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단체연합(이하 '보건연')은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全日本民主医療機関連合会, 이하 '민의련')의 초청을 받아 8월 3일부터 7일까지 민의련의 의료기관을 견학하고,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2024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가했다. 원수폭(原水爆)은 원자폭탄, 수소폭탄을 합친 핵폭 탄을 가리키는 말로, 이 대회는 1955년 부터 매년 8월에 열리고 있다. 보건연의 단체인 청년한의사회의 학생회원으로 연수에 참가한 송수민 회원의 후기를 싣는다.
생이 끝나도 지속되는 그날의 고통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은 1945년 8월 6일이었다. 상공 600m에서 직경 100m의 화구(火球)가 형성되어 열선과 방사선을 방출하고 충격파 폭풍을 일으켰다. 모든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집과 길과 학교가, 모든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이 순식간에 파괴됐다. 79년 전 그날의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찾았다.
우리는 긴 여름해가 지기 전 평화공원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후에도 꿋꿋이 자라나 희망의 상징이 된 협죽도(유도화:히로시마를 상징하는 꽃)를 비롯한 여러 꽃과 나무들이 위령비를 감싸며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각종 위령비들이 피해자들을 기억하며 평화공원을 넘어 대로변 끝까지 줄줄이 우뚝했다. 앙상하게 드러난 철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원폭돔과 원폭피해에 대한 상세한 기억이 담긴 평화기념자료관도 보였다. ‘평화의 날’을 맞이한다고 쓰인 거대한 현수막이 걸린 건물 앞으로 노을빛을 받은 분수가 눈부시게 빛났다.
‘무섭도록 완벽한’ 히로시마 평화공원
그날의 비명을 품은 평화기념자료관에 들어갔다 나오자 밤이 되었다. 희생자들의 유품을 본 후 보이는 평화공원의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원폭돔의 흉터는 어둠에 가려졌지만 앙상한 철골이 더욱 음산하고 거대하게 드러나 히로시마의 유령들을 불러모으는 듯했다. 당시 피폭자들이 호소했던 극심한 갈증을 달래기 위해 조성한 인공 물길은 밤이 되자 방사능 물질을 함유한 ‘검은 비’처럼 진득하고 위험해 보였다. 앞에는 1964년 8월 1일 점화후 지금까지 계속 타오르고 있는 ‘평화의 불꽃’이 희생자들의 분노와 원한 그리고 끝없는 고통처럼 타올랐다. 이 불꽃은 ‘지구상에 모든 핵무기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결연한 반핵의지를 상징한다. 원폭돔과 물길과 불꽃은 아치형 원폭 희생자 위령비 사이로 하나의 그림처럼 합쳐졌는데, 그 풍경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작은 제단 같았다. 비로소 평화공원이 어떤 처참함 위에 세워졌는지 실감이 났다.
위령비의 조각상 아래 비석에는 ‘편히 잠드소서. 다시는 이런 잘못이 없으리니’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민의련의 하라씨는 이 비석에 주어가 없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의 패전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소련보다 먼저 주도권을 잡고 핵무기의 위용을 보이기 위해 원폭을 투하했으며, 피폭자들의 생사에 상관없이 방사능 조사를 시행하고 그 결과를 은폐했다. 미국 대통령 중 이 위령비 앞에 서서 애도를 표하거나, 자신들의 잘못에 대하여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폭 2~3세의 고통도 외면하고 원폭 피폭의 유전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도 무책 임하긴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는 사람들을 위한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않았으며, 반핵과 반미 여론을 우려하여 원폭 투하 사건을 은폐 했다.
이 때문에 12년 후 제3의 피폭인 비키니 사건(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인해 비키니 섬 인근의 참치잡이 어선이 피폭되어 생활인인 시민들에 의해 일본 전국적으로 반핵 여론이 형성된 사건)이 있기 전까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피폭국=피해국”라는 도식을 만들어 원폭 피해라는 이름 뒤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범죄를 숨기고 한국인을 포함한 타국의 원폭 희생자들을 오래도록 차별했다. 바로 옆 평화기념자료관에서 희생자들이 울부짖고 있는데 평화공원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지만 그 속은 텅 빈 평화만을 외치는 듯했다. 원폭 피해자 가족의 눈물겹고도 아름다운 인생 이야기를 다룬 김옥숙 작가의 소설 『흉터의 꽃』의 표현처럼, “히로시마의 하늘은 71년전 그날처럼 구름 한 점 없었다. 무섭도록 완벽한 날이었다.”
