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치에우 산티아고 ③ | 민주화 35년, 칠레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2024년 2월 20일
2019년 칠레와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봉기 당시 칠레에서는 여러 가수들이 모여 봉기를 지지하는 노래들을 불렀다. 그 중에서 특히 두 곡이 두드러졌다. 하나는 1960-70년대 활동했던 좌파 활동가들이 함께 부른 노래였는데, 1973년 군부 쿠데타 당시 군인들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á)가 6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호치민에게 지지를 보내며 부른 노래인 “El derecho de vivir en paz”(평화롭게 살 권리)를 개사하여, 칠레의 인기 가수들이 함께 부른 곡이었다. 다른 하나는 칠레에서 지속적으로 좌파적 노래들을 불러왔던 여러 래퍼들이 참여한 “Marichiweu”(마푸체어: 천 번 이기리라)라는 곡이었다.
이 두 노래는 모두 사회운동 한복판에서 불렸지만 꽤나 상반된 방향성을 보인다. 전자는 새로운 사회 협약과 증대된 복지, 교육, 의료를 이야기하며 한국에서 여러 번 반복된 바 있는 복지국가에 대한 소망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투쟁의 격렬함과 정당함, 현 체제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체제전복 의지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필자가 이 노래 가사에서 공감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Treinta años, es suficiente pa' aguantar su tiranía”(30년이란 세월 동안 저들의 폭정을 너무 많이 참아냈어)라는 구절이었다. 2019년으로부터 30년 전인 1989년 당시 칠레 사회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Ugarte)의 군사 독재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하고 있었다. 이 “30년”이라는 인식은 실제 봉기 속에서도 피켓과 사람들의 구호 속에서 자주 드러났던 인식이다. 신자유주의를 시작한 것은 분명 피노체트이었건만, 사람들은 왜 민주화를 그 시작으로 보았던 것일까?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을 뒤엎었다. 이로 인해 칠레의 1970년대는 피로 얼룩진 시대가 됐다. 쿠데타 당일 산티아고의 국립 경기장을 필두로 칠레 전국에 좌파 정당 활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을 구속하기 위한 수용소가 세워졌고, 수많은 이들이 귀가 도중에, 아이와 산책하다가, 잠을 자다가 비밀경찰에 의해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어갔다. 칠레 사회를 완전히 물리적으로 재편한 것이다.
칠레의 사회운동 세력을 청소한 70년대 중반 이후, 독재 정권의 관료들의 당면 문제는 바로 경제 체제의 재편이었다. 1960년대 초, 칠레의 유명 사립대 가톨릭대(Pontificia Universidad Católica)와 미국 시카고대학 간 맺은 교환학생 협정 이래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로 불리우는 꾸이꼬(Cuico; 칠레 민중들이 상류층을 경멸조로 부르는 호칭) 출신 신자유주의 경제학도들이 정권에 대거 기용됐고, 그들의 멘토 밀턴 프리드먼(Milton Freedman)의 기조에 따라 인플레이션 해결의 방책으로 성장하던 서구 다국적기업들에 시장을 개방한다. 수입대체 산업화를 기반으로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있었던 칠레의 2차 산업은, 그렇게 무너지고 만다. 수많은 실업자가 생겨났고, 노동운동에 기반한 사회운동은 그 기반을 잃고 지하 점조직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독재 정권의 철권조차 세계 최초 대의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자 대통 령을 선출한 국가의 사회운동을 절멸시키지는 못했다. 당시 활동가들은 망명지에서, 대학에서, 얼마 남지 않은 제조업과 건설 현장에서, 또 FPMR(Frente Patriótico Manuel Rodríguez,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전선) 등 무장조직의 형태로 반독재투쟁을 이어갔다. 1980년대 초 신자유주의 정책의 반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는 1984년 대규모 행진을 시작으로 반독재 운동이 전면에 나서도록 했고, 그 이면에는 사회운동의 명맥을 이어갔던 여러 조직들이 있었다.변화한 사회와 정세는 사회운동의 체질을 여러모로 바꾸어 놓았다. 쿠데타 이전, 칠레의 미래라는 대권을 두고 다툴 때에는 명확했던 이념의 구분이, 지하조직으로써 반독재투쟁에 나설 때에는 흐릿해져 갔다. 중도우파에 속했던 기독민주당(Democracia Cristiana)계열 조직들과도 손을 잡게 되었고, 사회주의보다는 당면한 독재체제의 타파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우선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생겨났다. 결국 1989년 피노체트의 하야를 두고 벌어진 국민투표는 기독민주당 계열 인사들이 언론의 포커스를 받으며 이루어낸 성과로 간주될 정도로, 사회운동 내의 좌익 기조는 흐릿해져 갔다.
