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민주진보당(민진당) 라이칭더(賴清德)가 40%의 득표율로 승리해 오는 5월 총통에 취임을 앞두고 있다. 국민당의 허우유이(侯友宜) 후보는 33%, 민중당의 커원저(柯文哲) 후보는 26.4%를 얻었다.
이번 대만 총통 선거는 미-중 경쟁과 국제 분쟁 정세 한복판에서 벌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외신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서구의 주요 언론들과 이를 받아쓴 국내 언론들은 "대만 국 민이 중국공산당에 맞서 민진당을 지지한 것"으로 선거 결과를 해석했다. 이에 대해 대만과 홍콩을 기반으로 한 중화권 언론 <단전매 端傳媒>는 2012년 이후 외신이 대만 선거를 줄곧 '미·중 갈등의 구도'로 바라봤다는 점을 꼬집으며, 대만 내부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총통 선거와 동시에 치뤄진 입법회(立法會, 우리의 '국회') 선거에서는 국민당(52석), 민진당(51석), 민중당(8석)이 과반 없는 여소야대의 구조를 이뤘다. 커원제 대선 후보가 대표하는 민중당은 여소야대 구조 속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고, 세 당 외에는 어느 당도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 캐스팅보트: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안건을 표결에 부쳤을 때 찬성과 반대표 숫자가 같을 경우 의장이 행사하는 결정권을 의미. 통상적으로는 양대 세력 어디도 과반을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제3의 세력의 선택으로 인해 과반을 이뤄 실제 갖고 있는 표보다 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번 입법회 선거 결과, 국민당의 한궈위(韓國瑜) 입법위원이 입법원장으로 선출됐다. 한궈위는 지난 2020년 홍콩 항쟁이 한창이던 시기 치뤄진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 현 총통(민진당)과 맞붙어 패배한 바 있다. 이때 차이잉원(蔡英文)은 중국공산당이 시위 강경 진압 입장을 견지했던 것을 들어 한궈위에게 '친중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그 덕분에 57.1%의 높은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바 있다.
민생 이슈의 부각
이번 총통/입법회 선거 결과의 특징이 하나있다면, ‘중국에 맞서 대만을 지킨다’(抗中保臺)는 이슈가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반면 국내 문제가 주된 쟁점이 됐다는 것이다. 라이칭더의 득표율이 40%로 과거보다 높지 않게 기록된 것도 이번 선거에 대한 대만 민심을 단순히 반중-친중 프레임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만 유권자들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대만해협과 대만 인근에서 군사 훈련을 하는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을 보며 전쟁의 위협을 느끼고, 중국에 대한 호감도 역시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국민당의 허우여우이조차 '친중'적 제스처를 보이지 않으며, '탈중국이냐 아니냐'만이 쟁점이 되고 있다. 허우유이는 자신이 본성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일부러 대만어(민난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등 '대만 정체성'을 강조한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메세지 역시 강조하며 선거에 임했다.
- 본성인: 일반적으로 명청 시기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주해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줄곧 대만에서 나고 살아왔던 사람들의 후손을 지칭한다.
- 민난어(閩南語): 본성인은 크게 민난어 화자와 객가어 화자로 나뉜다. 민난어는 복건성과 하이난성 일대의 방언이지만, 보통화와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의 차이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적으로 민난어 화자는 약 5천만 명으로 추정되고, 대만 내에선 1,4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8년 동안 집권정당인 민진당 차이잉원 정부는 저임금과 부동산 문제, 중국대륙 관광객 급감, 모병제에서 1년 의무복무 징병제 전환 등 대만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 미-중 경제와 양안관계(중국-대만 관계)를 바라보는 대만인들의 시선은 더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기를 바라고, 국제관계에서 정부가 보다 유연성을 발휘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강화됐다.
하지만 당선자인 민진당 라이칭더는 홍콩 항쟁이 중국에 의해 궤멸되었다는 두려움을 부각해왔고, 이번 선거에서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대만의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그 결과 대만 사회의 진보적 개혁에 또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도와 대외 정세의 영향으로 높지 않은 투표율로도 재집권에 성공했다.
국민당은 야당으로서 '정권 심판'이라는 유리함을 안고 있었지만, 부총통 후보 자오샤오캉은 “당선되면 집무실 자리에 사회주택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농담조로 말하는 등 심각한 경제난에 책임감있고 진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돌풍일으킨 커원저가 대안일까?
이번 총통 선거에서 민중당 커원저 후보는 애초 예상됐던 10~20%의 득표보다 높은 26.4%를 득표했다. 거대 양당을 바짝 쫓으며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특히 20~39세 유권자의 약 49%가 커원저에게 투표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젊은층에서의 지지가 높았다. 두 차례 타이베이 시장을 거친 커원저는 노후한 난먼 시장(南門市場)을 현대화했고, 예산도 모두 공개하는 등 시민들의 신뢰를 얻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이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이 늘어났다.
