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집단학살과 이스라엘 파시즘을 둘러싼 논쟁

가자지구 집단학살과 이스라엘 파시즘을 둘러싼 논쟁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극우 정부에 대한 서구의 비판자들은 종종 반유대주의로 비난받지만, 이스라엘인 좌파들은 수년 동안 이스라엘이 파시즘에 빠졌다고 비난해 왔다. 이 글에서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는 파시즘이 이스라엘의 식민지 프로젝트 논리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2023년 11월 3일

[읽을거리]국제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식민지, 역사

이 글은 Verso Books 블로그에 게재된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글 The War on Gaza and Israel’s Fascism Debate을 번역한 것이다.

하마스의 알 아크사 홍수(Al Aqsa Flood) 10월 7일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은 서방의 정부들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고, 무수히 많은 인권법 전문가들에 의해 명백한 ‘대량학살 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여러 집단들 내에서 파시즘에 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비르자이트 대학교 교수 및 직원 조합은 그들의 공동성명에서 ‘식민주의적 파시즘’과 ‘정착민 시오니스트 정치인들 전반의 아랍인들의 죽음을 향한 포르노그래피적 요구’를 언급하였다. 이스라엘 공산당(Maki)과 좌파 동맹 하다쉬(Hadash)는 그들의 선언문에서 ‘급격하고 위험한 확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파시스트 우파 정부에게 물었다. 한편, 콜롬비아의 구스타보 페트로(Gustavo Petro) 대통령은 가자지구 공습에 대하여 기후 재앙과 자본주의 고착화로 특징지어지는 ‘글로벌 1933’ 속에서 ‘우리 모두를 처분가능한 존재들로 취급하는 최초의 실험’이라고 묘사하였다. 아마 이 발언들을 인용하는 행위조차도 특히 BDS(Boycott, Divestment and Sanctions) 운동의 형태로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평화적 국제연대운동을 억압하려는 시도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 온 ‘반유대주의에 대한 국제홀로코스트추모연합(IHRA)의 정의’에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네타냐후 정권과 심지어는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파시즘에 대한 인식은 이스라엘 본토에서의 공적 담론에서 주류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는 특히 이스라엘 대법원이 자랑하는 그들의 자율성을 제거하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가 추진하는] 최근 사법개혁에 대항하는 시위들에서 그러하다. 하마스의 공격이 있기 나흘 전, 신문 하레츠(Ha’aretz)는 ‘이스라엘의 네오파시즘은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을 모두 위협한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였다. 한 달 전에 200명의 이스라엘 고등학생들은 다음과 같이 징병 거부를 선언하였다.

우리는 지금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파시스트 정착민 무리들을 선의를 갖고 섬길 수는 없다고 결정하였다.

5월에 하레츠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는 사설을 게재했다. ‘6차 네타냐후 정권은 전체주의 캐리커쳐로 보이기 시작한다. 전체주의와 연루된 행보 중에서 극단주의적 구성원들 중 한 명이 [그 행보를] 제안하고, 나머지 무능력자들이 누가 더 완전한 파시스트가 될 수 있는지 보이려는 경쟁 속에서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한편 하레츠 사설가들 중 한 명은 ‘이스라엘의 파시스트 혁명’이 사나운 인종주의에서 연약함에 대한 경멸까지, 폭력을 향한 열망에서 반지성주의까지 [파시즘의 구성요소들의] 목록의 모든 항목들을 만족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최신 논쟁들과 예측들은 저명한 지식인들이 이미 제기한 바 있는데, [그 중에는] 현대 이스라엘에서 ‘파시즘과 초기 나치즘과 유사한 인종주의가 자라나고 있음’을 주장한 극우파를 연구하는 저명한 역사학자 지브 스턴헬(Ze’ev Sternhell)과 열 살에 나치 독일을 탈출하였고 2018년에 사망하기 얼마 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한 기자이자 평화활동가인 우리 아브네리(Uri Avnery) 등이 있다.

