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그리고 좌파
2024년 7월 22일
'플랫폼C 페미니즘 공부모임'에서는 지난 6월 20일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를 읽고 정기 세미나를 열었다. 이 책을 추천했고, 당일 발제자 중 한 명이었던 필자의 후기를 싣는다. 장애도 질병도 없는 상태만을 '좋은 미래'라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억압을 이해하고, 모두의 해방을 도모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가 함께 고민하자.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는 장애학과 여성학, 퀴어 이론을 함께 연구하는 미국의 연구자 앨리슨 케이퍼의 책이다.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연합 정치’를 제안하는데, 그러기 위해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인 세상에 장애가 포함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장애운동/장애학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비판하며 ‘불구 이론’이라는 명명하에 ‘정치적/관계적 모델’을 제시한다. 사회구조적 변화로도 해결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또 정치의 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짚는다. 예컨대, 유니버설 디자인으로는 몸의 피로나 만성 통증을 해결할 수 없으며, 제도적 장애의 틀을 넘어선 폭넓은 연대가 필요하다. 활동보조 서비스가 24시간 지원된다고 한들 자신을 통합적인 인격체로 이해해 줄 친구/동료가 없으면 외로움과 고립은 곪아갈 뿐이다. 훌륭한 보조 공학기기나 치료제가 개발되어도 값이 비싸다면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부유한 장애인일 뿐이다.
'좋은 미래의 요건'
또한 정치적 의제가 되지 못한, 아무 논쟁 없이 상정된 ‘좋은 미래의 요건’에 질문을 던진다. 장애는 모두 치유되거나, 보조 공학으로 보완되거나 심지어 장애인을 아예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등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차지하는 수가 매우 적은 것이 좋은 미래의 여건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어떤 장애도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생각은 모두를 억압하는 정치적인 사상이다. 이러한 미래관이 현재 살아가는 장애인에게 미치는 실질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은 은폐된다.
‘좋은 미래’에 포함되지 않는, 장수하거나 재생산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불구’와 ‘퀴어’는 ‘비슷한 자리에 놓여 있다’ 사실 ‘비슷한 자리에 놓여 있다’라는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꽤 조심스럽다. 이번 세미나를 하면서 나는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에 ‘좌파’가 이어져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제안했을 때 다른 활동가로부터 “저자가 좌파인지, 계급적 관점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퀴어-불구의 정의로운 해방 역시 계급적·국제적 관점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이 책에서 (아주 전면화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고 느꼈다.
1991년 동구권 붕괴, 연이은 금융 위기와 사회적 연대의 와해 속에서 좌파와 공산주의 사상이야말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낡은 존재’, ‘재생산(교육)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공공연히 말하기 어려운 정체성’, ‘대중/갓반인 사이에서 생활하려면 숨겨야 하는 것’이며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따른 구금/보호관찰 사유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꾸준히 좌파라는 이념 지향과 계급성을 떠올리게 했다.
좌파
하지만 이 책을 읽은 소감을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 좌파(new!)’라고 크게 외쳐도 될까? ‘나는 (페미니스트/퀴어/불구)다’ 셋 중 어느 하나도 대놓고 명찰로 달기가 무안한 ‘당사자성 탈락’ 감각, ‘계급적 관점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라는 뭉뚝한 주장이 나머지 운동 의제들을 짜부라뜨린 역사, ‘나는 좌파다’라는 대화 역시 편안하게 들어보거나 해 본 경험의 부족 등으로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위축된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한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해 보기로 한다. 세미나 때 충분히 나누지는 못했으나 발제에서 내가 던졌던 질문은 “거북목과 새우등을 불구의 관점으로 사유한다면”이었다. 나는 어릴 적 크게 넘어진 걸 계기로 일자목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 내 꾸준한 관심사는 교정 스트레칭이다. 장시간 컴퓨터나 스마트폰, 서류를 보고 운동을 게을리하다 보니 점점 악화되고 있다. 한편 요즘 지하철을 타면 점점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목 경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어느 날 친구가 강남에서 헉 소리 나는 미인을 목격했다며 ‘요즘 아름다운 외모의 기준은 이목구비가 잘난 게 아니라 자세가 바르고 균형잡힌 것’이라는 걸 체감했다 말했다. 남들과 구별되는 바르고 균형 잡힌 목과 어깨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이 투여될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름다운 몸의 부피의 기준이 달라졌던 것처럼, 아름다운 체형이란 얼마나 계급적인가를 생각했다. 그러자 함께 점점 턱이 전진하고 있는 나의 친구들이 조금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우리는 교정 운동과 동시에 노동 시간 단축 및 문화/예술/스포츠 사회적 보장, 평생교육 주장 운동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현빈 활동가가 쓴 『망명과 자긍심』 후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몸을 ‘집’으로 비유하지만, 나는 ‘몸’을 지금까지 굴레로서 생각해 왔다. 굴렁쇠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내가 달고 있는 ‘여성’의 상징인 가슴은 굴레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부치들은 다 말린 어깨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모든 부치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일단 나는 말린 어깨다. 가슴을 숨기려 어깨를 최대한 말고 가슴을 안으로 넣는다. 등을 굽히면 남자아이, 등을 펴면 여자다. 등이 굽으면서 거북목도 얻게 되었다. 왜소한 몸집에 굽은 등, 소심한 성격은 괴롭히기 좋은 놈의 표본이다. 어릴 적 또래 남자 ‘일진’ 중학생들에게 장애인이란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장애인이라는 말 속엔 비인간화와 무성화가 포함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시대에 퀴어한 맥락이 없는 거북목 이야기까지 하는 게 자칫 책의 논지를 희화화하는 것처럼 읽힐까 우려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장애로 여겨지지 않는, 개인적인 생활 습관의 잘못이거나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치유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신체의 변형 또는 손상을 퀴어적·계급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불구의 연대의 시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별과 동시에 발생하는 수치심/자긍심을 그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감각하는 것이다.
