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멈춰지지 않는다면
2024년 1월 12일
이 글은 지난 2024년 1월 7일 서울 청계천에서 열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집단학살 중단하라!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6차 긴급행동」집회에서 발언한 한톨 작가의 편지 전문입니다. 한톨은 2023년 9월 1일부터 지난 연말까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체류했습니다.
1948년 나크바, 그리고 나크바 이전 부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은 한 세기가 넘도록 전쟁과 기근의 고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생태와 관계 맺고 살아온 생명과 사람을 떠올리며 연대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팔레스타인 여성 시인 ‘나오미 시합 나이(Naomi Shihab Nye)’의 시집 ‘붉은 가방(Red Suitcase)’에는 ‘팔레스타인 사람은 어떻게 따뜻함을 유지하는가(HOW PALESTINIANS KEEP WARM)’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 마지막 문단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여기 지구에서 따뜻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는 걸 알아요.’
2024년 새해가 되었고 새로운 결심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가득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지구 곳곳의 현실은 여전히 냉혹합니다. 그러나 이곳 연대의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바라보니 그녀의 시에 적힌 ‘지구에서 따뜻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는 시의 의미를 새삼 다시 깨닫게 됩니다.
2023년 9월 1일, 나는 팔레스타인에 왔어. 이 시기에 내가 지구상에 있어야 할 삶의 자리는 ‘팔레스타인’이라고 오래도록 생각했었고 그 마음이 나를 팔레스타인으로 이끌어주었어. 9년 전, 분쟁과 쓰나미로 인해 파괴된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마을 공동체의 회복을 도와주던 한 청년 공동체에서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어. 그곳에서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고 ‘내가 살아가 는 동시대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하는 의문을 풀고자 책과 기사를 찾아 보며 나름의 공부를 시작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총체적 현실을 마주하며 머릿속은 새하얘졌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스라엘은 마치 세상에 있는 온갖 폭력을 익혀 팔레스타인에 쓰는 것 같았어.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폭력은 겹겹이 쌓이고 포개어지며 더 치밀해져 갔어.
이 폭력은 모두 어디에서 온걸까. 이스라엘 권력자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이 팔레스타인을 격리하고 철저히 차별했어. 이스라엘 점령 속에서 팔레스타인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학살이 자행되었고, 과거 유대인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그대로 답습해 내는 듯했어. 과거에 많은 제국들이 식민지의 국민들을 몰살하고 그 땅을 강점했던 방식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온 생의 터전을 강탈했어.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알게 될수록 내 마음은 복잡해지고 감정은 점차 뜨거워졌어. 마치 몸이 기화되는 것 같았어. 허공에 뭉개어진 내 감정 안에서 팔레스타인은 한 사람의 인간이 되었어. 그렇게 나는 한 사람을 만난다는 심정으로 이곳에 왔어.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무더운 한여름 밤,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이곳에서의 첫 숨을 길게 쉬었어. 그리고 저 어둠 속에 내가 마주하려 했던 팔레스타인의 얼굴이 있다는 묘한 기다림으로 첫날을 보냈어.
나는 곧 팔레스타인 지역주민과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 이스라엘을 구분 없이 걸었어. 우리가 함께 곳곳을 다니며 취재하는 동안 태양은 뜨겁고 날씨는 무척 건조해 흐르던 땀도 곧 말라버렸어. 우리는 열기를 피하고자 틈틈이 올리브 나무나 유칼립투스 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피해야 했어. 때때로 이스라엘의 군인과 경찰을 만나게 되어 수시로 피해 다녀야 했어. 점령 상황 속에서 움직이는 일은 어렵고 조심스러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피해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어. 팔레스타인 풍경과 음식, 그들이 지켜온 문화의 아름다움을 만나 허기진 마음을 채웠고 그렇게 힘든지도 모른 채 따뜻한 9월을 보냈어.
