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 동아시아의 각 도시에서 울려퍼진 노동자들의 목소리

노동절 | 동아시아의 각 도시에서 울려퍼진 노동자들의 목소리

동아시아에서 노동절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아시아 노동자계급 운동의 운명을 반영하는, 길고 고단한 역사를 갖고 있다. 2024년 노동절에도 그 역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2024년 5월 31일

도쿄, 오키나와, 쿠알라룸푸르, 타이베이, 홍콩, 자카르타, 싱가포르, 노동절, 노동조합

지난 5월 1일은 제134주년 세계노동절이었다. 노동절(메이데이)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었던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모든 국가와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일 시행을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 시위를 조직하자”고 결의한 이래 1890년부터 매년 세계 곳곳에서 노동절 집회를 개최한 것이 올해로 134주년을 맞은 것이다. 또한 이날은 1886년 미국 시카고의 노동자들이 헤이마켓에 모여 일으킨 파업 투쟁이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첫 노동절 집회는 1923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주최로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공개 집회로 추정된다. 올해 한국의 14개 도시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노동권의 전방위적인 후퇴를 저지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동아시아에서 노동절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아시아 노동자계급 운동의 운명을 반영하는, 길고 고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식민주의와 내전, 반식민주의 혁명운동, 반혁명과 쿠데타, (국가)사회주의와 개발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탄생했고, 동원되거나 대항했어며, 혹은 중단됐다. 이 모든 시기에 메이데이는 노동-자본-국가 간, 노동운동과 정세의 다양한 흐름들 간, 미래 사회에 대한 대조적인 비전들 간 투쟁의 현장이었다. 올해도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노동절을 맞이하는 다양한 집회와 행사들이 열렸다. 이 글에서는 그 중 일부를 소개하고, 동아시아 노동자운동의 연대를 위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1924년 4월 18일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
1924년 4월 18일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

타이페이 | 칭더 칭더 공덕을 쌓아라

올해 초 대만에서 치러진 총선에서는 복수의 야당들에 소속된 후보들이 경합하면서 여당이었던 민진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라이칭더(賴清德) 신임 총통이 지난 5월 20일 취임했다. 새 정권 출범을 앞둔 대만에서 노동절 집회의 요구와 행동은 모두 새 정부와 새 의회(입법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타이베이에서의 노동절 집회는 다양한 노동조합 단체로 구성된 5.1행동연맹(五一行動聯盟)에 의해 조직됐다. 집회 장소는 다양한 대규모 시위의 주요 장소이기도 한 대통령궁 앞 카이다거란 대로(凱達格蘭大道)였으며, 행진 대오는 주로 산별노조, 전문직 및 기업들의 다양한 유형의 노조들과 사회운동단체들로 이뤄졌다. 행진이 시작되기 전, 노동자들은 라이칭더 신임 총통과 허페이산(何佩珊) 노동부 장관 예정자, 커젠밍(柯建銘) 민진당 상임위원장으로 분장한 인형들이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노동권 개악 3(勞工權益修惡三)’이라는 액션드라마를 선보였다. 또, “잘라 잘라 모조리 잘라”, “텅텅텅텅 연금”, “칭더 칭더(라이칭더 총통) 공덕을 쌓아라”, “노동자가 단결해 공덕을 쌓는다”라는 풍자 구호를 외쳤다.

민진당의 노동기본법 개악을 다룬 퍼포먼스
민진당의 노동기본법 개악을 다룬 퍼포먼스

이 구호들은 지난 8년간 집권 정부를 운영해온 민주진보당에 대한 노동조합들의 불만을 드러낸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민진당은 노동자들의 국정 공휴일 7일을 삭제하고, 노동기준법(대만의 노동법)을 개정해 교대 근무의 간격을 단축했으며, 초과근무 상한도 완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선거 전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는 차이잉원(蔡英文) 전 총통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다.

이로 인해 노동운동 단체들의 집단적 항의가 촉발됐다. 노동조합과 단체들이 가장 불만을 품고 있는 점은 그 시기 공휴일 삭제를 지지했던 허페이산이 노동부 장관으로 선출됐다는 점이다. 이는 라이칭더 새 정부가 취임 후에도 노동권을 개악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구체적 요구사항 부분에서, 노조들과 단체들은 올해로 입법 40주년을 맞은 노동기준법이 오랜 기간 드러낸 다양한 문제들을 지적했다. 노조 결성의 문턱이 너무 높은 점, 연금 보장이 미흡한 점 등이 특히 강조됐다. 초과근무 수당 역시 조정되지 않았으며, 산업재해에 대한 의료 보호 역시 크게 미흡하다. 따라서 올해 여러 노동조합들이 제시한 5대 요구사항 역시 노동법규 개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입법원의 민의대표들이 노동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노동기준법을 양심적으로 개정하기를 희망했다. 노동자들의 5대 요구는 임금 인상, 노동권 보장, 노사관계 개선, 퇴직자 권익의 보장, 노동재해에 대한 치료 보장 등이다.

