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주거정의로 나아간 순닝로드 재개발 반대운동 | 홍콩 세입자운동
2024년 11월 29일
이 글은 ‘도시 재개발에 맞선 홍콩 세입자들의 저항’ 연재의 두 번째 글이다. 홍콩의 도시개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려면 첫 번째 글인 「주거 불평등·부동산 시장화 앞당긴 도시재개발국 URA의 모순」을 먼저 읽길 추천한 다. 이어서 마지막 세 번째 글에서는 현재도 진행 중인 도시 재개발에 맞선 까우룽시티(九龍城) 투쟁과 세입자 운동 조직 전략, 2019년 항쟁 이후 전망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리퉁 거리 재개발 이후
2003년 리퉁 거리(利東街) 재개발에 맞선 풀뿌리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재개발 사업은 강행되었다. 그러나 리퉁 거리 투쟁에서 주민들은 도시 계획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직접 도시 개발의 계획안 ‘덤벨 플랜(啞鈴方案)’을 작성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1부 참고). 또, 이 투쟁에 참여했던 철거민들은 활동가들과 함께 단체를 꾸려 여전히 정부의 비민주적 도시 개발과 강제 퇴거에 맞서 싸우고 있다.
철거민들은 강제 퇴거 위기에 놓인 세입자들을 조직하고 함께 저항할 뿐만 아니라, ‘오래된 것은 모두 나쁜 것’이라는 정부 프레임에도 저항하고 있다. 정부는 “오래된 것은 철거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가르는 정부의 잣대는 매우 자의적이다. 가령 리퉁 거리로부터 도보로 4분 거리인 관광명소 ‘블루하우스(藍屋, Blue House)’는 ‘역사 문화유산 건물로 지정’돼 철거를 피할 수 있었다.
블루하우스는 1870년대 완 차이에 지어진 최초의 병원이자 중국인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던 ‘와토 병원’이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와토병원은 1886년에 문을 닫았으며, 1920년에 철거됐다. 2년 후인 1922년, 이 자리에 4층짜리 임대 주택이 다시 세워졌다. 이 건물은 1970년대에 정부에 인수됐고, 1990년에 외벽을 파란색으로 칠해 ‘블루하우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결국 이 관광명소는 1990년대부터 ‘남옥’이었으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리퉁 거리는 ‘공식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1950년대부터 인쇄소가 모이고 사람들이 살아오며 기억으로 역사를 만들어 온 곳이다. 그러나 오직 재개발로 인한 이윤과 부동산 자본을 위해 리퉁 거리는 철거됐고, 블루하우스는 살아남았다. 그러니까 ‘오래된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프레임은 자본의 욕망을 가리려는 핑계에 불과한 셈이다.
풀뿌리 철거민들은 ‘보상금 챙기려고 정부에 떼 쓴다’는 사회적 인식에도 저항하고 있다. 현재 그들은 어떠한 자금 지원도 받지 않고 있다. 회원들은 리퉁 거리와 삼수이포(深水埗), 몽콕(旺角), 까우룽시티(九龍城) 강제 퇴거 반대 투쟁에서 함께 투쟁하던 활동가 혹은 철거민로 구성되어 있으며 퇴근과 학업 이후에 활동하고 있다.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자금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일반 시민들이 스스로 시민사회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민들이 재개발 과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민주적 토론을 중시하는 상향식의 독립적 지역사회 활동단체(주민회 등)를 설립하도록 장려한다. 또, 기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활동하면서, 재개발 과정에서 지역 내 정보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활동도 하고 있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공공임대주택 등 부담가능한 주택(affordable housing)을 위한 개발은 거의 없다. 대부분 리퉁 거리가 그랬던 것처럼 고급 쇼핑거리로 개발되거나 고가 주택이 된다. 그러나 부자들의 이윤만을 위한 재개발에 맞선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2009년에는 순닝로드(順寧道, Shun Ning Road) 지역 도시 재개발에 맞선 삼수이포 순닝로드 재개발 우려그룹의 투쟁이 있었다. 2012년에 설립된 나친와이(衙前圍, Nga Tsin Wai) 마을 재개발 우려그룹(衙前圍村重建關注組)은 나친와이 마을 주민과 상인들로 구성되어 집단 행동을 통해 강제 퇴거에 저항했다. 까우룽시티 재개발 관심그룹(九龍城重建關注組)은 2019년부터 시작해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그밖에도 쿤통, 토콰완, 퉁칭 등 수많은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민주적 도시화를 향한 주민들의 투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선 ‘세입자 권리’와 ‘풀뿌리 주거권’이 주요 화두가 된 순닝로드 투쟁에 대해 살펴보자.
