으로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식이었다. 여러모로 이 기획은 깊이 있는 문화 교류를 탐색하려고 한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만약 전시된 작품과 국보들이 “도가니”였다면, 그것은 다양한 문화가 역동적으로 섞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그릇이 아니라, 특정한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주물에 가까웠다.

그 상이 무엇인지는 전시의 마지막에서 다시 밝혀졌다. [에필로그: 문화의 벽을 넘는 것은 누구인가?] 챕터는 다시 근대로 돌아와, 1930년의 시카고만국박람회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했다. 시카고만국박람회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는 캡션과 함께 〈기비 대신 입당 두루마리 그림〉 한 점을 중요하게 전시한 이 챕터의 해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미술은 문화 간의 벽을 넘는가. 이 물음을 생각하기 위해 〈기비 대신 입당 두루마리 그림〉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1932년에 미국 보스턴미술관이 구입하고 이듬해에 공개했습니다. 때마침 일본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보스턴 시민들은 이 작품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당시 보스턴에 머물던 미술사가 야시로 유키오(1890-1975)는 회상합니다. 그는 예술이 가진 보편적인 매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러기에 더욱 미술의 힘이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이용되는 것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미술은 분명 문화의 벽을 넘습니다. 정치 상황과는 상관없이 시대를 넘고 언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도량과 자세, 다른 문화와 만나는 우리 자신의 힘에 달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 💬 교토국립박물관, 《도가니》전 ‘에필로그: 문화의 벽을 넘는 것은 누구인가?’의 여는 글. 번역은 교토국립박물관.

여기서 “미술”,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의 문화재는 역사와 “문화”를 탈정치화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일본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이 높아지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만주사변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전시는 끝난다. 전쟁과 식민의 역사는 사라지고,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수렴시키는 미술만이 남는다. 여기서 비정치화된 미술의 아름다움마저도 실은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이용되”고 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미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되기 때문이다. 《도가니》전의 모든 작품은 전부 녹아내려, ‘우수하고 아름다운 일본’이라는 국가상을 찍어내기 위한 재료가 되었다. 유럽에서 인정 받았던 우키요에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인정 받은 한 두루마기 그림으로 끝나는 이 전시는 일본의 ‘국보’가 박람회라는 제도의 식민성과 제국성을 떨쳐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또, 《초국보》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도가니》전은 일본의 뮤지엄이 근대를 다룰 때 자꾸만 반동적으로 돌아선다는 사실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후가쿠36경 富嶽三十六景 - 가나가와 파도 아래 神奈川沖浪裏' 1831, 야마구치현립 하기미술관・우라가미기념관
가쓰시카 호쿠사이, '후가쿠36경 富嶽三十六景 - 가나가와 파도 아래 神奈川沖浪裏' 1831, 야마구치현립 하기미술관・우라가미기념관

제국으로서의 일본 그리고 국보, 뮤지엄, 박람회

일본 근대사에서 박람회, 뮤지엄, 국보는 긴밀한 연관을 맺으면서 함께 등장했다. 타국을 불러모으는 만국박람회world’s fair의 시대를 연 것은 1851년의 런던 만국박람회다. 이 만국박람회는 시장이면서 전시장이기도 했다. 다양한 국가가 모이는 박람회는 각국의 ‘발전 정도’, 즉 ‘문명화 정도’를 펼쳐놓고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는 장이었다. 그 문명화의 정도를 담지한 각국의 전시물은 대포에서 발전기에 이르는 최신 발명품, 왕실에서 대대로 내려온 귀중한 유물, 건축물, 예술품, 그리고 그 국가가 지배하던 식민지의 인간까지 다양했다. 박람회장에서는 투자와 구매, 감상과 구경이 뒤섞여 이루어졌다. 만국박람회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함께 일구어낸 스펙터클로서 엄청난 수의 대중과 각국의 인사를 불러 모았다. 한마디로, 만국박람회는 근대성을 식민 지배국과 식민지 양측에 퍼뜨린 주요한 장치였다. 