행진이 끝난 후 입법원 정문 앞에서는 원내 3대 정당에 대한 노동계의 기대와 감시를 상징하는 두 개의 커다란 삼색 공을 굴리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두 개의 큰 공에는 “장난치지 말고 노동자를 지원하라!”, “노동기준법을 개정하고 노동권을 보호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들을 밀어붙이는 동안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아 큰 공은 느리게 전진했고, 어느 순간 집회 현장 밖으로 날아가 마지막에는 공기가 새어나갔다. 이는 입법원의 입법위원들을 신뢰할 수 없고, 계속해서 좋지 않은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노동자들의 권익에 부합하는 노동법 개정을 위해서는 정부와 의회에 선의를 기대하기 보다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의지해야 한다.

도쿄 | 노동자 목소리 없는 노동절 집회

5월 1일에는 도쿄 요요기 공원(代々木公園)에서 전일본노총연맹(全国労働組合総連合, 젠로렌) 주최로 집회가 열렸다. 도쿄 말고도 일본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약 1만2,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들이 열렸다. 각지의 행동을 위한 기본 선언은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고,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중립적인 일본을 공동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0만 명의 조합원을 둔 젠로렌은 1대 노총인 렌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노총이다. 젠로렌의 올해 요구안들은 최저임금 1500엔 즉시 실현, 임금 대폭 인상, 해고 금지, 사회보장 강화, 성평등, 평등한 대우 실현, 빈곤 해소, 빈부격차와 차별 실현 등이 포함해 ‘8시간으로 살 수 있는 사회’, ‘지진 후 복원’,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기억하는 사회’, ‘원전제로 발전을 이루는 사회’, ‘핵무기 폐지’, ‘반전평화 반대’, ‘헌법 9조 개정 반대’, ‘대규모 군비확장 및 오키나와 군사기지 반대’, ‘기시다 정권 퇴진’ 등 총 16개 항목을 아우르고 있다. 요구사항 중 거의 절반이 반전과 평화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젠로렌 산하에는 많은 중소 노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 외에도 업종별로 고유한 요구를 내놓고 있다. 예를 들어, 항공노조의 승무원지부는 항공기의 각 문에 한 명 이상의 승무원을 배치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승무원들에게 국가 보안요원 자격증을 제공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조합원들에 따르면 이러한 요구는 승무원 업계의 인력 부족에서 비롯된다. 올해 초 발생한 하네다공항 여객기 충돌 사고에서는 모든 승객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비행기 출구마다 승무원을 배치한 상태였다. 하지만 항공사가 모든 항공기에 이런 장비를 갖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노조는 인력을 더 충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심각한 고령화와 저출산 사회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는 인력 부족 문제가 산업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보육교사노조 역시 보육교사 확충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젠로렌 주최 집회에 다양한 스타일의 조형물들이 등장해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조명했다는 점이다.

며칠 전인 4월 27일, 일본에서 가장 많은 조합원수를 가진 대형 노총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日本労働組合総連合会; 약칭 ‘렌고 連合’)도 요요기공원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는 전국적 규모의 렌고 산하 대기업 노조들이 참여했으며, 집회 참여자는 거의 2만 명에 다다랐다. 하지만 일본의 좌파 일각에서는 은 렌고가 기업 이익을 더 중시하고 노동권에는 거의 무관심하다고 비판한다. 렌고는 이번 집회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현 일본 총리를 또 한 번 초대했으며, 자민당 외에도 야당인 입헌민주당(立宪民主党), 일본국민당(日本国民党) 대표도 무대에 올라 연설했다.

실제 렌고의 노동절 집회에서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총리와 양당 지도자들이 도착하자 현장에는 검정색 수트를 입은 경호원들이 대거 배치됐고, 행사장 입장을 위해서는 수하물 검사를 받아야 했다. 행사장에는 각 노동조합의 이름이 적힌 깃발만 있을 뿐, 노동조합이 내놓은 구호는 없었다. 발표 내용은 주로 춘투(임금협상을 위한 협상 과정) 성과와 팬데믹 이후 사회재건에 관한 내용을 결합한 것이었다.

