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심판! 그러나…
우리를 번민에 휩싸이게 했던 22대 총선이 끝났다. 이번 총선 결과는 무능력하고 파렴치한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 여론으로 드러났다. 국민의힘 의석은 21대에 비해 5석이 늘었지만(108석), 2연속 총선 참패로 여소야대 상황을 정권 내내 지속하게 됐다. 민주당은 지역구 161석을 차지했고, 위성정당(더불어민주연합) 전략에 힘입어 총 175석을 차지했다. 조국혁신당의 경우 비례대표 명부에서 12석을 당선시키면서 제3당으로 등극했다. 정권 심판의 견해가 민주당 투표로 귀결된 것은 한국 제도정치 역사에서 꽤 익숙한 모습이다. 반면 조국혁신당이 24.25퍼센트(687만 표)나 득표한 것도 많은 이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별도로 하더라도, 이 성적표가 ‘정권 심판’ 성격이 강한 선거였기 때문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윤석열의 무능과 파렴치함을 떠올릴 때 당연한 결과다.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점을 확인한 대통령실은 선거용 포퓰리즘 정책으로서 의대 증원 카드를 밀어붙이며 전세를 뒤집으려 시도하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800조~900조 원에 달하는 사업 규모의 공수표를 남발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위해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 게 낫다.
선거 참패 후 윤석열은 반성의 기미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4월 16일 윤석열은 “더 낮은 자세와 유연한 태도로 보다 많이 소통하고, 저부터 민심을 경청하겠다”고 말했지만, 선거 패배 요인으로 지목된 사안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고집했다. 총선 보름 후 영수회담을 갖긴 했지만 이 자리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적 신호는 전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보수언론의 논자들조차 “윤석열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설상가상 5월 2일 야당들이 '해병대 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특검법'(채상병 특검법)을 강행 처리하자, 대통령실은 다시 ‘거부권’ 행사를 예고하고 나섰다.
한편 독자적인 진보정당운동의 생존을 바랐던 많은 이들이 노동당과 녹색정의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지만, 4월 10일 총선 당일 우리가 마주한 성적표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는 지난 10여 년 간 지속된 위기가 반영된 결과이지, 단기간 누적된 사건들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니 이제 중요한 것은 비관에 빠지지 않고 구조적이고 누적된 모순을 혁신함으로써 재조직화에 나서는 것에 있다.
진보정당운동의 한 시대가 마감한 상황에 대해 좌우 양편에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왼쪽에서는 사회운동과 멀어지거나 시장주의 노선에 타협하는 등의 논리로 비판한다. 이는 사실이지만 진보정당 성적표는 결국 사회운동 자신의 성적표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지역을 강화한다거나, “아래로, 더 아래로”는 항상 중요하지만 이를 절대적인 도덕률로 간주하는 것에도 함정은 있다. 한편, 평론가들이나 주류 언론들의 평가는 대체로 “정무 감각이 없었다”는 말로 수렴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평가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준이 불명확하고 빤한 비판이기도 하다. 특정 사안(특히 조국 사건이나 박원순에 대한 평가)을 둘러싼 논의에서 ‘너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정무 감각이 없다”고 비판하는 논리는 실제 그 조직의 한계를 되돌아보고 혁신을 도모하기보다는 ‘방구석 제갈량’의 동어반복에 그칠 뿐이다. 언론들은 훈수를 나열하기 전에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의 논의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고, 이준석이 페이스북에 무슨 말을 끄적였는지 보도하는 것에만 열중해온 자신들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모두가 “진보정당”을 말하지만, 이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있어서는 기준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민주당보다 조금 왼쪽에 있거나 원칙을 준수하는 수준의 정당이라면, 당리당략이나 단기적인 여론 같은 요소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 가령 여론조사 전문가를 자처하는 데이터 분석가들은 “페미니즘”이 득표 전략에 부정적이라면 페미니즘을 기각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민주노총이 주류 언론의 뭇매를 맞을 때에는 ”거리를 두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보면 진보정당의 진의는 사라지고, 득표 전술만 부유하게 된다. 이와 다르게 ‘사회운동적 진보정당운동노선’을 지향하는 이들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화라는 기반을 더 크게 확장하는 것이 곧 사회운동적 정당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사업의 중점으로 삼는다. 불행히도 정의당에게는 후자가 매우 부족했다.