10월 첫 주가 되자 이스라엘의 명절 ‘수코트(Sukkot)’가 시작되었어. 유대인이 과거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 수 있도록 풍성한 추수를 그들의 신에게 감사하는 절기였어. 하지만, 이 기간에 300명 이상의 이스라엘 불법정착민은 이스라엘 군의 보호 아래 알-아크사 모스크를 침입했어. 그들은 이슬람의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를 고의적으로 훼손했고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더 심하게 탄압하고, 죽이고, 이유 없이 체포했어. 누군가를 죽이고 괴롭히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절기를 기념한다는 사실에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어.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지만, 늘 총구가 그들을 향해있는 점령 상황 속에서는 단 한 번의 외침도 쉽지 않았어. 이스라엘의 폭정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생사의 위협을 느꼈고 침묵을 강요당했어. 이스라엘의 축제 속에서 지독한 일주일을 보내야 했던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전 세계는 알지 못했어. 그만큼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고 팔레스타인은 완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였 어.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주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정당 하마스는 가자지구의 분리 장벽을 허물었어. 이날 무너진 거대한 분리 장벽에 관한 소식은 팔레스타인 사회 안에 빠르게 퍼져나갔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만으로도 깊은 탄성을 외쳤어. 그 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전쟁의 시작이 아닌 오랜 탄압을 이겨낸 저항의 순간이었어. 그리고 세상의 외면 속에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팔레스타인이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평등한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준 사건이었어. 하지만, 이 중요한 순간은 찰나가 되었고 금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졌어. 이스라엘과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팔레스타인의 외침은 금세 잊히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 켜켜이 쌓인 피지배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세상은 앞다투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를 쉽게 정하려고 했고, 이 사건에 어울릴법한 이름을 붙여가며 전쟁이라고 규정해 버렸어.
세상은 억압된 목소리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총과 폭탄에 민감했어. 세계는 우리야말로 누구보다 평화를 바라고 지켜온 ‘정의’ 자체라는 듯 힘을 행사하고, 위선적인 말을 쏟아냈어. 세계는 ‘무기를 들어 살인을 시작한 자는 누구인가!’ 라고 외치며 그들 마음대로 정의와 불의를 규정했어. 하지만, 그 무기를 만들고 그 무기가 만들어지도록 묵인한 자가 바로 나 자 신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목소리를 나는 만나지 못했어. 그리고 과거 세계대전을 통해 무기와 폭력으로는 평화를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폭력과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했던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목소리도 만나지 못했어. 눈에 보이는 분노와 슬픔, 빠른 판단과 분석 속에서 너와 내가 이루고 있는 세상에 정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잊었고, 총격과 폭격에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동안 우리의 생각은 마비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마음을 잃어갔어.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했어. ‘무기로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지 않을까?, ‘무기는 생명을 지킬 수 있는가?, ‘무기는 생명을 죽이기 위한 목적 외에는 다른 쓸모가 나에겐 보이지 않는데, 우리 사회는 왜 무기 생산을 계속 허용하는가?’ 등등 질문을 계속 나열하며 괴로움에 몸서리쳐야 했어.