한편 도쿄 청년유니온 소속의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과의 연대 차원에서 히잡을 쓰고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행진에 참여했다. 그들은 이스라엘군의 공급망과 일본 기업들의 공모에 대해 노조가 진지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도쿄 | 여성노동자의 날

이튿날인 4월 28일, 여러 단체들과 개인들이 ‘여성을 위한 노동절 전야(May Day-eve for Woman)' 행사를 공동 개최했다. 이 행사는 일본 사회에서 가사 노동을 하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사적 영역에서 여성노동은 종종 무급으로 취급되며, 눈에 띄지 않고 인정되지 않는다. 또, 노동조합의 요구안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과소대표된다. 집회 주최측이 행사명을 ‘노동절 전야제’로 정한 것은 일본 사회가 여전히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여성노동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에는 주로 노동조합에 소속된 여성노동자들과 시민사회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참가자 중 약 3분의1은 30세 미만이었고, 나머지 3분의2는 30세부터 80세까지 다양했다. 이번 행사에는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했지만, 행사를 조직하는 데 있어 구체적 구조는 없었고, 주최자와 참가자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었다. 이 기획은 행사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위한 조직과 틀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였고, 여러 그룹의 몫이 아니라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려 노력한다는 의의도 있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수동적인 서비스 수혜자로 여기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집회 참석자 중 한 명은 이 집회에서 가장 좋았던 것으로 보드게임 ‘The Game of Life’를 기반으로 한 패러디 게임을 꼽았다. 이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여자라서 시험에 떨어졌다” 등 일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나 차별에 관한 구호, “국가기관에 문의하라”, “노조를 조직해 협상을 진행하자" 등 싸우는 방식에 대한 구호 카드를 무작위로 뽑았다. 질문과 적대적인 방법의 조합은 무작위로 이뤄졌으며, 일치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억압과 차별을 다루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등 예기치 않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치바(千葉)는 이 행사의 발기인 중 하나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인정받지 못한 여성의 노동 기여와 관련해 이번 사건이 일본의 미래에 미칠 영향은 낙관적이라고 말했다. ‘여성을 위한 노동절 전야’란 행사 기획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었다. 팬데믹 기간 일본 사회(특히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는 팬데믹 상황이 여성에게 심각한 영향(가정폭력, 자살률 등)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성을 돕기 위한 지원 네트워크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극도로 가부장적인 일본 사회에서 다양한 집단이 여성을 지원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더라도, 여성이 받는 도움은 남성의 설교와 가부장적 행동을 동반하여 여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또, 성평등에 대한 노동조합의 인식이 부족해 많은 여성운동단체와 개인들은 여성 상담 서비스를 마련하기도 했다.

팬데믹 이전, 미투(Me Too) 운동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여성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자신의 힘과 주체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줬다. 이토 시오리(伊藤詩織) 사건 외에도 정치권과 연예계 등에서 미투 사건이 많이 발생했으며, 언론노조 역시 언론계 성희롱 문제에 초점을 맞춘 활동을 펼쳤다.

'여성 노동절 전야제'에 참석한 참가자들
'여성 노동절 전야제'에 참석한 참가자들

오키나와 | 임금 대폭 인상 요구

오키나와에서도 노동절 집회가 열려 “목소리를 높이고, 노동​​환경 개선을 실현하자!” 등 구호를 외쳤다. 노동절 당일 나하 시내에서 열린 집회에서 오키나와현 노동조합총연합(沖縄県労働組合総連合) 아나이 테루아키(穴井輝明) 의장은 “현내에서는 요즘의 물가 상승에 맞는 임금 인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우리는 8시간 일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사회, 평범하게[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임금의 보장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했다.

이날 나하시 요기공원(与儀公園)에서 열린 집회에는, 현내 11개 노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 약 130명이 참가했다. 집회 주최단체 오키나와현노련은 ‘물가 상승’ 문제에 대응한 임금 대폭 인상[현행 896엔의 최저임금을 1500엔으로 인상]과 경기회복을 위한 유효한 경제 대책, 장시간 노동 및 높은 노동강도의 해소를 위한 대책 등을 요구했다. 또, 국가에 소비세를 감세해 국민생활을 지원하는 것나 인보이스 제도[일본 특유의 소비세 제도]의 폐지 등을 요구하는 결의가 채택됐다. 참가자들은 일련의 요구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며 현민 광장까지 행진했다.

