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플랫폼C 월례포럼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의 실체와 의사집단 반발의 원인‘과 ’병원 자본 문제와 병원 개혁에 있어 노동자들의 상황'은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사회운동이 공공의료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심도깊은 토론이 있었던 포럼을 돌아본다.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이후 전공의들이 집단 진료거부로 생긴 의료 공백은 오롯이 환자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의대 증원을 놓고 정부와 의사집단 간의 갈등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가 100일이 훌쩍 넘은 이 시점에도 양측 중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는 얘기만 평행선을 달리며 계속되고 있다.
지난 6월 12일, 플랫폼C는 월례포럼 "의사도 정부도 틀렸다: 의사 증원과 의료 상업화"를 열었다. 포럼에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정부와 의사 간 강대강 대치 속에서 이들과는 다른 해결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들로 가득 찼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의료? 실상은 다르다
먼저 발제에 나선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은 의사 당사자로서 의사집단이 내세우는 논리의 허점을 설명했다.
의사집단은 “1) 한국은 이미 1인당 병상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로 세계 최고 수준이니 의대 증원은 필요 없는 조치다. 2) 진료 횟수만 봐도 한국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의대 증원을 반대한다. 하지만 의사집단은 의사의 절대적인 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한국의 1인당 의사 수는 한의사까지 포함해도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그마저도 수도권에 몰려 있어 지역적으로 극심하게 편중돼 있다. 또한 영리적인 진료 영역으로 의사들이 몰려 필수의료 영역 의 의사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정부의 의대증원을 마냥 환영하기도 어렵다. 증가되는 의대 입학 정원 1,497명 또한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아무런 기준조차 없이 내년 의대정원은 총 4,610명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지역의료와 필수의료가 붕괴된 현실에서 시장에 맡겨진 구조적 문제는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는 정부와 관리·통제 받지 않는 사적 의료공급 자들에 의해 더 큰 문제로 이어 질 수 도 있다. 이미 자본에 의해 시장화 된 의료는 돈벌이 중심의 의료구조를 만든 정부와 의사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이다.
한국은 의사 수가 부족하지만 진료 횟수는 많은 기이한 국가이다. 총 의료비 중에 공적으로 나라가 부담하는 비율을 보장성 비율이라고 한다. 보장성 비율의 OECD 평균은 74%인 반면, 한국은 61%에 불과하다. 입원 진료에 한하면 OECD 국가들은 8~90%지만 한국은 67%로 그 격차가 늘어난다. 이는 의사집단이 강조하는 진료 횟수 중 실제 건강에 필요한 진료의 비중이 적지만 그에 반해 의료비 지출은 높다는 얘기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병상 수”라고 하지만, 한국의 공공병원이 보유한 병상은 전체 병상의 10%도 채 되지 않는다. OECD 평균이 72%니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분단 이후 공공 의료를 택한 북한과 달리 한국은 의사들의 주도 아래 시장 의료를 택했다. 이후 건강보험이 도입되면서 민간 자본이 영리 성을 목적으로 점차 민간병원을 우후죽순 세운 결과 지금과 같은 상황이 펼쳐지게 됐다. 이처럼 공공의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 노무현 정부는 4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 전체 의료기관의 30%를 공공의료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동시에 규제를 완화해 민간병원의 영리화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자의 약속은 사라지고 후자만 이루어졌다. 노무현 정부 이후에도 정부는 공공의료 대신 민간의료의 영리화를 위한 행보만 보였다. 이 과정에서 공공병원은 물론이고 중소형병원도 대형병원에 밀려 사라지면서 의료공백은 점차 심화되고 있다.
의료공백에 처한 지역에서 공공병원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30대 환자를 위한 의료 행위 가치는 4억 원, 80대 환자는 5백만 원' 이라는 등의 설득력 없는 “의료의 경제적 가치” 기준의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 조사에 의해 번번이 무산됐다. 정부 또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면제하지 않은 채 의료공백을 방치했다. 결국 이러한 민간 의료 체제에서는 병원으로 상징되는 의료자본의 영리화로 인해 노동자의 과로, 환자 안전의 위협, 의료시설의 수도권 쏠림 현상, 공공의료의 주변화와 열악화 등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의료자본 지키기에만 혈안이 된 정부
이 같은 현실에서 윤석열 정부는 ‘의료개혁’에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어떤 개혁을 할 것인지에 대한 얘기는 사라지고 의대 증원을 둘러싼 소모적 갈등만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파업에 나선 전공의들이 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 4~5년 수련 과정을 거치는 의사를 전공의라고 부른다.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전공의들은 대형병원일수록 그 의존율이 높아 거의 절반에 달한다. 건강보험평가원 자료를 보면 서울대병원, 연세대 세브란스 등 국내 대학병원 전공의 비율은 40%에 달한다. 반면 미국 메이요클리닉, 도쿄대 병원 등의 전공의 비율은 10%에 불과하다.전공의들이 병원 자본의 노동 착취를 견디는 까닭은 이후 전문의가 된 뒤 시장에서 누리는 자율성, 즉 경제적 우위 때문이다. 그런데 의대 증원은 그러한 경제적 우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인 만큼 전공의들은 민감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불만이 겹치면서 전공의들이 파업을 선택한 것이다.
한편 대형병원의 업무를 과도하게 떠맡은 전공의가 파업에 나서자 윤석열 정부는 수조 원의 의료 수익을 내는 대형병원을 위해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하고 공공의료를 맡아야 할 의사까지 착출하면서 의료자본 지키기에 혈안이다. 정부와 의사집단 둘 다 매몰되어 있는 시장 위주의 의료 체계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진정한 의료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서영 국장이 전한 핵심 메시지이다.