변화한 사회와 정세는 사회운동의 체질을 여러모로 바꾸어 놓았다. 쿠데타 이전, 칠레의 미래라는 대권을 두고 다툴 때에는 명확했던 이념의 구분이, 지하조직이란 형태로 반독재 투쟁에 나서자 흐릿다. 중도우파에 속했던 기독민주당(Democracia Cristiana) 계열 조직들과도 손을 잡게 됐고, 사회주의보다는 당면한 독재체제의 타파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우선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생겨났다. 결국 1989년 피노체트의 하야를 두고 벌어진 국민투표는 기독민주당 계열 인사들이 언론의 포커스를 받으며 이루어낸 성과로 간주될 정도로, 사회운동 내의 좌익 기조는 흐릿해져 갔다.
피노체트 하야로 1990년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면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법화됐다. 이들은 지하조직에서 벗어나 다시금 의회민주주의 틀로 돌아왔다. 그러나 새로운 민주주의는 반쪽 짜리 민주주의였다. 반독재 세력이 국민투표 개시를 위해 군부 측과 막후 교섭을 한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지속과 피노체트의 실질적 군 통수권자 지위 유지를 받아들인 것이다. 독재 종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염원했던 칠레 민중은 높은 투표율을 보이며 정치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별 다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체제의 한계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로부터 고작 5년이 지난 1995년 선거에서는 저조한 투표율로 그 실망을 드러낸다.
지표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은 큰 성과를 거뒀다. 독재 정권 이전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도 빈국에 속했던 칠레는 연 평균 8퍼센트 성장을 보이며 1인당 GDP 1만 달러를 넘어섰다. 교육과 절대빈곤율, 기대수명 등 여러 지표들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극심한 불평등, 비정규직 양산 등 불안정성이 높은 고용 형태가 증 가했다. 또, 절대빈곤선을 간신히 넘긴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작은 위기로도 절대빈곤에 다다르기 일쑤였다. 이처럼 칠레 사회에는 민중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새로운 칠레 사회는 정치, 특히 정당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쿠데타 이전 칠레의 정당과 정치는 대중정당의 전성기였다. 자유당과 보수당 등 전통 우파 정당을 제외하면, 중도우파 기독민주당과 좌파 블록[Frente Popular(인민전선), FRAP(민중운동전선), Unidad Popular(인민연합) 등 이름과 구성이 조금씩 변화했다]은 수많은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의 거의 모든 인구가 특정 정당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매우 정치적인 사회가 지속됐다. 특히 좌파 블록의 경우, 한국의 민주노총-민주노동당의 진보정당 운동과 달리 정당이 노동자 민중을 포섭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 중추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르게 말하면 정당 이외의 자생적인 사회운동이 그리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정당들이 불법화되고 활동가들이 학살당하자, 정당과 대중의 고리는 약화되고 말았다. 독재 정권 시절에는 "반독재 투쟁"이라는 기치 아래 기존 노조들이 잔류할 수 있었지만,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의 지속으로 노조의 가장 큰 기반이 되는 제조업 부활이 이뤄지지 않았다. 칠레 노동운동은 구심점 역할을 하는 조직이 없었고, 여러 자생적 노조들이 산재한 상태가 됐다. CUT(Central Unitaria de Trabajadores, 노동자연합중심) 등의 중소규모 노총만이 정당과 연계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당은 90년대를 거치며 노동운동 및 여타 사회운동과의 연계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렸고, 공산당 또한 CUT과의 연계와 학생조직인 JJCC(Juventud Comunista, 공산주의 청년단)를 제외하면 사회운동과의 연계가 상당 부분 약화됐다. 이에 더해 국민 투표 당시 막후 교섭 협약으로 인해, 의회민주주의는 경제 체제에 별다른 변화를 줄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그러니 당연히 민중의 삶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개혁 또한 불가능했다. 사회운동과의 연계가 끊어져가는 상황에서 의회정치로부터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고, 실망한 대중의 무관심과 냉소는 대중정당 전통을 무너뜨렸다. 이제 칠레의 정당들은 일종의 엘리트 정당으로 변모하게 됐다.
