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과 국정원의 ‘민주노총 때려잡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2023년 1월 23일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현 세대가 그들 자신들, 그리고 만물을 혁명화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창출해 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때, 정확하게 그와 같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도록 과거의 유령을 주술로 초조하게 불러내며, 그들로부터 이름과 구호와 의상을 빌려와 세계사의 새로운 모습을 이처럼 유서 깊은 분장과 빌려온 용어로 제시하고자 한다.”
- 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중
갑작스러운 간첩 사건
지난 1월 18일 국가정보원이 민주노총 사무총국과 보건의료산업노조 사무실, 제주 봉개동에 위치한 평화쉼터(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가 운영하는 ‘세월호 제주기억관’과 나란히 세워졌다), 전남 담양에 위치한 기아자동차 노동자 D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언론 보도와 민주노총 대변인의 브리핑을 종합하면, 이날 아침 9시10분께 국정원은 경찰 병력 수백 명을 동원하여 압수수색을 시도했다. 갑작스러운 압수수색 과정에서 각 노조 사무실 문 앞에서는 1시간 가량 대치가 벌어졌다. 압수수색 대상은 민주노총 조직국장 A, 보건의료노조 간부 B, 세월호 제주기억관 운영위원장 C, 기아자동차 노동자 D의 개인 책상이나 캐비닛 등이었다.
국정원은 민주노총의 전·현직 활동가들인 이들 A~D가 2016~19년 사이 캄보디아와 베트남, 중국 등에서 북한 공작원과 교류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국정원의 불투명, 비공개 수사 관행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국정원의 말을 대신 전하고 있는 언론들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들 A~D가 “북한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고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국정원은 아무런 입증도 하지 않고 있고, 대다수 언론들은 이를 기계처럼 받아쓰고 있다.
이에 앞서 국정원은 2022년 11월 9일 경남 창원과 제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관련하여 일부 인사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한 바 있다. 여기에는 경남 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진보당 제주도당 전 위원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당일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과 “회합·통신” 혐의를 적용하고 있다. 경찰은 두 사건이 서로 무관하다고 말하고 있다.
1월 20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번 수사는 국가정보원 비서실장 직속 조직인 ‘방첩센터’가 주도하고 있다. 국정원은 2022년 하반기 비서실장(2급) 산하에 ‘방첩센터’라는 내부 조직을 신설했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에 대한 수사)는 일반적으로 2차장이 맡아왔지만, 2차장이 관할하는 조직 내부에 문재인 정권 시기에 국정원에 발탁된 인사들과 현 정권에 충성하는 인사들이 뒤섞여 있는 상황에서 보안 문제를 이유로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대공수사를 이끌던 추명호 전 국장 라인이 대거 공안 수사에 복귀했다고 한다.
2017년 9월 27일, 추명호는 이명박 정부 시기 국정원 국익전략실에 근무하면서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관리를 주도한 혐의, ‘박원순 제압문건’을 작성한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받았다. 이 혐의는 재판에서도 그대로 인정되었고, 2022년 4월 14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국가정보원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추 전 국장은 국익정보국장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안전 보장을 위해 정보를 포괄적으로 수집·배포해야 하는데, 우(병우) 전 수석의 개인적 이익 등을 위해 (권한을) 남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기도 한 추명호는 군내 사조직인 ‘알자회’의 일원으로, (업무 보고 라인을 무시하고)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직접 보고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2016년 12월 28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추명호는 “신의 누나와 최순실씨의 친분을 계기로 최씨 비선라인에 접근해, 알자회 선배인 조현천(육사 38기) 기무사령관을 추천”한 바 있으며, 이후 조현천은 군내의 인사 정보를 추명호에게 전달, 추명호는 다시 이를 우병우 등에게 제공함으로써 군 인사에 개입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순실 비선을 활용한 군 인사 개입 관련 의혹 보고’에 담겨있다.
국정원 내부에 추명호 라인이 대거 복귀했다는 사실은 국정원의 상층부가 스스로 무엇을 도모하는지 가늠케 한다. 노동운동가 A~D에 대한 이번 공안 수사는 국정원의 과거로의 완벽한 회귀를 가리킨다.
