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 동아시아의 각 도시에서 울려퍼진 노동자들의 목소리
2024년 5월 31일
지난 5월 1일은 제134주년 세계노동절이었다. 노동절(메이데이)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었던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모든 국가와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일 시행을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 시위를 조직하자”고 결의한 이래 1890년부터 매년 세계 곳곳에서 노동절 집회를 개최한 것이 올해로 134주년을 맞은 것이다. 또한 이날은 1886년 미국 시카고의 노동자들이 헤이마켓에 모여 일으킨 파업 투쟁이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첫 노동절 집회는 1923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주최로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공개 집회로 추정된다. 올해 한국의 14개 도시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노동권의 전방위적인 후퇴를 저지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동아시아에서 노동절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아시아 노동자계급 운동의 운명을 반영하는, 길고 고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식민주의와 내전, 반식민주의 혁명운동, 반혁명과 쿠데타, (국가)사회주의와 개발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탄생했고, 동원되거나 대항했어며, 혹은 중단됐다. 이 모든 시기에 메이데이는 노동-자본-국가 간, 노동운동과 정세의 다양한 흐름들 간, 미래 사회에 대한 대조적인 비전들 간 투쟁의 현장이었다. 올해도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노동절을 맞이하는 다양한 집회와 행사들이 열렸다. 이 글에서는 그 중 일부를 소개하고, 동아시아 노동자운동의 연대를 위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타이페이 | 칭더 칭더 공덕을 쌓아라
올해 초 대만에서 치러진 총선에서는 복수의 야당들에 소속된 후보들이 경합하면서 여당이었던 민진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라이칭더(賴清德) 신임 총통이 지난 5월 20일 취임했다. 새 정권 출범을 앞둔 대만에서 노동절 집회의 요구와 행동은 모두 새 정부와 새 의회(입법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타이베이에서의 노동절 집회는 다양한 노동조합 단체로 구성된 5.1행동연맹(五一行動聯盟)에 의해 조직됐다. 집회 장소는 다양한 대규모 시위의 주요 장소이기도 한 대통령궁 앞 카이다거란 대로(凱達格蘭大道)였으며, 행진 대오는 주로 산별노조, 전문직 및 기업들의 다양한 유형의 노조들과 사회운동단체들로 이뤄졌다. 행진이 시작되기 전, 노동자들은 라이칭더 신임 총통과 허페이산(何佩珊) 노동부 장관 예정자, 커젠밍(柯建銘) 민진당 상임위원장으로 분장한 인형들이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노동권 개악 3(勞工權益修惡三)’이라는 액션드라마를 선보였다. 또, “잘라 잘라 모조리 잘라”, “텅텅텅텅 연금”, “칭더 칭더(라이칭더 총통) 공덕을 쌓아라”, “노동자가 단결해 공덕을 쌓는다”라는 풍자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들은 지난 8년간 집권 정부를 운영해온 민주진보당에 대한 노동조합들의 불만을 드러낸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민진당은 노동자들의 국정 공휴일 7일을 삭제하고, 노동기준법(대만의 노동법)을 개정해 교대 근무의 간격을 단축했으며, 초과근무 상한도 완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선거 전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는 차이잉원(蔡英文) 전 총통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다.
이로 인해 노동운동 단체들의 집단적 항의가 촉발됐다. 노동조합과 단체들이 가장 불만을 품고 있는 점은 그 시기 공휴일 삭제를 지지했던 허페이산이 노동부 장관으로 선출됐다는 점이다. 이는 라이칭더 새 정부가 취임 후에도 노동권을 개악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구체적 요구사항 부분에서, 노조들과 단체들은 올해로 입법 40주년을 맞은 노동기준법이 오랜 기간 드러낸 다양한 문제들을 지적했다. 노조 결성의 문턱이 너무 높은 점, 연금 보장이 미흡한 점 등이 특히 강조됐다. 초과근무 수당 역시 조정되지 않았으며, 산업재해에 대한 의료 보호 역시 크게 미흡하다. 따라서 올해 여러 노동조합들이 제시한 5대 요구사항 역시 노동법규 개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입법원의 민의대표들이 노동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노동기준법을 양심적으로 개정하기를 희망했다. 노동자들의 5대 요구는 임금 인상, 노동권 보장, 노사관계 개선, 퇴직자 권익의 보장, 노동재해에 대한 치료 보장 등이다.
행진이 끝난 후 입법원 정문 앞에서는 원내 3대 정당에 대한 노동계의 기대와 감시를 상징하는 두 개의 커다란 삼색 공을 굴리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두 개의 큰 공에는 “장난치지 말고 노동자를 지원하라!”, “노동기준법 을 개정하고 노동권을 보호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들을 밀어붙이는 동안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아 큰 공은 느리게 전진했고, 어느 순간 집회 현장 밖으로 날아가 마지막에는 공기가 새어나갔다. 이는 입법원의 입법위원들을 신뢰할 수 없고, 계속해서 좋지 않은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노동자들의 권익에 부합하는 노동법 개정을 위해서는 정부와 의회에 선의를 기대하기 보다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의지해야 한다.
도쿄 | 노동자 목소리 없는 노동절 집회
5월 1일에는 도쿄 요요기 공원(代々木公園)에서 전일본노총연맹(全国労働組合総連合, 젠로렌) 주최로 집회가 열렸다. 도쿄 말고도 일본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약 1만2,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들이 열렸다. 각지의 행동을 위한 기본 선언은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고,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중립적인 일본을 공동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0만 명의 조합원을 둔 젠로렌은 1대 노총인 렌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노총이다. 젠로렌의 올해 요구안들은 최저임금 1500엔 즉시 실현, 임금 대폭 인상, 해고 금지, 사회보장 강화, 성평등, 평등한 대우 실현, 빈곤 해소, 빈부격차와 차별 실현 등이 포함해 ‘8시간으로 살 수 있는 사회’, ‘지진 후 복원’,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기억하는 사회’, ‘원전제로 발전 을 이루는 사회’, ‘핵무기 폐지’, ‘반전평화 반대’, ‘헌법 9조 개정 반대’, ‘대규모 군비확장 및 오키나와 군사기지 반대’, ‘기시다 정권 퇴진’ 등 총 16개 항목을 아우르고 있다. 요구사항 중 거의 절반이 반전과 평화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젠로렌 산하에는 많은 중소 노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 외에도 업종별로 고유한 요구를 내놓고 있다. 예를 들어, 항공노조의 승무원지부는 항공기의 각 문에 한 명 이상의 승무원을 배치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승무원들에게 국가 보안요원 자격증을 제공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조합원들에 따르면 이러한 요구는 승무원 업계의 인력 부족에서 비롯된다. 올해 초 발생한 하네다공항 여객기 충돌 사고에서는 모든 승객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비행기 출구마다 승무원을 배치한 상태였다. 하지만 항공사가 모든 항공기에 이런 장비를 갖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노조는 인력을 더 충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심각한 고령화와 저출산 사회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는 인력 부족 문제가 산업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보육교사노조 역시 보육교사 확충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젠로렌 주최 집회에 다양한 스타일의 조형물들이 등장해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조명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