정당이 변화의 동력을 상실하고 사회운동이 유의미한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면서 칠레 정치는 민주화 이래 지속적으로 우파 연합과 중도좌파 연합이 정권을 바꿔가며 부패를 저지르는, 민중의 삶과 무관한 양당제가 됐다. 대부분의 칠레 사람들은 힘겨운 현실을 받아들이며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삶을 살아내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El que puede puede, el que no, aplaude”(할 수 있는 사람은 하고, 못하는 사람은 박수나 치자)라는, 불평등에 순응하는 논리가 지배적이 되었고, 투표율은 항상 50%를 넘지 못했다.
이렇게 변화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변화를 외쳐왔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다름 아닌 칠레의 젊은 청소년들이었었다. 민주화 이후 태어난 세대가 중등교육을 받게 된 2000년대 중반, 청소년들은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2006년, 흔히 “펭귄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청소년들의 평등하고 접근 가능한 교육을 위한 투쟁은 칠레의 각 중등학교(칠레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구분이 없다)에 사회운동과 투쟁의 전통을 뿌리내리게 했다. 2019년 봉기의 시발점이 된 것도, 거리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경찰과 맞서 싸우는 이들도 바로 이 청소년들이다.
이 펭귄 혁명 세대는 대학에 입학하여 새로운 대학생 운동을 촉발시켰다. 한국의 80-00년대가 그랬듯, 학생회를 중심으로 여러 조직들이 학생회 수권을 노리는 한편 학생들을 조직하여 살리다(salida;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거리로 나가 집회를 여는 것)와 학생총회, 담화를 이어가며 칠레 대학생들의 운동의 전통을 재정립했다. 이 세대가 학교를 졸업하고, 기존 정당에 도전장을 내밀며 조직한 것이 바로 현재 칠레의 집권 정당인 Frente Ampilo(광역전선)이다. [2019년 봉기의 거시적 정세에 대해서는 '칠레에서 대중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글 참조]
그러나 광역전선마저도 칠레 정당의 고질적인 문제인 대중과의 괴리는 극복하지 못했다. 주거권 운동의 일부와 여러 원외정당을 흡수했지만 소수의 정치인과 활동가 위주의 정당 형태는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한계는 2019년 봉기 당시 굉장히 두드러졌다. 2019년 봉기는 지하철 요금 30페소 인상에 반대하여 Instituto Nacional(국립고등학교, 칠레의 명문중등학교)의 학생들이 salida의 일환으로 지하철 요금을 내지 않고 개찰구를 넘어가는 투쟁을 조직했고, 이들의 행동과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틱톡 등 SNS로 퍼져나가 고통받던 칠레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즉, 봉기를 조직하거나 요구를 수렴하는 사회운동 조직이나 정당이 없었다. 즉, 광역전선에게 있어서 봉기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주어진 상황이었다. 광역전선 내부에서는 봉기 지지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좌파연합 또한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대통령궁인 모네다를 점령할 기세로 쇄도하던 봉기의 기세에 눌려 당시 대통령인 세바스티안 피녜라(Sebastian Piñera)가 하원에 신헌법 제정과 의무투표 시행을 골자로 향후 집회를 근절한다는 타협안을 제출했고, 이들 원내정당은 이를 받아들이며 봉기를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즉, 체제의 근본적 변화보다는 의회 정치 내에서의 가능성에 민중의 동력을 써버린 것이다. 봉기의 조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직이 없었던 상황에서, 이러한 타협안은 많은 사람들에게 집회를 계속할 이유를 잃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던 집회는 코로나 대유행을 기점으로 완전히 잦아들었다.