10월 7일의 사건은 팔레스타인이 배제된 채, 이스라엘과 세계가 바라보고 규정한 대로 정말 ‘전쟁’이 되었어. 나는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오가며 취재를 지속하고 있었는데 ‘전쟁’ 이후 이스라엘 군인들이 통제하던 체크포인트는 더 삼엄해졌어. 결국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이동권은 상실되었고, 일자리를 잃었어. 체크포인트를 통과하지 않으면 일을 할수도 돈을 벌수도 없는 상황이 수십년 동안 지속되고 있었어. 이동이 통제되면서 올리브 농장의 일손은 턱없이 부족해졌어. 마저 수확하지 못한 올리브들이 짙고 검은 보라색이 되어 말라 떨어졌어. 나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곳곳의 소식을 너무 많이 들은 탓인지, 땅에 수북이 쌓인 연갈색 올리브 낙엽이 전쟁에 쓰고 남은 탄피처럼 보였어. 괴로움에 장벽을 따라 걷던 어느 날, 험비 전투차량을 타고 나타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텅 빈 터로 끌려갔던 적이 있어. 두 명의 군인이 내게 총을 겨누고, 옷을 벗도록 지시했어. 한 명의 여군은 내 몸과 짐을 수색했고 내 신상정보를 스캔했어. 서안지구와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상에서 종종 당했던 수모를 그렇게 나도 처음 겪게 되었어. 나는 겁이 났지만, 결코 눈빛을 떨어뜨리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생각했어. 그리고 그들처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마음을 지키며 취조받았어. 막상 이스라엘 군에게 풀려나 공터에 혼자 남았을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지만 말이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통행을 위해 서안지구 곳곳에 건설된 고속도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위험한 길이 되었고, 체크포인트는 닫힌 상태가 일상이 되었어. 팔레스타인 마을과 마을 사이로 이어진 시골길마저 이스라엘군과 정착민의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어. 그리고 총을 시민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 서슴지 않게 일어났어. 매일 총성과 폭격이 울리는 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간밤에 죽고 잡혀간 사람들의 소식으로 마을 곳곳은 슬픔과 분노로 하루를 시작해야 했어. 가지지구 뿐만 아니라 서안지구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었어. 골목, 시장, 광장, 거리마다 죽은 아이들, 청년들, 마을 주민들의 얼굴이 벽에 붙었고, 그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으로 그려진 그라피티는 점차 늘어갔어. 생각해 봐. 서울의 광화문 광장의 빌딩 벽마다 죽은 친구의 얼굴, 연인의 얼굴, 가족의 얼굴이 벽에 그려져 있고, 그 모습을 매일 봐야 한다면 우리는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일상이 원만히 흐를 수 있을까?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을 거야.
나는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자 시간을 아껴 걸었어. 한 명이라도 더 만나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어. 5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했어. 점령 아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카메라와 녹음기 앞에 서는 일은 큰 용기가 필요했어. 언제라도 이스라엘의 감시와 통제 속에 구금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야. 실제로 어느 순간부터 이스라엘의 감시 때문에 나와의 연락이 이제는 위험해졌다고 말하며 사라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생겨났어. 나는 그 목소리를 기록할 때마 다 작은 돌 하나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 상상을 했어. 14년 전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알-아크사 인티파다’에서 이스라엘군 탱크에 단신으로 맞서 돌을 던진 팔레스타인 소년 ‘파리스 오데흐’가 손에 쥐었던 작은 돌이 생각났기 때문이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소리이야 말로 내가 손에 쥐어야 할 돌이고, 그들이 보이지 않게 하는 세계의 장벽을 무너트릴 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느새 묵직해진 주머니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넘어섰어.
나는 돌을 줍는 심정으로 그들을 만났지만, 내가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물길 같았고, 서로 연결되어 나를 곳곳으로 흐르게 했어.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지역과 도시와 마을을 불러볼게. Sheikh Jarrah, Jerusalem Old City, Silwan, Beit Hanina, Shuafat, Qalandiya, Bethlehem, Hebron, Negev, Massafer Yatta, Ramallah, Jerico, Tybeh, Beit Liqya, Bilin, Bisan, Salfit, Qalqilya, Tulkarm, Tubas, Jenin, Acre, Haifa, Qabastiya, Nzt, Sabastia, Burqa, North Asira, South Asira, Madama, Bourin, Aqraba, Azzun, Aqaba 등 섬 같았던 땅들이 떠올라.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는 나의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그 목소리를 따라 걸었던 길은 내 안에 생생한 흔적, 물길, 바람, 상처로 남게 되었어.