2009년 순닝로드
“말하지 않고 폭발하지 않으면 조용히 죽게 될 것입니다!”
순닝로드는 구룡반도 삼수이포구 청샤완(長沙灣)에 위치하고 있다. 삼수이포 지역은 도시 빈민들과 난민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가장 소외된 자들을 밀어내는 도시 개발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중 특히 순닝로드 주변은 노점상이 밀집해있는 지역이었다.
2009년 6월 URA(도시개발국)는 순닝로드 재개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부동산 개발업자와 함께 삼수이포를 몇십년에 걸쳐 고급 주택단지로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민 182명이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 67명이 세입자였다.
URA의 재개발 과정에는 동결인구조사(凍結人口調查) 항목이 포함돼 있다. 해당 프로젝트의 시행일에 수집된 정보는 재개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현금 보상 및 재주택 마련에 대한 적격성을 검증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인구동결일(人口凍結日)로부터 3개월 동안 최소 13명의 임대 계약이 해지됐고, 집을 압류당하거나 소송을 당해 법원에 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세입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무단 침입, 폭행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세입자들도 동결인구조사에 포함되긴 했지만, 과거 URA에는 강제 퇴거를 당했을 때 재임대나 보상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세입자들이 그 권리를 상실할 확률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순닝로드 재개발로 인해 강제 퇴거당한 철거민, 강제 퇴거 반대 투 쟁에서 투쟁했던 당시 활동가들이 함께 ‘삼수이포 순닝로드 재개발 우려그룹(順寧道重建關注組, 이하 순닝로드 우려그룹)’을 결성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재개발 사업이 발표된지 두 달 후 순닝로드 우려그룹은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순닝로드 우려그룹은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문맹 등 여러 사유로 인구동결조사에 등록되지 못한 이들의 권리 보장을 요구했다. 동결인구 조사 기간이 불과 며칠 밖에 진행되지 않아 많은 이들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2004년 임대차 규제가 완화된 이후 임대인은 언제든지 세입자를 퇴거시킬 수 있었다. 순닝로드 재개발 프로젝트에서도 두 달 사이 최소 8명의 세입자가 강제퇴거 당했다. URA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사적 계약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풀뿌리 주민들이 삼수이포에 거주하는 이유는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자녀들이 인근 학교에 다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직장까지의 교통이 편리하고 물가도 저렴하여 생활비를 줄일 수 있었다. 순닝로드 우려그룹은 주민 퇴거를 강행하는 URA의 대응과 정부 차원의 세입자 보호를 요구했다. 또, 지역사회 공동 체가 흩어지지 않고 함께 이동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순닝로드 노후지역에 거주하는 세입자 중 상당수는 SDU(Sub-Divided Unit, 한국의 쪽방촌처럼 모여있지 않으며, 홍콩 전 지역에 걸쳐 존재하는 특수한 주거형태)에 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사 가게 되면 다시 오래된 지역으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계속되는 재건축 프로젝트에서 세입자들은 반복적으로 퇴거를 당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향후 영향받을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
