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 주거 불평등·부동산 시장화 앞당긴 도시재개발국 URA의 모순

홍콩 | 주거 불평등·부동산 시장화 앞당긴 도시재개발국 URA의 모순

URA는 지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해당 구역의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고급 주택을 짓는 등 18건의 재개발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일반 시민을 위한 저렴한 주택 수가 크게 감소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동산 시장을 부풀려 가격과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다.

2024년 9월 13일

[동아시아]홍콩주거권, 반빈곤운동, 홍콩, 도시

이 글은 '도시 재개발에 맞선 홍콩 세입자들의 저항' 연재의 첫번째 글이다. 두 번째 글은 다음 달에 게재할 예정이다.

홍콩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주택 가격으로 악명 높은 도시였다. 2004년부터 2021년까지 홍콩 주거용 주택의 실질 가격 지수는 239% 상승한 반면 실질 임금 지수는 7.1% 증가하는 것에 그쳤다. 홍콩의 엄청난 임대료는 정치적으로 대중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의 '쪽방'처럼 집주인들이 무단으로 집 안에 벽을 만들어 쪼개고, 분할 임대하는 SDU(Subdivided unit)를 확산시키기도 했다.

홍콩의 쪽방 '통퐁(劏房)'
홍콩의 쪽방 '통퐁(劏房)'

임대료의 상승도 불평등하게 나타났다. 낮은 임대료의 주택 가격은 높은 임대료의 주택보다 더 빠르게 상승했다.

홍콩의 대형 부동산 기업 Midland Reality가 공개한 2004년부터 2020년까지의 주택 가격 변화 분포를 4년 간격으로 보여주는 아래의 그래프에 따르면, 2004년 100만 홍콩 달러(약 1억 7천만원) 상당의 주택 평균 실질 가격은 2020년에는 4배로 오른 반면, 2004년 500만 달러 상당 주택의 평균 실질 가격은 같은 기간 동안 2배 상승에 그쳤다. 일반 풀뿌리 민중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홍콩의 민간 주택 가격 변동 분포: 2004-2020 (출처: Midland Reality)
홍콩의 민간 주택 가격 변동 분포: 2004-2020 (출처: Midland Reality)

정부는 공공임대주택을 더 짓지는 못할망정, 기존에 시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마저 고급주택단지나 명품쇼핑거리로 재개발을 강행하고 있다. 이에 내쫓겨나는 원주민들이 조직되었고, 연대자들이 가담한 많은 지역 기반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비록 몇몇 투쟁은 패배로 마무리되었지만, 아직까지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단체들도 있다.

이 글에서는 홍콩 재개발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URA(市區重建局, 도시재개발국)에 대해서, 그리고 홍콩에서 최초로 재개발과 강제 퇴거에 저항하여 주민들이 직접 토론하고 계획하여 정부에 민간 개발 계획을 제출했던 2003년 완차이 지역의 리퉁 거리(Lee Tung Street, 利東街) 투쟁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2003년 이후 홍콩의 다른 지역들에 있었던 저항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홍콩 도시 재개발과 URA

1988년 홍콩에서 LDC(土地發展公司, 토지개발공사)가 설립되었다. 이후 1999년에는 도시 재개발을 가속화하기 위해 URA를 설립하려 했으나, 재개발로 인해 쫓겨난 사람들의 저항에 가로 막혔다. 그렇게 미뤄지던 URA는 2001년 5월 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설립됐고, 토지개발공사는 같은 날 해산되었다.

LDC와는 다르게 URA에게는 토지를 직접 회수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LDC는 토지를 취득하기 위해 소유자와 장기간 협상을 해야 했고, 토지 강제회수를 신청하기 전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토지를 취득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그렇기에 재개발에 반대하는 소유주들과의 마찰로 도시 재개발의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URA 체제로 변화된 후에는 재개발 속도가 빨라졌을 뿐 아니라, 세금까지 면제됐다.

