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우금티와 2024년 12월 남태령은 어떻게 연결됐나
2025년 1월 10일
다시 만난 세계를 꿈꾸는 새로운 우리, 그리고 동학
소수자를 탄압하는 권력은 반드시 모두를 탄압하게 되어있습니다.
(맞습니다!)
장애인을 휠체어에서 끌어내리는 권력, 대학원생 입을 틀어막는 권력, 성소수자는 차별해 마땅하다는 권력, 그리고 트랙터를 막아서는 권력은 결국 우리 모두를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소수자를 지키는 것이 모두를 지키는 것입니다. 남들과 연대하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입니다.
(와! 맞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남태령에 있었던 우리는 모두 진심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 오늘이 지난 다음에도 내일에도 모레에도 우리의 삶은 반드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호응한다
2024년 12월 21일 동짓날 밤을 지나 22일까지 남태령에 모여 농민을 지켰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서로를 확인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유 발언들의 주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들은 광장 앞에 서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며 자랑스럽게 호명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시민들은 크게 호응했다. 자유 발언대에 오른 한 여성이 자신은 여성을 사랑하는 무성애자라고 밝히며, 박근혜를 지지했던 지난 날을 후회한다고 하자 시민들은 지지의 환호성으로 답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발언은 스스로를 만화 그리는 사람이라고 밝힌 20대 남성의 말이었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국민의힘 해체하라’가 좀 길어서 입이 아프다며 ‘윤석열을 해체하라’ 라고 외치자고 했는데, 너무 취향에 맞는 위트있는 말이라 나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함께 웃었다. 우리는 서로를 귀기울여 들었다.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격려하듯 박수를 치기도 하고, 위로하듯 반응하기도 했다. ‘맞습니다!’ 소리는 약속한듯 타이밍에 맞게 터져나왔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인가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자유 발언을 하기 위해 한참 줄 서있다가 마침내 발언하게 된 한 시민이, 자신은 강원도에서 새벽부터 첫 차를 타고 왔다고 하자 함께 놀라고, 이어 본인이 철원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트랜스 여성 농민이라고 소개하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크게 환호했다. 그러한 실제의 삶 앞에서 각자의 의문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남태령까지 자신의 삶 전체를 끌고 와 용기를 내어 스스로를 열어 보인 사람, 그 힘있는 신체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에 접속되었다. 윤석열을 반대하는 것 이상의 배움이 서로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농민들이 이들을 불렀다. 반도를 가로질러 6일 동안 천천히 행진해 온 트랙터들이, 연행되고 가로막혀서 들어올 수 없었던 2016년부터, 어쩌면 130년 전 우금티에서 막혔던 그 때부터 불러 낸 몸들이었다. ‘시민 여러분! 2024년 오늘, 바로 여기 남태령이 우금티입니다.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끝내 넘지 못한 그 우금티가 바로 여기 남태령입니다. 이번에는 넘고 싶습니다. 반드시 넘어야만 합니다. 기필코 넘을 것입니다.’ 라며 SNS에 도움을 요청했던 전봉준 투쟁단의 의기에 반응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앉아서 볼 수 없어 팔도가 마음을 함께 하고 억조창생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건질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 동학농민운동 <무장포고문> (1894년 음력 3월 20일 포고)
우리는 마음을 함께 하여 깃발을 든다
근대 조선, 탐관오리의 심각한 수탈에 고통받던 수많은 사람들과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은 같다고 할 수 없지만,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앉아서 볼 수가 없어 의로운 깃발을 들게 된 것은 비슷하다. 동학을 따르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던 당시의 동학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평등 사회를 이루고자 했다. 공동체 안에서는 계급 상관 없이 모두 경어를 쓰고 서로를 똑같이 대했고, 빈자와 부자가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함께 나눠먹었다. 나아가 동학의 사상은 ‘모든 만물이 하늘님을 모시지 않은 존재가 없다’라는 ‘삼경설(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 ‘범천론적 시천주’ 사상으로 확대해 동물과 자연을 포함한 만물을 ‘모시고’, 아우르는 정신으로 발전한다.