촌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주지하다시피 이번 총선 정국은 개혁도 미래도 진보도 없는 ‘제3지대’와 ‘위성정당’ 합종연횡으로 시작됐다. 한참 전부터 정의당이 진보정당으로서의 성격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이들이 이탈해 우익 포퓰리스트들과 통합했고, 이를 ‘제3지대’라고 포장하며 단 꿈을 꾸었다. 이런 흐름을 주동해온 세번째권력(구 정의당 내 의견그룹, 현 개혁신당)은 총선이 끝나기 무섭게 “조직적 역량도, 여론 형성 능력도 판연히 부족했다”고 평가하는 입장을 제출했다. 세번째권력 멤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애초 “자유주의적 정치질서의 복원”이라는 프로젝트는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1992년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자유주의를 일컬어 “인류 최후의 이데올로기”라고 선언했고, 그로부터 불과 17년 후 그 질서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브렉시트(Brexit)’와 ‘트럼피즘(Trumpism)’, 극우민족주의의 흥기, 세계화가 야기한 빈부격차와 노동권의 후퇴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듯,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매개로 한 금융화는 자유주의 정치가 배태한 괴물이자, 자유주의 정치질서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자유주의의 이런 한계는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소극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소유’를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간주하고,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평등’이나 ‘사회적인 것’은 부차화하거나 제거한다. 이른바 ‘제3지대’의 지향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더 세련되게 심화시키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거 국면이 다가오면서 정국은 촌극으로 점철됐다. 민주당 위성정당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자 상상 이상의 일들이 펼쳐졌다. 더불어민주연합이라고 명명된 이 위성 텐트가 후보로 내세우기로 한 30명 중 민주당 몫은 20명, 진보당과 새진보연합은 각각 3명, 그리고 민주당의 이해관계에 조응해 위성정당을 추동한 연합정치시민회의가 4명의 후보를 추리기로 합의했다. 극우언론들은 일부 후보들에 대한 반공주의적인 비난 공세를 쏟아냈고, 더불어민주연합은 쉽사리 후보들을 내치며 색깔 공세에 호응했다. 이런 촌극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연합정치시민회의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비민주적이고 반동적인 위성정당 대응이 윤석열 퇴진의 도구가 될 수 있겠냐”고 반문했지만, 이미 선을 넘어선 이들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4년 전과 비교하면 스스로가 뱉은 말을 배반하는 것이었지만, 이들은 기성 거대 양당이 정치를 망가뜨린 그 궤적을 고스란히 따라갔다. ‘시민사회 대표’를 참칭한 이 노회한 인사들은 앞장 서서 정치를 붕괴시켰다. 이에 대한 입장 표명 없이 정치개혁을 운운하는 것은 대국민 사기극으로 귀결될 것이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정치방침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됐다. 적지 않은 활동가 및 대의원들은 두 차례 대의원대회에서 진보당을 민주노총 지지정당 리스트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제기하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지난해 9월 대의원대회 결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진보당 성향의 ‘민주노동자전국회의’ 활동가들은 위성정당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수정동의안을 제출했지만 대의원 과반의 동의를 얻는데 실패했다. 비판자들의 주장이 전국회의나 범좌파 경향에 모두 속하지 않는 대의원들을 적지 않게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애석하게도 선거 이후 양경수 위원장 및 집행부가 이런 비판을 수렴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노동운동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정파의 이해관계에 함몰된 이런 경향은 중장기적으로 자신의 운동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에도 기여할 수밖에 없다. 현장 노동자들의 정서까지 실용주의에 전도될 때 노동정치가 설 자리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자성하고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한국 정치의 뉴노멀과 사회운동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인 다수 정당이 됐다고 해서 다수 대중이 민주당을 흔쾌히 지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역구 선거의 접전지에서 민주당은 대부분 승리했고 지역구 전체의 64%에 이르는 164석을 차지했지만, 이들이 실제 얻은 표는 전체의 50.5%에 그친다. 소선거구제의 혜택을 고스란히 거머쥔 것이다. 즉, 이번 총선 결과는 명백히 정권 심판의 반영이었지만, 그렇다고 민주당 노선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확인됐다고 말할 순 없다.
혹자의 말처럼 “팬덤 정치는 한국 정치의 뉴노멀이 됐”다. 사회운동은 기성 체제와 권력집단으로부터 이탈하는 포퓰리즘 현상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고, 이는 고스란히 제도정치판의 하이에나들이 판을 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공백에서의 이니셔티브를 점령한 것은 폐쇄적인 진영 정치를 추구하는 그룹들이었다. 녹색당과 정의당은 ‘진영 정치’의 수렁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진적이고 대중적인 정치 활동으로 자신을 혁신하는 과업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반복적으로 언급해왔듯, 붕괴된 정치를 복원하는 일은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구호만으로도, 성벽 앞에 나선 중세 의 기사처럼 창끝을 벼린다고 해도 이뤄지지 않는다. 내부의 붕괴부터 살피고, 사유화된 모든 정치 과정을 공유화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정당들의 시급한 과제는 정치적 과정을 공유화하고, 젊은 세대 활동가를 육성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내부 역량을 통한 재생산 과정을 구조적으로 만들지 않고, 외부 유명 인사의 수혈만으로 뗌빵하는 정당은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22대 총선 구도에서 사회운동의 의회 의존도가 높아질 위험은 보다 높아졌다는 데 있다. 진보정당 의석수가 기존의 7석에서 0석(자주성을 견지한 진보정당노선) 또는 3석(민주당 위성정당을 택한 진보당)으로 감소한 조건에서 운동 전략과 보폭을 맞추며 의회 전술을 논의할 파트너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조건에서는 입법 과정이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모아 사회운동과 궤를 함께 할 수 있을 여지는 줄어든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운동은 의회에 의존하기보다는 조직화와 투쟁을 중심에 두고 입법 전술을 사고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운동을 재조직하고, 단단한 대오를 만드는 일에 주력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조직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진보정당 운동의 흥망성쇠는 그 당들을 지지했건 하지 않았건 사회운동 자신의 결과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결과를 대상화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것으로 뼈 아프게 인식해야 한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프로젝트의 한 시기가 왜 실패로 끝났는가에 대한 기존의 분석들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위기의 시대에 여전히 유의미한 좌파 정치의 역할을 돌아보며 부활을 위한 밑바닥을 다시 다져야 한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사회운동의 정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한 차례 선거의 결과는 영원하지 않으며, 이는 사회운동 좌파의 역량과 조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운동이 자신의 역량을 어떻게 구축하고 펼치느냐에 따라 정치적 구도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사회운동이 주체적으로 갖는 평가의 과정이 뒤따를 때, 억압과 착취, 불평등으로 얼룩진 이 체제를 끊임없이 ‘지양’하는 운동이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다.
글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