URA는 겉으로 주거지가 형성된지 오래된 지역의 시민들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재개발을 한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열악한 삶의 조건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돕고, 이를 통해 그들이 더이상 열악하게 유지되는 집에서 겪을 문제를 감수하지 않도록 한다는 비전을 내걸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는 URA가 설립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주거세입자, 상가세입자들의 거리 단위 강제 퇴거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URA가 설립되기 전인 1998년, 홍콩 정부는 임대료 통제를 해제했다. 1921년부터 이어온 이 임대료 통제는 1998년 당시에는 원래 임대료의 20% 이상 임대료를 인상할 수 없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URA가 생긴지 3년 후인 2004년에는 거주권 보호 조치들을 해제했다. 원 임차인의 임대 갱신 우선 순위 보장, 계약 해지 통보 기간 6개월 이상, 퇴거 제한이 사라지게 되면서 세입자들은 아무 보호 없이 내쫓기기 쉬운 상황에 처해졌다. 도시 재개발에서 퇴거당한 세입자들이 보상을 받는 과정도 너무나 복잡해서 아무 보상도 못 받고 쫓겨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를 테면 URA가 도시 재개발을 위해 그 지역을 구매한 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주거를 시작한 경우라면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또한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는 요건이 되지 않거나 홍콩 영구 거주권까지 없다면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아주 작은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밖에는 없었다. 이 외에도 옥탑방 등 본래 주거용이 아닌 거주지에 사는 경우 2년 이상의 거주 증명을 할 수 있는지, 1982년 이전에 건물 등록을 했는지 등 여러 경우에 나뉘어 공공 주택으로 이주할 수 있는 자격이나 보상이 주어진다. 공공임대주택 또한 경우에 따라 새로 지어진 공공임대주택인지, 오래된 공공임대주택인지가 정해진다.

이렇게 URA가 오직 이윤을 추구하며 재개발을 마구잡이로 실시한 결과, 그들이 처음 세운 강령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역변이 일어났다. 거주민들과 상가 상인들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강제퇴거 당해야 했다. 재개발 계획 과정에서는 원 거주자들과 그곳에 형성된 공동체 의견은 모두 배제됐다. 새로 재개발된 곳의 상류층 주민들이 기피하는 자동차 수리점 등의 상가들은 완전히 제거됐고, 옥탑방 등 불법 구조물 또한 철거됐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할 도시 공간이 마구잡이로 상품화됐다. 홈리스 등 도시 지역의 하층민들이 모두 퇴거되고, 재건설 관련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URA가 정부 부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홍콩이라는 도시를 오직 그들의 이윤을 위해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민간 개발자들이 갖지 못한 많은 공공 자원과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음 세 가지 주요 사항이 포함된다. 첫 째, 재원 측면에서 정부 자금이 투입됐다. 설립 후 첫 5년 동안만 해도 100억 홍콩달러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부에 대한 세금 납부 또한 면제되었다. 두 번째로 URA의 재개발 사업은 정부로부터 토지할증료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초고층 개발권을 무상으로 취득할 수 있었고, 정부에 토지 프리미엄을 지불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노후 4~5층 건물을 40~50층으로 재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로 공권력 측면에서 URA는 홍콩법례 제124장의 ‘회수토지조례’(收回土地條例)에 명시된 ‘토지를 직접 회수할 수 있는 능력’을 발동 가능한 권한을 부여받는다. URA가 재개발 지역의 소유자에게 재산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 없는 경우에 이를 적용할 수 있다. 정부는 토지 재개 조례를 사용하여 해당 토지와 그 부지에 있는 부동산을 공공 소유로 반환하도록 강제했다. URA는 이를 활용하여 많은 재개발 지역의 부지를 강제로 회수했다.