홍콩 |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메이데이

2020년부터 홍콩에서는 노동절 행진이 없다. 올해 메이데이를 맞아 모든 노동조합과 정당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고, 거리에서는 메이데이 분위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사회민주연선(社會民主連線)만이 노동절을 맞아 대정부 청원을 위해 정부청사 앞 시민광장에 나타났다. 사회민주연선은 생활임금, 실업수당, 표준근로시간, 보편적 퇴직금 보장, 진정한 보통선거 등 노동권 보호를 위한 6대 대책을 요구했다. 이 행동에 참가한 인원수는 4명에 불과했지만, 그 앞에서는 경찰 20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 사회민주연선은 1992년 9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홍콩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26.9% 증가한 데 그쳤지만,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을 뺀 홍콩 GDP(2023년 시장가격 기준)는 1.7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임금이 너무 낮기 때문에 정부가 법적으로 조정에 나서야 하지만, 홍콩의 법정 최저임금은 오랫동안 낮은 수준에 고정되어 해롭지 않고 효과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한 달에 26일을 일하더라도 그들의 임금은 최저 빈곤선보다 낮고, 현실에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편 『공노소보(工劳小报)』 편집진은 과거 홍콩의 노동조합에서 활동했던 ‘패션프루트’(가명)을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에서 패션프루트는 현재 홍콩 노동운동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원 부족’이라고 말했다. 2021년 직공맹(소위 ‘홍콩노총’)이 해산되면서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그 때문에 풀뿌리 노동조합들이 쟁의 상황에 직면하면 과거처럼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노동권이 얼마나 침해되고 있는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지만, 인력과 자원도 부족하다. 그 때문에 노동 문제에 대한 조사와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노동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기도 어려워졌다. 일례로 최근에는 건설 노동자들이 생활 문제를 이유로 이주노동자 도입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노조들이 개입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패션프루트는 정부의 태도 변화가 노조 운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언급했다. 가령 버스업계에서는 막강한 노조가 있어 협상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노조가 대정부 간담회나 협상을 하는 것 어려워졌고, 정부에 문제 제기해도 정부는 이를 무시한다. 어떤 버스 노동자들은 한 버스운수업체에서 신규 노조 설립을 희망하며 노동조합 설립을 위한 모든 서류를 준비했지만 정부 절차에 의해 가로막힌 상태다. 노조 설립 신청으로부터 1~2년이 지났지만 승인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문의를 하더라도 ‘아직 처리 중’이라는 답변만 들릴 뿐이다. 2023년 이래 홍콩 정부는 갑자기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문서 등을 보완해야 한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결국 2년의 시간이 지났고, 일부 노동자들은 이미 연락이 두절되거나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상태가 됐다.

2년 사이 홍콩의 신규 노동조합수는 증가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친정부 노총에 의한 신청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방식으로 어용 노조를 결성해 독립적인 노동조합의 결성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홍콩 정부는 기존에 활동 중인 다른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노조 활동을 불허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노동조합이 계속해서 노동 문제를 다루는 것은 허용하지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다른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노동자들도 사회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지 않게 느끼고, 자기 일에만 신경쓰면 된다고 여기고 있다. 그 결과, 풀뿌리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자신이 속한 산업과 기업의 문제만 다루는 경향이 생겼고, 노동조합 간 협력은 드물어졌다.