보건연 방문팀은 원폭 투하 시간인 8월 6일 8시 15분에 맞추어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묵념했다. 당시 강제징용 등으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10만 명의 한국인 중 5만 명이 피폭되었으며 그 중 3만 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투하 이후 임시 피폭자 진료소에서 조선인들은 제대로 진료받기 어려웠고, 일본인 피폭자보다 적은 진료비를 지급받았다. 치료도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분노의 표적인 되어 불안에 떨어야 했다. 1970년 4월 10일 건립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히로시마시 당국의 불허로, 처음에는 평화기념공원 밖에 지어졌다. 이후 한인위령비가 평화공원 밖에 있는 것은 한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것에 항의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1999년 한인위령비가 평화공원 안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묵념 후 발언을 통해 한국인 강제동원과 원폭투하로 인한 피폭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사람들을 기억했다. 원수폭금지대회 폐회식에서는 일본인 피폭자 바로 옆에 한국인 피폭자 당사자가 나란히 앉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피폭자 박씨의 아버지는 전쟁 중 노동력 강제동원으로 히로시마로 왔다. 당일 아침 먹고 6남매가 집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원자폭탄이 떨어져 기둥에 깔렸다. 어머니는 집을 헤집으며 상처투성이 아이들을 한 명씩 끌어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자 했으나 돈이 없어 일본 시골을 떠돌다 한참 후에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공장에서 일하며 겨우겨우 먹고 살았는데도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 정착한 후에도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져 또 한 번의 전쟁을 겪으며 힘들게 살았다. 글로만 배웠던 한국사의 기구함이 개인의 인생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을 목격한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지속되는 피폭자들의 고통, 그리고 연대
“피폭자들의 고통은 지속되고 있다.”
민의련 대교류회에서 원폭 피해자 당사자인 야마다씨가 한 말이다. 그녀는 가족을 모두 잃고 원폭 고아가 되어 여러 집을 전전하며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의 기억은 화상 흉터처럼 박혀 몇 십 년 후의 그녀와 청중들을 눈물짓게 했다. 야마다씨는 성인이 되어 피폭자를 함께 살아가리라 다짐했고, 피폭자와 부락민 구제를 주로 하던 생협 병원에서 38년 간 일했다. 퇴직 후에도 피폭자와 퇴원환자를 위한 개호시설을 열어 20여 년간 운영해오고 있다 하셨다. 소설 『흉터의꽃』에서 초월적인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등장인물 박인옥을 보며 피폭자들에게 인내와 희생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우뚝 서서 고통을 연대로 승화시킨 사람의 목소리는 뜨겁고 감동적이었다.
피폭자 진료소에서 몇 십 년간 진료하신 후지와라 씨는 환자가 호소하는 모든 증상이 원폭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고 진찰한다고 했다.그 자체로 고통인 피폭된 몸과, 가족과 친구를 잃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사회적 편견과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기에 그들이 겪는 질병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원폭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피폭자들이 싸워 얻어낸 피폭자건강수첩을 통해 진료지원이 더 수월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핵친화세력의 방해로 피폭자들의 인정제도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투쟁을 통해 원폭 후 방사능 물질을 함유한 검은 비가 내린 지역의 범위를 넓혀 6천여 명이 추가로 인정되었지만(나가사키에서는 인정범위가 훨씬 좁았다), ‘검은 비를 생각하는 오카야마(히로시마 인근 지 역) 모임’이 강조했듯 피폭자 인정 범위는 여전히 매우 좁다. 뿐만 아니라 피폭자들이 호소하는 증상도 후생노동성이 정한 11개 피폭 질환의 증상에 해당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고 있다. 원폭 피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전성’도 여전히 ‘과학적 근거가 없다’며 제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어 원폭 2세와 3세의 선천적인 고통은 개인의 책임으로 남겨졌다.
‘안전한 핵’은 없다
‘피폭자 분들이 오래 살아주신 덕분에’ 그분들을 진료하며, 100mSv 이하의 선량-반응 관계에 방사선이 소폭이라도 상승하면 피해도 비례하여 커지는 직선 그래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방사선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몸에 좋지 않다는 정비례관계가 성립함을 증명한 것으로, 이 전까지는 임의로 100mSv라는 허용선량을 정해두고 이보다 적은 방사선 피폭은 인체에 해롭다고 증명되지 않았다는 기존의 무책임한 입장을 반박하는 결과였다. 이로 인해 핵발전을 추구하는 세력이 정한 ‘합리적’이라는 잣대에 반박하며 ‘안전한 핵’은 없음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원폭 피폭자들과 원전 인근 주민들이 연결되는 지점이라 매우 인상적이었다.