이렇게 URA가 법정 기관으로서 막대한 공적 자원과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민간 개발업체와는 달리 이익 추구에만 집중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강령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URA 조례에서는 URA가 URS(도시재개발전략)에 따라 도시 재개발을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사람 우선, 지역 중심, 사람 중심” 접근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 재개발의 주요 목표는 해당 지역 주민의 커뮤니티 네트워크를 보존하는 등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URS는 재개발 중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 재개발 프로젝트로 인해 부동산을 취득하거나 소유권을 환수당하는 소유자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보상을 받아야 한다.
  • 재개발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는 국내 세입자는 적절하게 재입주해야 한다.
  • 도시 재개발은 지역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어야 한다.
  • 재개발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는 주민들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URS의 강령은 번지르르한 문구로 작성됐지만, 실제로 이는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 URS는 URA의 재개발 시행에 대한 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URA에서는 이윤 추구만을 위해 재개발 사업을 시행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매년 손실이 발생하여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해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URA의 현재 누적 자산은 300억 홍콩 달러를 초과했다.

2002~2016년 URA 재정상태 (출처: 舊區街坊自主促進組)
2002~2016년 URA 재정상태 (출처: 舊區街坊自主促進組)

URA는 공적 권리로 토지를 점유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토지 취득 과정에서 ‘회수토지조례’의 권한을 활용해 주민들을 협박할 수 있고, 주민들 입장에서 취득 가격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더라도 협상력을 잃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몇몇 주민들은 같은 지역에서 재정착할 충분한 자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거주권을 포기하고 토지를 URA에 매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URA의 건물 압류 비용을 크게 절감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URA는 정부로부터 토지 프리미엄 보조금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여러 층의 오래된 건물을 수십 층의 고급 주택으로 재건축할 수 있는 ‘고층 개발권’을 무료로 받을 수 있어 다른 개발업체에 비해 재정적 이점이 더 크다.

현재 URA가 수행하는 거의 모든 재개발 프로젝트는 민간 개발사와 협력하여 개인 고급주택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URA는 우선 재개발 사업을 인수하고 주민과 기업의 재정착 문제를 처리한 뒤, 공개 입찰을 통해 시행사에게 공동개발권을 부여하고, 동시에 시행자로부터 선불금을 징수한 뒤 판매 수익금을 배당한다.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에도 임대 부동산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URA는 법으로 설립의 근거가 규정된 기관이기에 공공기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관의 수입은 전적으로 부동산 시장에 의존하며, 민간 개발사와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인다. 설립 당시부터 URA는 정부가 투입한 100억 달러에서 326억 달러로 순자산가치가 200억 달러 늘어나는 등 큰 돈을 벌어왔다. 당시 엄청난 흑자를 낸 URA 최고 경영자(행정총감, 行政總監) 와이치칭(韋志成, Wai Chi-sing, 2016년부터 URA의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음)은 2017년 11월 공식 웹사이트에 3개의 블로그를 게시했는데, 이 중 11월 19일자 게시물에서는 URA가 과거 재개발 사업으로 돈을 벌었던 주된 이유로 “몇 년 전 현재 시세보다 낮을 때 인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최근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있기 때문”에 장래에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그는 “향후 몇 년 동안 세계 경제, 양적 완화 정책, 금리 및 기타 상황이 변하면 부동산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URA 재개발 프로젝트는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도 언급했다. 그의 발언은 공공 기관으로서 URA의 생존이 부동산 시장에 달려 있고, 그 손익은 전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부침에 달려있다는 홍콩의 도시 재개발의 모순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URA가 지속적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시장을 지원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야 부동산 시장이 늘 꾸준하게 상승하고, 재건축 이후에는 새로운 부동산이 건설될 것이다.

