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세계 여성의날 ① | 낙태죄 폐지 이후 임신중지 경험을 묻다

2024 세계 여성의날 ① | 낙태죄 폐지 이후 임신중지 경험을 묻다

임신중지의 비범죄화 이후에도 정부는 임신중지 의료 행위를 비공식적인 영역으로 방치해 우리의 건강권을 침해하고 있다.

2024년 3월 6일

[읽을거리]페미니즘임신중지권, 인권, 한국, 2024 세계 여성의날, 페미니즘, 여성의날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이하 ‘모임넷’)에서는 낙태죄 폐지로 완전 비범죄화된 2021년 이후 임신중지 경험을 묻는 설문조사를 2023년 12월 한달 동안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를 통해 확인한 임신중지와 재생산건강 보장제도의 문제점, 개선을 위해 필요한 보건당국의 역할을 짚어본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발표되고, 2021년 이후 해당 조항이 법적 효력을 상실하고 임신중지 비범죄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안전한 임신중지와 재생산건강 및 권리 보장을 위해 공식 보건의료 시스템과 정보 제공 체계를 구축해야 할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보건당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인권과 건강권 보장을 위한 중요한 영역이라는 점에서 지탄받아 마땅한 책임 방기이다. 이에 ‘모임넷’은 지난 해 8월 31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정부의 임신중지 권리 방치는 인권침해다!” 라는 제목으로 복지부와 식약처의 임신중지 권리보장 방치로 야기된 권리침해에 대하여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이후 임신중지 권리가 보장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제출을 위해 낙태죄가 폐지되어 완전 비범죄화가 된 2021년 이후 임신중지 경험을 묻는 사례 분석 조사를 2023년 12월 한 달 동안 실시하였다. 응답자들의 답변을 통해 의료접근권과 의료의 질 등 기본적인 건강권을 침해하는 여러 문제들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정보 부족

응답자들은 모두 임신 9주 이내에 임신중지를 하였으며 대부분 임신 초기에 임신중지를 하고자 하였으나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구하기 어려웠다. 응답자들은 대부분 병원에서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온라인을 통해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모두 복용한 응답자의 경우에는 약의 후유증, 복용 후의 신체 증상에 대한 판단과 대처 등에 관해 신뢰할만한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도움을 구하거나 문의할 곳이 없었고, 비용 부담과 정보부족으로 병원을 방문하지 못했다.

건강 상태와 안전한 임신중지 과정, 후유증 관리 등을 고려하여 가깝고 신뢰할 수 있는 병원을 찾는 일이 중요함에도 공식 정보가 없어 상담과 시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 응답자들이 느낀 큰 어려움이었다. 결국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 임신중지 시술을 받거나 회복이 필요한 시간을 위해 병원 근처에서 숙박이 필요한 상황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보건복지부는 안전한 임신중지 여건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전국 산부인과 병/의원 현황을 파악하여 각 의료기관의 임신중지 가능 시기, 임신중지 방법, 비용, 연락처 등에 대한 공식 정보를 제공하고 원활한 연계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임신중지 여부에 따라 이용 가능한 의료서비스와 지원 정보, 임신중지 전후와 임신중지 과정 및 피임에 관한 종합 정보를 공식 정보 시스템을 통해 전 국민과 국내 거주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뉴질랜드, 스웨덴, 캐나다, 호주 등 많은 국가들의 제공하는 임신중지 관련 공식정보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인권침해

어렵게 의료기관을 찾은 여성들에게도 어려움이 남아있다. 임신중지시술을 위해 파트너,보호자 등의 동의서 작성이나 진료, 수술 시 동행은 필수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병원에서 이를 요구하고 있다. 병원의 부당한 요구에 응답자들은 지인을 설득해서 동행해야 하는 등의 불필요한 절차를 겪어야 했다. 최근 다른 연구에 의하면 성폭력 피해자에게조차 배우자/파트너 동의를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 성폭력 피해 청소년이 부모 동반 요구 때문에 의료 지원 체계에 진입을 못하여 피해를 키우는 사례도 있다.(김정혜·이미경·동제연, 2023) 이러한 부당한 요구는 중요한 시기에 임신중지 결정을 포기하거나 연기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으로, 이로 인해 불필요하게 임신중지 시기를 지연시키고 의료접근성을 저해하게 된다. 미혼이거나 청소년,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편, 파트너, 부모의 승인을 요구하고, 승인을 받지 못한 경우 의료서비스의 접근을 제한하는 것은 국제 인권법의 기준에도 어긋나는 명백한 인권침해이며 사생활과 개인정보 기밀성의 침해이다. 당사자에게 충분한 정보 안내와 설명을 하고 본인이 원하는 경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동행할 수 있도록 권고하되 제3자의 동의 또는 동행이 임신중지 관련 의료서비스 제공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유산유도제