[아브네리에 따르면] “사실상 모든 삶의 영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나치 독일의 첫 단계에서 유대인들이 받은 취급과 유사하다. (점령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뮌헨에서의 배신[뮌헨 협정] 이후에 세워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서 체코인들이 받은 취급과 더 유사하다.) 크네세트에서 비처럼 내리는 인종주의 법안들, 이미 통과된 것들과 아직 진행 중인 것들은 나치 정권 초창기에 라이히스탁이 통과시킨 법률들과 매우 유사하다. 몇몇 랍비들은 아랍인들이 운영하는 상점들을 보이콧하자고 주장한다. 마치 그때와 같다. ‘아랍인들에게 죽음을’(‘유대인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는 축구 경기 중에 자주 들린다.”

물론 이러한 유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등은 1948년 데이르 야신(Deir Yassin) 학살사건 직후 뉴욕 타임즈에 헤루트당(네타냐후의 리쿠드당의 전신)이 ‘나치와 파시스트들의 정당들과 조직, 방법, 정치철학, 그리고 사회적 호소력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규탄하는 성명을 보냈다.

또한 아브네리는 [이스라엘의] 현 재무장관 베잘렐 스모트리치(Bezalel Smotrich)를 ‘진정한 유대인 파시스트’라고 지목하였다. 자기 자신이 ‘파시스트 동성애혐오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 있는 스모트리치는 국가로서의 지위를 향한 팔레스타인의 그 어떠한 희망도 ‘유산’시킬 것이고, 나크바(Nakba)를 반복할 것이라는 본인의 대량학살 의도를 위한 신학적 기반을 드러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성경의 예언자]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그 땅의 주민들에게 세 가지 메세지를 전했다. [우리의 통치에] 순응하고자 하는 이들은 순응할 것이다; 떠나고자 하는 이들을 떠날 것이다; 싸우고자 하는 이들은 싸울 것이다. 그의 전략의 기초는 ‘우리가 여기 있다, 우리가 왔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세 개의 문이 열려 있고 네 번째 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떠나고자 하는 이들 – 떠날 이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 그들은 내가 도와줄 것이다. 어떠한 희망이나 전망도 없을 때 그들은 떠날 것이다. 1948년에도 그러하였듯이. […] 떠나지 않는 이들은 유대교 국가의 통치에 순응할 것이고, 이 경우에 그들은 남아있어도 되는데, 순응하지 않는 이들과는 우리가 싸울 것이며 그들을 물리칠 것이다. […] 나는 그를 쏘거나 가두거나 추방할 것이다.”

여호수아서에 대한 언급은 그 책이 이스라엘 초기에 세속주의자였던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에게 이데올로기적인 참조점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구약성경의 파멸을 향한 찬가는 오늘날에도 불길한 시의성을 갖는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여호수아서 10:40-41)