전쟁 후 제닌은 정말 가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어. 그 어느 도시보다 이스라엘군의 습격과 폭격이 많았어. 그럼에도 도움의 손길을 만나 제닌에 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었고 11월 4일 제닌에 도착했어. 제닌은 작년 5월 11일 이스라엘군의 총에 머리를 맞은 알자지라 기자 ‘쉬린 아부 아클레’가 죽은 곳이기도 했어. 도착 후 현지 청년들과 함께 제닌 곳곳에 폭력이 지나간 자리를 찾았어. 도시 곳곳에 세워진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상징하는 조형물은 모두 부서져 있었고, 학교의 벽은 총격으로 벌집이 되어 있었어. 마을 아이들이 다니는 작은 도서관, 집, 관공서, 시장 등등 이스라엘의 총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어. 죽은 이들의 장례를 치르고 제대로 묻을 곳이 없어 난민캠프 근처의 공터에 급하게 만든 무덤이 생겨나고 있었어. 그곳에는 어린 3명의 소녀가 무덤을 지키고 있었는데, 목걸이에 담긴 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기억해 달라고 했어. 나와 소녀들은 죽은 언니의 사진을 함께 보며 한참을 무덤에 앉아 있었어. 그러는 중에도 하늘에는 드론이 날아다녔고 높게 솟은 건물 벽에 숨어 총을 겨누는 이스라엘 저격수와 무기를 들고 난민 캠프를 지키려 모인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일촉즉발의 대치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어.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11월 9일, 제닌에 큰 폭격과 총격전이 일어났어. 이스라엘 군은 우리가 며칠 전 찾았던 바로 그 자리를 다시 폭격했고 제닌을 안내해 주던 청년B의 친구가 죽었어. 우리는 며칠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렇게 슬픔으로 시간이 멈추기도 했지만, 우리는 다시 움직여 폭력이 지나간 자리를 목도하고 다시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연대와 움직임을 만났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터뷰 중에 총성이 울려도 묵묵히 이야기를 전했어. 그 모습은 내 마음을 더 고요하게 했고, 나는 담담히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게 되었어. 한 발 뒤에서 팔레스타인인을 따라야 했던 나의 발걸음은 팔레스타인인을 점점 닮아갔어. 그 발걸음은 애타기도 했고, 예고 없이 멈춰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큼성큼 나아가기도 했어. 예의주시하며 걷는 고양이 발걸음처럼 인기척 없이 걷다가도 급변하는 상황에 맞춰 내리 달리기도 했어. 이스라엘 군에게 체포되어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야 할 때도 눈빛은 떨어지지 않았어. 저격을 피해 숨고 달아나야 할 때는 어떻게 몸을 숨기고 어디로 피해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었어. 도시와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입로와 체크포인트가 막히면 쳇바퀴 돌듯 도로를 돌다 결국 길 위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어.
이 모든 일이 나에게는 처음 겪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반복되는 일상이었어. 각 사람의 나이만큼 쌓여가는 이 경험과 억압은 죽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트라우마와 함께 자라온 듯했어. 그 트라우마로 이어진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의 유대와 연결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 철을 녹여 만든 지하철로 같았어. 이스라엘의 점령 속에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디로든 연결되어 있는 철도가 놓이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어. 이 연결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배와 폭력이 지나간 냉혹한 자리에서도 서로에게 닿았고 온기를 보내며 삶을 따뜻하게 유지하고 있었어.
때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텅 빈 시선으로 시간을 보냈어. 이들에게는 그 텅 빈 시선도 바램이고, 염원이고, 기도이고, 사랑이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어. 산산이 부서진 팔레스타인의 잔해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소중함을 떠올렸어. 이곳에서 삶의 의미는 가을 낙엽처럼 바스러져 흩날리는 조각이 되기 일쑤지만 여전히 그 조각조각 안에는 사랑이 있었어. 바스러진 의미에 깃든 사랑은 온기를 잃지 않고 자신보다 더 차가운 것의 곁에 붙어 힘이 되어 주었어. 이 붙임성 좋은 고운 사랑의 잔해들은 연약해 보이지만 따끔하게 붙어 나를 많이도 울게 했어.
늘 따뜻할 것 같았던 팔레스타인도 3개월이 지나자 추운 겨울이 되었어. 거리 곳곳마다 가득 피어있던 재스민꽃은 모두 떨어지고 선홍빛 석류도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어. 강렬히 내리던 햇빛은 점차 사라지고 거센 바람과 함께 뿌려지는 비, 안개,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더 자주 보게 되었어. 모든 것이 부서진 폐허 속에서 몸 피할 곳이 없어 추위와 배고픔 속에 떨며 죽음의 위험 앞에 있는 난민들이 절로 떠올랐어.
