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가장 낙관적인 n잡러 네티윗

방콕에서 가장 낙관적인 n잡러 네티윗

오늘 태국의 군부독재에 맞선 사회운동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지만, 우리의 불복종이 연결될 어디쯤에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2024년 12월 2일

[동아시아]태국동아시아와 사람, 태국, 민주주의, 학생운동, 젠트리피케이션

이 글은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모토로 29년 동안 발간 중인 월간 『작은책』 2024년 12월호에 실린 글이다.

지난 10월, 다른 일로 방콕에 들린 김에 네티윗 초티팟파이산(เนติวิทย์ โชติภัทร์ไพศาล)이 운영하는 국수집을 찾았다. ‘맛있는 민주주의(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กินได้)’라는 이름을 가진 그 국수집은 미얀마와 태국의 국수 음식들을 팔았는데, 네티윗과 그의 동생, 할머니, 그리고 미얀마에서 온 아주머니가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미얀마 국수를 주문해 먹었다. 과장 전혀 보태지 않고 그때까지 먹은 미얀마 음식들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식당명에 붙은 수식어가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팟퐁 야시장 근처에 있으니 방콕 여행의 기회가 있다면 꼭 찾아가보길 권하고 싶다.

방콕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활동가 중 한 명인 그가 갑자기 국수집을 열게 된 사연은 뭐였을까?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혹은 국수라는 음식을 매개로 방콕에서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민주주의’라는 테마를 일상적으로 떠올리기 위해. 방콕 시내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이 식당은 정말 그런 역할을 했다. 노골적이지만, 결코 그 이유를 밝히진 않는다는 점도 더 많은 궁금증을 유발하게 했다.

네티윗의 직업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그는 꽤 오랜 경력의 활동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세 차례가 방문했었고, 여러 외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 그는 군사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태국의 교육 시스템에 맞서 다양한 활동들을 벌인 바 있다. 태국의 교과서를 비롯한 교육 시스템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고, 청년들이 지배체제를 넘어 다른 상상과 실천을 벌이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2012년 ‘태국 교육혁명연합(TERA)’, 2013년 ‘시암 해방교육’ 등 조직을 만들어 군부 독재에 항의했고, 군부에 의해 제시된 공립학교 커리큘럼의 ‘12가지 핵심 가치’ 교육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또, 군대식 헤어스타일 규정의 철폐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쭐라롱콘대학에 다니던 2020년대 초에도 그는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2020년 유출됐던 방콕 경찰 문건에는 네티윗에 대해 온갖 혐의들이 적혀 있다. 첫째, 태국 예절과 문화를 어기는 부적절한 활동을 펼쳤다는 점. 둘째, 법률에 따른 군 징집에 불응했다는 점. 셋째, 외교 관계를 해칠 수 있는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한 점. 넷째, 위법 행동들 등이 그것이다. 실제 네티윗은 여러 차례 군부 독재와 억압적 교육 제도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치면서 집회시위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이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위치에서 투쟁해나가고 싶어 한다.

경찰의 비밀문건에 대한 폭로 포스팅
경찰의 비밀문건에 대한 폭로 포스팅

또한 네티윗은 태국에서 흔치 않은 병역거부자이기도 하다. 2014년 태국에서 또 다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자 네티윗은 자신의 열여덞번째 생일을 맞아 양심적 병역거부를 공개 선언했다. 일개 청년의 선언일 뿐이었지만, 습관적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는 태국 사회에서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태국 최초의 병역거부자로 기꺼이 나선 것이다. “우리가 세계의 시민임을 잊지 맙시다. 비폭력은 전쟁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 폭력이 만연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나라에서 제가 불교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언론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평화에 대한 제 의도를 선언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네티윗은 최대한 미루길 원하지만, 어쩌면 그는 곧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 최근 경찰의 압박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수집 한쪽 구석에는 병역거부운동이나 정치철학, 민주주의, 아나키즘 등 주제들을 다룬 책들이 꽂혀 있다. 이는 모두 2017년 네티윗이 친구들과 함께 설립한 ‘삼얀 출판사(สำนักพิมพ์สำนักนิสิตสามย่าน)’에서 펴낸 책들이다. 한병철의 <피로 사회>를 비롯해, 이스라엘 지식인으로서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연대해온 일란 파페(Ilan Pappe)의 저작, 세계적으로 유명한 좌파 출판사 버소(Verso)에서 출간된 <초과 근무(Overtime: Why We Need A Shorter Working Week)>, 그리고 <고양이들을 위한 마르크스(Marx for Cats: A Radical Bestiary)> 등 동시대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의 다양한 모순들을 다룬 책들을 출간하고 있었다. 또, 네티윗과 그와 함께 하는 동료 활동가들이 거쳐온 투쟁 경험을 소개하는 책들도 있었다. 마음 같아선 한두 권 사고 싶었지만, 구불구불한 태국어 글자를 조금도 읽을 수 없으니 그러지 않았다.

네티윗의 또 다른 직업은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선 불복종운동가다. 쭐라롱꼰대학 재학 중이던 2020년 6월 그를 비롯한 학생운동가들은 학교 캠퍼스 인근에 고급 콘도미니엄(아파트)의 건설을 위해 150년 된 도교 사원을 철거하려는 시도에 맞서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이곳은 방콕에 정착한 화인들이 집단 거주해온 삼얀(Sam Yan) 지역에 남은 유일한 도교 사원이었고, 그 때문에 사원 철거는 화인 이주민 공동체와 그들의 문화에 대한 파괴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국수집에서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네티윗은 이 사원으로 안내해주었다. 식당에서 도보로 20분쯤 걸어 도착한 사원은 고층 빌딩숲 사이에 숨겨진 보물섬과 같았다. 방문객들은 사원에 모셔진 마조신에게 절하고, 점궤를 쳤다. 대체 이 사원을 누가, 왜 철거하려는 걸까? 다름 아닌 대학당국이었다. 쭐라롱콘대학의 부동산 자산관리회사가 학교 소유의 땅을 개발해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네티윗의 투쟁은 졸업하고나서도 끝나지 않는 듯했다. 네티윗과 친구들은 출판사 운영을 통해 번 20만 바트(약 600만원)를 쏟아 이 투쟁을 치른 2년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는데, 2023년 태국영화협회로부터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다큐멘터리 『삼얀의 마지막 숨결』
다큐멘터리 『삼얀의 마지막 숨결』

국수집 주인이자, 활동가, 병역거부운동가, 출판인,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선 운동가, 영화제작자인 네티윗을 알게 된 건 불과 몇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왜인지 그를 오랫동안 알게 된 느낌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 거리낌이 없고, 하는 일도 정말 많다. 아마도 이런 점이 뭇사람들이 흐린 눈으로 그를 보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를 따라 도심을 이리저리 걸어가보고, 국수집에서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눠본다면 적어도 그의 모든 활동들이 모두 진심이라는 점, 그리고 하나같이 치열한 흔적들로 이뤄져왔다는 점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오늘 태국의 군부독재에 맞선 사회운동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지만, 우리의 불복종이 연결될 어디쯤에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글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