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 … 관념론적이고 공허한 허수아비 때리기

서평 |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 … 관념론적이고 공허한 허수아비 때리기

수전 니먼의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에 대한 비판적 서평

2024년 7월 25일

[읽을거리]사회운동서평, , 좌파, 사회운동, 철학

수전 니먼(Susan Neiman)의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Left Is Not Woke)』는 ‘워크(woke)’라는 불분명하고 정의조차 모호한 호명을 화두로 삼은 철학적 논설이다. 한데 저자의 주된 관심은 ‘좌파’가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논의하거나 정세적 논쟁을 하는 것에 있지 않다. 반대로 도덕철학 논의를 배경 삼아 ‘워크’라고 명명된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 저자의 주된 관심사다.

문제는 ‘워크’라는 명명이 매우 불분명하고, 시류에 따라 그것이 지칭하는 바도 달라져왔다는 점이다. 1920년대 “stay wake!”라는 구호 혹은 노랫말과 함께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등장했던 구호 ‘woke’가 2014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을 경과한 후, 2016년을 전후에 '모두의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 혹은 '백인의 생명은 소중하다(White Lives Matter)'와 같은 우파적 대응이나 ‘정체성 정치’ 비판을 맞닥뜨리게 됐다. 이것이 다시 미국의 우파들에 의해 진보·좌파에 대한 광범한 모욕과 조롱의 의미로 전유되면서, 서구 사회에서 이른바 ‘wokeism’을 둘러싼 논쟁이 산으로 갔다.

저자 수잔 니먼은 이를 ‘정체성 정치 비판’의 맥락으로 연결한다. 그러면서 도덕철학 논의를 바탕으로 ‘워크’라는 조롱적 언사로 명명되는 사회운동 내의 어떤 경향을 비판한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서구 우파들이 ‘워크’를 고의적으로 전유의 전략을 펼치는 것에 대해 별로 궤념치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저술의 제목을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라고 언명한 것에서부터 그런 인식을 감지할 수 있다.

BLM운동의 어떤 경향이 매우 강력한 수준의 ‘정체성 정치’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돌아볼 수 있고, 이를 되짚어보는 것은 사회운동을 도덕주의적 함정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논의 방식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를 비판적으로 여기는 모든 좌파들이 저자처럼 도덕철학의 문제의식에 기초해 이를 다룰 이유는 없다. 모든 이들에게는 다양한 정체성들이 있고,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억압기제로 작동한다. 한데 우리가 그 억압된 정체성을 필사적으로 긍정하려는 실천은 어떤 식으로든 물화의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 낸시 프레이저가 정체성 정치를 바탕으로 한 인정투쟁과 무시의 양산 대신, 지위 모델을 제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회운동은 결코 하나로 묶이기 어려운 어떤 경향을 뭉뜽그려 비난하는 ‘woke냐 아니냐’ 따위의 공허한 허수아비 때리기에 시간을 투여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전 니먼이 규정하고 싶어하는 ‘woke’의 모호하고 불분명한 실체에 대해 정의내릴 수도 없고, 이게 대체 뭘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논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아시아에서 “좌파는 woke가 아니다”라는 수사를 활용해 현실의 쟁점들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별로 효용적이도, 와닿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는 진지하고 건강한 논의를 와해시키고, 현실의 논의를 관념론적이고 주지주의적인 차원에 정박시킬 위험, 우경화된 프레이밍에 포획되는 것에 기여하는 효과만 낳을 뿐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지칭하면서도 ‘좌파’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정의하지 않는다. '부족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가 중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십분 동의할만 하지만, 정작 저자 자신은 부족주의 비판이 갖춰야 할 정치성과 정세성을 누락한다. 가령 그는 비판을 하면서 사례 인용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이 사람이 대체 뭘 대상으로, 어떤 사건을 근거로 이런 악감정이 생겼고 ‘woke’라는 레토릭을 무기화하기로 작정했는지 알기가 어렵다.

저자가 관심을 두고 집중하는 화두는 ‘18세기 계몽주의’에 있다. 우선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주창한 이성, 자유, 평등의 가치와 당시 유럽의 식민주의, 노예제, 인종차별 담론 사이에 모순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유럽중심주의적 한계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반박한다. 고래의 계몽주의를 옹호하고, 자신이 임의로 규정한 미셸 푸코나 카를 슈미트를 거부하는 것이 그의 정치적 목적일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논의에 유리한 논거만 늘어놓고, 계몽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낸 논거들은 철저하게 외면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를 하나의 기준으로 비난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푸코의 논의를 단순화해 보수주의자로 단정해버린다. 심지어 오늘날의 좌파를 파시즘과 연결시키는데, 이는 지나친 비약처럼만 보인다. 행동하는 좌파가 구태여 푸코주의자씩이나 될 필요는 없겠지만, 자의적이고 교조적으로 매도하는 것 역시 현명한 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좌파에게 필요한 덕목은 실천에 있어 단호하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입장을 지니면서도 개방적이고 복합적으로 사유하는 것에 있다. 현실과 연결되어 사회운동에 무기가 될 수 있는 비판이론이 나쁜 방식으로 유통되는 이유는, 대체로 이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용시키는 잘못된 방식에 있다.

저자가 ‘woke’라는 용법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사회운동 혹은 사회의 어떤 현상이나 집단을 지칭하는지 제대로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크게 아쉽다. 가장 구체적으로 적시되는 대상은 BLM운동과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인데, 그 내부에도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한 두 운동을 두루뭉술하게 지칭하는 것은 사회운동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좌파’를 자칭하려 한다면, 그 운동에 대한 지지와 실천을 바탕으로 내부의 잘못된 경향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비판하는 게 생산적일 것이다.