유산유도제인 미페프리스톤이 도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소프로스톨 단독 요법으로 내과적 임신중지를 한 응답자들의 경우 병원을 통해 약을 복용했음에도 임신중지가 제대로 완료되지 않아 추가로 수술을 한 경우도 있었다. 임신 9주 이전에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 혼합요법의 경우 95~99%의 성공률을 보이는 반면, 미소프로스톨 단독 요법의 경우 84~96%의 성공률이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병용하여 사용하는 경우 성공률이 매우 높음에도 현재 미소프로스톨만을 사용하여 내과적 임신중지를 시도한 경우 병원에서 진행하더라도 약 복용만으로는 완전히 임신중지가 진행되지 않아 추가로 시술을 해야하는 일이 다수 발생하고 있다. 한편, 병·의원 방문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구입한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병용한 경우에는 부작용에 대한 문의와 대처가 어려운 상황이다. 보건당국이 유산유도제를 공식 도입하지 않아 병원과 병원 밖 모두에서 안심하고 안전한 임신중지 과정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유산유도제를 공식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국가에서는 안전성이 훨씬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근거자료들은 충분하며, 2018년 발행된 WHO의 유산유도제를 이용한 임신중지 가이드에서는 사용 방법에 대한 지침, 합병증을 인식하는 방법,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하루속히 세계보건기구가 필수의약품으로서 권고하는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공식 유산유도제로 승인하고 공식 의료 체계를 통해 내과적 임신중지가 안전하게 지원되야 한다. 현재 유산유도제를 공식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국가에서는 안전성이 훨씬 높게 나타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423,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미페프리스톤 사용 후 병원 입원, 수혈 또는 심각한 감염과 같은 부작용은 0.01~0.7%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대부분의 부작용은 큰 후유증 없이 치료가 가능했다.

2018년 WHO가 발행한 유산유도제 이용 임신중지 가이드에서는 사용 방법에 대한 지침, 합병증을 인식하는 방법,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고, 그간의 연구 결과에 따라 임신 12주 미만인 경우 산부인과 전문의 뿐만 아니라 숙련된 조산사, 간호조무사도 유산유도제를 이용한 임신중지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하루속히 세계보건기구가 필수의약품으로서 권고하는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공식 유산유도제로 승인하고 공식 의료 체계를 통해 내과적 임신중지가 안전하게 지원되도록 해야 한다.

건강보험

임신 3주차에서 9주차까지의 응답자들이 지불한 임신중지시술비용은 3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이런 상황은 의료기관과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당사자들이 비용부담으로 의료기관을 이곳저곳 전전하게 만들고 있다. 자의적으로 책정되어 천차만별인 비급여 수가는 전체 의료비 및 환자의 부담을 상승시킬뿐만 아니라, 정확한 통계 및 역학조사도 어려워 구체적인 건강 지표를 확인하고 개선해야 할 보건당국의 책임을 방기하게 한다.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루속히 임신중지서비스에 건강보험 보장을 적용하고 공식 수가를 통해 당사자의 경제적 부담 없이 의료비가 안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임신중지의 비범죄화 이후에도 정부와 보건당국이 계속해서 임신중지 관련 의료 행위를 비공식적인 영역으로 방치해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정보 및 보건의료 접근성을 떨어뜨린 결과 건강권이 침해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와 세계산부인과학회를 비롯한 주요 국제 기관의 가이드와 연구 자료들이 경고해 온 것처럼 처벌, 규제는 임신중지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지 않은 의료환경을 만들게 될 뿐이며, 임신중지에 관한 비공식적 의료 환경은 전반적인 재생산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지속, 강화할 뿐이다.

출처 :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결과 보고서

정리 : 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