와이칭칭의 이런 평가는 공공기관으로서 URA의 생존이 부동산 시장에 달려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손익은 전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부침에 달려있다는 홍콩의 도시 재개발의 모순적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URA가 지속적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시장만을 지원해야 한다. 그래야 부동산 시장 규모가 꾸준하게 상승하고, 재건축 이후에는 새로운 부동산이 건설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밀어붙이다보면 궁극적으로 그들의 강령에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집 구입이 어렵고 임대료가 비싸 고통받는 일반 주민들의 곤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시민이란 초고층 고급 주택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들 뿐인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URA의 생존이 부동산 시장과 연결되는 사태는 홍콩 정부가 오랫동안 공공 도시 재개발을 정부의 승인 없이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는’ 사업으로 규정해왔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정부는 이미 1988년부터 LDC를 설립했는데,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반 정부 부처와 달리 공기업의 형태로 운영됐다. 법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경영 원칙에 따라 운영되고 재정적으로 자신의 손익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자금조달’의 본질은 정부가 도시 재개발에 등을 돌리고 이에 책임을 낼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재개발 후 새 부동산의 가격이 높을수록 토지 개발 잉여금이 커지고 더 많은 프로젝트가 시작될 수 있으며 순환이 계속된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전역을 휩쓴 1997년 금융위기가 홍콩 부동산 시장에 큰 타격을 주자 LDC는 큰 손실을 기록했다. 이는 도시 재개발과 부동산 시장의 모순도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만약 홍콩 정부가 제대로 이 손실의 원인을 인지했다면 시장에 의존하지 않은 공공을 위한 재개발에 대해 재검토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콩 정부는 그간의 행보를 성찰하는 대신 부동산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에만 집착했다. 2001년 LDC를 대체하는 URA를 설립했을 때에는 비정상적인 '부동산 주도' 발전을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URA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부동산 주도 현행 재개발 모델의 폐해

도시 재개발은 재건축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주민들의 주거권을 위협하는 것 외에도 지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재개발이 필요하다면 좋은 계획이 필요하다. 재개발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다양한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상향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URA는 손익을 책임진다고 주장하며, 개발업자로서 주도적으로 토지를 취득할 수 있는 공권력을 갖고 있다. 민간 개발업체와 협력해 재개발 부지를 개발하고 엄청난 수익을 노리며 고가의 고급 주택을 잇달아 짓고 있지만 이는 평범한 대중들이, 그 재개발 부지에 원래 살던 원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삼수이포(深水埗, Sham Shui Po) 재개발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주로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삼수이포는 중국 본토에서 온 신이민(新移民: 법적인 원뜻으로는 홍콩에 이주해 왔으나 아직 만 7년이 지나지 않아 영구거주권을 얻지 못한 사람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내지(중국 본토)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노인, 노동자 계층 등 다양한 사람들이 높은 인구밀도로 밀집해있다. 1940년대 후반, 중국에서 내전이 발생하며 많은 난민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을 때, 그들은 도시 지역 외곽과 산비탈에 불법 거주지(squatters)를 건설했다. 195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섹킵메이(石硤尾, Shek Kip Mei) 불법 거주 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영국령 홍콩 정부는 모든 주민에게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보다 재정착 건물을 짓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화재 이후 홍콩 정부는 통상적인 불개입 정책을 깨고 그 자리에 7층짜리 건물을 여러 채 건설했는데 이는 홍콩의 첫 번째 공공주택이다. 이 셱킵메이 지역 주변에 고밀도 공공주택이 추가적으로 지어졌고, '재정착 지역'이 되면서 '삼수이포 구'가 형성됐다.

1953년 섹킵메이 화재 이후 지어진 임시 거주시설 (출처: 香港特別行政區政府檔案處)
1953년 섹킵메이 화재 이후 지어진 임시 거주시설 (출처: 香港特別行政區政府檔案處)

2001년부터 현재까지 URA는 지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해당 구역의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고급 주택을 짓는 등 18건의 재개발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일반 시민을 위한 저렴한 주택 수가 크게 감소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동산 시장을 부풀려 가격과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다. 여전히 이는 삼수이포의 오래된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삶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히, 삼수이포는 남아시아계 난민들과 빈곤층이 많이 산다는 점에서 영향이 극심하다. 최근에는 난민 신분으로 일을 하지 못하거나 고령인 주민들이 거리에서 노점상을 여는 것 또한 도시 재개발을 명분으로 식품환경위생국을 동원하여 금지시키고 쫓아내고 있다.

