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문제의 뿌리를 겨냥할 새로운 세력을 구성할 때

재난 문제의 뿌리를 겨냥할 새로운 세력을 구성할 때

사회운동은 기성의 권력에 도전하는 역할을 하고, 전문가에만 기대지 않는 집합적 실천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 재난을 돈벌이의 기회로 삼고, 자당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생각을 우선하는 이들에게 문제를 제기할 동료를 모으자. 우리에게는 재난 문제의 뿌리를 겨냥할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다.

2024년 10월 19일

[읽을거리]사회운동재난, 사회운동, 체제전환운동, 노동안전

이 글은 참세상에도 '반복되는 재난은 체제의 문제다!'라는 제목으로 공동 게재되었다.

아리셀 참사 집회에서 중국어가 함께 쓰인 무대막을 볼 때마다 어찌할 바 모르는 감정에 가슴이 요동친다. 한국에 가면 좀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사람들, 한국의 법과 언어를 잘 몰랐던 사람들, 자신들이 다루는 물질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던 사람들, 가까운 출입구를 열 수 있는 권한조차 없었던 사람들… 무대막의 중국어 문구는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노동자 시민 추모제”를 번역한 제목일 뿐이지만, 낯선 언어는 계속해서 말을 건다. 그날 화마 속에서 숨을 거둔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기억하라고.

지금의 사회 구조가 참사를 만들어 낸다

세계 어디에서나 약자들은 더 자주 재난의 희생자가 된다. 우리가 ‘자연’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재난에서조차 부의 불평등이, 젠더 관계의 모순이 원인으로 작동한다. 1990년 이후 스리랑카의 산사태 발생률은 26배 증가했는데, 이는 수출을 목표로 차 플랜테이션을 만들며, 언덕에까지 뿌리가 얕은 차나무를 많이 심으면서 발생한 일이다. 2004년 인도양 지진해일에서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3배나 더 많이 사망했다. 여성들은 가사노동을 위해 해일이 온 아침 시간에 대체로 집 안에 있었고, 해일의 전조를 알아채기 어려웠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수영을 배울 기회가 적었고, 전통의상은 파도에 휩쓸렸을 때 탈출을 어렵게 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산재나 재난이 저렇게 극적으로 계급이나 인종, 젠더의 모순을 드러낸 적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수의 이주노동자가 한꺼번에 사망한 아리셀 참사는 조금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닐까 의문을 가진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윤추구를 최우선으로 하고, 책임을 아래로 떠넘기도록 짜여 진 사회 구조가 재난의 원인이 된 사례를 여러 차례 보아왔다. 세월호 참사는 기업의 탐욕, 느슨한 규제, 구조세력의 무능과 무책임 등이 결합해서 발생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역시 아주 낮은 규제의 벽을 기업이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산재 사망으로 눈을 돌리면 이 경향은 더 강해진다. 인력감축, 빡빡한 작업시간, 안전장치 미설치나 안전장비 미지급은 모두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인데, 이로 인해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하루에 두세 명씩 죽는다. 산재 사고 사망자 중 이주노동자의 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것도 이 구조를 잘 보여준다.

재난은 자연과 기술의 문제가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한 사회 질서 내부에 내재해 있다가 특정한 계기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한국 사회운동은 이 문제의식을 ‘사회적 참사’라는 말로 표현했다. 2016년 말,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이 말에는 산재나 재난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다르게 구성해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

협소하고 잘못된 대책의 반복

재난의 진짜 원인이 더 깊고 큰 사회적 구조에 내재해 있다는 진단은 생각보다 종종 이뤄지고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재난 이후의 해결책은 이 진단에 비해 협소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다.

재난은 오랫동안 자연을 인간의 힘으로 잘 통제하거나, 기술을 발전시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재난 정책은 ‘전문 영역’으로서의 허들이 높다. 즉 대책을 마련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주체가 협소하다. 노동안전보건 정책이나 재난 위험을 둘러싼 정책 과정에 보통 사람들이 의견을 내기는 어려우며, 따라서 관련 정책은 대체로 “대중大衆없는 정책”으로 규정되어 왔다. 이는 전문가들이 기존의 재난 정책 시스템을 크게 넘지 않는 선에서 점진적 개혁에만 머물도록 만든다. 재난통신망을 정비한다든가, 안전 감독을 위한 체크리스트를 늘린다든가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협소한 대책은 위험을 축적하고, 이를 위험을 만들어내는 데 책임이 없는 이들에게 전가하는 권력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재난 예방을 빌미로 사회통제를 강화하거나 기존의 질서를 강화하는 정책이 이뤄지기도 쉽다. 대구지하철화재 이후 노동조합은 2인 승무를 요구했지만, 지하철공사는 오류를 일으키는 인간을 시스템에서 제외하겠다며 무인승무시스템을 확대했다. 신자유주의 금융화는 인력 구조조정, 노동조합의 약화, 정부 규제자원의 축소 등으로 안전을 위협하지만, 재난은 이런 금융자본이 다양한 재난보험을 개발하고 수요를 확대할 계기가 되며 정부는 이를 권장한다. 재난도 돈벌이 기회로 삼아 기존 질서를 강화하는 ‘재난 자본주의’다.