순닝로드 주민들이 투쟁한 이유는 단지 이번 강제 퇴거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을 위한 것이었다. 강제 퇴거를 당한 세입자들은 다른 구역에서 살 수 밖에 없고, 180여 곳의 재개발 지역에서 언제든 다시 강제 퇴거를 당하게 될 수 있다. 순닝로드 우려그룹 안에는 경비원, 식품공장 노동자, 컨테이너 터미널 노동자, 노점상, 택배 노동자, 식당 노동자, 건설 노동자 등 밤낮없이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강제 퇴거를 당하지 않은 세입자, 상가 세입자, 옥탑방 거주자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순닝로드 우려그룹은 2012년 8월부터 9월까지 흔히 무단 거주지로 여겨지는 옥탑방에서 ‘옥상문화축제(深水埗天台文化節)’를 개최하기도 했다. 옥탑방 세입자를 동결인구조사에 포함시키지 않는 등 URA의 불평등한 정책에 항의하는 취지였다. ‘풀뿌리 옥상에는 주택이 있고, 옥상 공간에는 문화가 있습니다.(基層天台有住屋, 天台空間有文化)’ 옥상문화축제의 슬로건이었다. ‘문화’를 강조한 것은 홍콩의 심각한 주거 문제에 대해 풀뿌리에서 자발적으로 해결책을 만들어온 진정한 ‘홍콩 문화’이자 하나의 생활 양식으로 옥탑방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그룹에 있었던 만큼, 강제 퇴거 문제 말고 정치적인 문제들도 주요 의제였다. 순닝로드 우려그룹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퇴거 당사자 양위안류(楊源柳)는 세 자녀를 둔 미혼모였으며 중국인 부모를 두었고 순닝로드 재개발 지역의 SDU 세입자이기도 했다. 그는 양방향(홍콩-중국대륙 이동)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자녀는 모두 홍콩에서 태어났다. 양위안류는 세 자녀가 방학 중일 때 정기적으로 본토에 가서 허가증 갱신을 신청해야 했다. 홍콩에서 일하고 있지만 홍콩인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9년 1월 홍콩 종심(終審)법원(Court of Final Appeal)은 “홍콩에 입국한 중국 출생 홍콩인의 자녀에 대해 홍콩 거주권을 줄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륙 출신 홍콩인 자녀들의 홍콩 이주를 광범위하게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홍콩 정부는 중국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에 보낸 홍콩 대표단을 통해 법률 재해석을 의뢰했다. “인구 급증으로 인한 주택난과 범죄 등을 예방한다”며 해당자를 축소해달라는 취지였다. 이에 전인대는 ‘홍콩 기본법’의 제정 취지를 근거로 들어 이주 대상을 축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그해 6월말 ‘중국에서 출생한 홍콩인의 자녀 가운데 출생 당시 부모 중 한 사람이 거주권을 가진 자에 한해 거주권을 줄 수 있다’며 판결 내용에 ‘출생 당시’라는 문항을 추가함으로써 거주권 보유 판결을 받은 중국 본토 출신 이주민 중 상당수가 거주권 발급 대상에서 제외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위안류가 본토에 가서 허가증을 갱신하는 도중 집주인이 집 자물쇠를 바꾸는 일이 발생했다. 양위안류는 이에 분개하여 거리로 나왔다. 양위안류는 거리에 텐트를 치고 농성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입장문’을 적어 붙였다. 작년 6월 URA가 순닝로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시행한 동결인구조사에 포함되었지만, 집주인이 임대 계약을 해지했으며 집을 나가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양위안류는 URA가 임대료 보상과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공문까지 보냈다고 폭로했다.
결국 양위안류처럼 홍콩에서 일하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는 사람들도 한순간에 그 권리를 잃어버렸다. 1999년 당시에도 전인대의 법률 재해석에 대해 홍콩 기본법의 해석을 중국에 요청하는 것은 ‘일국양제’에 위배되며 홍콩을 자치권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았다. 그 뒤집힌 판결의 영향은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었 고 ‘쫓겨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순닝로드 우려그룹은 ‘쫓겨나지 않고 살 권리’라는 큰 목표 아래 ‘전국인민대표회의의 기본법 해석 때문에 거주권을 잃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홍콩 거주권을 회복시켜 달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양위안류는 노숙 농성을 하며 투쟁을 이어갔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말하지 않고 폭발하지 않으면 조용히 죽게 될 것입니다!(不在沉默中爆發 就在沉默中死亡!)”
부동산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은 풀뿌리에서 시작된다!
포럼, 토론회, 문화제, 매주 수요일 URA 앞 시위, 농성, 항의편지 보내기 등 다양한 투쟁이 진행되었지만 재개발 프로젝트는 멈추지 않았다. 이에 주민들은 URA가 재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에도 확정된 도시 계획을 제출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고 리퉁 거리 투쟁 때처럼 직접 삼수이포 도시 재개발 계획을 세워 제출하고자 했다.