현재의 재개발 모델은 홍콩의 전반적인 풀뿌리 주택 문제를 악화시켰다. 민간 부동산 개발업자와 협력해 고급주택을 개발하며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재개발 프로젝트들은 심각한 주택 문제에도 불구하고 도시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 상승에 앞장선다. 또한 재개발 시에 저소득 주민들이 임대할 수 있는 SDU 등 부실 주거지들은 대부분 철거된다. 하지만 이는 반지하 폭우 참사 이후 서울시에서 반지하를 없앤다고 공언한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것처럼 풀뿌리 세입자들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지 못했다. 노후 건축물, 부실 주거지들이 감소하면 시중에서 거래되는 풀뿌리 세입자들을 위한 저렴한 임대 주택이 감소한다. 그러나 URA가 재개발하는 신축 건축물은 시와 공동으로 개발, 매각하는 사유재산이다. 새로이 개발된 부동산은 풀뿌리 세입자들이 살기에는 전혀 저렴하지 않다.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기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나 공공임대주택 입주 소득 요건에 약간 모자라는 사람들은 점점 더 집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엄청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산업용 건물을 주거용으로 쓰는 경우나 일종의 ‘쪽방’이나 다름없는 SDU가 등장하는 경우 또한 늘어나고 있다.

URA는 설립된 지 10년이 넘도록 재개발로 퇴거당한 세입자를 위한 건물을 단 한 채도 건립한 적이 없으며, 주민의 적절한 재정착을 위한 계획도 수립하지 않았다. 주민 재정착은 주로 HA(Housing Authority)와 HS(Housing Society)의 공공주택 아파트에 의존하지만, 모든 재개발 부지는 민간 고급 아파트 건설에 사용되었으며 임대 아파트 건설이나 아파트 보조금 판매를 위해 HA나 HS에 재개발 부지를 양도할 의무가 없다.

2003년 리퉁 거리 재개발에 맞선 풀뿌리 저항

2003년 URA는 완차이 지역 리퉁 거리(利東街) 전체와 근처 거리들 일부를 포함한 8개 거리의 H15 재개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여기서 H15는 완차이 지역 URA의 3개 사업 중 하나로 54개 건물, 930가구 이상을 포함하는 리퉁 거리 지역의 8,900㎡가 넘는 면적을 말한다. 100개 이상의 작은 상점이 이 지역에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홍콩 사람들에게 친숙한 청첩장 인쇄 골목도 포함된다.

1990년대 서울의 예비 부부들이 결혼 준비를 위해 이대 웨딩 드레스 거리에 방문했듯, 홍콩에서는 모든 예비 부부들이 청첩장 인쇄를 위해 리퉁 거리에 방문했었다. 재개발 프로젝트가 발표되자 주민들과 상가 세입자들은 자발적으로 H15 우려 그룹(H15 關注組, H15 Concern Group)을 설립했다. 2004년, H15 우려 그룹은 상향식 및 주민 참여가 포함된 홍콩 최초의 민간 계획 ‘덤벨 플랜’(啞鈴方案, Dumbbell Plan)을 제안했다. 리퉁 거리에서 수십 년간 형성된 커뮤니티 네트워크가 H15 우려 그룹 내에서 홍콩 최초의 민주적 도시 계획을 수립하는 것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H15 우려 그룹에서는 거주민이 지역 사회의 개발과 도시 계획에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된 가치로 삼아 집집을 방문하여 거주민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의견을 경청하고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민 회의를 여러 번 개최하고, 워크숍과 거리 모형 전시회를 기획했으며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초청하여 협력했다.