과잉정치화와 과소정치화 사이에서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 위험을 축적하는 기존 권력을 축소하고 바꿔야 한다면, 재난은 정치적 쟁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정치화는 이전에는 정치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을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이다. 이때 모든 산재와 재난이 정치화되지는 않는다. 정치화는 언론 보도, 정치권의 의지, 사회운동, 여론 등의 함수의 결과로 이뤄지는데, 어떤 재난을 의제화하고 정치화할지에 있어서도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

최근 우려되는 현상은 거대양당이 서로를 비난하기에 적절한 사건이 정치화되고, 사건의 여러 측면 중 정쟁에 사용하기 좋은 측면은 과잉정치화되는 반면, 이 사건의 구조적 의미를 분석‧숙고하는 데 필요한 측면은 과소정치화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23년 7월 집중호우가 발생시킨 오송 참사와 채상병 사건은 모두 정부의 재난대응 역량과 체계, 방식에 대한 심대한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채상병 사건에 비해 오송 참사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적다. 언론도 정치권도, 재난 예방에 도움이 될 구조적 원인에 주목하기보다, 책임이 대통령까지 갈 수 있는지 지자체장으로 그치는지를 우선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채상병 사건에서 누가 실종자 수색을 지시했느냐는 쟁점은 세세하게 보도되는 데 비해, 재난대응 훈련을 받은 부대 외에도 군부대를 쉽게 재난수습에 동원해 온 방식, 재난수습에 나선 군인들에게 제대로 된 안전 장비를 지급해오지 않았던 다른 사례 등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2024년 한국에서 재난의 정치화는 기성 당파 중 누군가를 편들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다음 재난을 막기 위한 유의미한 방법일까. 현재의 구도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을 국회의 다수로 만들고, 대통령을 바꾸는 것과 위험을 창출하는 권력에 맞서는 일은 다르다. 전자를 후자로 치환할 수는 없다. 지금과 같이 재난이 정치화되는 방식을, 다르게 변화시켜야 한다.

문제의 뿌리를 겨냥할 새로운 세력을!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에서 안드레아스 말름은 코로나19가 인류 사회를 강타했는데도 생태학 쟁점이 최우선 의제로 부상하지 못했다면서, 그 이유로 생태적 재난 시기에는 생존 그 자체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시기에는, 재난의 근원을 찾기 위해 사회 구조를 분석하고 토론하기보다 재난 이후의 고통에 더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함께 겪고 넘으면서도 우리는 이 고통의 근원에 대해 분석하고 성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에 또다시 이전과 같은 방식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름은 ‘급진적’이라 함은 결국 문제의 뿌리를 겨냥한다는 뜻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렇다. 재난으로 인한 고통을 궁극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재난의 뿌리를 찾아내 겨냥하는 것뿐이다. 이는 단순히 같은 감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모여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구조적 문제로 ‘감각’하는 것과 이를 해결해 나갈 분석력을 갖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 또 이를 실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세월호 참사를 사회 구조의 문제라 말했지만, 그 진단이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 경로를 구상하고 제안하는 것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여러 사회적 참사에 맞선 투쟁이 결국은 기존 질서 안에 포섭되거나 정권을 향한 분노의 불쏘시개로만 쓰일 때면 재난이 과연 급진적 사상 속에 계보를 가질 수 있는지, 사회운동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현실에서 즉각적인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역사를 봐야 한다. 이제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재난 취약성’ 개념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밑줄을 긋는다. 이들은 재난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불운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구성한 취약성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재난이 긍정적 정치화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도 길어 올린다. 대표적인 “대중없는 정책”이었던 핵발전 관련 정책은 스리마일과 체르노빌 등을 거치면서 대항 전문 집단이 생겨나고 “대중이 있는 정책”이 되었다. 반핵운동을 사회운동의 의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사회운동은 기성의 권력에 도전하는 역할을 하고, 전문가에만 기대지 않는 집합적 실천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 재난을 돈벌이의 기회로 삼고, 자당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생각을 우선하는 이들에게 문제를 제기할 동료를 모으자. 우리에게는 재난 문제의 뿌리를 겨냥할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다. 체제전환운동이 바로 그 세력이 될 수 있기를 나는 기대한다. 세상을 바꾸자. 세상을 바꿔 우리를 구하자. 이 재난의 시대에서.

글 : 박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