만국박람회를 경험한 참가국이나 시찰단은 모든 나라를 서열화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또, 부와 권력의 불균등한 분배와 적자생존의 논리를 습득하게 되었다. 일본은 1861년의 런던 만국박람회에 시찰단을 보낸 후,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참가했다. 이때 일본은 ‘예술과 문명의 도시’였던 파리에서 우키요에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에 힘입어 자국을 예술의 국가로 브랜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예술품인 우키요에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디까지나 미국에 의한 불평등조약으로 개항한 아시아의 국가였던 일본은 만국박람회에 참가할 때마다 자신이 오랜 문명과 역사가 있는 독자적인 나라임을 증명해야 했다. 제국주의의 담론에 걸맞은 역사관을 발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전략은 고도의 수사와 담론을 배경으로 했으며, 그 과정에 문화적 우수성과 미술의 창의력을 강조한 미술사 담론은 결정적이었다.” 일본의 역사와 기량을 서구인들이 눈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물론 문화재였기 때문이다. 전영백, 「동서교섭사로 보는 일본의 ‘미학적 국가주의’」, 『미술사연구』, 31호, 2016, 194쪽.

일본이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고 4년 후인 1871년, 일본 정부는 「고기구물보존방」을 공표한다. 이것이 “고기구물”, 즉 오래된 기록과 물건을 법적으로 보호하게 된 일본 내 첫 번째 사례다. 이 포고문은 자국의 문화적 우월성과 역사성을 증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만국박람회의 경험을 물론 배경으로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함선이 일본에 등장해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이후 일본 내에서 퍼진 개화에 대한 절박함 또한 배경으로 두고 있다. 당시 강대국을 만나 일깨워진 쇄신에 대한 열망은 일본적인 것, 즉 옛것을 무분별하게 버리는 파괴 운동으로 굴절되었던 것이다. 

「古社寺保存法 고기구물보존방」
「古社寺保存法 고기구물보존방」

이 포고문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하고 고증할 수 있는 유물들을 일부러 훼손하고 쉽게 팔아버린 것에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김용철, 「근대 일본의 문화재 보호제도와 관련 법령」, 『미술자료』, 제92호, 2017, 97쪽.

또, 일본의 것을 서구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우수성을 방증하는 것으로 새롭게 정립한다. 「고기구물보존방」은 예술품을 비롯해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를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보존의 대상으로 명시했다. 무기, 책, 악기, 농기구, 의복, 화폐 등을 아울러 ”일본에서 만들어진 모든 품목”뿐만 아니라 수입품까지 보존의 대상으로 명시했다. 이 포고문과 함께,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고기구물을 보관하고 관리하기 위해 박물관을 건립할 것을 논의하기도 했다. 📌김용철, 각주 7번의 문헌, 같은 곳.

이후 1870~90년대에 일본은 교토와 나라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문화재 전수조사를 실시한다. 또, 문화재를 국가의 보호 아래에 두기 위한 제도를 구체화한다. 1870년대는 “황국사관에 입각한 일본의 역사인식이 체계화되고 천황가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일본역사의 중심에 자리잡”은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일본의 박람회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박람회사무국은 1875년에 아예 박물관으로 개칭했고, 1889년에는 제국박물관으로 다시 명칭을 변경했다. 대중에게 “황국사관에 입각한 전개과정을 조형물로 보여주는 기관”으로서 역할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뮤지엄의 등장은 일본의 문화재를 보여줄 중요한 대상이 타국민뿐만 아니라 자국민으로도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일본의 문화재는 국제적으로는 서구의 인정을 받기 위한 증거물이었으면서 국내적으로는 국민을 황국신민으로 호명하고, 자국의 우수성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장치였다. 일본의 문화재 보호를 둘러싼 제도사는 “천황제를 기반으로 한 일본식 국민국가가 틀을 잡아가던 그 시기에 문화재가 곧 국가적 정체성과 직결”되었던 양상을 드러낸다.

  • 📌김용철, 각주 7번의 문헌, 101쪽.
  • 📌김용철, 「1962년 제정 「문화재보호법」과 일본의 문화재 보호 법령」, 『미술사학연구』, 308호, 2020, 212쪽.