그들은 삼수이포 지구에서 2010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1,000건의 설문 조사를 실시하여 해당 지역의 공공 주택 및 중저가 민간 주택 건물에 대한 요구사항을 파악했다. 이를 기반으로 전문가들과 함께 ‘삼수이포 주민자주계획안’을 작성했다. 계획안은 돈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지역사회가 상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구성되었다. 그들은 부지에 공공 주택 단지를 건설할 것을 요청했으며 기존에 있던 소규모 상점들이 다시 들어올 수 있기를 원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기에, 소규모 노점 상가에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진입할 수 있도록 1층에 장애인 통로를 설치해야 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또 지역 사회 공공시설에 대한 수요도 계획안에 담겼다. 공공 병원, 도서관, 운동장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자주적으로 도시 계획을 세워가며 “부동산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은 풀뿌리에서 시작된다(反抗地產霸權 由紥草根開始)”고 이야기했다.
2011년 9월에는 순닝로드 우려그룹이 기획하고 재개발을 우려하는 삼수이포 주민들이 모여 지역 내 4개 URA 재개발 부지에 민간 고급 주택을 건설하는 것에 항의하는 약 2시간의 행진이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2가지 였다. 도시 계획에 있어서 주민들의 의견을 들을 것, 그리고 더 많은 공공임대주택. “고급아파트 필요없다. 공공임대주택만 건설하라(不要豪宅只要公屋)”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주거정의행동, 풀뿌리 주거권 수호(住屋正義行動,捍衞基層住屋權)”라는 슬로건이 적힌 50피트 길이의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주택협회와 URA에 의해 거듭 거부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2013년 여름부터 순닝로드 재개발 지역의 모든 주민들은 이곳을 떠나야 했다. 거주하던 지역의 공공임대주택으로 이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순닝로드 우려그룹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투쟁을 섣부르게 '실패'라고 규정해선 안된다. 투쟁 과정에서 지역 노동자들, 세입자들은 스스로를 조직해 주거정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순닝로드 우려그룹에서 출발 해, 재개발 지역들에서 구성된 다른 우려그룹들로 연결됐다.
노동단체, 독립언론, 풀뿌리운동 단체, 홍콩 사회운동 영화제, 그리고 개인 등이 모여 주거정의행동(住屋正義行動)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2011년 9월부터 10월까지 삼수이포 주민자주계획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세입자 권리, 풀뿌리 주거권에 대한 조직된 목소리를 냈다.
주거정의행동은 더 많은 공공임대주택과 퇴거세입자들의 수평이동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주거정의’를 외쳤다. 물, 전기 등 기본 시설이 마련된 집, 태풍 등 재난에 안전한 집을 요구했다. 값비싼 쇼핑몰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오래 뿌리내린 식당과 노점상, 시장을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또, 직장, 학교, 공공 시설 등과 멀지 않은 곳에 거주지가 위치할 수 있게 해 가족과 지역 공동체,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순닝로드 우려그룹을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거 정의라는 기치 아래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지속적인 주거 정의를 위한 투쟁의 기반을 다졌다. ‘주거 정의’에 대한 요구의 시작은 홍콩 내 세입자 권리, 주거권 활동가들이 더 급진적인 상상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였다.
현재 홍콩에서는 2020년 통과된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2023년 3월에 통과된 새로운 국가보안법(기본법 제23조)로 인해 점점 민중들이 단결하여 권력에 맞서 투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순닝로드 재개발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URA와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야욕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순닝로드가 위치한 삼 수이포 지구를 고급 주택단지로 개조하려는 계획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삼수이포 지구에 많이 살고 있는 난민, 이주민, 도시빈민들은 거주지에서의 강제퇴거뿐 아니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높아진 임차료에 시달리고 있다. 노점으로 생계를 겨우 이어가려는 노력 또한 삼수이포를 홍콩의 브루클린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자본에 의해 늘 좌절된다. URA가 식품위생국(食物環境衞生署)을 대동해 노점들을 협박하고 내쫓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존재 때문에 거리로 나와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기란 매우 어려워졌다. 이 답답한 시기에도 활동가들은 더욱 풀뿌리로 들어가고 있고, 주민들을 조직하고 관계를 맺으며, 주거정의를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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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경희 (플랫폼c 동아시아 사회운동 뉴스레터, 빈곤사회연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