해월에게 있어서는 “어린이도, 베 짜는 며느리도, 집에 오시는 손님도 모두 하늘님이며, 하늘을 나는 새도, 들판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도, 그리고 졸졸 흘러가는 시냇물도 모두 하늘님이었다.” - 박맹수, 『창비 한국사상선16 최제우·최시형·강일순 개벽 세상을 꿈꾸다』 창비 2024, 37면
귀천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포교소를 설치하니 홀어미와 홀아비가 모이고, 재물을 좋아하여 있는 이와 없는 이들이 서로 도우니 빈궁한 이들이 기뻐했다. - 최승희, 「서월(유림)세력의 동학 배척운동 소고」, 『한우근 박사 정년 기념 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1, 554면
그런데 이 때에 있어서 제일 인심을 끄는 것은 커다란 주의나 목적보다도 또는 조화나 장래 영광보다도 당장의 실익 그것이었습니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 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데에서 모두 다 심열성복(心悅誠服)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그때야말로 참말 천국 천민들이었지요. - 홍종식, 「70년 사상의 최대활극 동학란실화」, 『신인간』 34,1929년 4월호, 45~46면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먹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모인 이유는 어떤 주의나 목적, 대의나 장래의 영광보다도 당장의 실익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이익은 동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 누릴 수 있는 실질적인 안정감이었다.
신분과 성별 관계없이 존중받을 수 있는 것, 배고파 굶는 사람 없이 모두가 먹을 것을 나눠 먹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물자를 보태 곤궁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 모습은 대략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남태령과, 이어진 한남동 집회에서 목격한 물적 지원과 후원의 물결을 보았기 때문이다. 먹을것과 마실 것, 쉴 자리, 보온 물품들이 우리들 안에서 계속 보급되었다.
서로 낯선 이들이었지만, 서로를 돌보았다. 누군가가 저체온증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쓰러지는지 모르고 잠들어버린 건 아닌지, 밤새 거리에서 자리를 지키느라 식사를 할 수 없어 너무 배고프진 않은지, 서로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소통하며 먹을 것을 나눠 먹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집회에서 경험된 느슨한 연대의 울타리는 돌보고 먹이는 것에서 경험되었다.
우리는 계속 연결되고, 멈추지 않는다
동학 공동체 안에서 누렸던 안정감은 서로를 끈끈하게 해 가족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 때 경험한 이상적인 공동체가 농민군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갖게 했을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 자발적으로, 강한 결사의 정신을 가지게 했을까.
나는 플랫폼C 역사기행에 참여해 충남 공주의 우금티 전적지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알게 된 우금티 전투는 일본군의 농민군 학살에 가까운 큰 패배의 현장이었다.
1894년 12월 5일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무기가 월등히 우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력을 다하기 위해 동학의 큰 공동체 단위인 북접과 남접이 합세해 만 명이 넘는 농민군을 모았다. 동학군들의 무기는 총도 있었지만 죽창이 대부분이라 계속해서 쓰러지고 쓰러지면서도 2백~3백명씩 대열을 지어 40~50차례 연속적으로 공격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시체는 산처럼 쌓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넘고자 했던 마음(‘무르팍만 내밀어도 나갈 수 있었는데, 주먹 만 내질러도 나갈 수 있었는데..’)은 간절했다.
총을 든 일본군 앞에 죽창을 들고서라도 나설 수밖에 없었던 원동력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대의, 혹은 가족과 같은 동학 공동체의 힘이었을까. 2024년의 우금티로 불린 남태령에서 경찰과 부딪칠 걸 알면서도 진격했던 전봉준 투쟁단의 결의와 겹쳐지고 또 달라진다.
회의가 열렸다. 현재상황은 진(進)의 길은 없고 퇴(退)의 길은 열려있다고 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논쟁을 하듯 간부들은 명분과 현실 앞에서 흔들렸다. 오히려 간부가 아닌 사람들이, 평소에 조용한 사람들이, 간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 ‘아따 눈들이 많은디 여기서 우리가 빠지면 쓰겄는가, 쪽팔리게’ 그것은 명분도 실리도 아닌 체면과 양심이었다. 죽되든 밥되든 버틴다고 결정했다. - 전봉준 투쟁단 중 한 분인 강광석님의 페이스북 글 <28시간의 남태령>
남태령에서 그 해 가장 추운 동짓날 밤을 지새우고 나서도, 사회자가 ‘우리 이 길이 열릴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하실 거지요?’ 라는 물음에 놀랍게도 곧장 크게 ‘네!’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외쳤던 끝까지 함께 한다는 말은 모두 진심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나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해도 뒤이어 그 자리를 맡아줄 사람들이 올 것을 알고 있다. 동학 농민군이 뒤이어 올 자들이 싸워줄 것을 믿고 전투에 뛰어든 것처럼, 농민이 시민을 부르고, 민주노총이 응원봉 동지들이 와 주리라 믿고 부른 것처럼, 그 믿음과 실제로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했다. 앞서 ‘신체’와 ‘몸’이 왔다고 표현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인 우리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이다. 동학농민운동은 당시 인구 1052만명 중 4분의 1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300만의 민중들이 가담한 혁명이었다고 한다. 교주나 지도자 몇 명의 업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민중의 흐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의 정신은 누군가 가르친 것이라기 보다 시대와 민중이 요청한 것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 정신이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에서 1919년 3.1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 촛불 시위의 역사로 이어졌다.