이 시기의 고미술 ‘조사’와 ‘보호’ 활동은 제국으로서의 일본이 지녀야 할 “전통을 만드는”(에릭 홉스봄) 기초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내 1897년, 우수한 문화재는 ‘국가적인 보물’임이 법적으로 확정된다. “국보” 같은 문화재의 특별한 등급을 지정하는 기준을 명시한 「고사사보존법」이 새로 제정된 것이다. 이 법은 “역사의 증징”과 “미술의 모범”이라는 국보의 두 가지 기준을 최초로 규정했고, 국보를 지정하려면 자문기관인 ‘고사사보존회’를 거쳐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 “처분이나 차압 금지…망실 및 훼손 등에 관한 체계적인 조항”도 만들어 구체적으로 문화재를 관리하고 대우하는 규정을 확립했다. 📌김용철, 각주 7번의 문헌, 102쪽.

사실, 국보라는 단어는 「고사사보존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일본이 서구의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며 이미 적극적으로 활용해 온 수사였다. 가령,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서 제국교토박물관은 일본의 국가관으로 ‘봉황전‘(호오덴)을 꾸리고 그 안에 미술품과 건축물을 전시한다. 이때, 전시의 안내 책자에는 “일본이 “따뜻한 친구이자 이웃인 미국이 거대하고 훌륭하게 마련한 전시”에 “천 년 동안의 국보급 보물들”을 가져온다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해, 문화재를 국가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한 후, 이를 더 적극적으로 현실화하기 위한 제도로 국보 지정제가 필요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국가가 직접 문화재의 구체적인 의미를 결정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전영백, 각주 6번과 같은 문헌, 208쪽.

  • 💬 참고로, 일본은 자국의 국보 제도를 조선에도 유사하게 적용하는 법령인 「보존령」을 1933년에 제정했다. 다만, 방향이 달랐다. 일본의 문화재 조사는 제국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루어졌고, 조선의 문화재 조사는 식민지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일본은 조선의 역사관을 통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관리하던 조선총독부에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위원회’를 자문기구로 두게 했다. 이 위원회는 거의 대부분 일본인으로 구성 되었다. 이때의 「보존령」은 독립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문화재 보존법의 기초가 되었다. 김용철, 각주 11번의 문헌, 218쪽 참고.

자국을 브랜딩해 세계에 선보여야 하는 박람회, 그를 위한 재료인 문화재, 그리고 문화재를 연구하고 의미화하는 뮤지엄이라는 세 범주는 근대사 속에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국내외로 작동시키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그러한 맥락을 고려하면, 교토박물관이 2025 오사카엑스포를 기념해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꾸린 《도가니》전이 반동적으로 흘러간 이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나 교토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되어 온 국보들이란 철저히 제국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제도를 통해 고안되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일본 커뮤니케이션 재단
©일본 커뮤니케이션 재단

국가주의적이지 않은 국보는 가능한가?

우수한 것만 선별하는 국보 지정제는 역설적으로 국보의 일반화를 불러온다. 즉 국가가 정립한 까다로운 기준과 감정을 거쳐 진정한 국보로 지정되지 않더라도, 모든 문화재는 기본적으로 ‘국보’다. 문화재에 자국의 우수성과 문화에 대한 대표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가 퍼져나간 후, 그 이데올로기를 보편화하기 위해 국보 지정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분류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잠재적으로 국가성을 부여받는다. 그 국가성은 앞서나가고, 독창적이고, 우수하고, 고유하다. 문화재를 통해, 국가는 예술에 부여되는 가치를 얻어낸다. 이제 일본의 모든 문화재 하나하나는 일본이다. 

그렇기에 그런 문화재를 다루는 뮤지엄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필수적인 장치로서, 국가의 적극적인 관리를 받는다. 따라서 문화재는 모든 것이 사유재로서 자유롭게 거래되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비켜 가는 특권을 누린다. 일본은 문화재보호를 처음으로 법제화한 1870년부터 사찰이 적자 재정을 이유로 불교 예술품을 팔아치우지 않고 계속 소장해 보수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지급했다. 1897년에는 아직 국보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아주 중요한 문화재를 소유한 개인 소장가가 문화재를 외국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중요문화재 등급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보호제도는 오늘날 모든 근대화된 국가들에 존재한다. 국보로서의 문화재를 자유시장에서 마구 거래하면 규제 받는다. 제도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그러니 국보는 애매한 공공재다.