타락한 권력자의 안위를 위한 인권 척살의 역사
국정원은 동아시아 현대사의 음울한 그늘과 함께 탄생했다. 해방 이후 3년 동안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자신들의 방첩 활동 경험을 남한의 지배계급에 전수해야 했다. 미군정에 의한 직접적인 통치를 마친 후에도 이 땅에서의 반공주의 전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정보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좌익계열 군인들과 시민들의 봉기가 발생했을 때, 육군본부 정보국은 이를 잔인하게 진압하기 위한 ‘색출 작전’에 매우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탱크를 몰아 쿠데타를 일으켜 만든 군사정권은 매우 신속하게 박정희의 친구 김종필을 내세워 중앙정보부를 설립한다. 역쿠데타나 민중 저항 등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는 모두 ‘정보’를 얼마나 쥐고 있느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쿠데타 이후 불과 12일만이었다. 이처럼 중앙정보부는 그 자체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정권의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탄생했다. “드러냄 없이 묵묵히” 권력자의 안위를 위한 도구였다.
중앙정보부는 처음부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도를 받으며 설립됐다. 중앙정보부가 처음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기여한 것은 1년 전부터 CIA와 연관을 맺으며 지원을 받고 있었던 총리실 직속 중앙정보위원회의 이후락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중앙정보부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한을 가졌는데, 자연스레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할 수 있게 됐다.
군부 독재 시기 중앙정보부는 보안사와 함께 독재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온갖 인권 침해를 자행했다. 1967년 박정희가 대통령 3선까지 가능하도록 개헌을 시도할 때 야당이 적극적으로 개헌 반대에 나서자,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터뜨렸다. 중앙정보부는 유럽에 체류 중인 대학생과 지식인, 음악가 194명이 베를린을 거점으로 삼아 ‘간첩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곧바로 이어진 재판에서 관련자 34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지만, 대법원에서 간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0명이었다.
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 역시 국가보안법을 무기삼아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찰과 간첩 조작 사건을 일으킨 국가폭력의 핵심 기관이었다. 이들은 1971년과 1975년에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대대적인 대중 선동에 활용했다. 서준식은 1971년 체포된 후 17년 동안 고통받았고, 온몸으 로 저항한 대표적 인사 중 하나다. 그의 투쟁은 『옥중서한』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안사는 1975년 11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재일조선인 교포 청년들을 ‘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엮는 과정에서도 무수히 많은 고문과 협박을 자행했고, 이를 통해 간첩이라는 자백을 얻어 이들을 몇 년간 감옥에 가둔 후에야 일본으로 돌려보내주었다. 이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이동석 씨는 2011년 한국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2015년 9월 대법원 확정 판결로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1975년 한국외대에 재학 중이던 그는 2021년에야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1981년 전두환 군부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폐지하고,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를 신설했지만, 이전과 같은 음모적 공작은 지속되었다. 1982년 안기부는 차씨 성의 한 시민을 연행해 66여 일 동안 불법 구금해 간첩으로 조작했다. 이듬해 재판에서 그 시민은 법원에서 가혹행위 사실을 진술했지만 군부 시기 재판장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대한민국 국가는 2007년에야 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혔고, 이듬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5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84년 5월, 안기부는 15년 전 억울하게 북한의 경비정에 피랍됐다가 귀환한 어부 서모씨를 체포해 가혹하게 구타하고 고문했다. 1987년 1월에는 부부싸움 도중 살해된 여성 고 김옥분씨를 살인자로 둔갑시키고,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남편을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보호해주었다(수지김 사건). 남편에게 살해당한 이 피해자는 가정폭력과 국가폭력 모두의 희생자가 되었고, 그 가족들의 삶마저 파괴되고 말았다. 