성균중국연구소는 「2024년 대만 선거결과 분석」 보고서에서 대만의 청년 세대가 거대 담론인 전쟁 대 평화, 민주 대 독재 구도보다 일자리, 저임금, 주거 문제 등 민생 이슈에 더 관심이 있었다며,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한 커 후보를 지지했다고 지적했다. 즉, 청년세대들이 ‘중국과의 통일이냐, 독립이냐’는 주제로 선거를 접근하고, 실제 민생을 돌보지 않은 민진당과 국민당 대신 사회주택 건설, 다주택 특별세, 원전 처리 등의 현실적 공약으로 민생과 정부 개혁을 주요 문제로 부각시킨 커원저에게 투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커원저가 외치는 ‘중도’에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들도 있다. 홍콩에서도 한때 '중도' 포지셔닝이 힘을 얻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결국 친중으로 노선을 틀고, 경제의존도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시장 재임기에 점차 중국쪽으로 기울었다는 타이베이 시민의 우려 역시 그가 ‘중도’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게다가 커원저는 이번 선거에서 국민당과 단일화를 시도했고, 입법원장 선거에서도 민중당이 기권해 국민당의 승리를 우회적으로 도왔다. 이런 점에서 그가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보긴 어려워보인다. 더구나 커원저는 성차별적이고 동성애 혐오 발언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해바라기운동의 유산
사실 커원저는 2014년 당 시 타이베이 시장 후보로 해바라기 운동을 촉발시킨 양안서비스무역협정에 반대해 재선된 바 있다. 그런 그가 이번 선거에서는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을 부활시키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는 그의 입장에 더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와 함께 민중당을 이끄는 황궈창 의원은 해바라기 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투사’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젊은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커원저와 황궈창은 대만의 젊은이들이 무역협정 자체가 아니라 불투명한 협상에 반대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며 본질을 흐렸다. 그러나 대만인들은 단지 협상과정을 공개하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양안간 무역협정이 가져올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 본질적인 불평등에도 반대하는 것이었다.
대만의 노동조합 활동가 라이충치앙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이 1,000개 이상의 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실직과 임금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 정부는 미국, 일본, 한국 등과 반도체 칩 동맹 등에도 합류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만의 복잡한 대외 문제에 단순한 해법을 제시하기 힘든 이유다.
한편, 해바라기 운동에 참여했었던 청년들은 시대역량(時代力量) 등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고 지난 두번의 선거에서 5석, 3석을 차지하는 등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를 해왔다. 하지만 점차 지지를 잃어 이번 선거에선 아예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물론 해바라기운동 출신 활동가 중 사회민주당의 마요포야, 무소속 쩡원쉐(曾玟學, Tseng Wen-hsueh)는 각각 44.8%, 45%의 득표율로 시의원에 당선되는 등 자신의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인문사회과학연구소의 허밍시우(何明修) 소장은 "민진당 3연승에는 중국 중심의 경제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해바라기 운동의 유산이 담겼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이후 사회운동의 정치적 방향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평가를 남겼다.
국민당, 민진당, 민중당 중 어느 곳도 가까운 미래에 공식적인 대만 독립이나 통일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 정당 모두 홍콩의 국가보안법과 해바라기운동이 보여준 민심의 영향 속에 ‘일국양제’의 틀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당선자인 라이칭더는 미 공화당, 민주당과 양안정책과 국방정책을 긴밀히 논의할 것이다. 중국은 독립 지지자로 보이는 라이칭더와 당장 대화를 하지는 않을 것이고, 여소야대 형국에서 국민당과 문화, 경제 협력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한국 역시 미중 등 강대국과의 지정학적, 경제적 관계에 따라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복잡다단한 대만 정치의 변화 속에 대만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고민하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게도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있다. 대만과 한국의 사회운동 좌파는 공히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확장하고, 아래로부터의 운동 강화를 통해 스스로를 세력화해야 한다.
전쟁 위기에 놓인 대만 시민들은 군비 증강이나 권위주의 정부가 아니라 평화롭고 평범한 아침을 갈망한다. 이런 위기가 한반도와도 연결돼 있다고 여긴다면, ‘말걸기’와 연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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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당·국민당은 통일·독립만…커원저는 민생과 개혁 말했다”, 한겨레, 최현준, 2024.01.16 - 이지윤, <“나는 이래서 OO을 지지했다” 대만인 25명의 답변>, 동아일보, 2024. 01. 20
- 대만 청년들은 왜 제3 후보에 열광했을까, 시사저널, 임명묵,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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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son Pan, <Ko Wen-je criticized over call to restart CSSTA talks>, taipei times, 2023.06.22
- Ho Ming sho, <How the Sunflower Movement legacy lives on in Taiwan’s 2024 elections>, ThinkChina, 2024.01.22
글 : 김지혜
교열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