이어서 발제를 맡은 현정희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정책위원은 의료 붕괴의 ‘현상’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에 대해서는 모두가 함구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현장 간호사이기도 한 현정희 정책위원은 현재 정부가 전공의 파업으로 병원이 마비되자 간호사들에게 의사 업무를 미국에 있는 직종인 'PA'와 같이 떠넘기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 의사 부족으로 인해 의사의 업무를 음성적으로 떠넘겨 받았던 간호사들은 수십 년 전부터 계속 존재해왔다. 정부는 이를 여태까지 불법이라고 처벌해왔으나 병원자본이 이들을 필요로 하자 처벌은커녕 오히려 강권하고 있다. 값싼 인력에 상대적으로 임금을 더 줘야 하는 업무를 전가하며 병원 자본의 이익을 위해 정부가 앞장서고 있는 행태다.
보험업계는 국민의 건강보험데이터를 노골적으로 '미래 먹거리'라고 칭하며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하려 시도하고 있다. 현정희 정책위원은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삶과 직결된 건강 영역마저 온전히 자본에 통째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를 표했다.
더 큰 공공성을 얘기하는 운동을 만들자
두 사람의 발제 이후 참가자들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한 참가자는 "'지금과 같은 의료의 시장화 흐름 속에서 운동이 어떻게 함께 모여서 투쟁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는 '의사도 틀렸고 정부도 틀렸다'라는 포럼 제목을 언급하며 "정부가 틀렸다는 것이 충분히 사람들에게 안 알려졌을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대단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론은 거의 없는 듯하다"며 "그럼에도 왜 사회운동이 유의미한 개입 지점을 만들지 못했을까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며 "공공병원의 부족 만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라며 "공공의료 확충과 함께 민간 병원이라도 병원이면 공공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또 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정치적 힘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도 동시에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의료 영리화를 주도하는 게 의사집단이 아니고 의사집단의 의지를 꺾는다고 해도 공공의료가 강화되는 것은 아닌 만큼 병원자본과 의사집단을 구분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고 짚었다. 이어 "병원자본과 의사집단을 넘어서 건강할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 대중이 직접 나서는 대중운동으로 가기 위한 조직화 또한 우리 운동이 아직 충분하게 나서고 있지 못한 것 같다"며 "이러한 부분들을 운동이 함께 고민해야지 좀 더 다르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견을 나누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질문에 이서영 국장은 "말씀대로 자본과 의사집단은 다르다. 전공의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선 대형병원 개혁이 있어야하고 그 과정에는 지방에도 충분히 좋은 병원들이 제기능을 해야 한다"며 "그런 차원에서 공공병원을 늘리라는 것은 일종의 슬로건이다. 더 나아가서 공공성 자체에 대한, 요컨대 공공병원의 운영에 노동자와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등과 같이 더 큰 차원에서 공공성을 담보하기 위한 운동을 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정희 위원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사안이지만 '이대로 살 수 없다',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라 는 화두를 붙잡고 그런 생각을 지닌 이들과 함께 연결하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한다"고 했다.
이어 현 위원장은 "그러기 위해선 운동의 요구를 뾰족하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라고 생각한다. 요구 없이 투쟁 없고 투쟁 없이 쟁취 없다"면서 대중운동에 모든 요구를 다 담기는 어려운 현실에서 현 상황에 가장 중요한 슬로건으로 대중운동을 확대시키면서 관련된 주요한 주장들을 공유할 필요성에 대해 지적했다. 공공병원만들기 운동은 그런 점에서 “의료는 상품이 아니다”라는 근본적 주장을 확대하기에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의료는 상품이 아니다
보수 여야가 21대 국회에서 실손보험 청구대행을 합법화 시켜주었고, 2024년 2월에는 금융위원회가 민간보험사 담합기관인 ‘보험개발원’을 지정해주고, 1차 의료인 ‘건강관리서비스’ 민영화, 디지털헬스케어법, 건강정보 빅데이터 민간개방 등이 임박해있다. 윤석열 정부의 가짜 의료개혁과 보수여야의 의료시장화 정책에 속아서는 안 된다. 지역의료와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좋은 공공병원을 시민의 힘으로 만들고 의료민영화·시장화 정책을 막아내야 한다. 현위원은 또한 과거 전공의들과 함께 연대해 전공의 노조를 창설한 것을 언급하며 "지금 상황에서도 저는 전공의 노동자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전공의들도 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얘기했던 과 거 그 전공의 동지들과 같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요구를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저는 체제 전환과 또 우리가 연결해 가는 힘이 더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이후 발제자들과 참가자들은 의료 개혁과 관련한 많은 논의들과 의견을 서로 나누었다. 공공성을 비롯해 수많은 문제들이 얽힌 상황에서 '의대 증원'이라는 정부의 일방적 선언이 블랙홀이 되어 개혁 의제들을 삼키고 있다는 점을 공유했다. 최근 병원 자본은 '경영 상태 악화'를 이유로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하고,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 무급휴가를 강요하고 있다. 심지어 임금 반납 압박에 이어 임금 체불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는 공공의료를 후퇴시키는 또 다른 계기가 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시작은 ‘의사 증원’ 문제였다. 의사수는 당연히 증원되어야 하지만, 정부의 증원 정책 시행 방식은 ‘묻지마’식 또는 ‘개문발차’식 정책이라는 혹평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운동과 평범한 시민들은 공공의료를 지키고 또 확장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진지하게 논의하고, 보건의료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해야 한다.
글 : 박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