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4년 11월 21일 저녁 진행한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책읽기모임에 참가한 회원의 서평이다.
역사는 어떻게 쓰여지는가. 기입된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하나의 줄기로 이어 붙이려는 시도에서 삭제된 장면 속 인물들은 이탈된다. 하지만 역사가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기입되지 않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건 투쟁이 있어야 했다. 호명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 여성 해방, 자기 해방을 위해 투신한 한 여성이 있다. 김진언 할머니는 제주에서 태어나, 당시 합법이었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민주여성동맹(여맹) 활동을 했다. 1949년, 제주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북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북한에서 활동을 이어나가다 남파되었고, 다시 체포되어 25년간 옥살이를 했다. 10년 넘는 보호 감시가 잦아든 후 몇년 뒤인 1987년 여름, 저자는 처음으로 그녀의 증언을 채록한다. 그녀 나이 일흔 아홉이었다.
처음 할머니를 찾아간 날, 싸리 빗자루 금이 선명한 마당 너머로 늠름한 체구를 가진 백발의 할머니가 앉아 있었고 뒤뜰에는 장작이 반듯한 정육면체로 쌓여 있었다. 티끌 하나 없던 마루에 앉은 할머니 첫인상은 ‘흰 범’ 같았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면 무서운 범의 형상이었을 테지만 잔잔히 웃는 모습이 민화 속 호랑이를 떠올리게 했다.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p.7)
그 세월의 역경을 살아내고서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김진언 할머니의 이야기를 저자는 5년 동안 듣고, 정리했다. 이후 김진언 할머니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난 할머니의 스승이자, 여맹 선전부에서 활동했던 박선애, 박순애 씨의 증언까지 모아 책으로 엮어냈다.
저자는 김진언 할머니의 기억에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특히 숫자나 연도에서 할머니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생생한 자기 고백은 객관적인 정보를 넘어서는 힘이 있다. 그녀의 평등 사회에 대한 열망은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부 일처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활동했다는 할머니의 말 속에는 항상 자랑스러움과 후회가 교차했다(같은 책 p.10). 그녀는 제주에서부터 남과 북을 모두 그녀의 몸으로 교차하며 살아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의 시선
그 생을 통해 바라본 격변기 한국의 풍경은 달랐다.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의 시선으로 본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독립해도,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가 된다고 해도 여전히 해방되어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었다. 게다가 여성으로서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항상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인 리더십과 성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일을 도맡아 했던 그녀는 여성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키웠다.
열세 살부터 시작한 물 질. 아침에 배를 타러 테왁(해녀가 몸을 띄우기 위해 쓰는 뒤웅박)과 망사리를 옆에 끼고 소중이(속옷) 바람으로 바닷가에 나갈 때,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 그때 우리 부락에서 부녀회를 만들었는데, 조직이 셌다. 동네 여자가 죽으면 행상을 메어서 공동묘지까지는 못 가도 신작로 길 건너까지는 여자들이 다 옮겼다. 나는 총무를 맡았다. 어머니, 사촌고모, 내가 옆구리 딱 해서 나서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아무 소리도 못했다. 고모님이 일하다 비위가 틀어져서 베구들동산에 가 “이 쫄장부 같은 놈들 다 나와라”하면 남자들이 발발 떨며 맥을 못 추었다.(p.23)
물질을 하며 다 함께 노동요를 불러야 할 때, 열 세살의 그녀는 항상 선창을 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 부락 여성들의 기개와 닿아있었다. 지역 공동체의 여성들이 공동체 일원의 장례 행렬을 위해 함께 행상을 메어 시신을 옮기는 장면을 상상하면, 그 이미지는 공동체를 누가 맞들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공동체는 남성들과 더불어 여성들이 함께 구성한다. 하지만 그 시절 여성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그녀는 리더십과 자질이 충분한 사람이었지만 조직 회의에서는 배제되었다.