나블루스에서 지낼 때 나는 나블루스에서 제일 값싼 일용직 노동자 공용숙소를 이용했는데, 그곳에서 서안지구로 피난 온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 네 명을 만나게 되었어.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는 가자지구를 자발리아, 라파, 가자시티에서 피난 온 팔레스타인 실향민들을 통해 만날 수 있었어. 가족의 생계를 벌기 위해 가자지구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 근처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던 그들은 가자지구에 쏟아진 폭격으로 하루아침에 일가족을 잃었다고 했어. 네 명 모두 20~30명 정도의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는데 가족을 잃고 홀로 피난길에 나선 거야. 밤마다 자기 가족들의 이름을 읽고 또 읽었어. 마음이 아리면 기도했고, 매일 밤 숙소에서 각자 가진 것으로 저녁을 나눠 먹었어. 누가 울기 시작하면, 모두가 울었고. 울다가 지쳐 잠에 들었어.
11월 말 짧았던 6일간의 휴전 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구금자와 인질을 교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사실 서안지구 안에서는 이스라엘이 풀어준 구금자 보다 더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시 잡아 가고 있었어. 이스라엘은 내부에서는 결코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들처럼 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세상을 향해 테러집단을 상대로 정의로운 거래를 하고 있다고 말했어.
점령과 전쟁으로 인해 복잡한 상황 속에 있었지만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서 만났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틈틈이 팔레스타인의 땅과 올리브와 자타르와 그곳의 생명을 보여주며 나에게 이곳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어. 그리고 올리브 나무 한 조각과 함께 팔레스타인의 돌과 소금을 손에 쥐어 주었고, 팔레스타인 땅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팔찌를 손목에 걸어주었어. 우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나머지 전부를 몸에 담아 서로를 안아주었어. 그렇게 안녕할 수 없는 현실에도 서로의 안녕을 바랬어.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온 이후로 나의 밤은 고요하지 않게 되었어.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총성과 폭음은 이제 귓가를 맴도는 바람이 되었고 화약냄새가 계속 코 끝을 스쳐. 긴밤을 지나 이른 새벽에 눈을 뜨면 나는 장작 타는 소리를 틀고 눈을 감아. 그리곤 밤중에 나를 괴롭게 한 생각과 악몽을 한 곳에 모아 장작불에 던져 태우는 상상을 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를 보내는 것이 힘겹기 때문이야. 그리고 내 자신이 이럴때 마다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수많은 시민의 얼굴을 떠올려.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지었던 다양한 표정은 마치 내게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호수 같았어. 나는 종종 눈을 감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짝 타들어가는 입과 마음을 축이며 지내고 있어.
나의 발걸음이 언제 시작 되었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어. 나와 팔레스타인의 연결을 더듬어 찾아보고 싶었어. 생각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랐어. 한국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온 나의 친할아버지는 전쟁 트라우마로 인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었어. 깊은 산골에는 그런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고 할아버지가 겪은 참상이 자신을 해칠 때면 그 화를 자신의 아들에게 고스란히 풀었어. 그는 자신의 아들을 몇 달 동안 광에 가두고 가축처럼 말을 들어야 풀어주었고 수시로 폭력을 가했어. 나의 아버지는 어릴 적 두려움과 상처를 가슴에 꾹꾹 눌러 담고 사회로 나왔고 결혼 후에도 그 상처는 전혀 치유되지 않았어. 그 역시 나를 비롯한 원가족에게 폭력을 가했고 아버지 안에 있던 폭력은 나를 길들이기 시작였어. 할아버지로부터 내 아버지까지 이어져 온 폭력은 어린 나에게까지 닿았고, 너도 이 폭력의 역사를 이어가라는 듯 나를 옥죄었어.