이 책이 번역 출간된 시점은 이 책이 지닌 여러가지 모호성을 더 나쁜 지점으로 이끈다. 현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고 있다. 2024년 7월 25일 기준 가자지구에서는 이미 약 4만 명이 학살됐고, 지금도 매일 수백 명이 죽고 있다. 억압적 국가장치에 의해 탄압받는 미국 사회의 흑인들 혹은 흑인 공동체 역시 그들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사회모순이나 총기 사용, 무자비한 민영 교도스 시스템이 타파되는 대신 국가폭력으로부터 현실의 억압을 감당하고 있다. 현실의 운동을 보다 건강하게 교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옳지만, 이런 엄존하는 현실에 맞선 운동 내의 쟁점을 '워키즘'으로 싸잡아 묘사하는 시도는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사회운동 혹은 좌파는 기후위기나 전쟁, 빈곤, 인종주의, 가부장제, 군사화, 불평등, 노동 착취 등 다양한 모순들에 맞서 싸워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모순들은 너무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고, 좌파 정치의 구심은 거의 와해되어 있다. 이로 인해 종종 좌파 정치 구성이 실패한 특정 사회에서는 사회운동이 정세적이고 효과적으로 투쟁하기가 매우 어렵다. 불행히도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복잡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늘날의 좌파들을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 묘사하는데에만 집중한다. 이로 인해 사회운동 내의 보편주의적 지향을 오히려 감춰버린다. 저자에게는 이런 지향이 부족주의적 한계를 슬기롭게 넘어 단결을 구사한 사례들을 볼 안목과 시야가 없다.

기존 체제의 모순에 불만을 느껴 대항주체로 재조직·사회화된 사람들이나 집단이 이 복잡한 난맥상을 뚫고 더 나은 대항/대안운동의 주체로 조직되는 과정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수전 니먼 식의 단순화된 비난과 조롱이 아니라, 슬기롭고 우애로운 안내와 비판이다. 이들은 최소한 기존의 지배체제나 지배사상에 문제의식을 느끼며, 새로운 사상을 찾고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다시 말해, 근대를 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기성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기성 권력 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했다면 오늘날 이런 정치의 가능성을 가장 폭넓게 갖고 있는 것은 정체성나 지위든, 인종이나 젠더든, 전쟁위기나 기후위기든, 불평등이나 착취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두더지들에게 있다.

한국 사회에는 겉으로는 ‘사회진보’를 말하면서 선거 시즌이 되면 현실 논리를 들이대며 사회운동의 요구를 “나중에”로만 치부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제도정치 몰입층'에 위치해 있다. 사회운동이 민주당식의 가짜 대안이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해 비판했을 때, 이들은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을 쏟아붓는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종종 정치적 부족주의를 현시하고, 일상적으로 투쟁하며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노동운동가들에게 “김어준이 저렇게 홀로 싸우고 있을 때 니들은 뭐 했냐”며 어처구니 없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경향의 한국적 진보 부족주의에 대해 우리는 별도로 연구하고 다루어야 할 과제가 있다. 이들은 종종 민주당에게 급진적 언어로 비판하는 사회운동에 대해 “중요한 게 뭔지 모른다”고 폄훼하는데, 이는 수전 니먼처럼 구체성이나 복잡성을 누락하고 “종족주의 대신 보편주의가 중요하지!”라는 수사 전략을 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위악으로 가득한 수사 전략을 펴는 몇몇 유튜버들, 정치화되고 능력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뉴-보수 정치 그룹 등은 페미니즘이나 사회운동적 목소리에 대해 모든 사회적 맥락을 소거시키고 빈번하게 조롱을 쏟아붓는다. 이런 위악보다는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아직)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최소한 냉소하지 않고 어떤 억압이나 모순을 기꺼이 관찰하고 응시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

트럼피즘이나 이준석식 ‘이대남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열망을 ‘위선자들’이라고 뭉뜽그리고, 조롱을 쏟아붓는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대량학살 상황에 직면해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연대하기 위해 캠퍼스 점거 시위를 이어가는 대학생들에게 조롱을 쏟아붓는 트럼피즘 혹은 우익 청년들의 한 증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애석하게도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의 철학적 논의는 너무 투박하고, 실천과는 더욱 멀리 떨어져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현실에서 정체성 정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숙고하는 가장 좋은 실천은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라고 떠들거나, "사회운동이 당파적 기구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공간으로 우뚝 서려면,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식의 답정너식 수사를 반복하는 것에 있지 않다.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관념론적이고 당위적인 주장들 역시 그것이 발화되는 순간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경향들에 대한 '단절'과 '불매'는 너무 손 쉬운 결론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는 운동 속에서, 운동과 함께, 그 운동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개입하고 실천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규명되어 왔듯 보편적 대의를 견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등과 민주주의를 위한 보편성을 견지하는 사회변혁운동의 정치를 현실의 실천 속에서 멈추지 않는 것 그 자체에 있을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을 과도하게 격상시켜 운동 안팎의 모든 비판들을 도매금으로 부정하려는 시도야말로 좌파의 행동양식을 비겁하게 만들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도전의 역사에서 '비판'은 언제나 사회운동 좌파의 무기였다. 이를 '정체성 정치'라고 명명된 함정에서 구원해 날카롭고 뜨겁게 벼리는 것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모순 속에서 그 모순들에 맞서 싸울 때에만 가능하다.

글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