바닷가 바로 앞 우리 집은 ‘갯가바위 집’으로 통했다. 물질로 번 돈으로 스물여덟에 장만한 집이다. 마을과 좀 떨어져 있고 울담이 둘러 있어 아지트로 안성맞춤이었다. 김완배가 조천면당으로 옮긴 뒤 세포위원장이 된 주인(세번째 남편)은 본부인과 자식이 동네에 살고 있는데도 내 집에서만 지냈다. 당의 간부들이 들락거리고 마을 여성들을 모아 사상교육도 시켰다. 토지가 적거나 토지를 가지지 못한 농민에게도 땅을 똑같이 분배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은 당의 공개 아지트가 되어 수시로 회의가 열렸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당원들은 우리 집에 와서 방에 틀어박혀 회의를 했고 식사도 상방에 차려두면 알아서 먹으니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 사람들이 오고갈 때는 얼굴이 마주치지 않도록 피해있어야 했다.(p.29-30)
당시 김진언 할머니는 글을 몰랐다. 언문은 어렸을 때 익혀 알고 있었지만 한문은 잘 읽지 못했다. 자신은 물질과 수산물 거래에 있어 어릴 적부터 똑똑하게 수행했던 사람이라 앎에 있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조직 활동을 입말로 해야 했다. 그러나 조직 활동을 입말로만 하면 안되리라는 법은 없다. 만약 우리도 글 없이 말로만 사회운동을 한다고 상상하면 어떤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바뀐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었으니 최대한 직접 만나서 소통하고 설득하고 알려야 했다. 그야말로 순전히 신체와 신체의 활동이었다. 김진언 할머니도 그렇게 주변 여성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조직하고 논의하고 설득했다.
당시 여맹 활동은 거의 당을 위한 심부름꾼 역할이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여성 사업을 수행하도록 맡긴 게 아니고 당에서 부녀부장을 놓고 뒤에서 우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부녀부장은 서쪽 사람인데 다른 곳에 있다가 연락할 때만 오니 이름도 몰랐다. 나는 우리끼리 의논하여 사업을 진행할 수 없어 답답했다. 우리가 무식해서 그럴 수밖에 없구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남존여비라서 그렇구나 하다가 와산에 가서 일을 하는데 사태는 자꾸 불리하지, 연락은 계속 지체되지,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일의 체계가 왜 이 모양일까 의심이 생겼다. 부녀부장이 연락도 기관지도 가져오고 글로 하는 것도 모두 남자들이 했다. 우린 구두로 받아서 실전으로 일을 했던 것이다. 해안마을에 자리 잡았을 때는 입말로 어떻게 일을 할지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이놈들한테 잡히지 않을까, 이놈들이 들이닥치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이런 논의를 모두 입말로 했다. 의논한 내용을 위원장이 글로 적어 지시를 내려야 하는데, 우리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직접 당원들을 쫓아다니며 지도했던 것이다.(p.45-46)
신체와 신체의 활동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먹고 자는 것과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을 위협하는 비상 사태가 일어난다. 사건 전부터 조직 전체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고, 여맹은 장소를 자주 옮겼는데, 마을 가까이에서부터 점점 산으로 옮겨 한라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했다. 1948년,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자 총소리와 곡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조직 모두가 뛰고 또 뛰어야 했다. 비단 조직원 뿐만이 아니었다.
1948년 11월 15일 북촌의 젊은이들을 10여명을 잡아가 함덕해수욕장에서 총살했을 때, 우리 집안 장손인 큰조카도 희생되었다. 사촌들은 몰래 내려온 나를 보자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이년아. 어느 것이 해방이고? 어느 것이 금일 명일이고?” 친정어머니는 큰조카 시체를 찾으러 함덕해수욕장을 돌아다니다 모래사장에서 같이 죽은 동네 처녀를 발견해서 묻어주었노라고 했다. (p.57)
그녀의 기억에서 죽음은 눈알이 하나 빠지고 팔이 완전히 접질러지는 것, 총에 맞아 즉사하는 것, 맨발로 겨울 산에서 도망다니다가 배고픔과 동상으로 병에 걸려 죽는 것이다. 나중에는 포탄에 터져서 수많은 팔과 다리와 배가 떨어져나가 하늘로 솟구치는 것이다. 신체들이 훼손되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삶에 대한 열망과 자신의 신념을 잊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체포되고 무기 징역을 받는다. 수용소, 형무소에서는 고문과 취조가 계속 이어졌다. 그 때 전쟁이 일어났고, 그녀는 북한으로 흘러 들어간다. 인민군을 따라 평양 근처 항공사령부 식사 담당으로 일하게 된 그녀는 강한 의심과 의문을 일으키는 실상을 보게 된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계급사회에서 무계급사회로 전환한다고 알고 있었던 그녀는 상부에는 음식이 남아 돌고, 하부에는 굶고 있는 차별적인 상황을 목격한다.