히로시마를 돌면서, 전범국 일본의 원폭 희생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고민했다. ‘폐하의 백성’으로서 원폭 투하를 겪었으나 결국 국가로부터버림받은 그들은 희생자가 분명했지만, 전쟁범죄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도 일본이 피해자국이라는 일본정부의 주장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때 인위적인 선인 국경을 해체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한일 원폭피해자의 연대를 다룬 이지영의 글 <한일 원폭피해자의 고통의 감정연대와 균열>에서 그들을 만났다.
처음부터 원폭피해자 구제에 소극적이었던 일본정부는 피폭자건강수첩 교부 시작 후에도 일본에 있는 원폭피해자들만 피폭자로 인정하고, 한국이나 중국, 브라질 등의 해외 원폭피해자는 인정하지 않았었다. 원폭피해자들은 국경을 넘어 피해자로서 교감하는 연대를 형성하여 투쟁했고, 그 결과 국적이나 민족과 상관 없이 각종 생활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초기에는 한국 원폭피해자들이 강제징용을 떠올리며 일본인 피해자들에게 분노와 적대감을 드러냈으나, 일본인 원폭피해자가들이 연대하여 일본 정부가 배부하는 피폭자건강수첩을 한국인 피해자들도 교부 받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힘쓰면서 한일 피해자들 간 신뢰와 유대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국적의 피폭자들은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했다고 한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므로 피해자일 뿐이라는 모순적인 말을 비판하는 데에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동시에 타국민이라는 이유로 상대를 타자화하고 같은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고, 서로 죽이는 전쟁의 무참함과 공허함이 실감났다.
세계 곳곳으로 퍼지는 반전·반핵 메시지
1945 년 원자폭탄에 피폭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원수폭금지 세계대회에서 2024년의 전쟁과 핵발전에 대한 문제제기로 연결 및 확대되었다. 각 지역의 발언자들은 전쟁과 핵발전이 지역에서 구체적인 위협으로 나타났음을 고발하고 함께 맞설 것을 촉구했다. 비핵평화 아시아포럼에서는 동아시아 평화제언을 통해 적극적으로 ‘비핵과 평화를 위해 풀뿌리에서부터 운동을 펼치자’고 제안했다.
스페인에서 온 발언자는, 1966년 핵무기를 싣고 가던 미군의 폭격기가 비행 중 충돌로 인해 추락하여 스페인 동남부 지역에 수소폭탄이 낙하한 사건에 대해 들려주었다. 다행히 핵폭발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광범위한 지역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핵무장 찬성 세력이 주장하는,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만이 다른 나라가 핵무기를 쓰는 것을 막게 할 수 있다는 ‘핵억지론’의 모순이 떠오르는 사고였다. 스페인 정부는 오염된 토양을 처리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핵실험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다른 국가들에 선례를 남길 것을 우려해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방사능 오염 지역 출신인 발언자는 일부 지역에 핵무기를 공유하여 핵억지력을 제공하는 NATO에 스페인이 가입한 것을 비판하며, TPNW(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기 위한 풀뿌리운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원폭희생자가 있으면서도 가해자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오키나와현의 일본부인회에서는 미군의 여성(특히 소녀) 성폭행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에 상주하는 미군 3만 명 중 절반은 오키나와에 있는데, 오키나와현은 성폭행사건을 은폐하고 재발방지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미군이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는 것은 명백하며, 미군기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성폭행사건은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이라 강조했다. 히로시마의 남쪽에 있는 쿠레에서도 미군기지와 가까운 곳에 미군과 자위대가 함께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다기능 복합 방위 거점을 만들 것이라는 발표가 있어 시민들이 반대집회를 열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이 수십차례 핵실험을 진행했던 마셜 제도는 마지막 핵폭발이 일어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방사능 고위험 지역으로 남아있다. 미국의 원자폭탄보다 1000배 강력한 수소폭탄 실험 후 인근 지역에 방사능을 함유한 ‘검은 비’가 내려 주민들이 피폭되었다. 미군들은 피폭에 대해 무엇도 알려주지 않고, 오염된 채소를 먹게 해 내부피폭이 일어나게 하거나 피폭자들에게 직접적인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발언자의 아버지가 미군이 놓은 주사를 맞고 가슴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고 한 데에서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도 마셜제도 주민들의 암 발생률은 매우 높으며,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보다 더 많은 잔류 방사선이 각종 환경문제를 일으킨다. 마셜제도에서는 여성들이 ‘어머니’이자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 maker)’으로서 평화와 정의를 지켜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 발언자분 역시도 인자한 인상의 나이가 지긋한 여성이었다.