너도 나도 장애 당사자라고 손을 들고 연단에서 발언하자는 말은 아니다. 정형화/관념화된 장애 가진 몸을 탐구하기 전에 나의 몸의 역사를 돌아보자는 것이고, 괜찮았던 과거나 노력해서 나아질 미래만을 지향하는 것에서 벗어나 나의 ‘현재’에 살자는 것이다. 거북목과 새우등에 자긍심을 가지고 계속 그렇게 살자는 말도 아니다. 우리의 손상과 위기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동시에, 개인적이고 수치스러운 영역으로 남겨 두지 않고 햇빛에 널어 말린 후 정치적 의제로 다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관계를 만드는 운동을 더 구체적으로 늘 생각하고 싶다.
팔레스타인
마지막으로 세미나에서 중요하게 이야기 나왔고 최근 발표된 팔레스타인 지지 퀴어 선언의 맥락에서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퀴어이론가 재스비어 푸아가 말한 것처럼 좌파인 우리가 가까이 가야 할 ‘퀴어’는 제1세계의 세련되고 매력적인 LGBT보다는, ‘죽어도 싼 존재’로 여겨지는 팔레스타인 및 아랍의 무슬림 청소년/성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들에 가까울 것이다.
이는 퀴어의 범주를 성적지향·성별정체성으로 한정하지 않을 때 더 정의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에서는 퀴어가 ‘섹스하는 방식보다 살아가는 방식에 더 가까운 것’(주디스 핼버스탬)이라는 정의를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느끼하고 오만한’ 앨라이의 시기를 거쳐 ‘나도 성별 이분법에 부적응하고 저항하는 퀴어다’라고 정체화하기까지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를 최근까지 겪어내고 있다.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전에 없던 해방감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감히 권하고 싶다. 사람들이 ‘퀴어와 연대한다’라고 했을 때 그것이 ‘나의 퀴어성을 탐색하기’, ‘나도 더 퀴어해지기’였으면 좋겠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 9개월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6월에 열린 서울퀴어퍼레이드에는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지원한 국가(미국‧영국‧독일) 대사관들이 공식 파트너쉽 단체로 참여해 부스를 열었다. 플랫폼C는 이 세 나라의 대사관이 운영하는 부스 앞에서 ‘핑크 워싱’ 규탄 캠페인을 건설했다. 나도 이날 반려견 보가와 함께 전단지를 돌렸다. 보가를 보러 온 사람들이 엉겁결에 전단지를 받아갔다. 어떤 사람에게는 ‘퀴어축제’에 참여하고 지인을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일상과 다른 큰 해방이고 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니,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 환대하는 마음을 보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 용기가 제1세계에 사는 나의 것을 찾는 데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책을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었던 이유도 그런 마음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나의 권리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전혀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해방을 함께 도모하기. 같은 정체성으로 묶여 있는 우리 가운데서도 ‘더 소외되는 사람’은 누구 인지 무엇 때문에 소외받는지, 자칫 운동 방식이 그 사람의 언어를 힘없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기. 성별을 감각하고 재현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생애를 구성하는 방식, 자본/국가와 관계 맺는 방식, 미래를 지향하는 방식을 함께 일그러뜨려 가자. 누구보다 좌파에게 자랑스러운 길이 아닌가.
나의 권리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전혀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해방을 함께 도모하기. 같은 정체성으로 묶여 있는 우리 가운데서도 ‘더 소외되는 사람’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소외받는지, 자칫 운동 방식이 그 사람의 언어를 힘없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기. 성별을 감각하고 재현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생애를 구성하는 방식, 자본/국가와 관계 맺는 방식, 미래를 지향하는 방식을 함께 일그러뜨려 가자. 누구보다 좌파에게 자랑스러운 길이 아닌가.
글 : 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