“우리는 제주에서 이렇게 싸우지 않았소.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모두 공평하게 했소. 이게 평등사회요?”
“아직은 전시라서 토대가 안 잡혀서 그러니 이해하시라우요.”
지도원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때 의심이 생겼다. 우리가 조국통일 전쟁을 하는 이유가 자본주의를 몰아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건데, 사회주의 깃발을 꽂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토대가 안 잡혔다면 언제 잡힌다는 말인가. 전쟁이 끝나면 과연 달라질 것인 가. (p.82)
지도원에게 이것이 평등사회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던 그녀에게 전쟁이 끝난다고 한들 달라지지 않을 현실에 대한 자각은 어떤 의미였을까. 다 알 순 없지만, 황망하면서도 허무하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절망과 분노에 휩싸였을 것 같다. 다시 훗날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면서 자부심과 후회가 계속 교차하는 얼굴이었던 것을 생각한다. 아무리 그녀라도 왜 후회가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민을 뚫고 그녀는 살아낸 것이다.
북에서 남파된 그녀는 체포되고, 아주 긴 옥살이를 하게 된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전향하지 않았다. 마침내 형을 마치고 제주도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하늘과 땅이 딱 붙은 것 같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내가 한국전쟁 때 형무소에서 나와 바로 제주로 왔다면 집안에서도 못 견디고 나를 죽여버렸을 거다. 우리가 한 일 전체가 거짓말이 돼버렸으니까. 사람만 죽었지 뭐 하나 이룬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 부락으로 돌아오기도 창피했다. 하지만 그때 분들이 몇 명 없으니까, 있어도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어른들이라 그렇지 그 사람들 보기가 여전히 너무 미안했다. 우리가 어리석어 그 고생을 한 것일까, 아직도 모르겠다. (p.146)
어린 시절 그 동네에 이제는 텅텅 빈 것 같은 수많은 죽음들 사이로 돌아오면서도, 그녀는 인정을 잃지 않았다. 어느 날 밥을 많이 하면 누가 찾아오지 않으려나 기대된다고 하며 맛있는 집밥을 대접하던(그녀는 증언 중 자신이 만들었던 음식을 상세히 설명하곤 했다)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는 저자의 문장을 읽고, 무엇이 우리를 투쟁하게 하는가에 대한 깊은 영감을 얻었다.
후회와 자부심으로 가득한 지난 날들과 언제든 손님을 극진히 대하는 귀한 마음을 입고 우리도 그녀의 해방에 대한 바램을 이어 받았다. 시체들 사이에서 살기 위해 동백잎을 씹어 먹으며 버텨도 그것이 부끄러움이 될 수 없듯이, 우리도 자기 해방을 위해 살고 있다. 그녀가 살아서 자신을 증언하였기에 그 여성 운동가로서의 자부심을 우리의 몫으로 받아 듣게 된 것이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달라도, 이미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역사는 그렇게 김진언 할머니도 우리도 예상할 수 없는 고통과 기적의 혼재 속에 흘러갔다. 이 책을 복기하던 지난 밤 대한민국에는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제되었다. 계엄령은 누군가에게는 경고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김진언 할머니가 겪은 고통스러운 풍경들이 겹쳐서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창은 언제나 나의 것이라는 그 기개는 여전히 우리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반복해서 끊임없는 신체의 연대로 나아가게 한다.
글 : 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