한국 참가자들도 발언 기회를 가졌다. 친원전 정책을 펼치며 후쿠시마 핵오염수가 안전하다고 선전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동시에 북한과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미국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우크라이나에 유럽 전체보다 많은 폭탄을 지원하며 군수산업의 이윤을 추구하는 행태를 고발했다. 한미일의 핵전제동맹 결성을 비판하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는 한반도 비핵화가 필수적이라 강조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발언이 있었지만 전부 옮기지 못해 아쉽다. 대부분의 발언은 지역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반전과 반핵 투쟁에 함께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쟁, 핵무기, 원전, 기후위기 등의 거대한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체화되는 지역의 사람들이 맞서야 한다는 것이 마음 깊이 와 닿았다. 평화포럼의 패널로 있었던 한 한국 교수는 국가 정책을 넘어 SNS등을 통한 시민들의 연결만이 진정한 평화를 실현시키는 힘이라 말했다. 포럼이 끝나고 처음 보는 모양의 종이학을 받았다. 일반적인 종이학과 다르게 날개를 퍼덕일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종이학은 히로시마의 어린 소녀 사다코가 원폭으로 인해 발병한 질환이 낫기를 바라며 접은 후 반핵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힘찬 날갯짓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날아가리라는 희망이 느껴졌다. 비핵화를 실현한 카자흐스탄과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사례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무언가를 향해 함께 날아가자 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최근에 SNS에서 아래턱 일부가 손상당해 아랫니가 다 드러난 팔레스타인 소년을 보았다. 이번 세계대회에서 본 원폭 투하 직후 히로시마를 찍은 다큐멘터리에서도 비슷한 모습의 소년이 나와 소름이 돋았다. 불바다가 된 히로시마처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산 채로 타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로 다른 전쟁의, 동일한 무참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반전, 반핵’이라는 메시지는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연대로 구체화되었다. 보건연에서는 현수막과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연대 티셔츠를 입고 ‘평화의 날’ 행사가 이루어지는 평화공원을 다시 찾았다. 히로시마현이 주일 이스라엘 대사를 초청하고 러시아와 벨라루스 그리고 팔레스타인 대사를 초청하지 않은 것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비슷한 문제제기를 하는 듯 이른 아침부터 공원 입구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단체가 깃발을 휘날리며 큰 소리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고, 그 앞을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보건연 팀은 다행히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팔레스타인 국기를 입구에서 뺏기고 말았다. 속상했지만 공원 내에서 티셔츠를 알아본 외국인에게 FREE PALESTINE이라 적힌 부채를 받아 힘이 났다. 한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에서 시간에 맞추어 묵념하며, 식민지배로 고통받은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연대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깊이 느꼈다. 그 후 ‘한국의 보건의료인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을 규탄합니다.’라고 일본어와 한국어로 적힌 현수막을 펼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공식적인 발언 및 행동도 많았다. 세계대회의 개회식에서 미국의 대학생이 불타는 눈빛과 힘있는 목소리로 ‘From the river to the sea, Palestine will be free’를 외친 것이 시작이었다. 일본 각 지역의 어머니들과 아이들이 모여 반전평화를 외치며 갖가지 현수막을 펼쳤을 때에도 가자지구에 연대한다는 글귀를 눈에 잘 띄었다. 군수산업이 활발한 일본 나고야에서 온 발언자는, 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나고야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기억한다며, 나고야에서 만든 무기를 이스라엘에 수출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말했다. 교류회에서 만난 민의련 대학생도 팔레스타인 연대 스티커를 주며 한국팀의 퍼포먼스를 응원했다. 보건연에서 개인적으로 연대 굿즈를 준비하여 참가자들에게 나눠준 분도 있었다.
세계대회가 끝나는 날, 평화공원을 둘러싸고 흐르는 강에 등을 띄우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저마다 반전반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갖가지 빛깔의 등을 물에 띄워보냈다. 에필로그처럼 노을빛의 강물이 흐르는 가운데 <흉터의 꽃>을 마무리하며, 저 아름다움과 처참함 사이에서 피어나는 평화를 기원하는 바람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길 바랬다.
글 : 송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