이 시기 간첩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가족들은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에서 추방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이수근 간첩조작 사건(1967),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1970),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1973), 민청학련 사건(197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 아람회 사건(1980), 무림학림·부림 사건(1980년대), 오송회 사건(1982) 등 셀 수 없이 많은 간첩 조작 사건이 있었으며, 이는 모두 수십년 후에 무죄였음이 드러났다. 오늘날 언론들이 이런 모든 사실을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참혹한 일이다. 국정원발 ‘간첩 혐의’는 스트레이트로 보도하면서, 동시에 이런 과오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기자 스스로 민주주의 파괴에 공모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정권은 1999년 1월 정부조직법 개정을 통해 안기부를 지금의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김대중 정권은 “과거처럼 국내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가안보에 충실한, 그리고 해외역량을 보다 강화한 정보기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정원의 대공수사 파트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국정원의 초대 원장으로 재직했던 이종찬은 자신이 재임했던 시기에 강제 퇴직한 대공분야 베테랑들이 “국정원의 대공 정보 수집 기능이 약화됐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 “대공 정보 쪽 인력은 강화시켰고 국내 정치 정보 쪽 기능을 축소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김대중 정부은 군부 독재 시기 안기부의 오랜 국가폭력으로 고통받았던 많은 사람들의 폐지 요구를 무시하는 대신, 대공수사 파트는 오히려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대공수사권이 자행해온 인권 파괴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대공파트의 유지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낳은 불씨가 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국정원은 ‘대공수사’를 명분으로 민간인을 광범위하게 불법사찰하였고, 간첩 사건을 조작하는 등 오랜 기간 불법 행위를 벌여온 자신의 습성을 다시 부활시켰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이 바로 ‘서울시 공무원 간첩 혐의 조작 사건’이다. 북한에서 화교로 거주한 바 있는 피해자 유운성은 2004년 탈북자 자격으로 남한에 입국했다. 2012년 10월, 국정원은 유운성의 여동생 유가려를 중앙합동신문센터에 가두고 6개월 동안 감금 조사를 한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유운성이 화교라는 증언을 받고, 정보를 주면 남한에서 살 수 있게 하겠다고 회유했다. 심지어 국정원은 재판 과정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출입국 기록, 출입국 기록 사실조회서 등 공문서를 위조하였고, 이는 국정원 협조자의 유서에 의해 모두 드러난다. 재판에 제출된 검찰측 진술서 역시 조작됐으며, 위장 사무실을 만들고 허위 서류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정원은 “유운성은 간첩”이라는 거짓 증언을 해준 이에게 2천만 원을 지급하기도 했다. 일련의 조작 사건 전말은 여러 언론의 취재로 모두 드러난 바 있다.
이처럼 국정원은 아주 최근까지도 인권 파괴적인 대공수사를 남발하였고, 없는 사실까지 조작하면서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해왔다. 이쯤되면 반세기동안 국가권력의 핵심적인 지위에서, 막강한 국가폭력을 휘두르면서도 민주적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는(심지어 국정원법에 따라 대놓고 정보공개를 하지 않아도 된다) ‘국가폭력 마피아’라 해도 모자라지 않다.
한국 사회 모순에 대한 다양한 쟁점이 쏟아져 나온 촛불 항쟁 시기에는 국정원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크게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고, 지난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국정원개혁발전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위원회는 ‘국정원 댓글 공작 사건’을 비롯한 여러 정치개입 범죄를 조사하고, 이를 차단할 수 있는 혁신 작업을 구체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와 더불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국정원감시네트워크’를 결성해 국정원이 낳은 각종 적폐들에 대한 ‘15가지 리스트’를 발표한 바 있다. “정치 및 18대 대선개입 여론조작, 민간조직 ‘알파팀’ 운영 및 여론조작 의혹, <박원순 시장 제압 문건> 등 작성 및 실행 의혹, 보수단체 자금지원 및 관제시위 동원 의혹, 김영한 민정수석 업무일지에 수록된 불법사찰 의혹, <세월호 여론전 보고서> 등 국내정치개입 청와대 보고용 문건 작성, 해킹프로그램 구매 및 불법사찰 의혹, 탈북민 수사과정 인권침해 실태 및 간첩조작, 시민사회단체 활동 방해 및 압력행사,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새누리당 선거운동 활용 사건,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 사건, 2013년 채동욱 검찰총장 뒷조사, 기획탈북 의혹, 국정원 간부와 우병우 민정수석 등과의 유착 의혹, 양우회 운영 관련 비리” 등이 그것이다.
