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음식배달 플랫폼 그랩 노동자들의 하루 파업
2023년 3월 29일
그랩(Grab)은 말레이시아에서도 활발하게 확장하는 플랫폼 기업이다. 2021년 미국 나스닥(NASDAQ)에 상장되었고,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는 그랩은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슈퍼앱이다. 현재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등 국가에서 7 억 명의 사람들에게 음식, 소포, 차량호출, 금융, 오락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그렇듯, 말레이시아에서도 최근 그랩 소속 배달노동자들은 이전과 같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지난해 8월 5일 그랩 라이더들은 낮은 건당 배송비에 항의하며 파업을 예고한 바 있다. 그랩 라이더 모흐드 아즈릴 아흐마트(Mohd Azril Ahmat)가 말레이시아 현지언론 코코넛과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라이더의 약 60%가 파업을 지지했다.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 호소문에서 그랩 라이더들은 실질적인 파업을 위해 음식점과 쇼핑 센터 앞 집회를 예고했고, 그밖에 쿠알라룸프에 위치한 그랩 빌딩과 도심 내 주요 도로 등에서도 집회를 예고했다. 이에 따라 말레이시아 정부당국은 시위 현장에 추가 인력을 배치하고자 했고, 특히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거나 차단해 국지적인 도로 폐쇄와 업무 중단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경찰 배치를 준비했다. 당국은 파업 노동자들이 코로나19 관련 제한 조치를 위반했다고 판단하면 대량 체포까지 예측했다.
낮은 수수료가 낳은 불만
최근 들어 말레이시아 그랩 배달노동자들의 장거리 배송에 대한 배송비는 매우 낮아졌다. 이상적인 수수료는 1링깃(말레이시아의 화폐단위; 우리돈 300원)을 1분으로 환산하는 것이다. 25링깃(7500원)에 25~30분 정도 걸리는데, 변화된 수수료제도에 따르면 40분 정도마다 25링깃을 벌 수 있다. 약 25퍼센트의 임금 삭감이 이뤄진 셈이다.
아즈릴에 따르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20링깃,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400링깃을 버는 걸 목표로 한다면, 그랩 사측이 가져가는 커미션 20%를 공제하고나면, 약 10~12시간 동안 일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랩 사측은 곧바로 이러한 비판들을 부정하고 나섰다. 사측은 노동자들이 배달 노동의 대가로 3링깃(870원)을 받는다는 내용의 바이럴 반박문을 게시했다. 이 반박문에서 사측은 "소셜미디어상에서 최저 수수료가 3링깃까지 떨어진다는 문제가 제기됐으나, 해당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며, “최소 수수료에는 변동이 없다”고 밝혔다. 논란이 됐던 내용은 기술적 오류였다는 것이다.
낮은 임금에 대한 우려 외에 불만은 또 있다. 아즈릴은 배달노동자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를 강조한다. 그는 “이전에는 하루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약 10시간을 일해야 했지만, 이제는 12시간으로 늘어났다”며, “이렇게 근무 시간이 길어지면 피곤한 상태에서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교통사고가 증가할 것이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낮은 수수료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생계를 위해 24시간 내내 도로 위에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하시나요?”
그랩은 동남아시아 플랫폼 배달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이다. 그랩 수수료 정책의 이와 같은 변화는 시장 내의 다른 경쟁업체들이 요금을 책정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랩이 요금을 낮추면 다른 회사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배달 플랫폼 시장에서의 엄청난 경쟁, 그리고 전통적인 배달시장과의 경쟁우위 확보를 위해 그랩은 지난 몇 년 동안 엄청난 규모의 현금태우기 전략을 불사하며 시장 지배력을 확대해왔다. 그랩은 경쟁에서 가급적 압도적이고 빠르게 승리하기 위해 낮은 가격 정책을 유지해왔다.
본사 앞에 노동자들이 모이다
8월 5일 당일, 사측의 여러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그랩 본사 앞으로 모였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랩 말레이시아 본사 앞에 100여 명의 배달노동자들이 모여 항의시위를 하자, 온라인상에서는 ‘blackout’를 주제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날 현장 영상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우려 사항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였고, 이날까지 트위터 상에는 이 파업 관련 해시태그가 12만4천 건 이상 게시됐다. ‘파업’(mogok) 을 둘러싼 토론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대변인을 자처한 모흐드 피르다우스 압둘 하미드(Mohd Firdaus Abdul Hamid)는 취재 언론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을 조명해주어 고맙다고 밝히고, 그랩 경영진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요구에는 배달거리에 따라 지불하는 수수료 금액을 재조정할 것, 사라진 보너스를 원상복귀할 것, 그리고 라이더의 일할 권리를 막지 않을 것, 라이더들이 주어진 주문건을 취소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는 것 등이 포함됐다. 또, “많은 배달노동자들이 장난전화 주문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며, 현금 시스템의 폐지를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를 통해 파업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일부는 단 하루의 행동으로는 원하는 개선을 촉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날 부분적인 파업으로 인해 일부 이용자들은 그랩 앱에서 주문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증언하기도 했고, 일부는 여전히 사용이 가능했다.
페이스북의 여러 배달노동자 그룹에서도 이날 투쟁에 대해 논의가 이뤄졌고,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갔다. 일부 노동자들은 이날 계획된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라이더들을 비난했고, 다른 일부 라이더들은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으니 이해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소셜미디어상에서 일부 말레이시아인들은 “파업 지지”를 밝히기도 했으며, 파업 당일에는 주문하지 말자고 촉구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그랩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여러 차례 비공식적이고 조직적인 파업이 있었으나, 아직은 조직력이 미진하기 때문에 원하는 효과를 충분히 보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최대 절반 가량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난 이날 파업으로 인해 말레이시아 내 그랩 배달노동자들의 상황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말레이시아 배달노동자 협회(Persatuan Penghantar P-hailing Malaysia)는 이날 성명을 통해 “① 음식배달 플랫폼 라이더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1955년 제정된 말레이시아 고용법에 따라 보호할 것. ② 업무 시스템과 급여율, 수수료, 최저 수수료, 디지털맵, 배송거리 등에 관한 관리자와 노동자 간 발생하는 기술 문제를 제어하기 위해, 정부가 관련 규정을 정하고, 관련 기관을 만들 것. ③ 노동자들의 복지와 노동권 보호를 위해 정부가 KWSP(고용기금)나 PERKESO(말레이시아의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사회적 보호 등 최선의 방법을 보장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한계와 과제
그러나 이 파업은 조직화되지 않은 파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트위터상의 많은 라이더들은 그저 하루 쉬는 것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속적인 파업을 원했다.
이번 투쟁에는 우익적인 요소들 이 적지 않게 개입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외부 지원은 UMNO(통일말레이국민조직; 거대 수니파 보수정당)의 청년그룹과 PPIM(반동적인 이슬람계 소비자권리 그룹) 등이었는데, 이런 우익 조직들은 투쟁을 지원하려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이내 회유적으로 접근하기 일쑤다. 게다가 배달노동자들에게 “좌파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이에 개입해 사회운동적으로 견인할 필요성도 보여주었다. 물론 말레이시아 배달노동자 협회같은 조직은 조직되어 있지 않은 현장 노동자들보다는 명확한 요구안을 제시할 역량이 있고, 게다가 현장 노동자로부터 많은 신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아닌 NGO라는 한계를 갖고 있고,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에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려면 사회운동/좌파의 연대와 견인이 필요하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종교나 정부, 인종 등의 문제가 사회운동과 정치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발휘하기 때문에 몇 겹의 주의가 필요하다.
글: 보리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