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얀마 | 영화 <이런 사랑>과 취약한 몸의 공동체
2025년 6월 10일
한 장의 사진이 불길 속에서 타오른다. 잿더미로 사라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형한 강조를 내비치기 위해서 사진은 불타고 있다. 강조라면 무엇을, 그것은 사진에 찍힌 세 사람의 시선이자 그 시선이 응시하는 정면의 존재다. 1988년 미얀마 민중항쟁에 열렬히 참여한 세 사람의 시선 앞에 놓인 것은 미얀마의 준동, 하나의 사물로도 순간으로도 지시할 수 없는 미얀마 항쟁의 모습일테다. 이러한 시선을 이어받는 것은 하나의 목소리다.
“버마는 내 땅입니다. 내가 왜 망명을 해야 할까요?”
망명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따라 화면에는 미얀마의 풍경들이 나타난다. 고요하고 일상적인 거리의 풍경. 이것은 망명자의 심상에 맺힌 미얀마의 풍경일까. 또는 불타는 사진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세 사람이 대면했을 그 풍경일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며, 더욱이 어느 쪽이든 망명자의 목소리는 결코 이 풍경을 볼 수 없다. 이러한 불일치의 감각, 풍경과 시선. 목소리 간의 어긋남 속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불화를 자신의 조건으로 삼는 취약한 몸이다.
몸이 취약하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진 할러시 감독의 <이런 사랑 This Kind of Love>은 아웅 묘 민의 삶을 쫓으며, 미얀마의 역사가 몸에게 어떤 규범과 폭력을 강제하는지 주시한다. 영화는 미얀마의 투쟁 속에 새겨진 두 가지의 폭력적 규범을 모두 문제시한다. 하나의 규범은 1988년 항쟁의 시간에서 나타난다. 군부의 총구 앞으로 몸이 내몰릴 때, 군화와 몽둥이가 몸을 구타할 때, 뼈가 빠그라지고 까진 살갗 속에서 피가 흐를 때, 이때의 몸은 단지 하나의 목숨으로만 존재하는 한에서만 몸이며, 생존에 대한 최종 통제권이 부재하는 한에서만 몸으로 제시된다. 이에 불복하려는 몸은 몸으로도, 사람으로도 인식되지 않는다. 아웅 묘 민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버마학생민주전선’(ADSDF)에 합류할 때, 이 투쟁은 곧 근대 시민이라는 특정한 방식의 인식 가능성 속에 몸을 종속시키는 규범에 대한 거부이자 불가능으로 간주되던 몸의 가능성과 권리를 찾기 위한 긴급함에 함께한다.
그러나 이 투쟁 역시도 몸을 인식하는 특정한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버마학생민주전선에서 함께 투쟁한 군인과 사랑에 빠진 아웅 묘 민의 몸은 ‘부적절한 섹스’를 하는 게이의 몸이기에 저항적 주체의 몸에 부합할 수 없다. 동지들로부터 거부당한 아웅 묘 민은 비폭력 저항의 방안을 찾고자 군대를 떠나고, 그의 연인은 지위가 강등당해 전선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는 정부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죽는다. 아웅 묘 민은 인터뷰에서 “그들은 이런 종류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고 말한다.
이런 사랑이란 무엇일까. 인식 가능한 의미 주변을 불분명하게 서성이는 사랑, 명백한 존재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묵과되는 사랑, 그러나 동시에 이런 사랑은 가능한 조건을 축소하는 허약한 믿음을 분질러내는 사랑이자, 이성애적 젠더 규범과 불화하여 식별 가능한 ‘몸’에 종속되길 거부하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합치가 아니라 어긋남과 긴밀하며, 바로 이런 어긋남이야말로 타자의 가능성 그 자체임을 상기시키는 사랑이다. 처음의 질문을 다시 불러보자. 몸이 취약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란 무엇인가. 그것은 몸이 나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이와도 연루되어 있음을, 몸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열리기에 서로의 삶에 연루되는 조건과 방식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태국으로 망명한 아웅 묘 민은 취약한 몸들간의 연대를 형성하는 활동에 힘을 쏟는다. 그가 운영하는 버마인권연 구소(지금의 Equlity Myanmar)와 성소수자 인권단체 ‘컬러스 레인보’는 춤과 노래, 연기와 움직임으로 군부의 폭력과 내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몸을 드러낸다. 하나의 쇼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전통 춤을 추고 있는 몸이 등장한다. 투명한 녹색의 시스루를 입고, 빛나는 장신구를 달고, 속눈썹과 립스틱을 바른 몸. 이 몸이 추는 춤은 미용 기술을 배우는 MTF 트랜스젠더의 몸으로, 내전으로 인한 아동 매매와 폭력의 위협에 시달리는 몸으로, 폭격으로 인해 잘려나간 팔의 몸으로 이어진다. 취약한 몸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 안무는 근대 시민과 이성애적 젠더 규범 모두를 초과한다. 그 초과들로 구성된 새로운 삶의 조건들에 응답하려는 실천들, 이 활기. 불복의 힘으로 역동하는 상상들 속에서 우리는 “이런 모든 투쟁 속에서 몸의 자리가 다른 정치성의 개념을 열어낼 방법이 있는가?”(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역, 문학과지성사, 2018, p41)라는 질문에 응답할 방도를 찾는다. 아웅 묘 민의 궤적, 몸들의 안무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다.
<이런 사랑>은 민주적인 총선의 치워지며 아웅 산 수치가 당선되고,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우리는 2025년 4월의 시간에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 이후의 시간은 어떠한가. 2022년 군부는 쿠테타를 일으킨 뒤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2025년 3월 28일 발생한 대지진을 빌미로 군부는 피해지역에 90차례 이상 공습을 강행하고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현재 군부는 지진의 진원지인 사가잉 지역이 군부에 반대하는 민족통합정부(NUG)과 다른 민주 세력의 주요 활동지라는 이유로 구호 물자의 반 입을 방해한다.
대지진 상황에서 우리가 거듭 대면하는 것은 손 쓸 도리 없는 지진이 아니라, 지진을 빌미로 시민의 삶과 정치적 권리를 통제하고 박탈하려는 군부의 추악함이다. 지난 달, 미얀마 민족통합정부의 인권부 장관으로 한국에 방문한 아웅 묘 민은 지진과 군부 정치의 심각성을 전하며 국제주의적 연대를 강조했다. 국경에 가로막히지 않는 국제주의적 연대는 취약한 몸이 추는 춤의 동선 그 자체다.
<이런 시간>에서 목격한 취약한 몸의 연대를 넘겨 받아, 영화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를 위한 미얀마와 한국의 투쟁이 상호접합의 역사성 속에 함께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 투쟁 속의 몸을 새로운 관계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몸은 사회적 현실과 일상 세계를 재창조하며, 불가능한 삶의 형상을 가능한 현실의 자리에 도착될 수 있을 것이다.
글 : 권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