덤벨 플랜은 H15 우려 그룹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작성한 계획안이다. 이들은 리퉁 거리의 양쪽 끝에 새로운 고층 주거용 건물을 건설하여 4~6층 연립주택 클러스터, 원래 상점 및 중간 구간의 청첩장 인쇄 거리의 특성을 보존할 것을 제안했다. 재개발의 영향을 받는 주민들은 새 주거용 건물에서 새로 이사할 집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새로운 고층 빌딩과 중간 구간의 짧은 연립 건물은 아령과 비슷하게 생겨 덤벨 플랜이라고 불렸다.

2005년 H15 우려 그룹은 덤벨 플랜을 수정하여 두 번이나 다시 제출했지만 모두 거부되었다. 2007년 도시계획위원회는 비공개로 심의하고 URA의 리퉁 거리 재개발 계획을 승인했다. H15 우려 그룹이 참석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노란 현수막들이 붙은 리퉁거리
재개발에 반대하는 노란 현수막들이 붙은 리퉁거리

결국 2007년 7월에 개발이 시작되었다. 매일같이 리퉁 거리에서는 하향식 재개발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거리에는 반대 현수막도 빼곡히 붙었다. 대부분 ‘주민 참여 계획 구현’, ‘지역사회 네트워크 보존’, ‘주택은 주택으로, 상점은 상점으로 대체하라’ 등의 내용을 담은 노란 현수막들이다. 2007년 10월 한 시위자가 철거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들은 경찰서에서 알몸으로 수색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리퉁 거리에서 청첩장을 인쇄하러 온 신혼 부부를 대상으로 보석상을 운영하다가 재개발에 맞서 H15 우려 그룹에 가입한 메이 씨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리퉁 거리에서 철거를 시작하려는 것을 보고 단식 투쟁으로 작업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에는 정무사(한국의 국무총리실에 해당하는 행정부서) 앞으로 자리를 옮겨 단식 투쟁을 계속했다. 단식 투쟁이 나흘간 지속되었고 메이 씨는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다. 메이 씨는 URA가 거리의 주민들을 협박하고 집주인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을 내쫓았다고 이야기했다. 2003년부터 길게 이어온 투쟁이기에 주민들은 점점 줄어드는 보상금의 불안을 느꼈다. 또한 리퉁 스트리트 재개발 프로젝트 중에는 URA 직원이 허락도 없이 주민들의 집에 마구잡이로 침입하기까지 했다.

이후에는 정무사(한국의 국무총리실에 해당하는 행정부서) 앞으로 자리를 옮겨 단식 투쟁을 계속했다. 단식 투쟁이 나흘간 지속되었고 메이 씨는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다. 메이 씨는 URA가 거리의 주민들을 협박하고 집주인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을 내쫓았다고 이야기했다. 2003년부터 길게 이어온 투쟁이기에 주민들은 점점 줄어드는 보상금의 불안을 느꼈다. 또한 리퉁 거리 재개발 프로젝트 중에는 URA 직원이 허락도 없이 주민들의 집에 마구잡이로 침입하기까지 했다.

재개발 전, 리퉁거리 10번지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던 메이 (출처: 明报周刊)
재개발 전, 리퉁거리 10번지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던 메이 (출처: 明报周刊)

URA는 ‘사회적 책임’보다 ‘이익’을 우선시하고 주민들의 생계와 필요를 보호하기를 거부했다. 원래의 지역 특성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고 고급 주택과 쇼핑몰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리퉁 거리에는 서로 안부를 건네는 이웃들이 살았고, 작은 상점들이 즐비한 골목에는 인쇄업, 웨딩업, 철물점, 음식점 등이 줄지어 시장을 형성하며 공존했다. 당시 H15 우려 그룹에 참여한 성원이 참여하는 한 단체는 여전히 하향식 도시 개발에 맞서 실제 거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조직하고 투쟁하고 있다. 해당 단체의 활동가는 과거의 리퉁 거리를 회상하며 소규모로 운영되는 지역 경제는 일반 시민들의 생활 부담을 완화하는 동시에 지역 사회 네트워크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커뮤니티 네트워크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커뮤니티 네트워크는 완전한 유토피아도 아니고 마찰과 갈등도 일어날 수 있지만 이런 오랜 갈등을 통해 맺어진 관계는 민주적 협의를 위한 훈련장이다. 그러나 URA에서 자행한 도시 재개발은 지역 사회를 뿌리째 뽑으며 지역 사회 민주주의의 토양을 영구적으로 손상시킨다.