동학농민운동과 2024년의 윤석열 퇴진 운동은 확연히 다르다. 싸워야 할 대상도, 방법도, 주체도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 더 많이 다르고, 더 쉽게 연결되기도 한다. 130년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각자 개인이면서도 함께인, 우리만의 연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안에서, 우리는 서로 상의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하여 어떤 사람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이 곧 나를 위한 길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시민들 사이에 연대를 가로막는 구분은 불필요하다. 동학 공동체가 누리고 꿈꿨던 평등 사회의 주체는 남태령에서 조우하였다.
다시 만날 세계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오늘날 우리가 동학을 지금 다시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얼마나 훌륭하였는지 상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정신이 현재 우리들에게 어떤 상상을 하게 만드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2024년의 우금티인 남태령에서 확인한 다양한 주체들인 우리는 한남동에서 다시 만났고, 앞으로도 만나고자 한다. 그 만남의 공간에서 실질적으로 사회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고 새롭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동학의 꿈은 단지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았다. 봉건 사회의 적폐가 없어지는 혁명을 꿈꿨다. 집회는 미리 예상할 수 없는 급진적인 흐름들로 이어졌고, 그 흐름은 더 구체적이고 자유로운 상상과 실질적인 변화로 채워질 것이다. 윤석열이 파면되고 국민의 힘이 해체되어도, 다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체제를 위한 창조적인 연대는 요청될 것이다. 겨울 밤을 몸으로 밀어내고 피워낸 남태령의 봄처럼.
130년 전 천지개벽을 실현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군의 염원이 서린 우금치 전적비 앞에 그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대개혁을 실현하고자 모인 우리 전봉준투쟁단은 다음과 같이 「폐정개혁안 12조」(2024년)를 발표한다.
하나. 내란수괴 윤석열과 그 일당을 구속 처벌한다!
하나. 내란동조 국민의 힘 해체하고 그 당의 국회의원은 전원 사퇴시킨다!
하나. 군대와 경찰, 국 정원 등 무력, 공안기구를 민주적으로 혁파한다!
하나. 농산물 최저가격제 시행, 공정가격 설정으로 농민의 생존과 존엄을 보장한다!
하나. 경자유전의 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돌려준다!
하나. 개발농정 철폐, 기후재난 대응 국가직접농정으로 식량주권을 실현한다!
하나. 노동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한다!
하나. 재벌개혁, 대기업 경제력 집중 해소하고 중소영세상인 생존권을 보장한다!
하나. 이태원참사, 채상병 등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철저히 규명한다!
하나. 여성, 장애인, 이주민, 소수자 혐오와 차별을 철폐한다!
하나. 선거연령을 16세로 낮추고 청년정책을 우선한다!
하나. 불평등조약 및 종속외교 청산하고 자주권 실현하여 한반도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자!
참고로 동학농민운동 중 1차 전쟁을 종결하면서 해산의 조건으로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폐정개혁 12조」(1894년)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를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은 없앤다.
7. 청상 과부의 재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는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시문」, 최제우
겨우 한 가닥 길을 찾아 험난함을 뚫고 걷고 걸어 건너가노라.
산 넘어 다시 산이 보이고 물 건너 또 물을 만나는구나.
다행히 물을 건너고 또 건넜고, 겨우 산을 넘고 또 넘어왔네.
마침내 넓은 들판에 이르러 비로소 큰 길이 있음을 깨달았노라.
간절히 봄소식 기다렸지만 봄빛은 끝내 오지 않네.
봄빛을 무척 좋아하지만 봄이 오지 않은 것은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지.
마침내 올 때가 되면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올 것이니
지난 밤 봄바람 불어오니 온 천지 나무들 일시에 봄이 왔음을 알아차리네.
하루에 한 송이 꽃이 피고 이틀에 두 송이 꽃이 피니
삼백 예순 날이 되면 삼백 예순 송이가 피네.
내 한 몸 다 꽃이 되니 온 집안이 봄이로구나.
병 속에 신선의 술이 있으니 만백성을 살릴 수 있으리라.
천 년 전에 이 술을 빚어 크게 쓰고자 간직했나니
함부로 마개를 열면 향은 사라지고 맛 또한 변하네.
지금 이 도를 닦는 사람들은 입 지키기를 이 병마개 지키듯 하라.
글 : 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