그러나 네나탸후가 육성한 파시즘은 단순히 근본주의 정착민들과 (스모트리치의 정착민 NGO인 레가빔의 상태와 팔레스타인 토지소유권 및 재산권에 대한 그들의 법률 전쟁에 깊게 파고든 덩굴을 포함하는) 그들의 강제이주 책략들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또한 미국이나 인도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도 적극적으로 부패한 대도시 ‘엘리트’들에 반하여 동원된 국가적-보수적 세력을 이익과 특혜에 대한 가차 없는 방어와 결합하는 억만장자들의 사업적 이해관계와 법적 계략에도 깊게 자리잡고 있다. 최근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다니엘 블라트만(Daniel Blatman)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 실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리쿠드는 아닙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폭력배들도 아닙니다. 바로 코헬렛 정치포럼(Kohelet Policy Forum, 미국의 부유한 기증자들이 후원하는 보수 우파 씽크탱크)입니다. […] 그들은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선언문을 작성하고 있는데, 만일 이것이 결국 이스라엘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파시즘’이라고 하면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해외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 다른 나라들에서 받아준다면 말입니다. 좋은 식당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선의(good will)를 제외하고 – 왜냐하면 정부가 적절하다고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보호 여부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한 사람의 능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현 정권이 나타나기에 충분히 무르익은 상태였습니다. 리쿠드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가장 극단적인 우파가 모두를 그쪽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입니다. 한때 극우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중도파입니다. 가장자리에만 있던 생각들이 [오늘날에는] 합당해졌습니다. 홀로코스트와 나치즘이 전문분야인 역사학자로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오늘날 정부에는 네오나치 장관들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인종주의자들인 장관들은 어디서도 – 헝가리에서도, 폴란드에서도 –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문단은 나름의 통찰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파시즘의 등극에 대한 이스라엘 자유주의자들의 논쟁이 무엇을 간과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바로 팔레스타인인들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점령지의 거리에는 실제로 군인들이 활보한다.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해외로 나가지 못한다. 또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스모트리치나 국방부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Itamar Ben-Gvir)와 같은 이들이 거리낌 없이 내뱉는 ‘순수한’ 인종주의는 식민주의적 지배를 구조화하고 재생산하는 인종주의의 산물인데, 이는 들뜬 파시스트들만큼이나 정직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이다.

빌 멀렌(Bill Mullen)과 크리스토퍼 비알스(Christopher Vials)가 지적하듯이, 흑인 급진주의와 제3세계의 안티파시즘뿐만 아니라 토착민 저항의 유구한 전통들은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의 권리체제로부터 인종적으로 추방당한 이들에게는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항상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사회질서를 상기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조지 패드모어(George Padmore)가 1930년대에 ‘세계의 고전적 파시스트 국가’라고 평가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같은 정착민-식민주의적이고 그리고 인종주의적 파시스트 정권들에서 우리는 독일계 유대인 변호사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이 분석한 ‘이중 국가’(Doppelstaat)의 한 형태를 마주하게 된다. [이중 국가는] 지배하는 인구에게 [주어지는] ‘규범국가’(Normenstaat)와 지배받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무제한적 독단성과 그 어떠한 법적 제제에도 구속되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비상조치국가’(Maßnahmenstaat)[로 구성된다].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Y. Davis)가 1970년대 초반에 국가의 인종적 테러가 미국의 나머지 인구[소수인종들]에게 어떤 불길한 전조였는지 보여주었듯이, 규범국가와 비상조치국가 간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스라엘] 정부의 장관들은 ‘국가의 사기에 저해되거나 적의 프로파간다의 기초가 되는 정보를 퍼뜨렸다고 추정되는 민간인들을 체포하거나, 집에서 내쫓거나, 재산을 압수하라고 경찰들에게 지시할 수 있게 해주는 규정들을 추진’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구실을 사용하고 있다. 모로코계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아브라함 세르파티(Abraham Serfaty)가 수십 년 전에 팔레스타인 해방에 관한 그의 옥중수고에서 분석하였듯이, 탈취, 지배, 강제이주[로 구성되는] 시온주의 정착-식민주의 계획의 핵심에는 ‘파시스트적 논리’가 존재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부인할지 모르지만, 그것[파시스트 논리]의 핵심 메커니즘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 위기마다 다시 난폭하게 등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두 국가 해법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의 위선에 대한 [이스라엘 극우파의] 비난이 보여주듯이, 현재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극우파는 여러 의미에서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아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팔레스타인] 점령과 그로 인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잔인한 대우가 정상화되고 사실상 종결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받는 이 시기에 파시스트적인 정착민 종교 우파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정착민-식민주의 계획으로서 특징짓는 구조화하는 폭력과 비인간화를 긍정하고 기념하기에 이르렀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폭력]을 약화시키거나 최소화하는 것은 고려해왔지만 결코 이것에 대해 진정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너무 많은 다른 맥락들 속에서도 그러하듯이, 이스라엘에서 파시즘의 등극은 처음에는 단절 또는 예외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진정한 해방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식민주의적 자유주의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글 :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

번역 : 양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