2020년, 사립 기관인 간송미술관이 적자 재정을 이유로 국보로 지정된 불상 소장품 2점을 경매에 부쳤을 때, 간송미술관은 비난 받았고 소장품은 아무에게도 낙찰되지 않았다. 국보를 시장에 팔아서 사유재로 만들어버리는(혹은 사유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행위는 ‘국민’의 비난을 받는다. 이는 국가가 국보를 관리하는 자신의 역할이 정당하다는 국민의 동의를 강력하게 받아냈음을 보여준다. 설령 사기업이나 개인이 국보를 실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관념적으로 국보는 언제나 국가의 것이기에 국민들의 것으로 위치 지어진다. ‘그 보물은 나라의 것이다. 그것이 보물인 이유는 나라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간 유치해 보이는 순환논리 속에서 정립되는 국보의 존재 의의는, 그러나, 그 안에 역설을 품고 있다.

오사카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일본국보》(2025.04.26.~2025.06.15.)전의 마지막 전시물은 중국의 고대 왕조인 후한이 1세기에 일본 야요이 시대의 국가 중 하나였던 노국奴國에 내렸던 금 인장이었다. 이 인장에는 “한위노국왕”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어, 고대에서부터 중국 본토와 일본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노국이 당시 강력한 중심이었던 후한으로부터 인정 받았다는 자부심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것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문화재가 아님에도 일본의 국보다. 일본의 국보는 일본의 국보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국보는 한 국가의 자기 확인을 위한 장치이면서, 반드시 타자를 필요로 하는 장치다. 그래서 내셔널리즘적이면서 인터내셔널적이다. 역설적이게도, 국보는 한 국가의 가장 고유한 중심center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사이inter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국보는 나라의 것이다.

  • 💬 아시아의 고대 왕국 중 하나인 노국은 〈금인 한위노국왕〉이 출토된 위치와 고문헌 기록을 따라, 지금의 후쿠오카현에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정도까지 존재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비단 중국이나 인도 같은 먼 땅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문화재나, 〈백제관음〉처럼 타 문명의 영향이 또렷이 드러나는 이국적인 문화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한에서 한국사를 교육 받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조선과, 조선은 고려와, 고려는 통일신라와 같은 국가라고 여긴다. 다 같은 ‘우리나라’로, 전부 다 ‘우리’의 역사로 생각하는 것이다. 뜯어보면, “5,000년 한국사”라는 표현은 매우 기이하다. 수많은 국가가 등장하고 사라졌던 5,000년의 시간은 결코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정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일본 또한 우키요에를 탄생시킨 에도 막부, 그리고 후한으로부터 인장을 받은 노국과 ‘같은 국가’처럼 보인다. 이는 ‘문명국’으로 자신을 브랜딩하지 않으면 안 됐던 근대를 거치며 상식으로 자리 잡은 인식이다. 자국 역사의 정통성과 연속성, 발전 서사를 발견하는 데에 집중하는 근대적 역사관인 것이다. 그렇게 현재를 구성하기 위해 늘 과거를 돌아보는 뒷걸음질 속에서 국보는 발견되었다.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

그렇게 선별되었음에도, 국보는 그 선형적이고 단일한 역사관에 대한 균열을 필연적으로 내재한다. 《도가니》전이 아시아의 각국에서 받은 영향을 일본만의 개성으로 변형한 사례에 집착했듯, 국보는 시대와 지역에 따른 특수성과 변용을 드러낼수록 인정 받는다. 국보는 언제나 역사 속에 위치하고, 역사를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이질성과 충돌, 변동이기 때문이다.

이븐 할둔의 말처럼, 

“역사는 인간 사회나 세계 문명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는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변화에 대한 기록이며……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항하여 일으킴으로써 다양한 층으로 구성된 왕국과 국가를 낳는 혁명과 반란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는 상이한 인간 활동과 직업에 대한, 즉 일상 생활인이나 다양한 과학과 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해 역사는 사회가 본질적으로 겪는 모든 변화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모든 국보는 놀라우리만치 그 변동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 Charles Issawi ed. And trans., An Arab Philosophy of History: Selections from the Prolegomena of Ibn Khaldun of Tunis(1332~1406)(London, 1950), 26~27쪽, 에릭 홉스봄, 『역사론』, 강성호 옮김, 민음사(2002), 8~9쪽에서 재인용.