나는 감금과 통제와 폭력 속에서 어린시절을 살아야 했어. 마치 입양된 강아지들이 자신을 돌봐줄 것이라고 믿었던 보호자에게 영문도 모른채 감금 당하고, 맞고, 집 지키는 노동을 강요당하고, 인간의 집에서 배제되어 다시 버려지는 것 처럼 말이지. 그럼에도 힘이 없던 나는 원가족의 힘이 필요했고 이곳에라도 빌붙어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살면서도 늘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텼어. 그후 가족을 벗어나 사회에 나왔지만, 현실은 참혹했어. 6명의 친구가 노동 현실에 몰려 죽고, 자살하고, 고립사하는 일을 겪었고, 10년 전 새해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서울역 앞 고가도로 서울로7017에서 한 시민이 분신 자살하는 것을 목격했어. 생애 처음으로 생면부지였던 한 사람을 위해 서울역 고가도로 다리 아래에 국화꽃을 두고 홀로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어. 그렇게라도 해야 내가 살 것 같았어. 마음 둘 곳 없고, 마음이 바닥난 나는 매해 겨울이면 소리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홈리스 추모제에 발걸음 했어. 이 사회에 속해 있는 수백명의 생명이 고립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며, 어쩌면 나 역시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언젠간 이렇게 소리 없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컸어.
고등학교 급식소에서 일하다 세월호 참사에 죽어간 수많은 아이들을 작은 모니터 화면으로 지켜 봐야 했고, 그후 분쟁과 쓰나미 재해 속에서 터전을 읽었던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지내며 수 많은 슬픔을 듣고 목격하며 활동했어. 그 후에 로힝야 난민을 만나 난 또 다시 방황했어. 나는 계속해서 연결될 사람들을 찾았던 것 같아. 세계는 여전히 너와 나는 같은 생명이 아니라는 듯 서로를 배제하고 있어. 종교도 이념도 그 무엇도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것 같았고, 오히려 전쟁과 폭력과 재난을 데이터로 바꾸어 분석하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이용하기 급급했어. 나는 길 잃은 마음을 추스리고, 삶의 지혜를 구하고자 자전거를 타고 동아시아 곳곳을 돌아보며 다시 한국에 왔어.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며 보게된 농촌과 생태는 도시 경제와 군사권력을 위해 희생되고 착취되고 있었어. 지금도 여전히 밀양이, 군산이, 평택이, 새만금이, 지리산이, 설악이, 제주 강정이 그리고 다 언급하지 못한 곳곳이 이미 우리 사회의 배제와 점령 속에서 고립된 섬이 되어갔지만, 그 땅의 생태와 관계를 놓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생명들 덕분에 지켜지고 있었어. 마치 팔레스타인 처럼 말이지. 팔레스타인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
“땅을 지키고, 그곳에 계속 서 있어. 땅은 단지 땅일뿐이야. 하지만 땅과 함께 살아온 너의 삶은 그 땅을 떠나면 사라질거야”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와 나의 삶을 다시 생각하니 내 삶도 특별한 것이 아닌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많은 목소리 중 하나일 뿐이었어. 미디어의 전광판마다 빛나는 삶을 송출하는 그 작은 창의 바깥에서는 이런 경험들이 일상이었고 보편이었어. 사회의 따뜻한 시선은 마치 달의 이면을 비추는 법을 모르겠다는 듯 빛나는 곳 만을 바라보았고, 그곳에 열망을 더해갔어. 이렇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점점 나와 우리의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돼. 나의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는 오랜 시간에 걸친 ‘내가 너와 살기 위한 선택’이었어.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한 선택이었어. 나와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었고, 사소한 부탁과 사소한 일들이 모여 내 마음을 이루며 나를 만들어 갔어. 늘 부족했고 때론 후회하고 마음처럼 되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말이지.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멈춰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도 무너질 거야. 그렇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배제된 목소리를 듣고 연결을 고민하다면, 내 곁의 멀고 가까운 소중한 이들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사회적 타살을 멈추는 출발점이 될 거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우리 외부에 사는 존재들이 아니었어. 한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었어.
존 버거의 문장을 인용해 조금 다르게 써 보았어.
“폭력은 다수의 관심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그 생명을 이어 나갑니다.”
나는 우리의 관심이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폭력은 잠들 것이라고 생각해.
이제껏 너의 고민과 방식으로 동시대를 기억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고 있는 나 같은 너를 생각하며.
정지용 시인이 쓴 ‘호수’라는 시로 편지를 마칠게.
얼굴 하나야 / 손바닥 둘로 /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 호수만 하니 / 눈 감을밖에.
Stop the War.
No more War.
Free Palestine.
한톨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