2019년 홍콩 민주화운동 당시 홍콩의 정부수반인 ‘행정장관’이었던 캐리 람(林鄭月娥, Carrie Lam)은 이 당시 개발부 장관이었다. 캐리 람은 단식 농성 중이던 메이 씨를 방문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척, 덤벨 플랜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사실은 주민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재개발을 강행했다. 이후 캐리 람이 행정장관이었던 지난 2017년부터 2022년을 거치면서 리퉁 거리는 리퉁 애비뉴(Lee Tung Avenue, 囍匯商場)로 이름이 바뀌어 공동체나 이웃 간의 교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값비싼 럭셔리 쇼핑몰들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리퉁거리 재개발 후 명품 거리가 들어섰고, 거리 이름은 '리퉁 애비뉴'로 바뀌었다.
리퉁거리 재개발 후 명품 거리가 들어섰고, 거리 이름은 '리퉁 애비뉴'로 바뀌었다.

오랫동안 홍콩의 주류 담론에서 민주주의는 입법회(홍콩의 국회)와 행정장관의 완전한 직접선거를 의미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2007년과 2008년의 보통 선거를 위한 투쟁’과 거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리퉁 거리 주민들의 저항은 민주주의가 그 이상임을 보여줬다. 비록 H15 우려 그룹에서 계획한 덤벨 플랜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계획 과정을 통해 모든 시민이 정부의 정책 수립 과정과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참여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의미가 확장될 수 있었다. 이 최초의 민간 주도 도시 계획은 홍콩 시민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생활 공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동참할 것을 처음으로 요청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지난 2006년, 각각 1888년과 1925년부터 운행을 시작해 오랜 시간 동안 홍콩 섬과 구룡반도 침사추이를 연결하는 몇 안 되는 이동 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온 스타페리(天星小輪, Star Ferry)의 구 선착장과 황후페리(皇后碼頭, Queen’s Pier) 부두를 재개발을 이유로 홍콩 정부가 철거를 강행하려 하자 이에 맞서 싸운 투쟁에서 홍콩 사람들은 도시 계획의 민주화를 한 차례 요구한 적이 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진 완차이 리퉁 거리 주민들의 투쟁은 같은 맥락에서 강제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살던 곳에서 계속 살 권리,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사는 공간을 민주적으로 참여하여 계획할 권리를 주장했다. 비록 투쟁은 실패했지만 투쟁이 만들어낸 자산은 이후 다른 재개발 현장에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강제 퇴거에 함께 저항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단체로 이어졌다. 실제로도 리퉁 스트리트 투쟁 당시 거리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다 일방적인 재개발에 저항하며, 투쟁 당시 설립되어 여전히 계속 활동하고 있는 단체와 함께 단식 투쟁에 참여했던 메이 씨는 최근의 재개발 사례에도 연대하며 함께 저항하는 중이다.

위의 영상은 연대와 실천을 기반하여 다큐멘터리로 투쟁 현장을 기록하는 홍콩의 예술창작집단 ‘v-artist’ 리퉁 거리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해당 채널에 들어가면 더 많은 리퉁 거리 투쟁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다. 리퉁 거리 관련 영상 재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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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袁源隆, 「貢獻對後人多過對自己」 利東街街坊爭取原區安置失敗 卻播下珍貴種子, 01.03.2021

글 : 이경희 (뉴스레터 동동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