가령, 현재 일본의 국보와 지정문화재 목록에는 류큐 왕국의 핵심적인 역사를 증명하는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건축 양식, 공예 기법 등 류큐만의 독특한 문화와 교류 흔적을 드러내는 문화재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독특한 이유는 무엇일까? 류큐 왕국이 15세기 초반부터 자리 잡은 독립적인 섬나라였기 때문이다. 류큐는 일본의 메이지 시기였던 1879년, 무력으로 강제 합병 당하며 오키나와현에 편입되었다. 그 이후 류큐인들은 일본과 한 나라가 되었음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고,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금지 당했다. 류큐의 땅은 일본 본토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며 제국주의적 수탈을 겪어왔다. 그 대표 사례가 잔혹한 자살 강요와 강제 징집을 고발 당한 오키나와 전투(1945)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식민의 상흔이 지속되고 있는 오키나와의 현실과 달리, 일본사 속에서 류큐의 역사는 독립적이거나 이질적이지 않게끔 다뤄지곤 한다. 류큐사가 일본사라는 대서사에 부드럽게 합류해 이어지는 과거로 취급되는 것이다. 류큐의 많은 문화재가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도 이렇게 ‘하나의 일본’이라는 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류큐의 고유성이 동원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이 오키나와에 네셔널리즘적인 국보 제도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류큐의 역사로 파고들어야만 한다. 이러한 모순은 실제로 류큐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내세우는 국보 해설과 연구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국보들은 과연 천황제로 대표되는 일본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데에만 기여하고 있는 걸까? 이 국보들이 류큐를 독립적인 국가로 드러내고, 이질적인 역사로 분열시키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민족국가를 만들기 위해 발굴된 국보는 지난 모든 왕조를 각각 다른 국가로 분리해낸다. 이 문화재들은 한 국가의 문명이 발전해 온 대서사로 말끔하게 이을 수 없는, 서로 다르며 서로 충돌하는 국가들과 지역들을 발견하게 만든다. 그래서 국보들은, 아무리 그렇게 의도될지라도, 한 편의 역사,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시대, 하나의 지역을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물건들이기도 하다. 늘 이질성보다 균질성이 선별되어 기획될 뿐, 국보는 단일(해야)한다고 여겨지는 국가를 분열시킬 수 있는 증거물이다. 그리고 그렇게 ‘단일하게 통합된 우월한 순혈 국가’는 언제나 파시스트와 반민주주의자들의 역사관이었다.

많은 미술이론가들은 근대 뮤지엄의 탄생을 프랑스 혁명에서 찾는다. “1793년에 프랑스의 혁명정부는 새로운 공화제 국가의 탄생을 극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국왕의 미술 컬렉션을 국유화하고 루브르를 공공기관으로 선포”했다. 프랑스의 민중은 왕정제가 애지중지했던 예술품을 전부 파기하는 대신, 민중의 것으로 공공재화하고 누구나 관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 📌 캐롤 던컨, 『미술관이라는 환상』, 김용규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2015), 60쪽.

물론, 모든 근대 뮤지엄이 혁명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일본의 뮤지엄은 아래로부터 위로 건설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제공되었다. 일본의 뮤지엄은 민중을 공동 소유자가 아니라, 교육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문화재를 공유재로 삼았다. 조선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의 뮤지엄들은 비슷한 출발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씁쓸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뮤지엄은 늘 대중을 불러들이는 순간부터 자신의 권위를 파괴할 씨앗을 품게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뮤지엄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할 때마다, 사람들은 거꾸로 뮤지엄의 확장과 변화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공공재로서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연구하고, 더 많은 대중에게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며, 시민의 운영 참여를 지향하는 공공기관으로 나아가는 뮤지엄의 역사가 어디서든 목격되는 것이다.

대내외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를 위해 동원되었던 국보는, 천황제와 민족국가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공공재의 자리를 얻었다. 2025 오사카엑스포를 위해, 공공재로서 다시 대중 앞에 우르르 불려나온 뮤지엄의 국보들은 여전히 일본 근대사의 내셔널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민중은 어떻게 국가성에 얽매인 국보들을 빼앗아 올 수 있을까. ‘국보’들이 ‘자국’으로 모이지 않는 수많은 타국들을 지시하는 뮤지엄의 인터내셔널한 기획은 가능할까. 그리하여 뮤지엄과 ‘국보’가 잊힌 과거로부터 타자들을 다시 끌어안는 진정한 공유지commons가 될 수 있을까.

글 :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