쿠알라룸푸르 | 생활임금을 보장하라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 1,500명이 도심을 가로질러 메르데카광장으로 행진했다. 이번 행진에는 사회당(PSM), 원주민문제센터(Center for Orang Asli Concerns; COAC), 여성구호단체(Women's Aid Organisation) 등 71개 단체가 참여했다. 올해 행진의 주제는 ‘생활임금 보장’으로, 집회 준비팀은 기존 최저임금(약 1,500링깃, 약 44만원)을 대체하기 위해 2,000링깃(약 59만원)의 ‘생활임금’을 요구하고 있다. 임금 인상 요구말고도 행진의 8가지 요구에는 노동자의 경제적 권리, 원주민 토지, 성차별 반대, 민영화 반대, 철거 중단 등 더 많은 공동체를 포괄하는 범좌파적 의제들도 포함됐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노동절 행진은 1994년 사회당의 전신인 세 단체(노동자, 미등록 도시주민, 학생 등 대중조직)가 주도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들의 노동권 요구는 정부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하자, 해당 조직들은 독자적인 정당 창당과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98년 말레이시아 사회당을 창당한 것이다. 불행히도 사회당은 창당 선언 이후 2008년 8월 19일까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정당 등록을 하지 못했었다. [합법 정당이 되자마자 맞은 2008년 총선에서 2명이 당선돼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말레이시아 사회당 중앙위원 수슈화(苏淑桦)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에서 ‘생활임금 보장’이라는 구호는 사회당이 2002년부터 주장한 것이었다. 당시 요구되는 월 최저임금은 900링깃(26만원)이었는데, 이를 위한 투쟁이 성공한 것은 10년 후인 2012년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물가 변동으로 인해 최저임금을 900링깃으로 정하는 것만 인정하려고 했고, 발의 당시 필요한 생활임금 액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현재 법정 최저임금인 1,500링깃(43만6천원)은 더 이상 대중의 생활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 때문에 올해 사회당은 다시 한번 최저임금 인상을 강조하고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말레이시아 국립은행(Bank Negara)의 조사에 따르면 쿠알라룸푸르에 거주하려면 한 달에 최소 2,700링깃(78만5천원)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부는 최저임금을 제대로 계산할 수 있는 제도적인 공식을 갖고 있지 않다. 올해는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해로 예정돼 있지만 상반기가 모두 지난 지금까지도 감감 무소식이다. 사회당은 ‘최저임금’이 단순히 최저임금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절 당일 정부는 사회당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채로 모든 공무원(교사, 의료진 등 포함)에 대한 급여 인상을 별도로 발표했다. 수슈화는 이것이 정치적 제스쳐라고 보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공무원들은 오랫동안 정부의 투표기계로 여겨져왔기 때문에 정권에 대한 지지 여론이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정부는 공무원 급여 인상이라는 수단을 통해 공무원들의 호감을 얻으려 한다. 안와르 현 총리도 정부 지출을 절약하기 위해 휘발유 보조금을 삭감하고 일반 시민의 소비세와 서비스세를 인상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지난 2년 동안 말레이시아 노동자의 상황은 점점 악화돼왔다. 생활임금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됐고, 긱 경제는 점점 더 번영했지만 노동자들의 지위는 점점 약해졌다. 말레이시아 긱 노동자들은 현재 전체 노동자 수의 26.7%를 차지하지만 자영업자로 간주되어 노동권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불안정하게 고용된 계약직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노동자계급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준다.

안타깝게도 노동절에는 많은 대형 노조가 시위와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고, 대신 정부가 주최한 기념식에 참석했다. 한편, 말레이시아의 노동절 행진은 다양한 이슈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회당의 수슈화 위원은 노동절 투쟁이 ‘노동자계급이 서로 연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또한 공동체 간의 상호 지원과 연대의 행위이기도 하다. 좌파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문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주거권을 이야기할 때 노동자들은 과도한 주택 가격 문제에 직면해 있고, 주거권은 동시에 노동권이기도 하다. 다양한 공동체들은 노동절 축하 행사를 통해 함께 모여 목소리를 내고, 계급적이며 교차적인 관심을 통해 단결을 이뤄야 한다.

쿠알라룸푸르 노동절 집회에서 울려퍼진 팔레스타인 연대의 목소리
쿠알라룸푸르 노동절 집회에서 울려퍼진 팔레스타인 연대의 목소리

자카르타 | 정치세력화 위한 노동절 행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노동절 행진은 GEBRAK(Gerakan Buruh Bersama Rayat)이라는 연맹 조직이 주최했다. 이를 번역하면 “노동자와 인민의 연맹”으로 단지 노동조합들의 연맹이 아닌, 농민·학생·환경운동·토지운동 등을 포괄한다는 뜻이다. GEBRAK은 총 32개 조직으로 구성된 범좌파 노조 및 단체들의 전선 조직인 것이다. 이날 행진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KASBI(인도네시아 노동조합연맹의회) 조합원들이었다. KASBI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좌파적 노총이다.

GEBRAK 집회에 참가한 노동자 1만5천 명의 행진 대오는 수디르만역(Sudirman station)에서 출발해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건물을 지나 메르데카궁(Istana Merdeka)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날 투쟁의 주요 요구는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전 대통령이 제정한 노동권을 침해하는 일련의 규정, 즉 ‘옴니버스법’에 대한 반대였다. 옴니버스법의 취지는 외국인 투

자를 더 많이 유치하는 것이었으나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인해 최저임금 인상이 둔화되고, 노동시장이 유연화됐으며, 고용안정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퇴직금 및 사회보장기금이 삭감됐다.