일련의 노력은 2020년 12월 13일 국가정보원법 개정(민주당 김병기 대표발의)으로 이어진다. 당시 개정의 목적은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을 근절(국정원 직무 항목 중 ‘국내 보안정보’, ‘대공’, ‘대정부전복’ 등을 삭제)하고, 이를 위해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3년 뒤인 2024년부터 경찰로 이관하는 것에 있었다. 또, ‘정치적 중립성’과 ‘국민의 권리와 자유 보호’가 적시된 운영원칙 항목이 신설됐고, 불법 감청이나 위치추적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할 수 있는 근거도 추가됐다. 하지만 국정원감시네트워크는 민주당이 176석이라는 의석을 차지하고도 국민의힘을 핑계로 후퇴된 개정안을 내놨다고 비판했다. 대공수사권을 폐지했으나 조사권한은 유지하기로 했고, 수사권 이관에 3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두었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죽은 세대의 전통과 스펙타클
윤석열 정부의 등장 이후 국정원 내부 인사들은 “경찰이 대공수사를 맡는 건 북한 입장에서나 좋을 일”이라며, ‘대공수사권 폐지’에 대한 반대 여론 불지피기에 나서고 있다. 2022년 11월 경기 판교 테크노밸리에 ‘국가사이버안보협력센터(NCCC)’를 설립한 것도 이와 같은 취지의 일환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은 내부 감찰과 직무평가 등을 거쳐 문 정부에서 소외됐던 대공·방첩 인력을 전면에 재배치시키는 인사를 진행했다. 1월 20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최근 국정원의 민주노총 압수수색 등 수사는 국정원 비서실장 직속으로 설치한 태스크포스 성격의 팀이 주도하고 있다. 이처럼 국정원이 방첩 기능의 이관을 준비하는 대신 오히려 ‘강화’와 ‘몰이’에 나선 모습은 내년도 이관을 저지하기 위한 작업에 가까워 보인다.
이에 호응해 ‘윤핵관’으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은 공공연히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월 12일, 국민의힘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간첩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의 베테랑 대공 수사요원들의 역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2024년 1월1일로 예정된 대공수사권 이관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유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대통령실 역시 국정원이 간첩 수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국정원-경찰의 상설 합동 수사단을 신설하는 방안을 대놓고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부가 앞장 서서 입법부의 법 개정을 뒤집으려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재 국회는 여소야대 국면으로 여당인 국민의힘이 의지대로 대공수사권 이관 개정안을 철회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론 상황을 크게 뒤흔들어 민주당이 뒤로 한참 후퇴하도록 압박하거나, 최소한 어정쩡한 이관에 그치도록 하는 것이 국정원과 극우 정계의 인사들이 바라는 상황일 것이다. 이들은 판을 흔드는 가장 좋은 소재가 ‘민주노총’을 대상으로 한 ‘빨갱이 때려잡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에 간첩이 숨어 있다”는 스토리를 많은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면,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가리킨 ‘노동개악’ 드라이브를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고, 나아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직간접적으로 존속시킬 방책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정원의 민주노총 활동가 일부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수사와 1월 18일 대대적인 압수수색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읽힌다. 국정원이 터뜨린 'ㅎㄱㅎ 사건’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는데, 대공수사권을 계속 쥐고 있고 싶어하는 세력은 ‘동백림 사건’이나 ‘수지김 사건’에 버금가는 강력한 반응이 필요했을 것이다.
18일 아침 국정원의 압수수색 작전은 노동운동진영의 여러 활동가들이 말하듯 “한편의 쇼”였다. 국정원은 조직국장 A의 책상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700여 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했고, 민주노총이 위치한 경향신문사 빌딩 앞 차로에는 거대한 에어 매트리스와 사다리차까지 대동했다. 압수수색 영장 설명 후 국정원의 수사관들은 무리 없이 A의 책상에 대해 영장을 집행할 수 있었는데, 나머지 모든 스펙타클은 거대한 연극을 연출하기 위한 장치에 가까워보였다.