신헌법과 신정권 창출이라는 일련의 개혁 프로세스는 2021년 신헌법 제정과 제헌의회 구성, 대선에서 개혁파가 승리하며 칠레가 변화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율투표의 과대대표라는 함정이 존재했다. 칠레 전체 유권자의 투표율은 항상 60%를 밑돌았고, 그를 감안한 실제 개혁파에 투표한 유권자의 수는 신헌법 제정 투표를 제외하면 거의 항상 같았던 것이다. 대대적인 봉기에도 불구하고, 칠레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일상을 이어갔다.
이런 모순은 2022년 신헌법 초안 승인투표에서 개혁파의 뒤통수를 강력하게 때렸다. 의무투표로 무관심층이 투표하게 되면서, 광역전선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승인 반대로 표가 몰린 것이다. 의무투표는 2023년 5월 제2 제헌의회 선출, 12월 제2안 승인투표에서도 이어졌고, 무관심층은 그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신들이 선출한 우파 제헌의회의 초안조차 부결했다. 2021년 대선으로 선출된 가브리엘 보리치 정권은 2022년 1차 초안 승인투표 부결을 기점으로 상징적 쇄신조차 포기하고 학생운동 출신 내각을 이전 좌파연합 정권 출신 인사로 갈아치우며 30년 체제의 연장을 사실상 선언했다.
지난 2023년은 쿠데타 50주년을 맞는 해 였다. 그 핵심이 되는 매년 9월 10일마다 열리는 9.11 쿠데타 기념집회 때는 사상 최초로 기존 행진 경로인 대통령궁 주변을 차벽으로 막고 광역전선 관련 인사만이 대통령궁 앞에서 집회에 참가하고 다른 정파의 사람들은 우회하게 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2023년 '방아쇠를 당기는 법'(Ley Gatillo Fácil)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보단 암묵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주: 이 법은 사회운동으로부터 경찰의 힘을 강화시키고 사회치안에 대한 처벌 포퓰리즘 방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 초국적 임업개발회사의 자연 착취와 원주민 토지 침탈에 맞선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의 투쟁에 대해서도 해당 지역 계엄령을 다시금 내려 탄압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 칠레 사회는 쿠데타 종식 35년차를 맞았다. 여전히도 칠레 사회는 당시의 암울한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민중가요 'El Derecho de Vivir en Paz'의 개사곡을 부르던 이들이 정권을 잡은 나라에서, 마푸체어 가사가 들어간 또 다른 민중가요 'Marichiweu'를 부르던 이들은 역으로 탄압 당하고 있다. [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이들이 엘리트 정치인이 되어 '파업가'를 부르는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한국 사회를 상기시킨다.] 칠레 민중의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은 전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 더욱 힘겹게 이어지고 있다. 임업 회사들이 땅을 헐값에 사들이기 위해 지른 불이 거대한 산불이 되어 산티아고가 위치한 제 5주(Quinta Región)을 불태우며 100명 이상의 사상자와 수천의 이 재민을 냈다. 2019년 봉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백 명의 실명과 사망, 숱한 고문을 저지른 피녜라 전 대통령에 대해 보리치 현 대통령은 국장을 치뤄주었다.
민중들이 고물가와 저임금으로 고통받는 지금, 칠레에는 보다 두터운 사회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글 : 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