이번 시위는 인도네시아 민주주의 체제의 악화와 대선 과정에서 조작과 기만을 통해 조코위가 후계자로 낙점한 독재정권 출신 군부 인사가 당선된 것에 실망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행진 도중 경찰은 시위자들을 가로막고 도발하기도 했고, 행진 대오가 메르데카궁 앞에 다다랐을 때는 정부 관계자 중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다.

올해 행진에서 GEBRAK은 새롭고 진보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는 데 특히 중점을 두었다. KASBI 활동가 이판(Ifan)이 한 외신에 말한 바에 따르면, 이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통한 대안 권력의 형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옴니버스법 개정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여러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단체들이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지난 2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는 물가가 급등했지만,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심각하게 억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민중의 삶이 어려워지는 이유 중 하나는 주식인 쌀값의 상승이다. 인도네시아 식량청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1월부터 2024년 3월까지 쌀 가격은 거의 24% 증가했으며, 이러한 추세는 억제되지 않았다. KASBI 활동가 이판은 “인도네시아의 쌀 생산량은 1년 동안 모든 국민들을 먹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만, 쌀값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쌀 상인들이 쌀을 대량으로 사재기하고, 가격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일부 경제 전문가와 활동가들은 쌀값 상승이 조코 위도도 전 대통령의 잘못된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조코위는 의도적으로 쌀 공급을 줄였고,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기 위해 후보자들로하여금 지역사회에 쌀을 배포하도록 했다.

싱가포르 | 노동자는 할 수 있다

매년 5월 1일, 싱가포르 정부는 공식 노동절 집회를 개최한다. 올해는 샌즈 엑스포 및 컨벤션 센터(Sands Expo and Convention Centre)에서 싱가포르노조대표회의(National Trades Union Congress)의 노동절 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는 지난 4월 퇴임한 리셴룽 총리의 재임 기간 동안의 업적을 돌아보고, “정치적 안정이 싱가포르의 발전을 위한 열쇠”라고 강조했다. 집회에서 다양한 노동조합 대표들은 리셴룽 총리와 싱가포르 정부가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으며, 식음료연합노동조합(FDAWU) 대표들은 “리셴룽을 사랑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기도 했다.

한편, 같은날 이날 사회운동단체 ‘노동자는 할 수 있다(Workers Make Possible)’는 홍림공원(Hong Lim Park)에서 자주적인 노동자 집회를 열었다. 홍림공원 내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는 싱가포르에서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사회운동은 성장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할 수 있다’는 2023년 싱가포르 최초로 노동자를 위한 메이데이 집회를 열었는데, 그 해에는 약 300명이 참가했다. 올해(2024년)는 참가자 수가 그 2배인 600명으로 늘어났다. 이번 집회에는 이주노동자 공제회, 보건의료단체, 성노동자 권리조직, 싱가포르 노동자당 등 다양한 노동권 조직들이 자체적인 부스를 마련해 참가했다. 마찬가지로 야당인 싱가포르 민주당도 연설에 참석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전 세계를 휩쓴 이후 몇 년 동안 싱가포르 공공의료 시스템에서 의료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으로 고통받았다. 현지의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심각한 수준의 노동강도로 인해 더 이상은 인내심과 배려심만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고,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보건의료단체 ‘Sick and Tired’는 싱가포르 의료 시스템의 착취 메커니즘에 저항하고 의사와 환자 간의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집단이다.

홍림공원 스피커스코너에서의 집회 및 시위는 허용되지만, 이는 싱가포르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에게만 국한된다. 무엇보다 이주노동자의 참여는 불법이다. 그 결과, 싱가포르를 건설하는데 참여해온 이주 노동자들은 가장 위험하고 착취적인 환경에 놓여있고, 싱가포르 유일의 합법적 공개 집회 장소에서조차 자신의 처지를 말할 수 없다. 이들은 유튜브 생방송에 익명으로 접속해 집회를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집회 현장에 올 수는 없었지만, ‘이주노동자 공제회’는 현장에 부스를 설치해 싱가포르 시민들에게 이주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 정부와 고용주들은 노동자 안전을 희생시키면서 이주노동자들이 개방형 트럭을 타고 작업장에 진입하도록 허용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자주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다. 공제회는 이주노동자의 교통조건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했다.

싱가포르 홍림공원 스피커스코너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
싱가포르 홍림공원 스피커스코너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

정리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