2017년 ‘국정원 적폐리스트’를 발표하고, 현재까지 국정원 개혁을 위한 활동을 펼쳐온 국정원감시네트워크는 성명을 통해 “이날 전방위적 압수수색은 국정원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권한인 대공 수사권만은 유지하겠다는 시위에 나선 셈”이라며 “대공수사권의 부활을 노리는 국정원의 퇴행을 규탄하며 정부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탄압하겠다는 윤석열식 ‘공안통치’ 시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꽃놀이패’가 아니라 ‘악수’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착취와 국가폭력의 억압은 무수한 질곡을 낳아왔다. 이러한 착취와 억압에 맞선 사회운동의 입장에서 북한 권력자들의 노선을 따르는 것은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하지만 운동진영 내의 일부 인사들이 설령 북한이 파견한 인사와 접촉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국내의 노동조합을 탄압할 명분이 될 순 없다. 잘못된 운동노선에 대한 정정은 어디까지나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과 정당한 논쟁을 통해 극복되어야 하지, 국정원 대공수사권의 존속을 위한 작전과 ‘빨갱이 몰이’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사회운동은 작금의 국정원발 공작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근대국가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영토 내의 폭력수단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그것을 합법적이고 지속적으로 장악하는 것에 있다. 국가폭력은 ‘법에 의해서’ 정당화되지만, 한국 사회에서 경찰이나 국정원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의 폭력이 관철되어온 역사에는 의례적인 정당성이나 사회적 합의 따위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 성립 과정에서 미군정이 민중의 동의 없이 군림했고, 이후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는 온갖 정치테러가 자행됐다. 연쇄 폭력 끝에 탄생한 통치권력이 민중 항쟁에 의 해 정정된 이후에도 다시 쿠데타가 발생해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이라는 억압적 국가기구를 통해 부당한 권력을 유지했다.
국정원은 62년에 걸친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의 역사에서 많은 조작 사건을 일으켜왔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에 희생당하고 고통받아왔다. 국정원 자신이 제시하는 어떠한 혐의도 제대로 공개된 바 없다.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수사 관행과 스펙타클의 정치로부터 과거의 조작 사건들을 둘러싼 끔찍한 악몽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 📂물론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한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찰이 과거 안기부의 ‘죽은 전통’을 답습하거나 통치자가 이를 나쁘게 활용하려 한다면 이 끔찍한 국가폭력은 지속될 것이다. 다만, 민주적 통제의 통로와 기제가 생긴다는 점에서는 이전보다 나을 것이다. 어디까지 이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와 권력감시, 사회운동이 주체적인 역량을 지닐 때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제위기와 정치위기, 생태위기 등이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운데, 지배권력이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하고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위기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에 윤석열 정부와 국가폭력 집행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과시해온 집단, 극우언론 등은 노동운동을 ‘적’으로 몰아 세워 공격함으로써 통치 위기의 책 임을 회피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등장 초기부터 역대급으로 낮은 지지율에서 해어나오지 못하던 정부는 ‘노동운동 탄압’이 가장 쉬운 수단이라고 여기고 있다. 작금의 공안정국 조성으로 노동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 전반이 위축된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꽃놀이패’가 될 것이다. 반면 사회운동이 단결해 부당한 공격에 맞서 당당하게 비판하고, 폭넓은 대중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곳곳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이는 공안정국 시도는 ‘꽃놀이패’가 아니라 ‘악수’가 될 것이다.
90퍼센트의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노동운동의 위축은 끔찍한 악몽으로 다가올 것이다. 일련의 탄압 속에서 노동조합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자기 조직을 운영할 권리를 침해받으면 국가권력에 쉽게 종속될 위험에 노출된다. 이는 노동자 권리 후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노동조합 할 권리가 줄어들면 억울하게 떼인 임금과 불합리한 노동조건, 직장내 괴롭힘은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자본의 위기에 대응해 노동권 축소를 시도하는 윤석열 정부와 이를 대공수사권 사수의 매개로 삼으려는 국정원의 ‘노동운동 때려잡기’는 4천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에겐 끔찍한 악몽이다. 📌
글: 홍명교